--------------------
우리도 한 때는 무림의 용봉이었다
육봉쟁패.
이시아, 독고연, 혈소예, 제갈선, 유설라, 모용란.
현재 이 여섯은 기적적으로 제각기 다른 조로 편성되었다.
누군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동시에, 누군가를 떨어뜨렸을 때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리라.
이는 '본선 조마다 이전에 구룡육봉이었던 자를 한 명씩 배치하자'는 의견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회의 구룡육봉 중 한 명인 남궁패는 천무명과 같은 조가 되었다.
연붕은 모용란이 있는 조와 같은 조로 편성되었다.
육봉쟁패는 산주봉이 들어가야했을 자리에 이시아가 들어가면서 정리되었고, 이대로만 흘러가면 큰 무리없이 모용란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연붕 대 정사사태 천서아.
천서아.
천은 누구 성인지 뻔하고.
'서'와 '아'는 어디서 가져온 이름인지 뻔하다.
'차라리 이름을 류미시로 짓지 그랬나.'
...내 본선 첫 상대가 갑자기 튀어나온 아미파의 여고수만 아니었다면, 나는 참 편하게 대회를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냥 항복할까.'
태희를 본 순간부터 용봉지회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자꾸 나를 상대로 화경 고수들이 날뛰기 시작하니, 슬슬 짜증이 일어난다.
아니, 이럴 때일수록 더 본보기를 보여줘야지. 강자의 위엄을 보여줘!
굳이? 연붕으로서 싸울 필요가 있나? 본선 같은 조에 내 아내가 들어갔다면 모를까, 굳이 승부조작까지 할 필요가 있나?
갈등이 된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고민이 된다.
내가 연붕으로서 나선 목적은 나의 여인들을 음해하는 자들을 단죄하기 위함이지, 결코 옛 용봉들과 어울려 자웅을 겨루기 위함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정면에서 싸우는 건 좋지 않다. 연붕은 그냥 권각술의 달인이라 괜히 정체가 드러날 수 있다.
그러므로 연붕이 힘들지 않게 올라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사전에 치워버리는 것.'
저벅, 저벅.
나는 대기실에서 슬쩍 밖으로 나왔다. 마침 밖에는 두 여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짜로 계속 하실 겁니까?"
"그럼요, 언니."
"언니가 아니잖습니까…."
"어머, 사매에요! 저, 천서아! 올해 나이 20살!"
"씹."
나는 절로 튀어나오려는 욕을 간신히 참았다. 천서아라는 여인을 상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백발의 아미파 여고수, 유설라는 나를 눈치채고 표정을 굳혔다.
"누구냐."
"아, 죄송해요."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밖으로 나왔다.
"제 첫 대결 상대이신 정사 사태와 잠깐 긴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는데…."
"...사매. 그럼 나중에 이야기를 합시다."
"네, 나중에 봐요. 언니."
유설라는 표정을 굳히며 떠났다. 천서아는 아주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천 소저. 비무 전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저한테 따로…?"
"여기서는 조금 그렇고…."
나는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으슥한 곳을 가리켰다. 천서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인적이 드문 계단 아래.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 남들의 눈에 띄지 않을 곳에서 나는 천서아와 마주섰다.
"제게는 무슨 일이시죠? 본선 상대를 이렇게 따로 불러내시다니."
"아…별 건 아니에요. 그냥."
스륵.
나는 단숨에 천서아의 뒤를 잡았다. 그리고 계단의 아래, 그림자로 구석진 곳까지 입을 손으로 막고 강제로 밀어넣었다.
"읍?! 으읍…?!"
처음에는 당황하던 천서아는 자신의 엉덩이에 닿는 무언가에 몸서리를 치더니.
"......."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씩 웃었다.
"오늘 대회, 몸이 안좋아질 예정...아닌가?"
찌걱.
* * *
"흣차!"
화산파의 매화검수, 선주희는 깔끔한 승리에 기뻐하며 숙소 침대에 몸을 눕혔다.
"흥, 흐흥."
상대는 약했고, 자신은 화산파의 매화검수로서 그 위용을 마음껏 뽐냈다.
비록 대진표 반대편에 와백봉 제갈선이라는 강적이 있기는 하지만, 칠절매화검을 극성으로 익힌 자신이 진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아주 좋...응?"
선주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산파에서 빌린 숙소, 객잔의 창문에서는 비무가 펼쳐지는 건물이 멀리 보였다.
자신은 빨리 끝나서 돌아왔지만, 아직 경기가 남은 사람들은 한창 경기가 진행중인-
"......!!"
선주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하지만 기적적인 시야각으로 자신이 있는 방에서는 살짝 비치는 곳.
그곳에는 두 명의 여인이 서로 입을 맞추며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어, 어어…."
입술만 맞추는 게 아니다. 입술뿐만 아니라 게걸스럽게 혀를 섞고 탐하기를 반복했다.
심지어 계단 위로 사람들이 오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계단 아래에 바짝 붙어 서로를 탐했다.
"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누구든 계단 아래에서 펼쳐지는 행위를 고발했을 것이다.
저것은 용봉지회에 대한 능욕이다. 용봉지회는 용과 봉이 만나는 것이지, 봉과 봉이 만나는 봉봉지회가 아니지 않은가!
라고 하지만, 선주희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다.
스륵.
선주희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손을 아래로 넣었다. 계단과 벽 사이의 틈으로 두 여인이 서로 물고 빠는 것을 지켜보며, 선주희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견희 언니…."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선주희는 스스로의 달뜬 마음을 다잡아야만 했다.
설마.
계단의 벽에 가려진 곳에서는 남녀의 교접이 이루어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 * *
아미신녀, 복호보살은 억장이 무너졌다.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복호보살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사태에 분노했다.
어떻게.
아무것도 안하고.
찌걱, 찌걱, 찌걱.
가만히 누워서 범해진단 말인가!
[저항해! 저항하라니까!!]
"어허윽…! 조, 좋아…!"
[아아악!]
복호보살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리 천서아, 아니 류서시의 몸에 깃들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흐흐, 아주 좋아 죽는구나…?"
간드러지는 여인의 목소리로, 그는 류서시를 위에서 마구 찔렀다. 손으로 입을 막고, 허리를 천천히 쑤시며 양손을 가슴으로 모아 묶었다.
"으븝, 흐으읍…!"
류서시는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여인으로 분장한 색마가 덮친 순간,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몸이 점혈되고 구속되어버렸다!
"으응, 하음, 츄릅…!"
구속...되었나?
[일어나! 일어나서 맞서 싸워! 이보시오! 여기 색마가 있소! 색마가 여자를 범한다니까!!]
복호보살은 발을 동동 구르며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어찌 유령이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복호보살이 할 수 있는 건 류서시를 계속 독려하고 일으켜 세우는 것 뿐.
[이, 이러고도 네가 아미파의 장문인더냐!!]
"아으, 시끄러…!"
류서시는 손 하나를 빼내며 복호보살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파지지직!
[으허어엉?!]
복호보살은 선 채로 가버렸다. 분명 혼령일진데, 아래에 물이 뚝뚝 흘러내리며 절정에 휩싸였다.
[아, 아흐, 흐아아….]
복호보살은 옆으로 고꾸라졌다. 류서시는 다시 손을 안으로 당겨, 여인처럼 분장한 색마의 목을 끌어당겼다.
"음, 츄릅, 츕…!"
뚜벅, 뚜벅.
바로 위에서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류서시는 색마의 움직임이 멈추지 않는 것에 기겁을 했다.
들키면 어쩌지?
찡긋.
색마는 류서시의 입에 입술을 맞추며 저항을 막았다. 한 손을 깍지끼며, 허리를 계속 굴리며 떨어지지 않았다.
찌걱, 찌걱, 뷰르릇.
류서시는 안에서 뭔가가 차오르는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싼다는 예고도 없었다. 그냥 본인이 내키는대로 사정해버렸고, 류서시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뱃속에 차오르는 뜨거운 감각에 눈을 가늘게 떴다.
"천서아? 하, 어이가 없어서."
여인의 목소리지만, 색마는 류서시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마음껏 변장해봐라. 네가 무슨 얼굴로 나타나든...나는 너를 범해줄테니."
"!!"
류서시.
그녀는 색마에게 저항하지 못한 채, 자신의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계단 아래에서 전신을 떨어야만 했다.
* * *
잠시 뒤.
"그렇지, 연아! 네 힘을 보여주는 거다! 압도적인 무위를! 그게 독고세가이니라!"
독고자영은 맹주실에서 홀로 독고연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응원했다.
다행히 밖에는 무림맹의 무사밖에 없었고, 독고자영은 혼자 있었다.
혼자 있지 않았다면, 분명 '커험, 흠흠'하면서 무게를 쟀을 터.
하지만 이곳에서는 무게를 잴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의 딸이 그 어떤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압도적인 무공을 보이는 것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만.
"...끙."
본선 6조.
문제의 '그들'을 전부 한 곳에 집어넣은 조의 경기가 이제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모용세가에는...미안하게 됐군."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한다. 대진표는 몹시 공정하게 배정되었으며, 이는 천지신명도 알 것이다.
육봉 중 누군가는 곤륜의 검에 꺾이게 되어있다. 용봉지회 시작부터 그 역사는 매년 반복되어왔다.
"끙…."
"다녀왔습니다. 아버님."
독고연은 가뿐한 발걸음으로 맹주실에 도착했다. 독고자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그녀를 맞이했다.
"잘했다. 네 독고구검이 한층 더 강해졌구나."
"감사합니다."
딱딱하기 그지 없는 인사.
독고자영은 과거 이봉결정전 이전의 사근사근한 독고연이 순간 그리워졌지만, 자신에게는 딸의 애교를 볼 자격이 없다는 사실에 우울해졌다.
"...그래."
하지만 지금 이런 모습이라도 어떠랴?
딸이 다시 긍지를 가지고 검을 들어 남들의 앞에서 승리를 하는 것 만으로도 독고자영은 감개무량했다.
그리고.
슬슬, 시간이 되었다.
"6조의 경기...1경기가 곧 시작하겠군요."
이전까지는 딱히 관심이 없어보이던 독고연이 처음으로 흥미를 보였다.
"그래! 연희봉 모용란이 소속되어있는 곳이지. 첫 경기로 누가 출전하냐면...연…."
독고자영은 기쁜 마음에 대진표를 보였다가 표정이 굳었다.
"연붕과, 정사 사태."
정사 사태 천서아. 나이 20세.
"......."
독고자영은 침묵했다.
아미파의 여고수로 당당히 출전한 그녀는 아미파가 비밀리에 기른 후기지수로 이번 용봉지회에 처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미파의 또다른 여고수로군요."
"그래. 빙백봉 유설라가 아미파와 연을 끊다시피 했으니...사실상 유일한 아미파의 여고수라고 할 수 있지."
한쪽으로 땋은 머리로 아미파의 실전된 무공인 복호대라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관중들은 감히 그녀를 '아미신녀'의 화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뭔가 마음에 걸리시는 거라도?"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설마."
독고자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그 짓'을 하지는 않을 터. 설마 나이도 지긋한 양반이, 한 문파의 수장이나 되는 자가 어찌 그런 참담한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한 둘이 아니라서 그러려니 하는데.'
천무명이 속한 9조.
연붕이 속한 6조.
대진표를 볼 때마다 정말 입에서 헛구역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연붕이라는 소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네.'
대진표가 이렇게 나온 걸 어찌하겠는가? 누구든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 기회가 있을테니-
"맹주님. 운영본부로부터 급보입니다."
"무슨 일인가?"
무사는 바로 들어와 말을 하려다 독고연을 의식했다. 독고자영은 직접 일어나 무사에게로 다가갔고, 무사는 아주 작게 소곤거렸다.
"정사 사태 천서아가 포기했습니다. 바로 2경기로 진행을 하겠습니다."
"뭐…? 포기?"
기껏 예선에서 다 탈락시켜놓고 포기라니.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그, 그게."
무사는 떫은 얼굴로 손글씨를 썼다. 독고자영은 무사의 글을 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쩔 수 없지. 2경기를 진행하라고 알리게."
독고자영은 무거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아버님, 무슨 이유입니까?"
"......크흠."
독고자영은 민망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혈 증세가 있다고 하더구나."
"......."
아아.
하필 대회날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다니.
모두가 정사 사태 천서아의 결장을 아쉬워했다.
"하혈이 아니라 하액인 것 같은데…."
오직 독고연만이 누구도 듣지 않는 장소에서 조용히 속삭일 뿐이었다.
6조 1회전 승자.
연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