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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한 때는 무림의 용봉이었다
생명의 신비란, 정말이지 신비하기 짝이 없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성기를 비빌 뿐인데, 어떻게 한 명의 사람이 태어나는 걸까.
그것도 '나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라고 한다면 더욱 기분이 이상하다.
두근, 두근.
나는 좀처럼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안에서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내가 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저 믿기만 하며, 수도 없이 기도할 뿐.
그저 아프지 않고 예쁘게 태어나기를 바라며, 나는 소리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렸지, 오빠."
혈소예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두 팔을 벌렸다.
"예쁜 딸이야, 오빠. 물론, 들어가면 안 돼."
"왜…?"
"신생아니까. 설마 아이를 낳자마자 바로 다가갈 생각이야?"
"중려신화정으로 몸은 열 번이고 넘게 소독했다. 그럼 괜찮은 거 아닌가?"
"......정말, 징하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위협이 되는 모든 요소는 진즉에 차단했다.
"그래도 밖에서 기다려. 최소 세 시진."
"뭐…? 그렇게나 기다려야 한다고?"
"아빠가 그랬어. 갓 낳은 아이를 아버지가 보게 되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약간의 시간은 지나야 한다고. 그리고...혼자서는 안 돼."
혈소예는 내 뒤를 가리켰다.
"아빠."
"...월아야?"
혈소예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뒤에는 팽도황의 손을 잡고 걸어온 월아가 있었다.
"가주님."
"그리 죄송스러워할 것 없네. 자네는 자네의 역할을 다하면 되니. 이제 남은 건 하나 뿐일세.
"
팽도황은 월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월아는 내게로 다가왔고, 나는 월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지금은 들어가도 될 걸세. 산모의 안정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무림인이라면 지금쯤 괜찮아졌을 거야."
"그렇다면…."
"이건 아빠의 편지."
혈소예는 내게 편지를 하나 건넸다. 나는 한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아내에게 잘 할 것. 첫째도 신경쓸 것. 동생을 소개하는 건 아버지의 몫. 태어난 아이가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말 것.
"...하."
다소 어처구니가 없지만 나는 뼈에 새겼다.
"이번에는 안 늦었군."
"그래. ...나는 좀 더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셋 다 서로 만나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
혈소예는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월아와 함께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도 되겠나?"
"상공. 지금은…."
"네…. 들어오셔요…."
힘없는 목소리, 비릿한 혈향. 나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금방 정신을 차렸다.
"아빠."
옆에있던 월아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그게 월아의 응원같아서 긴장된 가슴을 진정할 수 있었다.
"그래, 그래."
나는 월아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주변에 하얗게 펼쳐진 천 너머, 사공희는 상체를 들어올리지도 못한 채 식은 땀을 흘리며 누워있었다.
"상공…."
"일어나지마라. 그리고...고생했다. 정말."
"뭘요, 흐으. 저보다 태희가 더 고생했죠."
사공희의 옆에는 작은 흰 보자기 안에 쌓인 아이가 있었다. 얼굴만 드러낸 채 꼼지락거리는 모습에서 나는 경외감을 느꼈다.
'혈교주, 역시 당신이 옳소.'
경험자의 생생한 경험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김우성이 내게 편지로 남긴 말에서 나는 입이 절로 바짝 말랐다.
이상하다.
나의 자식인데 내 자식같지 않은, 분명 문 밖에서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걱정했건만,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 으으, 으아앙ㅡㅡ!!
내가 조심스레 다가가기 무섭게 크게 울기 시작하는 태희를 보며, 나는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눈매가 참 엄마를 닮았네."
"목소리 우렁찬 건, 후우, 아빠를 닮아서 그런 걸까요…?"
사공희는 태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태희는 조막만한 손으로 사공희의 손을 붙잡았다.
태희는 울음을 뚝 그쳤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불안감에 가득했던 아이가 어머니의 체온을 느끼며 안정감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월아야. 네 동생이란다."
"......."
월아는 한참동안 태희를 바라봤다. 월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지만, 적어도 태희에게 푹 빠져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빠."
"응."
"아빠 나빠."
"...응?"
갑자기 내가 나쁘다? 나는 월아가 나를 노려보는 것에 기겁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견희 엄마 아프게 했잖아. 엄마들 자꾸 아프게 할 거야?"
"......그, 동생을 낳으려면 어쩔 수 없는...."
"아...상공."
사공희는 떫은 얼굴로 겸연쩍게 웃었다.
"그…상공께서 왜 자꾸 화경 이야기를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그게…."
"...산통, 엄청 적던데요."
팽유월은 소태씹은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환골탈태…."
"......."
생각해보면.
사공희는 신음만 흘릴 뿐, 아파서 비명을 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미안하다. 내가 낳아본 적이 없어서."
정말로 출산의 천재였던 걸까. 일반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몇 번을 기절한다고도 한다던데, 화경의 여인은 큰 무리없이 아이를 낳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으으…!"
오죽하면, 팽유월이 대놓고 사공희를 상대로 투기를 부릴 정도.
"......."
일단.
아프지 않게 잘 낳았으면 모두 다 잘 된 거 아닐까?
출산의 천재는 아이를 남들보다 아프지 않게 낳는다더라.
화경이라서.
역시,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 * *
새벽.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수면을 거른 채 사공희가 쉬는 방의 밖에서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밖을 지켰다.
-저희 잠깐 보고가도 되나요?
-안 돼.
태희를 보려고 하북팽가로 오려고 했던 이들을 모두 정중히 돌려보냈다. 그중에는 하북팽가에 절대 와서는 안 될 사람도 섞여있었다.
-나도 태희 보고싶어! 빼애액!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소공녀.
이시아의 천마난동을 간신히 제압하며, 천기미리보로 담벼락을 넘은 제갈선을 다시 돌려보내며, 얼음벽으로 시선을 교란하며 몰래 잠입한 유설라를 내쫓으며, 나는 태희를 지켰다.
-한 번 정도는 멀리서 봐도 되지 않아요?
-태희 코에 먼지들어간다. 안 돼.
-가가는요?
-나는 태희 방에 들어가기 전에 중려신화정을 전신에 두르고 들어가지.
지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래야만 했다. 괜히 밖에서 감기 기운이라도 달고 들어왔다가는 태희가 어떻게 될 지 알고?
무림인의 자식이라고 한들, 태어난 순간의 건강까지 무림인인 건 아니다.
최소한 벌모세수라도 해야하고, 벌모세수도 최소한 몇 개월은 자란 시점에서 해야지 지금 당장 하기에는 나도 부담스러웠다.
나중에 좀 커서 무공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모를까.
"그래서 무공 익히게 할 거예요?"
혈소예는 내 옆에 서며 물었다. 나도 그렇지만, 혈소예도 얼굴에 다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고 나가도 되나?"
"괜찮아요. 나가기 전에 머리 색깔 바꾸고 가면 되니까. ...하암."
"피곤하면 잠깐 눈 붙여둬라. 내가 좀있다 깨워줄테니."
"흥. 오빠도 오늘 경기 있잖아요. 아니다, 언니인 건가? 흐흥."
나도 오늘 당장 경기가 있지만, 그녀 또한 경기가 있다. 나나 혈소예나 둘 다 무난무난한 상대이며,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견희 언니 있잖아요. 왜 그렇게 아프지 않고 낳았는지 알겠어요."
"출산 천재라서 그런 거 아니냐?"
"아이, 그런 농담이 아니라…. 여인은 말이에요, 아이를 낳을 수 있게 골반뼈가 벌어지거든요? 아이가 나오면서 억지로 벌려지느라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혈소예는 자신의 골반을 손으로 탕탕 두드렸다.
"역체변용술."
"......."
"오빠가 걸어놓은 거죠? 아이가 나올 때 즈음이면, 견희 언니가 신경쓰지 않아도 몸 안의 내공이 움직이도록."
"......내가 역체변용술을 걸었다기 보다는, 환골탈태의 응용이지."
나는 그저 약간의 계기만 제공했을 뿐이다. 아이가 나올 때 골반뼈가 살짝 움직이고, 신체 내부가 쉽게 벌어지도록 했을 뿐이다.
"역체변용술을 이용하면 살을 얼마든지 늘릴수도 줄일수도 있지. 내공으로 늘리는 경우와...내공으로 압착하는 경우니까."
생살이 찢어져도 그 고통이 느껴지지 않도록, 늘어나고 찢겨지는 살 사이를 내공으로 이어 고통을 최대한 완화하고자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은 당연히 사공희.
내가 아무리 조치를 취해뒀어도, 출산 중에 무의식이라도 내공을 아이를 위해 사용한 건 사공희였다.
소위 말하지 않는가.
'진신전력'이라고.
사공희는 자신이 쌓은 내공을 깎으면서까지 태희를 낳았다. 내가 따로 가르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태극신공은 뱃속의 생명을 위해 모든 힘을 다했다.
"용봉지회만 아니었으면…."
"용봉지회 중에 낳을 줄은 몰랐죠. 오빠도 그것 때문에 굳이 하북까지 견희 언니를 데려온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리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역시 오빠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안심하고 마음을 편히 다잡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가…."
그런 거라면 진정으로 다행이다.
"혹시나 유월이도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냥 나는 경기를 던질까 한다."
"네?"
"육봉쟁패는 솔직히 지금 당장 때려치워도 상관없다. 구룡쟁패는…다음 번의 기회가 있으니 상관없지 않느냐."
"그럼 다른 사람들이 엄청 실망할텐데요…."
"상관없다. 어차피 천무명이 구룡쟁패에서 우승하려고 하는 건 천무명 개인의 영달. 다른 방향으로 명예를 드높이면 되지."
나는 남들이 듣지 못하게 혈소예에게만 조용히 속삭였다.
"...미친."
혈소예는 내 계획을 듣자마자 헛웃음을 지었다.
"오빠, 진짜 작정하셨네요."
"당연하지. 남들이 욕하든 말든, 나는 이미 확실한 승자가 되었다."
팽도황과이 일전에서, 나는 엄연한 '화경 고수'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천무명을 당장 실격시켜야한다고 하더구나. 주로 남궁세가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더군. 어찌 화경급 고수가 용봉지회에 나올 수 있냐고."
"규정에는 나이 제한만 있잖아요? 흥, 자기네 후기지수가 화경이었으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거면서."
"그게 아니니까 질투하고 시기하는 거지. 그리고…."
나는 천무명으로서의 대진표를 떠올렸다.
마지막 대결, 남궁패.
무림맹주가 준비한 3번의 시련을 무사히 넘긴다면, 그 뒤는 남궁패와의 1:1이다.
남궁패를 이기면 구룡이 되며, 내부 순위 결정전 없이도 나는 이미 천하제일룡이 되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어난 태희를 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진정한 우승은 용봉지회에서 우승하는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육봉을 모두 임신시킨다.
...그것만큼 확실한 우승이 어디있을까?
"중간에 탈락해도 상관이 없었어. 그래. 나는 깨달았다. 남들의 평판이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와. 정말 좋은 말씀이네요. 그런데 그 실체가…."
혈소예는 내 얼굴을 붙잡으며 이죽거렸다.
"육봉들을 모조리 후린 남자로 전설이 되려는 건 아니죠? 기둥서방님?"
"...상관없잖나. 남궁패보고 천하제일룡 하라고 해. 나는 아이 아빠 할테니."
"와. 이 오빠 지금 애 보더니 정신이 나가버렸네. 언제는 강호에서 명예보다 중요한 게 없다면서요?"
"어차피 혈교 때문에 강호는 망하는데 알게 뭐냐. 소예야. 대신…."
나는 한 번 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화경 이상으로. 경지 순 임신이다."
"......작정했네요. 그러다 하늘에서 내려오면 어쩌시려고?"
"이번 생에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슨. 만약 아이를 낳는 것 때문에 구천현녀가 내려와서 우리를 베려고 하는 것이면, 천기가 나를 도울 것이다. 하늘은 정의로운 자의 편이니까."
"...몰라요. 용봉지회 끝나고 봐."
혈소예는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 그래서 오빠, 연붕 언니 상대는 누구예요?"
"몰라. 어제 팽가 가주님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확인 못했어."
누가 나오든 딱히 상관은 없다. 상대가 평범한 적이라면 쓰러뜨리면 되고, 상대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닌 자라고 한다면 내가 혼쭐을 내면 되니까.
"혹시 누군지 들은 바가 있느냐?"
"아니요. 그냥…. 아, 그건 기억나요."
혈소예는 하품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아미파의 정사 사태."
"......."
[작품후기]
사공희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