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522화 (52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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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한 때는 무림의 용봉이었다

용봉지회, 개막!

드디어 용봉지회의 날이 밝았다. 참가자는 모두 비무장 가운데로 모였고, 나 또한 정체를 숨긴 채 무대에 올라섰다.

'필참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개회식에 반드시 참가해야했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탈락이었다. 동시에 여럿으로 변장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연붕은 중도 탈락해도 된다. 하지만 천무명은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천무명의 우승은 지켜야 한다.

구룡쟁패의 우승자는 육봉쟁패의 우승자와도 엮이기에, 천무명 이외의 남자가 엮이면 몹시 곤란한 광경이 연출될 것이다.

아무리 공식적이고 대외적인 자리라고 한들,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손을 잡고 하늘을 향해 깃대를 높이 치켜드는 것 따위의 일은 시킬 수 없다!

'지난 번에는 사공희랑 이시아가 같이 했지.'

용봉이 함께하는 것보다 흑백이 함께하는 것이 더 의의가 컸기에, 지난 번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육봉은 모두 내 여자고, 구룡은 모두 시커먼 남정네밖에 없다.

'다 내가 탈락시켜야 할 놈들이다.'

나는 갓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강호에 나온 수많은 이들을 예의주시했다.

'근데 다 모르는 얼굴이구만.'

남자는 다 모른다. 아는 놈이 있을 리가 없다.

'전부 이류에 일류. 제발 약한 놈들이 걸렸으면 좋겠는데.'

비무장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있었다. 무공의 경지에 관계없이, 그냥 순수하게 무작위로 서있었다.

그 바람에 내가 아는 얼굴은 대부분 다른 조로 가있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나는 그들을 전혀 모른다.

'남자 얼굴 외울 바에는 여자 얼굴 3개 이상 기억하는게 더 낫지.'

머릿속에 여자만 가득하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얼굴을 기억하는 남자는 현경 급 고수이거나, 제갈건담처럼 내가 주로 쓰는 무공의 주인이 전부다.

"...흐음?"

한 명,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

"저 자가 바로 폭룡 남궁패…!"

"조심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초절정이라고 하더군!"

"흥, 그거 다 남궁세가에서 흘린 말이야. 실제로는 지난 4년간 답보상태에 빠졌을 걸?"

주변의 이야기에도 남궁패는 의연한 태도로 가만히 서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보인다.

초조해하고, 다급해보이고, 좀처럼 마음을 쉬이 놓지 못하는 듯 하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걸로 보아-

'무림맹에 있는 남궁세가 사람들한테 들었나본데?'

그는 명백히 한 사람을, 나를 신경쓰고 있었다.

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흑의 무복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다고 한들, 여인이라면 누구나 시선이 갈 외모는 숨길 수 없었다.

희아연월이 함께 빚은 얼굴이다.

남자가 보기에는 계집애같다고 욕을 할 수는 있으나, 뭇 많은 여인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끙…."

남궁패는 앓는 소리를 내며 나를 노려봤다. 필히 자신에게 향할 많은 이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바람에 관심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

이해한다.

남궁의 자존감은 하늘을 찌르고, 지난 용봉지회에서 사실상 우승까지했던 몸이니 관심이 고플 수밖에.

나만 없었다면.

천무명만 없었다면 이번 용봉지회의 주인공은 남궁패가 되었을 것이다.

미래의 검황으로서, 파천신검 독고연을 도와 마교의 준동을 막고 혈겁난세에서도 크게 활약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젠 아니야.'

주인공 자리를 빼앗을 생각은 없지만, 나는 우승을 해야겠다.

나의 우승을 바라는 자가 많기 때문에.

'용봉지회에서 우승한다면, 그녀에게 청혼할 거야.'

더이상 복수에 미친 귀신이 아니라, 이제는 사랑스러운 여인과 알콩달콩 사랑을 가꾸며 사는 남자로서!

'걸림돌은 다 치운다.'

설령 그게 나의 장인어른이라고 하더라도.

"...를 기리며, 용봉지회의 막을 올리겠소이다!!"

기나긴 무림맹주의 연설이 끝났다. 모두가 맹주의 연설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개막전에 앞서! 오늘 이 자리를 빛낼 특별한 손님이 오셨소."

"뭐...라고…."

내빈 축사는 아까전에 끝나지 않았던가? 나를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지만.

"황녀께서 친히 오셨습니다."

천세-

아름답게 치창을 한 황녀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선녀와는 다른, 인간의 미를 극한으로 몰아넣은 것처럼 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호의 많은 여러분. 본인은-"

황녀는 홀로 나오지 않았다.

황녀의 뒤에는 천마신공의 황금빛과는 다른, 인세의 부유함을 잔뜩 녹여놓은 금색무복이 반짝이고 있었다.

"설마 저 분은…?"

"은퇴하신 걸로 알았는데, 아직 쟁쟁하시다니…!"

'빌어먹을 현경 할당제.'

관에도, 황궁에도 한 명 현경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저 자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을 줄이야.

천하대장군. 장문월.

무림식으로 표현하자면, 천하제일-월도(月刀).

무림이 감히 관을 상대로 미쳐날뛴다면 직접 월도를 들고 말 위에 올라 무림인들의 목을 참수할 무인.

"...부디, 다치는 일 없이 자신이 갈고닦은 무예를 뽐내길 바랍니다."

와아아아아아----!!

황녀의 인사와 함께, 용봉지회는 더욱 달아올랐다.

* * *

대기실.

"천하대장군께서 날 보셨어! 나를 금의위로 데려가주실 거야!"

"금의위에서도 나와서 본다니. 이건 기회야! 본선에 나가기만 한다면 금의위의 눈에 들테고, 그럼 나도 금으로 녹봉 받고 그러는 거지!"

"꿈도 크구나. 네가 본선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뭐라고? 이 놈!"

대기실은 순식간에 희열과 혼란에 가득찼다. 나는 조용히 내 무기를 가다듬으며 나와 같은 '조'로 편성된 이들을 훑었다.

'전대 구룡은 없고, 팽태양도 없다.'

다들 별반 위협이 되어보이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한 두 명 일류 고수가 있지만, 아쉽게도 그들에게는 애도를 표할 수밖에.

'다른 유명인으로는-'

"이보시오. 소협은 어디 출신이오?"

"초면에 소협이라."

나와 반대편 구석 자리. 외공을 쌓은 듯한 험상궂은 사내가 곱상한 청년을 위협하고 있었다.

...청년?

"남에게 물을 때는 자기 소개가 먼저 아닌가?"

"오만방자하구나! 감히 이 길림산의 장득배를 몰라보다니!"

"...길림산은 어디야?"

청년은 진짜로 모르는 듯 했다. 나도 모른다.

"이, 이 놈!"

하지만 길림산의 장득배는 자신을 모른다는 것에 몹시 분노한 듯 주먹을 들어올렸다.

카앙.

"커흑?!"

장득배의 손에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엽전?'

엽전이 날아가 장득배의 손등을 때렸다. 어디서 날아든 엽전인가 보니, 다른 쪽에서 동전을 튕기고 있는 실눈의 청년이 슬며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쯤하지. 약자를 괴롭히는 건 사내답지 못하다."

"네, 네놈은 단목청?! 폐관수련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어떻게 여기에?!"

"깨달음을 얻었지. 예정된 깨달음을 얻었으니, 폐관도 끝내는게 정상 아니겠나? 후후."

"큭…."

단목세가도 나름 유명세가이기는 하지만, 단목청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내가 처음듣는다? 후대에 아무 이름을 날리지 못한다는 뜻.

"사내라면 당당히 말을 하시오. 가만히 서있지만 말고."

"하하, 하…. 고맙습니다."

백의의 청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단목청에게 인사했다. 소란은 금방 잦아들었고, 청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

청년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나 싶어서 기운을 살짝 밖으로 흘리니, 청년은 내 기운을 눈치채고 바로 표정이 급변했다.

당황.

방금 전 장득배에게 위협을 받을 때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자가 당황하여 고개를 돌린다. 나는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남장여자까지 나오는 거냐.'

이 대회,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 * *

<그 시각, 용봉지회 운영본부.>

"무림맹주, 오랜만이오."

"대인을 뵙습니다.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껄껄, 아직 죽으려면 한참 남았지."

금의위 지휘사, 장문월.

"...여전히 강하십니다."

독고자영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빈틈이 없는 대장군을 앞에 두고 침을 꿀꺽 삼켰다.

"허허, 무엇을. 자네만 하려고? 나는 이제 늙어가며 죽을 일만 남았지만, 자네는 아직 정정하지 않은가."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이번 용봉지회에 이렇게 직접 찾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야 뭐 그냥 얼굴만 비추고 있으면 될 일이지. 공주님께서 워낙 열심히 해주시는 덕분에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네. 껄껄!"

독고자영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눈앞의 존재는 무공도 무공이지만 무림맹의 정보조직이나 마찬가지인 개방과는 차원이 다른 '금의위'의 수장, 지휘사가 아니던가!

"그런데."

장문월의 목소리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용봉지회라 함은 본디 신성하고 엄격한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있네만."

"윽…."

"왜 출전을 허락했는가?"

"......."

독고자영은 침묵했다. 하얗게 샌 눈썹 아래, 자신을 내려다보는 고동색 눈동자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움이 담겨있었다.

거짓은 무의미하다.

"...누군가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누구?"

"봉 중 으뜸은 독고연이며, 용 중 으뜸은 천무명이라."

"......."

노골적인 대답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난해한 대답이었다.

"둘의 우승을 원하는데 그 자들의 출전을 눈감아준다고? 허, 그게 앞뒤가 맞다고 생각하나?"

"지휘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가장 우승하기 쉬운 길은 약한 자들만 만나며 오르는 길이지요. 하지만…."

독고자영의 눈은 사나운 의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자들을 하나하나 꺾고 끝에 정상을 차지한다면, 누구나 인정할 천하제일의 용봉이 아니겠습니까?"

"자네...혹시?"

"예. 그렇습니다. 저는 이번 용봉지회의 주인공을 그 둘로 만들 겁니다."

독고자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색마에게 빼앗긴 두 사람의 명예와 행복을, 용봉지회로 되찾아주고자 합니다."

"하! 천무명에게는 시련을 내리고, 네 딸에게는 명예를 주려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 이건 횡포다! 권력 남용이야!"

"아니요. 지휘사, 이건 권력남용이 아닙니다."

무림맹주는 고개를 젖히며 코웃음을 쳤다.

"무림맹주에게 주어진 권력입니다. 이러려고 무림맹주가 되었는데, 당연히 이런 건 해야지요."

"뭐라?"

"시련이라 함은 자고로 적절한 단계가 있어야 하는 법. 그래서…."

독고자영은 비릿하게 웃었다.

"천무명이 상대하는 모든 조와 상대에,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싶은 강자들을 전부 집어넣었습니다. 마음껏 욕하십시오. 저는…."

독고자영은 벽에 걸린 대진표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맹주고 제가 용봉지회의 총책임자인데, 이 정도 권력은 좀 부려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 * *

예선전은 간단히 표현하자면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지금부터 서로 떨어뜨려라.

비무장 밖으로 나가면 탈락!

아니, 이것으로 본선 진출자를 가린다고?

"으아악!"

"크억?!"

"아, 안 돼! 내게는 우리 문파의 명예가!!"

라고 하기에는 탈락자가 정말 많았다. 장외 탈락은 어중이떠중이를 거르기에 정말 좋은 방법이다.

-천하에서 단 아홉 명을 겨루는 비무대회인데, 설마 장외로 나가떨어지는 자는 없을 것 아닌가?

맞는 말이다.

"네놈! 아까부터 무게나 잡고 말이야! 마음에 안 들었-"

카앙.

나는 검을 사선으로 휘둘러, 나를 향해 도끼를 휘두르는 자의 도끼날을 맞췄다.

"......."

무공은 하나. 희아연월검.

"강하군."

하지만 마음만은….

"그러나 내가 더 강해."

"네, 네놈…! 크아악!!"

나는 도끼날과 함께 무사를 밖으로 날려버렸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자들은 감히 검을 들고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또 없소?"

나는 두 팔을 들어 무사들을 도발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무사답게, 무인답게 붙어봅시다."

검황이라면.

"언제든지 들어오시오. 전력을 다해 받아쳐줄테니."

검존이라면.

"그렇게...재미없게 서있기만 할 것이오?"

그리고, 검선이라면.

"그렇다면, 본인이 먼저 가겠소!"

희아연월검.

오의.

월아부천붕(月牙赴天崩).

서걱.

나는 땅을 그었다. 그리고 막대한 충격파가 가장자리에 있던 무사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렸고, 비무장 위에는 단 네 명의 무사만 남아있었다.

길림산의 장 뭐시기, 단목청, 그리고 남장여자.

"그만---! 남은 네 명은 본선 진출이오!"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악의를 보았다.

천무명.

본선 1차전.

팽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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