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로 맺어진 맹약(血盟)
하북의 동쪽에는 바다가 있다.
황하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큰 강이 동쪽으로 흐르는 끝에 펼쳐진 넓은 백사장은 많은 어업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곳이자, 나름 취미로 낚시를 즐기는 이들이 와서 휴식을 즐기는 곳이다.
“준비는 되었느냐?”
이곳에서 나는 진녹색의 무복을 단단히 입은 독고연과 마주했다. 그녀는 검 한 자루를 쥔 채, 백발을 펄럭이며 나와 마주섰다.
“물론이죠. 주변에 아무도 없고, 방해할 요소도 없어요. 천가장보다도 더...확실하게 대련할 수 있죠.”
...당연히 사람들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넓은 백사장에서도 다른 이들이 없는 곳이었고, 설령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라도 여럿에게 걸리지 않을 위치였다.
“시작하지.”
나는 먼저 선공을 양보했다. 오늘뿐만이 아니더라도 나는 대부분의 비무를 나의 여인들에게 양보했다.
특히 지금처럼 내가 적발로서 상대하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선공을 양보해야만했다.
“후우….”
설령 독고연의 독고구검이 선공에 강점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일단, 부딪혀보거라. 잡념을 지우고, 나를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검을 움직여라.”
“......네.”
독고연은 말하기 무섭게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었다. 나는 정확히 내 어깨를 찌르고 들어오는 검을 향해 검날을 비스듬히 세웠다.
스르륵.
부딪히는 소리도 없었다. 나는 독고연의 검을 가볍게 흘렸고, 독고연의 초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스륵.
독고연은 검을 쥔 손을 교대하며 자세를 바꿨다. 역수로 움켜쥔 덕분에 검날을 지지대삼아 돌아간 검의 손잡이는 내 얼굴을 노렸다.
“좀 더 빠르게.”
나는 손바닥을 세웠다. 마침 그게 왼손이라 습관적으로 손을 움켜쥘 뻔 했지만,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한 발에 무게를 실었다.
“이런 식으로.”
혈마패연각(血魔覇燃各). 나는 정확히 독고연의 옆구리를 돌려찼다. 물론 닿기 전에 멈추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콰-----앙!!
허공을 때리며 뿜어지는 충격파는 독고연을 휩쓸었다. 독고연은 마치 내 발차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옆으로 튕겨나갔다.
스릉!
독고연은 금세 자세를 잡고 다시 공세를 취했다. 내 어깨와 허벅지를 위주로 공격하며 나를 무력화시키려했고, 나 또한 그녀의 공격을 받아쳤다.
“희아연월검.”
“!!”
내가 사용하는 무공에 진심으로 놀란 독고연은 초식명 만으로도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는 검을 양손으로 붙잡고 어깨 너머로 검을 올렸다.
“환월아(還月牙).”
빠르게 검을 아래로 긋고, 관성을 내공과 힘으로 억누르며 거꾸로 검을 다시 위로 긋는다. 초격보다 후격에 힘이 덜 들어가는게 흠이었지만, 똑같은 궤적을 반대로 긋는 공격은 예상하기 힘들다.
“파...월!”
하지만 독고연은 파훼했다. 나의 초격을 튕겨낸 다음, 바로 몸을 옆으로 빙글 돌리며 연격을 피했다.
그리고 자연히 이어지는 수평베기. 검 끝은 정확히 내 목을 노리고 있었다.
“연아.”
나는 왼손으로 독고연의 검을 붙잡았다. 손바닥을 겹쳐 칼날을 잡는 것도 아니고, 그냥 검을 통째로 움켜쥐었다.
키기기긱.
내 왼손에 깃든 붉은 혈강이 독고연의 검기를 억눌렀다. 검 위에 덧씌워진 검기는 혈강에 의해 잠식되어가기 시작했고, 독고연은 곧장 검을 자신에게 당겼다.
“네 마음속에 어둠이 보이는 구나.”
고수들이 하수들을 상대할 때 항상 그런 말을 하더라. 나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늘 이해할 수 있었다.
독고연의 검에는 미혹(迷惑)이 있다.
독고연의 검은 정교하지 못했고, 너무나도 쉽게 흔들렸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다급하게 만드는 것이냐?”
“...부러워서요.”
독고연은 밑바닥에서부터 긁어내듯, 감정을 토해냈다.
“...아시잖아요?"
"그래. 잘 안다. 그러니...내게 모두 쏟아라."
나는 독고연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마음, 내가 모두 받아주마."
독고연은, 나를 향해 살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독고구검으로서의 원형을.
그리고 나는 보았다.
"가가, 가가...!!"
나를 향해 온갖 감정을 토해내며 휘두르는 검의 궤적에 담긴, 파천신검의 궤적을.
* * *
"엄마-!"
월아는 팽유월의 품에 안겼다. 이미 젖은 떼어낸지 꽤 되었지만, 월아는 부모의 품에 안기는 걸 상당히 좋아했다.
"고생했어, 신혜."
"......."
혈신혜는 혼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팽가의 가주와 소가주가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혈신혜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아야했다.
월아의 놀이상대. 놀기 좋아하는 어린 아이와 몇 시진을 함께 노는 건 현경 고수라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응?"
"어떻게 아이를 두 번이나 낳을 생각을 하는 겁니까...?"
혈신혜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도, 낳고 난 뒤에도 엄청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고생한 만큼 행복하니까?"
팽유월은 월아를 품에서 다독이다가 침대에 잠시 눕혔다. 아이를 안아줄 체력은 되지만,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안는 건 잠깐 뿐이었다. 대신 월아의 손을 꼭 잡은 채 마저 먹던 점심을 한손으로 먹었다.
"고통도 있지만, 행복이 그걸 덮어버리니까 괜찮아."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 분은...음...."
"중원 남자들이 다들 그렇지. 그보다 오늘, 침대 하나 넓은 거로 상공 방에 놓아둬."
"침대...넓은 거로요?"
"응. 너는 오늘 월아 데리고 잘 준비하고."
팽유월은 눈을 샐쭉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은 넘겨줘도 밤을 독점하는 건 안 되지."
* * *
독고연은 쓰러졌다. 땀에 흠뻑 젖고 모래사장에 대자로 누운 채,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호흡을 골랐다.
"...두려웠어요."
나는 독고연에게 거꾸로 무릎베개를 해주며 햇빛을 가렸다. 그림자가 진 얼굴에는 울분에 가득찬 자색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저만, 저만 여인으로서의 매력이 낮은 것 같아서."
"......."
?
"그렇잖아요. 다른 언니들은 여인의 성숙미가 가득한데...저만 뒤쳐지는 것 같아서. 다들 밖에서는 어린 여자가 더 좋다고 하지만...언니들 보면 전혀 안 그렇잖아요? 다들...크고 예쁘죠."
나는 묵묵히 들었다. 괜히 다른 말을 하는 건 긁어부스럼이며, 혈교주는 이럴 때 조용히 들어주라고 했다.
"그에 비해 저는 가슴도 작고...체구도 작고.... 유일한 강점이었던 뒤 마저도, 선녀라는 특징도 점점 퇴색되고...."
원래 천재의 고뇌는 범인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나름 자신있었던 무공도 저보다 강한 언니들이 나오고, 저는 밀리는게 아닐까 싶었어요. 가끔가다가 가가에게 특별하고 색다른 느낌을 줄 수 있는...그런 존재가 아닐까하고. 가가의 주변에 있는 흔한 여자 1이 될까봐 무서웠어요."
독고연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렇잖아요. 특징이라고는 가가보다 어린 것밖에 없는 제가...가장 자신있던 것조차 다른 분들에게 밀리게 된 제가...과연 가가께 사랑을 계속 받을 수 있을지 두려웠어요. 거기에."
독고연은 스스로 얼굴을 덮었다.
"...또다른 연이가 저보다 강해지고, 가가를 생각하며 강해진 걸 알고나서, 저는 또다른 독고연을 뒤에서 바라보며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했어요. 자격지심...일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바보같죠? 남들을 질투하다가 이제는 자기자신까지 질투하게 된다니."
여인의 질투심은 결코 부끄러운게 아니다. 단지 질투가 독으로 작용하여 타인을 해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현녀가 그러하다. 그녀가 나를 곤륜에 속박하려는 건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다른 여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두 눈 뜨고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저 순수히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고자 한다면, 다른 모든 이들을 곤륜으로 부르거나 했을 터.
"...알아요. 질투하면 안 된다는 거. 하지만 사람인 걸 어떻게 해요. 가가가 저를 사람으로, 남들이 사랑받는 모습을 부러워하는 여자로 만들어버렸는데."
독고연은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어요. 그런 건 의미가 없다는 걸. 중요한 건 여기...이 마음이라는 걸."
앗, 여기서 정신론이?
"가가는…저를 끝까지 품으실 거죠?"
"당연하지. 내가 왜 의원이 되었었는데."
몇 번이고 말했다. 내가 의원으로서 처음 나의 신분을 숨겼던 이유는 독고연을 치료하고 나의 것으로 품기 위함이라고.
"나는 너를 선택했다. 무림맹주의 딸이며,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아름다운 선녀라는 것 모두 고려를 했었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독고연이라는 여자를 이루는 것이다."
독고연은 깨달았다. 자격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들에 대해, 그녀는 남들 모르게 소심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독고연은 나와 같은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었다.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절망적으로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독고연은 다른 여인들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자존감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는 해결되었다.
"연이는 너무 완벽해지려고 한게 문제였어."
"네, 알아요. 제가 부족한 걸 무조건 채우려고...욕심을 부렸죠."
남들이 보면 '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천차만별이다. 특히 독고연같은 팔방미인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때로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차라리 저도 견희 언니처럼 가슴이 컸다면. 시아 언니처럼 엉덩이가 예뻤다면. 유월 언니처럼 자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다른 분들과 차별화되는...나만의 요소를 가지고 싶었다고."
독고연은 몸을 일으켰다. 나의 빙백신공으로 몸의 열기를 식힌 그녀는 장포의 허리띠를 스스로 풀었다.
"하지만 그런 건 가가와의 관계에서, 천가장에서 이렇게까지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버렸죠. 네, 이연이가 제게 가르쳐준 거예요. 어딘가 부족한 부분은 있을 지 몰라도…."
독고연은 장포를 나뭇가지에 걸었다. 그리고 내게로 몸을 돌렸다.
"가가를 향한 제 마음이 굳건하다면, 누구보다도 단단하고 강하다면 된다는 걸. 제가 걱정했던 모든 것들은...진심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그래."
장포 아래에 가려진 독고연의 옷은 야하기 그지 없었다. 안이 비치는 얇은 백의 너머에는 혈교주가 혈소예를 위해 보내준 선녀의 날개옷이 비치고 있었다.
독고연은 나를 위해 이런 걸 당당히 입어줄 수 있는 여자다.
독고연은 나를 위해 스스로의 기억을 봉인하고 금제를 걸었던 여자다.
오직 나를 위해.
"가가, 새삼스럽지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무공이 어떻든, 신분이 어떻든, 몸매가 어떻든.
"저는, 가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답니다."
독고연이 내게 가진 마음에 거짓이 없다면, 다른 건 무엇도 중요치 않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연아."
어째서일까. 다른 여인들을 향해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게 어색하지 않았는데, 독고연을 향해 그 말을 하기가 너무 민망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다.
"...이거, 왠지 말하기 엄청 부끄럽구나."
"히히…. 마음이...통했네요."
"그래도 얘기하마. 사랑한다."
"...네, 고마워요. 정말."
독고연의 눈에 가득한 연심에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는 다른 여인들에게도 사랑을 나눠주고 있으니.
"가가, 그래도 오늘은 제 날인 거죠?"
"물론이지."
"...그럼 이쪽으로."
독고연은 내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우리는 그 날의 밤바다 처럼 해변을 거닐며 파도 소리를 즐겼다.
스윽.
"헤헤…."
독고연은 나를 으슥한 곳으로 이끌었다. 바위 절벽 틈 사이로, 햇빛이 아주 살짝 비치는 곳은 밖에서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장소였다.
"가가, 저 욕심을 하나 부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그러면…."
독고연은 벽에 손을 짚으며, 치마의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올렸다.
"오늘, 제게 사랑을 속삭이지 말아주세요."
"뭐?"
"대신 1년 쯤 뒤. 제 뱃속에서 태어날 가가의 아이에게...얘기해주세요. 아빠는, 너를 엄마보다 더 사랑한다고. 이번에 팽가에 있으면서 느꼈어요. 월아를 대할 때 가가의 사랑은...정말이지 질투가 났답니다."
그녀가 안에 품은 마지막 질투.
"...이건 질투 좀 해도 되는 거잖아요."
그것은 바로 나와 피로써 맺은 인연이자, 피를 섞은 증거였다.
"너…."
"여기."
톡. 토독.
독고연은 치마를 걷어올려 드러낸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나를 도발했다.
"제 아이에게도, 가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어요?"
"물론이지. 그런데 연아."
나는 독고연과 얼굴을 가까이하며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딸이 좋아, 아들이 좋아?"
독고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작품후기]
와! 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