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99화 (499/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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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맺어진 맹약(血盟)

이른 새벽.

기억을 되찾은 독고연은 새벽부터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해 따로 밖으로 나갔다.

"우웅, 아빠…?"

나는 새벽같이 깬 월아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팽유월이 좀 더 깊게 잘 수 있게, 나는 월아를 안고 바로 팽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왔다.

"월아야, 너는 동생이 생기면 어떤 느낌이 들 것 같니?"

"동생이 뭐야?"

나는 월아의 질문에 갑자기 머리가 굳어버렸다.

무공을 파훼하고 여인을 기쁘게하고 수많은 악인들의 계책을 무너뜨리는 건 쉽게 답할 수 있었지만, 월아의 질문에 쉽게 답하기는 어려웠다.

"월아보다 늦게 태어나는 엄마 아빠의 자식이지."

"그럼 월아랑 달라?"

"월아보다 더 어리고 더 약한 아이지."

"뭐가 약하다는 거야?"

아아, 이것이 육아의 고통인가. 월아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월아는 아가였을 때 기억해?"

"월아는 아가야! 엄마가 아직도 월아는 아가라고 그랬어."

"...그래, 아가지. 하지만 월아가 지금보다 더 작았던 때가 있었어. 지금처럼 걷지도 못하고, 말도 잘 못했던 때가."

"그래? 잘 모르는데…."

월아는 복잡한 얼굴로 기억을 떠올리느라 머리아파했다. 나는 잠시간 월아의 질문공세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에 숨을 돌렸다.

"동생이라는 거, 월아보다 약해?"

"그렇지. 조만간 태어날테니."

"몇 밤?"

"...글쎄, 한 백 밤 정도 자면 되지 않을까?"

"......."

"아빠가 열 번 정도 오고 나면, 그 때 월아 동생이 나올 거야."

"아!"

월아는 금방 이해했다. 내가 팽가에 들리던 시간에 열 번을 곱하여 계산하다니, 역시 팽유월과 나를 닮아서 예쁘고 똑똑하다.

"동생...동생…. 동생이 태어나면, 월아는 어떻게 되는 거야?"

"......."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형제든 자매든,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한다고. 그래서 뒤에 태어나는 동생의 존재에 대해 본능적으로 꺼려한다고.

태어나면서 서로 투닥거리며 가족애를 가지게 되겠지만, 유아기의 아이에게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 다소 쉽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엄마가 월아를 보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겠지."

"아."

월아는 금방 울상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월아를 높이 들어올려 가슴에 품었다.

"엄마가 월아랑 같이 있어주지 못하는 만큼, 아빠가 월아랑 같이 있어줄게."

"정말?!"

"......."

이렇게까지 기뻐할 일일까? 월아는 누구보다도, 나의 아내들보다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기뻐했다.

"당연하지. ...그런데 월아야. 월아 동생이 한 둘이 아닐 거야."

"한...둘…?"

월아는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인상을 찌푸렸다.

"동생, 열 명이야?"

"...어쩌면 더 될 지도."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10명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팽유월이 둘째를 낳은 것처럼, 나중에 둘째가 생길 지도 모른다.

"음...아빠는 엄마들이랑 월아동생 만드는 거 좋아?"

"만드는게 조, 좋다기 보다는…. 서로 사랑하니까 그런 거지."

"사랑? 그게 뭐야? 나도 할래?"

"......."

갑자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월아가 커서 다른 남자에게 상공, 가가, 공자, 오빠 소리를 할 걸 생각하니 뭔가 속이 뒤틀렸다.

이런 느낌이구나. 천마가, 혈교주가 나를 생각하는 기분이. 너무나도 미안했다. 사과는 하지 않겠지만.

"...월아는 아빠랑 엄마랑 같이 사랑하는 거로."

"와! 사랑! 좋아, 히히."

월아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저 좋아라했다. 나도 월아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동생들 사랑하면 돼?"

"당연하지. 월아 동생들, 분명 월아처럼 예쁜 아이들일 거야."

장담한다.

"내가, 너희를 반드시 지켜주마."

사랑이 가득한 천가장을 위하여.

"응, 나도 지킬게!"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알기나 할까. 나는 활짝 웃는 월아의 미소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월아도 지켜주기를-"

...지킨다?

"......역시 월아야."

고민이, 해결되었다.

* * *

"상공. ...다음에는 천옷 덧 씌워서 나가주세요. 아무리 내공으로 보호한다고 해도…."

"크흠, 미안하다."

월아와의 새벽산책에서 돌아온 나는 팽유월에게 바로 한 소리를 들었다.

별 건 아니다. 날씨가 쌀쌀한데 옷을 얇게 입고 나갔기 때문이다. 내가 무공을 써서 주변의 공기를 전부 데우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냐 하지만….

"비상식을 상식으로 알게 되면 곤란하다구요…."

"십분 통감한다. 반성하지."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사람이 불꽃을 일으킨다. 사람은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월아의 교육에 상당한 방해가 되는 요소였다.

"죄송해요. 너무 따지듯이 말한 것 같아서…."

"아니다. 응당 그래야지. 역시 어머니는 달라."

"......그, 저도 상공을 위해서 지내고 싶지만."

"아니지. 아니야, 네 1순위는 내가 되더라도, 네 0순위는 월아가 되어야지."

다소 잔인한 말이기는 하지만, 반려보다 자식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으로서 가진 본능인 것 같다.

나도 팽유월도 서로 그걸 느끼고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미안함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월아랑 재미있었어요?"

"그래. 월아가 그렇게 말이 많은 아이인지 몰랐다. 원래 아이들은 그렇게 질문이 많나?"

"상공께 유독 더 많이 그런 것 같아요. 후후, 질투나네요…. 옆에서 오랫동안 본 엄마보다 가끔 오시는 아빠를 더 좋아한다니."

"...크흠."

말에 뼈가 있지만, 그게 월아의 사랑을 비교하는 거라면 물러설 수 없다. 나는 팽유월과 월아에 대해 제법 긴 시간을 이야기 한 뒤, 슬슬 '본론'을 꺼냈다.

"...월아와 이야기를 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무공이요?"

"아니. 팽가의, 새롭게 개편될 무림의 정세에서 팽가의 변화에 대한 깨달음이지. 바로 이곳, 하북에서."

하북은 다른 의미에서 중원 대륙 전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자연환경적으로도 하북은 많은 왕가의 사랑을 받았다.

수천 년 전에도, 수백 년 전에도, 그리고 수백 년 후에도 이곳은 대륙의 중심으로서 이름을 널리 떨칠 터.

그런 곳의 중심에 위치한 하북팽가는 무림 세가로서 널리 알려져있지만, 정작 하북 내에서는 나름 유명한 토호 세력에 불과하다.

"하북에는 정말 많은 유지들이 있지. 무가가 아니라 관료 집단, 유학자들, 그리고 상인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널리 이름을 떨친 이들이 모여있는 곳이 이곳 하북-북경이다.

"그들은 과연 하북팽가를 어떻게 바라볼까?"

"유감스럽지만...왈패집단 정도로 경원시하겠죠."

팽유월은 쓴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무리 구파일방과 팔대세가라고 한들 그건 무림 내에서의 위상이고, 무림 자체에 대한 혐오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관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파락호들의 모임에 불과하다.

"단순히 무공을 쓰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하지만 거기에 자본의 힘이 곁들여진다면?"

"...황제에게 반역하지 않는 한, 졸부라고 조롱을 받더라도 돈이 있는게 최고죠."

팽유월은 이를 갈며 웃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상당한 긴축재정으로 쪼들리게 살고 있었던 만큼, 그녀는 금전적인 문제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상공 덕분에 팽가의 재정상황이 정말 괜찮아졌죠. 항상 고마워요."

"내 아내와 딸의 가문을 위해 그 정도는 해야지. 그리고 앞으로도 더."

팽가의 창고를 채운 것을 넘어, 이제는 팽가의 힘을 더욱더 키워 관에서도 쉽게 팽가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왈패집단이라서,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오래전부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해온 '무신'의 집안처럼, 팽가의 무력을 흠모하게 만들 것이다.

"혈교가 남쪽에서부터 일으키는 변혁의 바람은 광풍이다. 그것이 하북에 도착했을 때 대처하려면 너무 늦어."

"네. 시류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면...흐름에 올라타서 남들보다 앞서나가야죠."

팽유월은 팽가의 여인답게 호쾌했다. 이야기를 함에 있어 머뭇거림이나 막힘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팽유월과 이야기를 나누기에 정말 편했다.

"상공은 뭐 생각나는 거 있어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혈교의 계책에 대해 자세히 아실테니…."

"...팽가의 체질 개선 겸, 무공을 널리 알리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구나."

나는 엄밀히 따지면 팽가의 외인이다. 가문의 대소사에 왈가왈부 할수는 없다.

하지만 이게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내가 팽유월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게 곧 팽유월의 뜻이 된다.

"'힘'은 언제든지 옳지. 단순무식하게 비무대회에서 '크하하, 나의 오호단문도를 보아라!'하고 외치는 시대는 이제 끝날 것이다. 무림 세가는 변화해야해. ...바로 이거다."

나는 팽유월에게 나의 계획이 담긴 책자를 넘겼다. 일종의 계획서였고, 팽유월은 빠르게 책을 훑으며 내 생각을 읽었다.

"...상공의 뜻을 잘 알겠어요."

팽유월은 다소 복잡한 얼굴로 계획서를 덮었다.

"경호업이라."

"팽가의 무(무)를 가장 효과적이고 권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지."

호위. 요인안전. 경비. 그 모든 것을 아울러 팽가는 '누군가를 지키는 일'에 칼을 들 것이다.

"누군가를 베기 위한 칼은 여전히 들고있지만, 그건 '적'을 베기 위함이다. 예전에 네가 안휘에 왔을 때를 기억하느냐?"

"...애증으로 기억하죠."

나는 살짝 토라진 팽유월의 입에 입술을 맞췄다. 처음에는 입을 열지 않았던 팽유월은 눈으로 나를 욕하며 입을 열었다.

할짝.

"그래서 안휘의 일이 팽가가 경호업에 전념하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죠?"

"나는 그 때를 기억한다. 호위무사들이 너를 보호하기 위해 함께 내려왔던 것을. 왜 그랬지? 당시만 하더라도 일류급 고수였던 너를, 왜 이류 수준인 무사들이 함께 내려와서 너를 지키려고 했지?"

"그야...그게 안전하니까…. 하항."

팽유월은 비음을 흘리며 웃었다.

"상공은 안전을 팔려는 거군요."

"정답이다. 팽가는 다른 이들의 안전을 책임질 힘을 제공하고, 그걸로 금전과 명예를 받게 되겠지."

"관직에 있는 이들 중 낭인들을 고용해서 무공을 익히게 하는 경우가 더러 있죠. 그런데 팽가의 무사가 파견을 나가서 호위를 선다? …...아, 그 효과도 있겠네요."

팽유월은 책상 옆에 놓인 거대한 칼을 손으로 쓸었다.

"우리 가문은 팔대세가의 무사를 호위로 두고 있다."

"그래. 대신 이건 크나큰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밖으로 나간 만큼, 사람에 대한 교육이 철저해야겠네요. ...밖에서 사고를 치지 않게."

"그래. 마치 내…."

쪽.

팽유월은 이미 알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나에게 입을 맞추어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호위무사.

중원의 호위무사들이 대부분은 아니겠지만, 잘생기고 키크고 과묵하고 실력좋은 호위무사는 대부분 호위 일을 하러 간 가문의 금지옥엽과 눈이 맞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내 어미와 아비가 그랬고.

"...큭."

"왜요?"

"아니, 이거 내 운명인가싶어서."

누군가를 지키는 일이 곧 나의 숙명이 아닐까. 명목상 나의 친부는 남궁세가의 호위무사였다.

그리고 나는 전생에 혈교주를 바로 옆에서 밀착보호하는 호위무사였다.

호위 대상이 전라로 씻을 때도 옆에 서서 언제나 그녀를 지켰던, 누군가를 지키는 일이 가지고 있는 극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유월아. 믿기는 어렵겠지만, 나는 누군가를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중원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다. 주로 사람을 지키는 일로."

혈겁난세.

중원 모두가 혈교주의 목을 노리는 상황에서, 나는 구천현녀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혈교주의 목숨을 빼앗기지 않았다.

상처는 입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치명상이 아니라면 회복하면 그만이다.

호위무사가 모든 위해로부터 사람을 지킬 수는 없지만, 행여나 일어날 지도 모르는 사태에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다.

호위.

경호.

무공을 익힌 '전문 경호 집단'.

그것이 내가 혈교가 일으키는 '무림 붕괴'에서 팽가의 전통과 역사를 지키며 동시에 팽가가 살아남기 위해 생각한 방법이었다.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잘 하는 것이 세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무공을 쓰는 방법이며,

하나는 자지를 쓰는 방법이며,

나머지 하나는 사람을 지키는 방법이다. 이는 전생에 수많은 이들을 죽인 업보에 대한 속죄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검을 들 때, 무림인들은 누구보다도 강해지지. 안 그러냐?"

"......월아를 키우면서 느낀 게 있어요."

팽유월은 내가 건넨 계획서에 손을 올리며 거리를 좁혔다.

"사람은 무언가를 지키고자 할 때, 더 강해진다는 거요."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월아를 통해 배웠다.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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