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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파에 드리운 음모를 파헤쳐라
아미파에는 유명한 고수가 없다.
다른 구파일방과 달리, 아미파에는 현경에 이른 고수가 없었다.
최고 고수가 화경!
그건 돌아온 과거 시점에도,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도, 그리고 미래 혈겁난세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미파 내부에 검선처럼 고인(古人)이 있나?
아니다!
아미파에는 검선 적성자처럼 현경급 무인이 살아 오랫동안 남아있었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아미파를 습격했을 때 나타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미파에 재능을 가진 여인들이 많이 있는가?
이건 조금 애매하다.
아미파는 구파일방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강력한 문파이나, 20대 나이에 초절정에 이른 재능 넘치는 고수가 있다거나 그 수가 많다거나 하지 않는다.
아미파는 불가(佛家)이기 때문이다.
무공을 익히는 문파의 성질보다 관세음보살을 찾으며 아미타불을 찾는 비구니의 경향이 강했다.
그게 점점 무림의 문파스러워진 계기가 바로 전통과 규율을 중시하는 노모파와 혁신과 개혁을 주장하는 유모파의 대립이었다.
머리칼!
불가의 문파에서 새로이 들어오는 여인들이 머리칼을 기를 수 있냐 없냐에 대한 문제는 아미파의 존립 자체에 대한 문제로까지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걸 앞장서서 타파한 존재가 바로 멸색사태 류서시다.
아미파 제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장문인.
당연히 아미파 원로들은 류서시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로부터 존경심을 잃은 원로들은 아미파의 주도권을 가져오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드디어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장문인의 폐관수련.
멸색사태 류서시가 류미아로 강호를 주유하는 동안 대외적으로 장문인은 폐관수련에 들어갔다고 널리 알려졌다.
사실 류미아가 밖에서 대놓고 류서시라고 떠들고 다니지만 않는다면 걸릴 일도 없다. 조용히 강호를 돌아다녔다면 그녀는 반로환동한 초고수로서 아미파의 젊음을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산동에서 추색살들을 구하기 위해 류미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중원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동정호 인근에서 검마 왕소현과 더불어 내게 범해졌다. 비천색마에게 범해진 그녀는 천무명의 이름을 찾으며 아미파로 떠났고, 나는 그녀가 얌전히 아미파로 돌아갔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아미파로 돌아가 아미파의 젊음을 이끌어야 할 장본인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멸색사태 류서시의 복귀 소식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고, 폐관수련은 계속 이어졌다.
장문인의 폐관수련이 길어짐에 따라, 원로들-아미파의 노모(老母)들은 아미파의 실권을 잡기 시작했다. 류서시의 눈치가 보여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 둘 저지르기 시작했고, 제자들은 류서시를 찾았으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이상을 느낀 점은 바로 이곳.
"류미아...언니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제자들의 어려움을 내팽겨 칠 여인이 아니에요."
하남 무림맹에서 잠시나마 함께 긴 시간을 보냈던 유설라는 류서시의 성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언니가 제자들을 얼마나 아끼는 사람인데요. 제자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색마를 향해 다리도 벌릴 분이라고요."
"그건 그렇지. 나도 익히 잘 알고 있다."
사천에 처음 왔을 때 검담으로서 나는 와룡검을 훔치기 위해 아미파를 습격했던 적이 있었다.
"다른 아미파 장로들은 가만히 어떡해 어떡해 거리고 있던 와중에 류서시만 검을 들고 검담의 앞에 섰지."
그곳에서 나는 정자사태를 납치하여 아미파의 시선을 끌었고, 류서시는 모두가 가만히 있는 와중에 혈혈단신으로 신창의 검담 추격대에 합류하여 목숨을 걸었다.
"빙색마인 때도 마찬가지였다. 성적 취향이 조금 독특한 걸 제외하면...그녀는 누구보다도 백도의 여인답게 의협심이 강하고 정의감 넘치는 사람이야."
"그런 분이 이런 상황에 침묵하는 건 말이 안 돼요."
"그래. 이건...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지."
원로들에게 모종의 약점이 잡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미파 밖에서 원로들이 단검을 들고 여제자들의 머리를 자르려고 벼르는 와중에 어찌 류서시가 가만히 보고만 있으랴?
"어리석은 여자들. 그게 아미파의 발전을 방해하는 거라는 것도 모르고."
"여자만 받는 문파인데 머리를 빡빡 밀게 하는 문파이니...누가 가고 싶어하겠어요."
"그래. 그리고 그런 악습을 부활시킨 자가 있을 것이다."
대공자, 주지.
우리는 아미파에 드리운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아미파의 빙백봉'으로써 먼저 아미파에 방문했다.
* * *
"만나서 반갑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아미파의 장로들은 한 여인을 가운데에 두고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압박했다. 장로들의 눈총을 받는 여인, 빙백봉 유설라는 짧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장문인께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장문인은 자리에 안 계시군요."
"장문인은 지금 폐관수련 중이다."
"그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 오자마자 말대답을 하다니. 그 아이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으니 화가 나지도 않는다. 유설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장로들의 투기를 흘려냈다.
'늙은 여자들이 예쁘고 젊은 미인을 질투하는 거다. 그냥 듣고 흘려.'
색마의 조언에 따라 유설라는 장로들이 무슨 말을 하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직책만 따지고 보면 북해빙궁주인 자신의 위치가 더 높다고 할 수 있었다.
"하! 아무 말도 안해? 고얀 것."
"됐습니다. 어차피 아미파의 여인인 이상 아미의 규율과 법칙을 따라야 하는 법."
장로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흉흉하게 웃었다. 그들의 눈은 유설라의 하얀 머리칼에 고정되었다.
"빙색마인에게 당한 흔적이라지? 보기 썩 좋지 않구나."
"오면서 몇몇 보았겠지만, 아미파의 제자들은 이제 모두 머리를 밀고 비구니로서 부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너도 아미의 제자이니 당연히 따라야 할 것이다."
"스스로 자르겠느냐, 아니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겠느냐?"
"......."
유설라는 시작부터 자신을 몰아치는 장로들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조금만 강단이 낮았어도 어어하는 사이에 머리가 밀렸을 테지.
"아미파의 제자라면 머리를 밀어야 한다...그 말씀입니까?"
"그렇다. 대 아미파의 오랜 전통과 규율에 따라-"
"그럼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유설라는 모두의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며 당당히 선언했다.
"빙백봉 유설라. 파문시켜주십시오."
유설라의 발언에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뭐, 뭐라...?"
"머리가 길기 때문에 남자에게 범해질 것이다? 하, 웃기지도 않는 소리."
유설라의 신랄한 말에 장로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지만 유설라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대머리 될 바에는 차라리 아미파를 버리겠습니다."
* * *
지금쯤 유설라가 원로들을 상대로 '아미파 탈퇴'라는 초강수를 뒀을 것이다.
- 머리카락을 강제로 밀어버릴 거라면 나는 아미파를 나가겠다!
'빙백봉이라는 특이한 위치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백도 무림의 여섯 봉황이라는 상징성.
미녀.
아미파에 소속되어있지만 아미파의 제자는 아닌 존재.
속가제자와 비슷한 위치의 유설라기에 원로들을 상대로 아무렇지 않게 당당히 아미파와의 관계 단절을 외칠 수 있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오래전부터 아미파의 원로들을 모시고살아왔지만, 유설라는 그렇지 않으니까!
'엄청 혼란스러워하는군.'
가만히 있기만 해도 아미파 내부가 어수선하게 움직이는게 훤히 느껴진다. 나는 그림자 속에 숨어 남들이 다니지 않는 곳을 중심으로 돌아다니며 류서시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장문인실에는 없었어.'
류서시의 방은 아주 잠깐 다녀간 흔적만 남아있었다. 내가 그녀와 의붕으로서 방에서 직접 배를 맞춘 기억이 있는 만큼, 류서시의 방을 헷갈릴 일도 없었다.
'그럼 있을만한 곳이 없는데?'
장문인을 어디 가둬놓은 것도 아니고-
"......설마?"
아무리 그래도 원로들이 장문인을 가뒀을까? 폐관수련을 하는 수련동의 입구를 막았다면, 류서시는 검으로 입구를 가로막은 바위를 부수고 나왔을 여자다.
물리적으로 막지 못했다면 정신적으로 막았다는 말.
'원래들이 마공을 익혀서 금제를 걸었다? 아니야. 류서시는 파사현정검을 익힌 여자다. 정신적인 금제는 아무 의미가 없어.'
남자들에게 겁간을 당하고도 끝까지 살아남아 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심지어 색마를 상대로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의 내공심법까지 익혔는데 사술에 홀릴 리도 없다.
그렇다면 역시 생각해봄직한 건 '스스로' 가뒀다는 것 뿐.
"...아직 확인해보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기는 한데."
나는 아미파의 구조도를 기억하며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숨어들었다. 설마설마하며 가정에서 지운 곳이지만,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류서시가 있을만한 곳은 한 곳 뿐이다.
참회동(懺悔洞).
큰 잘못에 대하여 부처의 앞에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곳. 아미파 내에서 큰 잘못을 저지른 제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곳이며, 류서시가 장문인이 된 이래로 아미파는 참회동을 거의 열지 않았다.
참회동 내부는 아무것도 없이 불상만 있을 뿐이다.
말이 참회동이지, 사실상 체벌실이나 마찬가지인 곳.
"......."
나는 그곳을 지키는 무사들을 향해 가볍게 지탄을 날렸다.
"컥!"
마침 내게서 뒤돌아보던 비구니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머리에 쓴 두건이 사르르 떨어지니 머리가 반짝거렸다.
"...크흠."
두상이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너무 예뻐서 머리에서 빛이 반짝반짝 날 정도로 눈부셨다. 머리의 환함 때문에 아기색마도 눈이 먼 듯 고개를 푹 숙였다.
"......?"
아무리 머리가 벗겨진 여자라도 여자는 여자.
눈앞에 기절한 여자가 있는데 아기색마가 반응하지 않을 리가 없다. 나는 내가 기절시킨 여자를 유심히 살폈다.
"......정조?"
내가 용봉지회에서부터 숱하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입가심으로 몰래 취했던 여자. 의붕을 상대로 약간의 연심을 품고 있지만, 그냥 스쳐지나갈 뿐인 여자.
"어우야."
그녀는 머리가 벗겨진 채 참회동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머리에 두건을 얹은 다음, 참회동의 입구를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번천육합공(飜天六合功)!
아미파의 내공심법을 일으키자마자 바로 내부에 펼쳐진 진법에 몸이 스며들었다. 나는 천천히 안쪽으로 향했다.
'이게 참회동이냐. 감옥이지.'
사람이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작은 공간에 부처의 불상 하나만 올려둔 채 기도하는 것이 전부인 공간. 나는 이 공간 자체에 대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부처를 상대로 참회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언제까지 참회하라는 기준은 이곳에 가둔 이들이 정하는 게 아닌가?
아미파의 원로들.
'자기들이 위에 있을 때는 온갖 권리를 누리다가, 정작 정마대전과 혈겁난세에서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자들.'
추마귀 시절 아미파의 젊은 제자들을 암살하러 다녔을 때부터 혈강시 시절 아미파를 멸망시킬 때까지, 나는 아미파에 대한 좋은 소식은 거의 듣지 못했다.
그나마 현생에 와서 멸색사태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며 좋은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아미파의 발전에 저해되는 자들.
명분만 서면 그들을 제거할....
"......오랜만이네요."
가장 안쪽의 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나를 단번에 알아챈 만큼, 나도 당당히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
"그래. 오랜만이군. 이렇게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못했는데."
"저도 마찬가지에요, 친구."
류미아, 아니 류서시는 핼쓱해진 얼굴로 소복만 입은 채 나를 맞이했다. 그녀의 앞에는 불상조차 없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제자들이 전부 머리가 벗겨졌더군."
"......그것이, 아미파가 원래 지켰어야 할 모습일 지도 모르죠."
류서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모습으로 쓰게 웃었다. 나는 그녀가 왜 자포자기한 상태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너를 그렇게 만든 거지?"
"...글쎄요. 당신?"
류서시는 우울한 얼굴로 나를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름다운 꽃에는 벌레가 많이 꼬이는 법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장로 분들은...제가 잠시 강호에 나간 사이 자기들끼리 결정을 내렸더군요. 류서시가 류미아가 된 상태로도 나가서 범해진다면, 분명 미모가 그 원인이니 여성성을 없애야한다고."
"...그게 무슨 개떡같은 논리야?"
여인이 옷을 다소 짧게 입는다고 성행위를 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머리가 길다고 범해지기 쉽다는 건 도대체 무슨 논리란 말인가?
"논리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제가 류미아로 강호에 나간 동안 누군가에게 범해졌다는 거니까."
아.
"원로분들의 말씀은 그래요. 강호에 색마들이 넘쳐난다고 한들...설마 비구니를 건드리겠느냐고. 설령 건드린다고 한들, 최소한 색마에게 당하는 이들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거라고. 그분들 하는 얘기가...."
류미아는 다소 해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미파 장문인도 색마에게 범해지는 세상인데, 조금이라도 색마에게 당할 요소를 제거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냐면서...."
"......."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내가 류미아를 겁탈했기 때문이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군. 자기들은 잃을 게 없으니 젊은 이들에게도 자기네가 겪은 걸 강요하는 셈이 아닌가?"
아기색마가 화가 났다.
"지들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뭘 하려는 겁니까?"
"여인들의 머리칼을 지킬 것이오."
아무리 색마가 여인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들, 머리카락 없는 여인을 범할 수는 없다. 그냥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더니, 아미파의 원로들을 용서할 수 없는 명분이 생기고 말았다.
때로는 하기 싫더라도 해야할 때가 있는 법.
"머리가 있든 없든 색마는 여자라면 가리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겠소."
"어떻게요?"
"색겁을 일으킬 것이오. 하나도 남김없이, 싹 다."
나는 아미파 제자들의 모발을 지키기 위해, 아미파를 겁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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