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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에서 검을 논하다
"죽을 것 같다."
매화 향기가 사라지고 제정신이 든 나는 전신을 으깨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가 났다.
"으으, 그냥 비무고 나발이고 천마구검 써서 죽여버릴걸."
일부러 내 경지에 맞지 않는 무공을 강제로 사용하느라 발목이 망가진 것도 내 책임이고, 일부러 여러 무공을 사용하느라 내공이 바닥까지 줄어든 것도 내 잘못이지만, 그래도 나를 이렇게 만든 검선에 대한 불합리한 분노는 참을 수 없었다.
"와...일류네."
발목에 남은 내공을 모두 모아 죽은 검선에게 다가가니, 그는 웃은 채로 죽어있었다. 이미 피는 쏟아질 대로 쏟아져, 더는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로 주변에 흥건하게 고여있었다.
내가 매화향기라고 느꼈던 건 어쩌면 검선의 혈향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의 잘린 팔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등선에 성공해서 꼭 위에서도 비무행을 펼치시길 바라오."
만약 선계가 있다면, 그리고 이미 숱한 고인들이 우화등선했다면, 그곳에는 분명 검선과 검을 맞대고 논할 심심한 선인들이 차고 넘칠 것이다.
화륵.
나는 남은 내공을 끌어내 중려신화정으로 검선의 몸에 불을 붙였다. 화장은 중원에서 역병에 걸린 이들에게나 하는 그릇된 방법이지만, 나는 중려신화정에 서린 신기(神氣)가 검선의 혼백을 하늘로 올려줄 거라고 믿는다.
이곳은 오악 중 태산.
가장 높은 산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늘에 그나마 가까운 여러 산 중 하나가 아닌가.
"꼭 등선해서 다시는 지상에 내려오지 마시오. 만약에 내려온다고 하면 여자로 내려오시고."
검에 미친, 비무에 미친, 자신을 여자가 아닌 무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를 여자로 만드는 게 얼마나 마음에 불을 지르는지 아는 사람만 안다. 하나에 몰두해 있는 존재의 마음을 변하게 만들어 내게 끌어당기는 것만큼 끌리는 것이 있으랴.
"뭐, 그렇다고 남정네가 여자가 된 걸 내가 처첩으로 들이겠다는 건 아니고."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고 하지만, 속 재료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입장에서 참으로 거부감이 강하다.
아무리 먹음직스러운 만두가 앞에 놓여있다고 한들, 그 안에 사천보다 더 매운 고추가 다짐육과 함께 한가득 담겨있는 걸 알면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나는 음양의 이치를 따르는 자. 음이 양이 되는 건 채음보양으로 족하다. 음기인 줄 알고 취했더니 근본은 양기라고 한다면, 내 몸만 상하게 될 뿐이다.
화르륵.
검선의 몸이 완전히 타버렸다. 중려신화정은 백골조차 남기지 않고 지상에 남은 육신을 모조리 태워 하늘로 올려보냈다.
"...아, 팔 하나."
내가 자른 팔을 제외하고. 나는 내 검에 튕겨 나간 팔이 어디로 굴러떨어졌는지 슬쩍 확인했다. 분명 내가 허공을 디디다가 검을 그었고, 검선이 뛰어오른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씁."
봉오리 너머, 아래가 구름과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아래였다.
"아깝네, 비연검."
은홍검과 마찬가지로 화산의 삼대 보검 중 하나인데, 그중 하나가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와룡봉추검처럼 특유의 기운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닌 만큼, 비연검을 찾으러 내려간다면 분명 개고생을 할 게 틀림없다.
'은홍검 얻었으니까 됐다.'
원래 목적인 은홍검을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마음먹었다. 저걸 찾으러 가기에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고, 내가 사라진 것에 대해 사공희도 분명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사라진 나머지 곤란한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나는 빠른 내공의 회복을 위해 하늘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하늘이여, 나에게 힘을!"
운용하는 내공심법은 천마신공.
마침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태양의 기운은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잘 흡수할 수 있다. 높은 산은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차가워지지만, 하늘의 기운과 태양의 기운 자체는 역설적으로 가장 차가운 곳에서 쉽게 얻기 마련이다.
천마신공을 운용하면 내공을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으니 본격적으로 운용하려고 했는데, 순간 내 기감에 기이한 느낌이 서렸다.
"...응?"
사아아.
사라진 줄 알았던 매화향이 코를 스쳤다. 백도의 내공 위주로 운용하다가 인제야 천마신공의 마기를 운용하다 보니, 주변에 한가득 채워진 정순한 양기에 나는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야, 떠나면서 이런 선물도 다 주다니."
검선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남기고 간 마지막 흔적일까? 주변에는 매화향이, 자하신공(紫霞神功)의 기운이 물씬 남아있었다.
화산파의 무공은 음양이기가 확실하게 나뉘어 있다. 여제자들을 위해 따로 옥녀심공이 있는 것처럼, 화산파는 남성 중심적이며 양기를 운용하는데 최적화된 무공과 내공심법이 많다.
자하신공은 전 무림을 통틀어 양기를 토납하는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심법이다.
내가 만약 화산파의 무공을 나의 근본으로 삼았다면 자하신공을 으뜸으로 꼽았을 정도다.
'자하신공의 구결은 몰라도 천마신공으로 흡수하는 건 가능하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고개를 치켜들었다. 일반적인 가부좌와는 확연히 다르지만, 자연의 풍취를 만끽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아아.
자하신공의 힘이 내 몸에 서서히 깃들었다. 원래라면 천마신공으로도 자하신공의 기운을 끌어당기지 못했겠지만, 자하신공의 양기는 주인을 닮아있었다.
- 그대가 나를 이겼으니, 마음껏 가져가시오! 하하하!
스르륵.
매화향이 빠르게 내 몸에 축적되기 시작했다. 전신에 스며들어 호쾌하게 내 단전에 자리 잡는 흐름에 천마신공이 오히려 당황하여 순간 넘칠 뻔했다.
"...후우."
하지만 천마신공은 마교 최강의 심법. 화산에 순간 밀렸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천마신공은 본격적으로 자하신공을 빨아들였다.
"음, 이걸로 역체변용술을 하기에 충분한 내공을-"
파직, 파지직.
"......."
나는 내 주변에 튀어 오르는 자색의 기운에 전신에 핏기가 가셨다. 극양지기 덕분에 상처는 금방 아물었고 싸우기 전만큼의 내공은 회복했지만, 천마신공을 운용하는 순간 나타나는 이 특이한 현상에 나는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거, 검선 이 썩을...."
파스스.
나는 내 주변에 흐르는 자색의 기운을 지울 수 없었다.
...내공을 일부러 방출하지 않는 한.
- 하하하! 무림 최고가 쓰는 화산의 검기라면, 곧 화산이 중원최고가 아닌가! 하하하하하하!!
"......."
* * *
섬서에는 화산파만 있는 게 아니다.
섬서라는 넓은 지역에서 화산파가 백도의 대표 격으로 명성을 크게 얻고 있지만, 엄연히 구파일방 중 하나의 또 다른 문파인 '종남파'가 섬서 중부에 자리를 잡고 있다.
- 종남? 그거 화산파 제자로 못 들어간 애들이 차선책으로 선택하는 곳 아니냐?
...상대적으로 종남은 화산보다 격이 떨어진다는 오명이 있다. 오죽하면 구파일방 중 하나의 자리에서 종남을 빼버려야 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종남은 세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종남파는 섬서, 특히 서안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구가하는 문파다.
- 그래도 종남 덕분에 서안에서 날뛰는 무뢰배는 없지!
종남파가 대도시 서안에 기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
지리적으로 산서나 하남에 더 가까운 섬서의 구석에 위치한 화산파와 달리, 종남파는 섬서 최대 규모 도시 서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종남산에 자리를 잡고 있다.
화산보다 높지는 않지만, 서안에서 가장 가까워 말이 전력 질주를 하면 반 시진도 안 돼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즉, 서안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종남파의 무사들이 뛰쳐나와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가 된다는 말. 종남은 지리적 이점과 불안정한 시국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자신들의 위세를 본격적으로 과시하기 시작했다.
"서안의 여러분은 안심하십시오! 서안에 날뛰는 색마가 있다면, 종남이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종남파의 대제자이자 구룡육봉 중 한 명, 인룡(忍龍) 육병군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앞에서 외쳤다.
"종남을 믿어주십시오! 섬서는 안전합니다!"
"화산보다 못하지 않아?"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저 청년, 구룡 중 한 명이 아닌가?"
"으잉? 종남에 구룡이 있었어? 몰랐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연히 구룡 중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 육병군은 울컥한 마음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 분노를 담아 더욱 악을 질렀다.
"서안은 안전합니다!! 그 어떤 색마도, 그 어떤 마인도 서안에 발을 들이질 못할 것입니다."
"흐응...그래?"
어디선가 고혹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병군은 뒤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에 검을 뽑아 들었다.
꺄아아악!!
구룡 중 한 명이 검을 뽑아 들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둘 놀라기 시작했다. 일반 민초의 앞에서 무림인이 검을 뽑는 건 크나큰 민폐였으나, 육병군은 상대-여인이 뿌리는 기세에 검을 뽑지 않을 수 없었다.
강대한 검기. 압도적인 기세. 대호(大虎)와도 같은 기상.
그리고 섬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압도적인 미모.
비록 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젊은 시절 뭇 여러 남자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미부(美婦)의 등장에 놀라 도망치려던 모두가 발걸음을 돌렸다.
"동감이야, 신인(新人). 색마가 감히 날뛰는 건 용서할 수 없지. 같은 무림인으로서."
"...누구시오!"
"나? 마검비."
여인, 마검비는 당당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마인이 당당히 서안 안으로 들어와 정체를 밝힌 것에 사람들은 기겁하면서도 궁금해했다.
"마검비라면...분명 이전의 검마! 옛 마교 십마가 섬서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어머, 얘. 옛사람 취급하니까 서운한걸. 모처럼 도우러 왔더니."
마검비는 쿡쿡 웃으며 육병군에게 다가갔다. 그는 인룡으로서 제자리에 굳건히 선 채 물러서지 않았지만, 긴장에 침이 꿀꺽 넘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절정 초입에 걸친 그로서는, 자신보다 아득한 초절정-혹은 그 이상을 뛰어넘는 마인의 기세를 이길 수 없었다. 상대의 검을 향해 가야 할 시선은 자꾸만 의복 사이로 드러난 마검비의 흉흉한 기세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후훗, 역시 내가 아직은 현역이라니까. 다들, 진정하세요. 나는 여러분을 돕기 위해 온 거니까."
마검비는 육병군의 간격에 들어가, 어깨를 두드렸다. 마치 선배가 귀여운 후배를 대하는 듯한 모습에 육군병은 긴장이 풀렸다.
"색마가 날뛴다고요? 후후, 한 때 '검마'였던 자로서, 그런 조잡한 자들이 마(魔)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걸 용서할 수 없네요."
콰득!
마검비가 검을 바닥에 꽂았다. 묵철의 검신이 땅에 꽂힌 순간, 땅이 십자로 갈라지며 주변에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감히 마를 참칭하는 자에게, 검마가 선언한다---!! 본인이 색마라고 한다면, 애꿎은 양민들을 건드리지 말고 본녀를 범하러 와라----!!"
마검비의 선언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중원의 상식을 벗어나는 외침에, 모두가 마검비의 목소리에 홀리고 말았다.
"본녀는 이곳에서 석 달을 기다리겠다! 만약 본녀를 검으로 이긴다면, 본녀를 범해도 좋다!!"
마검비는 자신의 몸을 미끼로 색마를 잡을 덫을 놓았다. 그녀의 포부에 서안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오라, 색마들이여! 연약한 여인을 겁탈하지 말고, 당당히 본녀에게 맞서서 검으로 쟁취하라!"
"와...."
앞으로 일반 양인을 건드리는 자는 색마가 아니라, 그저 약한 존재를 성적으로 핍박하는 지질한 변태에 불과하리라.
"악적을 쓰러뜨리는 데 흑백을 가릴쏘냐! 색마는, 이 마검비가 상대하겠다!!"
와아아아아!!!
손뼉을 치는 군중 속, 콧수염을 단 거한과 갓을 쓴 미청년이 마검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늦으시는데...."
두 명의 매화검수를 상대로 멋지게 승리를 따낸 뒤, 방으로 돌아온 사공희는 아무도 없는 방에 전전긍긍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해가 지고 달이 차오르기 시작한 순간까지 오지 않는 건 다소 문제가 있었다.
"언제 오시려나."
사공희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게 남들이 보면 주인이 언제 돌아올까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보인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사공희는 빨리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렸다.
"실례합니다, 태극화 님."
문밖에서 화산의 여제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매화검수가 오늘의 비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겸, 함께 식사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저 배 안 고파요. ...아니, 오늘은 쉬고 싶으니 그만 하세요."
다소 차갑게 응대했다가 곧 말을 바꿨지만, 사공희의 의지는 여제자에게 전달되었다.
"...후훗, 네, 알겠습니다. 잘 전달하겠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여제자는 기뻐하며 돌아갔다. 사공희는 오라는 사람은 안 오고 자꾸만 이상한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 것에 슬슬 화가 치밀었다.
끼이익.
창문이 열렸다. 문이 아닌 창문으로 들어올 사람은 단 한 명.
스승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제자라고 불러야 할지는 그가 말하는 것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사공희는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늦어서 미안하다."
"......어?"
"...역시 이상하냐?"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닌, 미소년도 아닌, 마음을 설레게 하는 훤칠한 미청년으로 훌쩍 자란 모습에 사공희는 깜짝 놀랐다.
"이번에는 누구로 변하신 거예요?"
"......변한 게 아니라, 성장해버렸다. 에이, 설명은 나중에."
그는, 비천색마는 진심으로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왔다.
"쉬고 싶구나. 침대에 누워라."
"네, 네."
사공희는 그의 말대로 침대에 반듯하게 누웠다. 그는 사공희의 옷을 곧장 좌우로 열어젖힌 뒤,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사, 상공?"
그는 잠들었다. 사공희는 눈을 좌우로 굴리며, 자신의 몸 위에 포개듯 쓰러진 그를 어찌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으, 으으...!"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깨우면 안 되는데. 누가 들어오면 어쩌지. 덮칠까? 어디서 이렇게 힘을 많이 쓰고 오셨나. 온갖 생각이 사공희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될 대로 되라지. 사공희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든 주인을 꼭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깊게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으, 으으."
...하필 양물의 위치가 그곳에 떡하니 올려져 있지만 않았더라면.
"깨, 깨우면 안 되는데...!!"
점점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사공희는 혼란에 빠졌다.
[작품후기]
자하신공 특 - 멋있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