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57화 (15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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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제일검

서로 전력을 끌어올린 시점부터, 이미 허초는 무의미해졌다.

모든 검격에 살의가 깃들어있다. 검 끝에서 매화향이 피어오르기도 전에, 이미 검선은 검을 당겨 다른 곳을 찔렀다.

머리, 가슴, 허벅지, 팔, 다리.

눈 한 번 깜빡였다가 뜨면 동시에 다섯 곳을 찌르고 들어온다. 허초라고 생각하기에는 공격이 절대 얕지 않다.

검 하나하나에 살의가 깃들어있다. 상처를 조금이라도 입는다면, 분명 상처가 난 곳을 집요하게 노릴 것이다.

쾌검(快劍).

화산파라고 한들 쾌검이 없는 게 아니다. 빠르게 찌르고 들어오는 쾌검의 비에 나는 방어에 전념했다.

"이게 무슨 만천화우도 아니고!"

"하하! 매화만개라고 불러주실까!"

서걱, 서걱!

빙백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린 검으로 주요 급소를 보호한다. 허벅지나 팔과 같은 부위는 호신강기를 둘러 검을 막아낸다.

"큭!"

가열차게 공격을 이어나가며 신이 났지만, 검선은 자신의 공격이 연이어 통하지 않는 것에 침음성을 흘렸다.

급소는 내가 검을 맞대어 튕기며 철저히 보호하고 있고, 급소가 아닌 곳은 빙백신공의 호신강기로 튕겨냈다.

마치 얼음의 갑옷을 입은 것처럼, 검선은 호신강기를 뚫어내지 못했다.

카앙, 카앙!

그러나 착실하게 깎아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 있는 얼음 바위가 되었고, 검선은 칼 한 자루로 바위를 깎고 자르는 조각가가 되었다.

"언제까지 막기만 할 셈인가!"

"막다 보면 이기는 싸움도 있는 법이지."

조급할 필요가 없다. 놈은 나이만 2갑자를 훌쩍 넘긴 사람이고, 나는 아직 파릇파릇한 나이다.

몸에 쌓여있는 내공의 수위가 비슷하다면, 결국 우리의 비무는 체력전이나 지구전으로 흘러가기 마련.

"좀 더, 좀 더 다른 무공을 써보시게!"

검선은 시간이 끌리면 자신이 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검을 휘두르는 데 있어서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보여줘야 하겠군!"

"...!!"

칠절매화검.

매화검수만이 익힌다는 화산파의 절기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나를 상대로 본격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려고 하는지, 자하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막기만 한다면, 한 곳만 계속 공격해서 뚫어내면 되는 법이지."

카앙!

자색의 궤적이 내 심장을 노렸다. 나는 희게 물든 은홍검을 휘둘러 검을 튕겨냈다.

카앙, 카앙!

다시금 쾌검이 내 심장을 찌르고 들어왔다. 검로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검끝은 똑같이 심장을 노렸다.

명치를 경유하여 찌르기도 하고, 옆구리에서 위로 솟구치듯 찌르기도 하고, 전방에서 검을 찌르는 척하면서 등 뒤로 돌아 뒤에서 찌르려고 했다.

검선은 집요하리만큼 심장을 노렸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있지만, 나를 내가 만든 얼음성에서 스스로 뛰쳐나오게끔 만들려는 수였다.

"매영난세(梅影亂世)...!"

"하하, 아는구려!"

검기 끝에서 터져 나온 매화의 그림자가 지기 전에 새로운 매화가 피어올랐다.

칠절매화검중에서도 극강의 쾌검을 자랑하는 검기에 내 주변은 매화향기로 가득 차올랐다.

이십사수매화검.

십사수매화검.

칠절매화검.

화산파의 하급무사들부터 매화검수에 이르기까지 쌓아 올린 그 모든 초식이, 비연검 하나에 어우러져 내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근본을 드러내지 않을 것인가!"

카앙!

빙백신공이 뚫렸다. 자색의 검기가 검강을 스친 순간, 나는 크게 몸을 돌려 매화 속에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어서, 어서 보여주시게! 그대의 진정한 힘을!"

"태극혜검에 용제검에 빙백신공까지 보여줬는데 또 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그러지 말고!!"

검선은 아이처럼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주책을 부리는 모습이 영 안타까웠지만, 나는 그의 마지막 투혼을 느낄 수 있었다.

회광반조.

"좀 더, 좀 더 즐기다 가게 해주지 않겠소?"

이미 그는 등선하기 직전이었던 몸이다. 무공을 쓰는 순간 등선이 가속화될 거라는 걸 알면서, 그는 나와 검을 맞대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천하제일인이 쓰는 천하제일검! 설령 등선에 실패한다고 해도, 내 꼭 보고 가리다!"

"이래서 별호에 선(仙) 자 들어가는 놈들은 상대하기 싫다니까."

왜 신선이라는 별호가 붙었겠는가. 속세에서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이니, 그냥 산에 처박혀 등선이나 준비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신검합일."

"!!"

내가 은홍검을 수직으로 세우자, 검선 또한 검을 옆으로 세우며 모든 기세를 끌어올렸다.

은홍검과 내가 하나가 되었듯이, 검선 또한 비연검과 하나가 되었다.

"일격에 끝낸다."

"좋소!"

종이 한 장 차이로 승패가 갈린다. 여기서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아남는다.

말이 비무지, 사실상 이건 생사를 두고 싸우는 결투다. 나는 검선을 죽여 은홍검을 가져갈 것이고, 검선은 나를 죽여 진정한 검선으로서 등선하게 되리라.

만약 검선이 내게 죽는다면, 그는 진정한 등선-우화등선이 아닌 인간 세계를 등지고 그냥 죽게 되는 의미로서 등선하게 되리라.

"화산의 근본을 똑똑히 보시오."

사라락.

주변에 매화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나와 검선의 검기로 초토화된 봉우리에 매화꽃이 흐드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작 내공의 방출일 뿐인데, 이미 검선의 검기는 현실에 침식할 정도로 강대했다. 자하신공은 우리가 싸우는 비무장을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쌓인 화단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전신에 배어드는 매화향에 몸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향기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검기였다.

자하신공의 기운이 내 주변을 스칠 때마다, 내 호신강기는 점차 자하신공의 자주빛 기운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피가 튀듯, 혈화가 피어나듯, 내 곁을 맴도는 매화향이 나를 좀 먹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허상이다. 이 모든 것이 환검이다.

허초 속에 숨어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주변 전체를 허상으로 만들어 내 감각을 속인다. 언제 어디서 검선의 검이 찔러들어올지 모르게 되어버린 일촉즉발의 상황.

사락.

나는 바닥에 핀 매화를 가볍게 짖이기며 하체에 내공을 실었다. 가벼워진 몸으로 뛰어오른 다음, 흩날리는 매화꽃잎을 밟아 한 번 더 위로 뛰어올랐다.

사라락-

매화꽃잎이 나를 붙잡으려 매섭게 쇄도했다. 자하신공의 기운이 나를 지상에 붙잡으려고 빛처럼 내 다리를 찌르려 했다. 나는 그걸 아래로 검을 휘둘러, 더욱 높이 뛰어오르는 것으로 공간을 벗어났다.

자하신공이 펼쳐진 공간을 뛰어올라, 매화꽃이 피어난 화단을 벗어나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큭!"

검선의 침음성이 아래에서 울렸다. 꽃밭에 발을 디디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봉오리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꽃은 아래로 떨어지는 법."

아무리 자하신공이 극양지기의 검법이라고 한들, 그걸 무극태을검(無極太乙劍)의 힘으로 아래에서부터 검기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면 위로 치솟아 오르지 못한다.

"어지럽게 흩날려도, 결국 떨어지는 법이지."

바닥에 깔린 자하신공의 기운에서 벗어난다면, 얼마든지 환검의 영역을 빠져나와 실체를 볼 수 있다.

"하하! 그 여자와 똑같은 말을 하는구려!!"

움찔.

나는 하늘을 디디며 한 번 더 뛰어오르려다 깜짝 놀랐다. 어느새, 바닥에 짙게 깔려있던 매화가 조금씩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준비했지! 구궁반천(九宮反天)!!"

천지가 뒤집혔다. 아래에 깔린 매화가 공중에 뛰어오른 나를 향해 용솟음치듯 쇄도하기 시작했다.

"큭?!"

자하신공의 기운에 숨어, 비연검이 내 목을 그었다. 조금만 늦게 눈치를 챘어도 목에 비연검이 꽂혀 피를 토했을 것이다.

"어딜!"

나는 발에 힘을 주고 검선의 명치를 밟았다. 매화향에 숨어있던 검끝을 밟는 대신, 하늘로 치솟으며 매화향 속에 숨어있던 검선의 몸을 밟고 한 번 더 높게 뛰어올랐다.

검선이 뛰쳐 오른 덕분에, 그리고 내가 충분히 높이 날아오른 덕분에.

"드디어 벗어났군."

검선이 펼쳐놓은 매화밭의 신기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제단은 화산파 무공 특유의 검기로 초토화되어 있었고, 무극태을검으로 모든 검기를 하늘로 솟구치게 하여 반천(反天)을 노린 검선은 비연검을 회수하며 제단 위에 착지했다.

"하하, 그대가 한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리다!"

철컥!

검선은 검으로 네 방위를 그리며 나를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자신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펼친 검기의 중심에 선 그는 하늘에 떠 있는 내게 모든 검기를 집중했다.

"떨어지는 건, 꽃잎만 있는 게 아니지!"

사람도, 결국 떨어지기 마련.

경공술로 아무리 검기를 밟고 뛰어오른다고 한들, 결국 인간인 이상 자연의 법칙에 따라 꽃처럼 떨어지기 마련이다.

"오지 않으면, 내가 한 번 더 하늘을 뒤집겠소!"

바닥에 흩뿌려진 자하신공의 기운이 모두 검선의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눈에 번들거리는 살의에, 그가 무슨 공격을 감행할지 직감이 들었다.

이지선다.

심장이냐, 아니면 상처 입은 목이냐.

나를 향해 흔들리는 검 끝은 두 급소를 동시에 노리고 있었다. 맑게 피어오른 매화 꽃잎에 숨어, 하나는 분명히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

막으면 진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역공을 펼치는 수밖에.

사락.

나는 한 발로 구름을 밟았다.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치고 떠오르듯 가볍게 뛰어올라 검선이 내심 준비하던 호흡을 흐트러지게 했다. 구름을 딛고, 땅이 잡아당기는 힘에 순응하기 전 몸을 거꾸로 뒤집었다.

"!!!"

검선의 눈이 떨렸다. 그는 내가 움직이는 자세만으로 내가 펼치는 무공을, 그리고 내 원류(原流)를 알아챘다.

"그대는-"

"비천."

나는 하늘을 박차고 아래로 솟구쳤다. 검선이 휘두르는 검보다 더 빠르게.

"큭...!"

검선 또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나는 몸이 뒤집힌 상태에서 허공을 밟으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화산이, 천하제일이다---!!"

검선의 검이 두 갈래로 흩어졌다. 아무리 몸을 비틀어 움직여도 그의 검 끝은 하나는 내 목을, 하나는 내 심장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천하제일?"

찰나의 순간.

나는 흐드러진 매화 속에서 실체를 찾았다. 아무리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거나 따르려고 한들, '하나의 검으로 동시에 다른 곳에 찌른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목을 찌르고 심장을 찌르든, 심장을 찌르고 목을 찌르든, 결국 검을 찔렀다가 빛처럼 검을 회수해 다시 검을 찌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서걱!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하늘을 밟아 몸을 빙글 돌렸다. 한 번 베였던 목에 한 치 가량 깊숙이 비연검이 스치듯 날아올랐다.

그리고 검선이 검을 당겨 다시 심장을 찌르기 직전, 매화꽃이 심장에 닿기 직전!

"천하제일(天下第一)은 그대가 하시오. 하지만."

서걱.

"하늘은, 나의 것이오."

은홍검을 내리그었다. 은빛에 푸른 궤적이 실려, 자하신공의 자줏빛 기운을 통째로 갈라버렸다.

"커, 허억...!"

매화꽃에 붉은 피가 튀었다. 검선의 검과 함께 팔을 자른 나는 검선에게서 튄 혈화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첨벙---!!

나는 매화향이 짙게 서린 샘에 처박혔다. 차가운 기운이 내 전신을 가득 채웠고,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털썩.

검선은 제단 위에 착지했다. 나처럼 꼴사납게 물에 처박히는 일 없이, 아주 우아한 모습으로 제단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화산은 곧 죽어도 멋을 부린다고 하더니. 왜 피하지 않았지? 피했다면, 이 꼴이 된 나를 이길 수 있었을 텐데."

검선은 내 검을 피할 수 있었다. 회수한 검을 찌르지 않고, 억지로라도 몸을 비틀었으면 팔 한쪽을 잃지 않고 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크흐흐, 피해?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나는...화산이니까, 커흑."

목에 칼이 스쳤지만 치명상은 피한 나와 달리, 검선은 비연검을 잃었다. 비연검을 쥔 손은 어깨부터 통째로 잘려 나가 산봉우리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허허, 아쉽구나. 화산은 여전히 그자를 넘지 못한단 말인가."

"인간이 검신(劍神)을 이길 수는 없지."

신검이 아닌, 검신. 나는 처참하게 망가진 돌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지막 순간 억지로 허공을 디딘 '아홉 번째 걸음' 덕분에, 내 발목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이름을 말해주시오. 저승에 가서, 내 그대에게 죽었다고 말하리다."

"비천색마."

"...크흐, 그것참."

검선은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젊었을 때...붙어봤더라면...."

털썩. 검선은 쓰러졌다. 제단은 그의 팔에서 쏟아진 피로 가득 물들었고, 나는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전신에 깊은 탈력감이 든다.

오랜만에 순수한 '검법'만 사용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내공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

"하아, 하아, 하아."

어느새 하늘은 석양이 지고 있었고, 시간은 벌써 저녁이 되었다.

분명 정오가 되기 전에 올라왔던 거로 기억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나버린 걸까.

"...진짜 뒤질 뻔했네."

목덜미가 따갑다. 상처로 인해 욱신거리는 게 더럽게 아프다.

마지막 순간.

검선이 내 검로를 읽고도 정면에서 검을 부딪치려고 하지 않았다면, 분명 죽는 건 나였으리라. 목을 베인 그 순간 이미 내 발목은 부러져, 나려타곤이든 뭐든 내 검을 피한 뒤에 나를 공격했다면 나는 공격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쉽게 이기는 길이 있었지만, 어렵게 이기고 말았다.

천마신공에 독고구검을 얹어 신검합일을 이루었다면, 적어도 삼백합 안에 수월하게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검선의 도발에 응했고, 오직 검법만으로 이겨내려고 했다.

그 때문일까.

"...노인네, 젊었을 때 아주 화려하게 날뛰셨겠어."

설령 검에 죽더라도, 검선은 마지막 순간까지 생사를 건 '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서로의 절기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걸 알면서도 자신의 검로를 바꾸지 않았다.

"썩을. 여자였으면 반할 뻔했어."

화산, 이름 없는 봉오리.

"이게 화산이구나."

나는 내 곁에 따스하게 남아있는 매화 향기에 그만 취해버리고 말았다.

[작품후기]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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