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17화 (11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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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구검

정자 사태.

유설라.

독고연.

그리고 황보혜지.

진정한 '이봉결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진을 두고,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다.

구파일방 중 아미파간의 대결.

팔대세가 중 두 세가의 대결.

- 이건 이거대로 좋네!

구파일방은 아미파의 유설라가 남궁유린을 이긴 것으로 자존심을 챙겼다.

팔대세가는 독고연이 화산파의 매화검수를 이긴 것으로 자존심을 챙겼다.

서로 한 번 주고받았으니, 정파끼리 서로 대결이 과열되는 것은 사양이다. 구파일방과 팔대세가 사이의 대결이 반복되도록 하늘은 대진표를 구성했지만, 운명은 백도의 내분을 원치 않았다.

- 남궁유린이 이겼으면 구파일방이 면을 들지 못하게 되었겠지.

- 그럼 분명 백도제일화를 가리자고 태극화를 달달 볶을 게 아닌가?

- 그건 안 되지! 남궁가에게는 미안하지만, 남궁 소저의 패배가 전화위복이 되었군그래. 껄껄!

우승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남궁유린의 패배는 충격적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과열되었던 이들의 머리를 식혔다.

- 뇌절일섬이라니, 심했지.

- 다들 미쳐있었던 게야.

- 암, 이 비무 대회는 서로 죽이기 위한 게 아니야!

비무란 서로의 무공을 증명하는 자리. 피가 튀고 서로에 대한 증오가 난무하는 건 이봉결정전의 취지에도, 용봉지회의 취지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훈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도 존재하기 마련.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공간에 모인 두 흑의인은 4강전의 대진표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고 있소."

"빙마가 남궁유린과 8강전에 걸리는 건 예상외였지만, 다행히 빙마는 이겼소. 상대인 정자 사태는 빙마보다 훨씬 약하니, 무난히 독고연과 비무장에 오를 수 있을 것이오."

"빙마가 다친 것도 예상외였지."

"...남궁유린이 예상외로 강해졌다고 생각하지. 용봉지회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소."

똑, 똑. 붉은 피가 남궁유린의 이름을 적셨다. 두 흑의인은 붉게 번지기 시작하는 종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유린도 후보에 넣도록 합시다. 열패감에 찌든 여자만큼 세뇌하기 좋은 것도 없지."

"암. 이미 도마에게 더럽혀진 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 더더욱 좋지. 그분께서 좋아하시겠어. 흐흐."

두 흑의인은 붉게 묽든 남궁유린의 이름표에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 피를 떨어뜨렸다.

"다른 후보는 더 없나?"

"남은 자 중에는 없소. 매화검수야 워낙 고결해서 패배도 시원하게 받아들였고, 떨어진 자 중에도 딱히 '자질'을 보이는 이들은 없었소."

"음...."

흑의인은 대진표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가장 먼저 둘의 눈이 간 곳은 빙마 유설라의 상대, 정자 사태.

"이 아이는 건드리지 맙시다."

"좋소. 사천의 미친놈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니."

밖으로는 다들 쉬쉬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정자 사태는 이미 누군가에게 처녀를 잃었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파다했다. 여자 무인이 한 번 납치당하고 살아 돌아온 이상, 악질적인 소문이 퍼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청성파를 박살 내고 여제자 하나를 납치한 사천의 검제가 정자 사태를 건드린 것에 분노하여 무덤을 박차고 튀어나온다면?

"음.... 정자 사태, 나이도 제법 괜찮고, 그분께서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데? 아미봉의 먼 친척이기는 하지만, 딸이라고 의심될 정도로 닮지 않았는가?"

"미친개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광견은 자기가 먹다 버린 뼈에 잡견이 달라붙으면 으르렁대며 잡견들을 물어 죽일 놈이오."

"자기가 버려놓고도?"

"그러니까 미친개지."

정자 사태, 보류. 결국 남은 건 독고연, 그리고 황보혜지 뿐이었다.

"황보세가에 대한 공작은 잘 되고 있지?"

"물론. 팽가의 실패를 초석 삼아 모든 변수는 차단했소. 본인이 원치 않는다는 걸 제외하면, 세가에서도 바라는 완벽한 혼인이지."

뚝. 흑의인들은 황보혜지의 이름을 피로 적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이름, 독고연.

"빙마의 성공을 기원하며, 혈세."

"창천이사, 혈천당립."

""장강이 핏빛으로 물들지어다.""

독고연의 이름표는 이미 처음부터 붉게 물들어있었다.

* * *

와아아아아-----!!

함성이 울려 퍼진다. 독고연은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오랜만이에요, 독고 소저! 건강한 모습을 보니 보기 좋네요!"

"네, 그날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 같아요. 오랜만이에요, 혜지."

머리를 말총으로 묶은 장신의 미녀, 생기 넘치는 황보혜지는 독고연의 말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감격했다.

"독고 소저...! 아직도 저를 혜지라고 불러주는군요!"

"혜지는 혜지니까요. 저도 연이라고 불러주세요."

"연...!"

와락. 황보혜지는 독고연을 끌어안았다. 그날, 독고연이 독에 쓰러지기 전까지 7살 때부터 상당히 친한 관계였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무붕 의원께서 당신을 치료해주신다고 들었는데, 차도가 있는 모양이네요!"

"네. 아직 완치는 아니지만요."

"아.... 혹시 몸을 움직이는데 불편한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독고연은 슬며시 웃으며 검집 위에 손을 올렸다. 틈을 파고들 수 없는 검기에 황보혜지는 침을 꿀꺽 삼키며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강하네요. 제가 감히 이길 수 없을 만큼."

"아."

우울해하는 모습에 독고연은 실수했다는 걸 직감했다. 건강해진 모습을 과시하고 싶었을 뿐인데, 표현 방식이 잘못되었다.

"......."

황보혜지의 무공 수위는 일류. 사자가 토끼의 앞에서 이빨과 손톱을 과시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황보혜지는 잠시 고개를 돌리며 눈 근처를 소매로 닦은 뒤, 두 팔 벌리며 활짝 웃었다.

"미리 얘기할게요. 졌어요! 정말 강해지셨네요, 연! 부러워요. 비결이 뭐예요?"

"그, 그러니까...."

"재능도 원래 엄청 뛰어난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강할 줄은! 의원님께 약을 받은 게 아니라 어디 뭐 몸에 좋은 영약이라도 받으셨어요?"

"힉!"

독고연은 어깨를 움츠리며 놀랐다. 과한 반응에 황보혜지는 자신도 움찔거렸지만, 웃으며 독고연의 손을 붙잡았다.

"진짜예요? 와, 너무한다. 자기만 무붕 의원께서 주시는 좋은 거 먹고! 연, 저한테 의원님 소개해주시면 안 돼요? 의원님께서 달여주시는 백수오가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배, 백수오...."

황보혜지의 적나라한 표현에 독고연은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길고 굵직한 백수오를 뜨겁게 달여서...히힛. 네, 네? 연, 부탁 좀 드릴게요!"

"...안 돼요."

독고연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황보혜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의, 의원님의 백수오는 제 거예요."

"......흥. 치사해. 13년만에 만났는데 연이 변했어요. 좋아요, 제가 이기면 의원님을 꼭 소개해주시는 거예요? 아, 아니다. 연이 칼에 다치기라도 하면 무붕 의원님 신세를 지면 되겠구나!"

"!!"

독고연은 사색이 되었다.

"아, 으, 아무리 혜지라도, 의원님은...!"

황보혜지는 하나하나 격한 반응을 보이는 독고연의 모습에 활짝 웃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독고연의 손을 붙잡았다.

"연. 의원님이 좋으신 거죠?"

"읏...!"

"사랑하는 소녀가 다 그렇답니다. 저도 그랬고."

황보혜지의 눈에 순간 우울한 기색이 스쳤다.

"연은 그러지 마요. 저보다 훨씬 더 강하잖아요. 13년 가까이 세가 안에서 지냈으니까, 이제 자유를 누리셔도 된답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과 서로 좋아할 자유도 없으면, 삶이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아...."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맞잡은 손에서 전해져오는 진한 감각에 독고연은 가슴이 울컥했다. 각혈이 아닌,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하하, 내가 뭐래. 연, 부끄러우니까 잊어요. 알겠죠?"

"......명심할게요. 혜지의 말."

"아니, 내가 말한 거 말고! 잊으라는 걸 명심하란 말이에요!"

"후후."

독고연은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고, 황보혜지는 생기가 넘치는 독고연의 모습에 자신도 활짝 웃었다.

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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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군중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서로 웃기만 하던 두 여인은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황보세가!! 벽력신권!! 황보----혜지------!!

혜지! 혜지! 혜지!!

"저부터네요. 먼저 갈게요."

황보혜지는 허리춤에 건 권갑을 집어 들었다. 손등에 묵철을 덧댄 권갑에는 수많은 날붙이가 다녀간 흔적이 역력했다.

"......."

검사와 권사.

힘 조절을 하지 않으면, 분명 권사가 크게 다칠 가능성이 높다.

"우, 우으.... 상처 없이 어떻게 이기지...."

독고연은 울상을 지으며 비무장에 올랐다.

"그, 그래도."

독고연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무붕이 자신의 땀을 닦아주기 위해 사용했던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습, 하, 습, 하.

약재 냄새. 그리고 약재 속에 가려진 듯한 색향.

"...청심환이 이런 거구나."

심신이 안정된 독고연은 차분하게 비무장을 향해 걸었다.

와아아아아---------!!

* * *

4강전이자 이봉결정전이 시작되기 전, 나는 사공희와 이시아를 따로 불렀다. 미혼표식구궁진의 창고에는 유설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연 소저가 치료를 받기로 마음먹었소."

내 말에 세 여자는 복잡한 얼굴로 웃었다. 비천색마를 상대로 야전을 이겨낼 동료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지만, 내 곁에 있을 여인이 늘어나는 건 마냥 기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공, 그러면 상공의 정체도 드러내실 건가요?"

"그래. 그러기 위해 이제부터 계획을 세워야지."

언제까지 무붕 의원인 척 정체를 숨기고 살 수는 없는 법.

사공희, 이시아, 그리고 독고연 셋과 함께 정사를 논하는 그 날을 위해, 나는 독고연에게 나의 정체를 여실없이 드러내야만 했다.

비천색마로서의 자신을.

"저, 정체를 드러내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무림맹주의 딸인데."

"딱히 문제없을 걸? 정체를 드러낸다고 말 한 시점부터, 이미 비천은 독고연에게 정체를 밝혀도 문제없다고 판단한 거야."

역시 이시아. 흘러가는 말에도 내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다만 '어떻게' 독고연을 납득시킬 거냐 이거지. 그냥 십팔음뇌절맥을 치료해서 끝나는 게 아니잖아. 우리가 계속 여기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맞아요. 아무리 상공의 방중술이 대단하다고 한들, 거짓으로 쌓은 신뢰는 진실이 드러나면 무너지기 마련이에요."

"그건 걱정마라. 다 방법이 있다."

"...상공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믿을 뿐이에요."

사공희는 내게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내가 만약 이곳에서 살겁을 일으키고 도망치자고 해도, 사공희는 태극화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무당을 배신해 나를 따르리라.

"중요한 건 그거요. 독고연이 이 장원을 벗어나게 하는 것. 독고자영은 분명 딸을 감싸고 돌 것이오. 병은 나았지만 혹시나 모른다는 핑계로, 그녀를 가두려고 하겠지. 그리고 분명 독고연을 독고 세가의 중흥을 위한 패로 써먹을 것이오."

"네? 그럴 리가요. 그렇게 딸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다고요?"

"그래. 아무리 맹주라도 딸을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써먹겠어?"

"...남궁패."

유설라의 말에 두 여자는 표정을 굳혔다. 아무 부담 없이 빙백신공을 일으키며 은발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유설라는 냉철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두 분은 여기에 계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밖에는 폭룡 남궁패와 벌써 독고 소저를 이어주려고 하는 기미가 보여요. 꼭 당장이라도 약혼을 맺을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가 감돌아요. 자연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죠."

"그건 누군가의 계략이 있다는 건가요?"

"음.... 역겨운 게 안 느껴지는 걸 봐서는 그 새끼 짓은 아닌 것 같은데."

"맹에서 직접 퍼뜨린 소문일 것이다. 남궁가의 체면을 세워줘야 하거든."

독고연과 남궁패의 약혼설을 퍼뜨리는 배후가 있다면, 대공자가 아닌 무림맹일 것이다. 남궁유린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이봉이 될 것으로 확실한 독고연의 반려로 남궁패를 운운하며 분위기 반전을 유도하는 게 목적이리라.

'진짜로 진행될 수 있지.'

남궁세가의 폭룡 남궁패. 독고세가의 검봉 독고연.

객관적으로, 대외적으로 보면 확실히 선남선녀의 만남이다. 서로가 눈이 맞지 않는다고 한들, 가문에서 혼약을 맺으면 화촉을 밝혀야 하는 게 팔대세가 후계자의 운명이기도 했다.

"혼인동맹. 팔대 세가가 세력을 유지하는 기반이지."

천하제일룡과 천하제일봉. 기분은 더럽지만, 역사적으로 두 남녀가 눈을 맞거나 혼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빈번했다. 당연히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소문이다.

"후후, 편견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참새들에게 대붕의 진리를 널리 펼쳐야겠군."

나는 셋에게 내 계획을 소상히 알렸다.

대공자를 엿 먹이고, 독고연을 좁은 새장과 혼약의 올가미에서 탈출시킬 최고의 계획을.

"분탕(焚蕩)이다."

이봉결정전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작품후기]

신인! 혜지! 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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