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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원이 된 이유
나는 현재 이류만도 못한 수준의 내공을 운용하고 있다.
'내공을 숨기는 건 살수의 기본이지.'
특급 살수들의 기본은 내공을 숨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초특급 살수의 기본은 상대가 방심하도록 적당한 내공을 흘리는 것이다.
독고자영을 죽이기 위해 암왕의 내공을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 혈기 넘치는 색붕이를 죽이기 위해.
'계속 그렇게 죽어있거라, 소색마(消色魔).'
"하하! 무붕께서 설마 무공을 익히고 계실 줄이야!"
"변변찮은 호신술일 뿐입니다."
맹주는 나를 눈앞에 두고도 내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무인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설령 내공을 사용하고 있어도 의심하지 않았다.
'무림의 의원'이 어느 정도 무공을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할 리가 없다.
특히 스승인 신의가 마교에 납치당했기에 무공을 익힌다는 개연성까지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이상, 적당한 무공은 나의 정체를 숨겨주는 최고의 방패가 된다.
"용봉지회가 끝난 뒤에 사라지셔서 놀랐습니다. 그동안 사천에 계셨다지요? 혹시 소열제 쌍검 소동을 보셨습니까?"
내가 치료해주기로 선언한 시점부터 맹주는 나를 벌써 '가문의 은인'인양 존칭을 붙였다. 내가 환마같이 수염을 기른 노인네였다면 아마 그는 가마를 직접 들고 나라님을 대하듯 극존칭이라도 붙일 기세였다.
"아니요, 그때는 아미파에 들렸다 바로 서안으로 가는 바람에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검각을 넘어가고 난 다음 날 무너졌지요."
"흠...그렇습니까."
말투에 의심이 깃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검각이 무너졌으면 아마 제 시각에 허창에 도착하지 못했을 겁니다. 천만다행이지요."
"허허, 그렇군요! 혹시 인근을 지나가다가 이상한 자는 보지 못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서안과 낙양에 환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간 터라. 송구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하하, 무붕 의원님께서 두 도시를 거치며 의술을 펼치신 일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불치병은 제 전문이니까요."
역시 맹주는 내 행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다행히 '혹시 검제를 치료하셨나?'하던 의심의 눈초리는 바로 사라졌다.
"그렇지요, 허허! 지상의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 바로 신의 아니시겠습니까!"
"모든 병은 아닙니다. 아는 병만 치료할 수 있을 뿐."
"하하, 하.... 예. 부디 의원님께서 아는 병이기를 바랍니다."
맹주로서 본능적인 의심암귀는 가지고 있지만, 불치병을 가진 딸을 가진 아버지의 부정이 맹주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
"제 딸은 이 다리의 끝에 있습니다. 이쪽으로 쭉 가시면 됩니다."
"이 다리를 건너면 되는 겁니까? 조금...길군요."
다리는 단순히 열 장 정도 되는 길이가 아니었다. 장원을 둘러싸고 있는 연못은 호수라는 표현이 더 바를 정도로 넓었다.
"잘못 길을 들었다가 빠지지는 않을지."
"하하, 걱정 마십시오. 끝에는 장원이 있습니다. 안에 가셔서 여장을 푸시면 됩니다."
"...여장? 밖에 숙소를 잡아뒀습니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말만 들으면 꼭 안의 별장 안에서 지내라는 말 같았다.
"허허. 무붕께서 맹에 오신 걸 알게 된 이상, 숱한 이들이 무붕을 찾을 겁니다. 외부의 잡것...흠흠. 정체가 불분명한 이들이 날뛰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설마 저 안에서 머무르라는 말씀입니까?"
내 떨떠름한 반응에 맹주는 표정을 굳혔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에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나는 최대한 튕길 필요가 있었다.
"그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래야 내 몸값을 올릴 수 있으니까.
"저는 만인의 의원입니다. 환자가 있는 곳에 어디든 찾아가야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서 묶게 되면...."
"무붕 의원님."
쿵! 나는 무림 맹주의 행동에 당황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게 부정이라는 것인가?
"맹주가 아닌 딸 가진 아비로서 간청드립니다. 부디 제 딸의 병을 치료해주십시오. 이제 의원님밖에 없습니다."
맹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른 이들이 보지 않아서 망정이지, 누가 봤으면 내 목이 달아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 일어나주십시오!"
"무례한 부탁이라는 건압니다. 하지만 꼭 부탁드립니다. 딸아이의 곁에서 병을 치료하여 주십시오. 어떤 영약이 필요하든, 어떤 약재가 필요하든 제가 사재를 털어서라도 구해오겠습니다."
"맹주님!"
"부디! 제 딸을 치료해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나머지 한쪽 무릎까지 꿇을 기세라,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막무가내를 들어줘야 했다.
"알겠습니다. 당분간 안에서 지내며 따님을 돌보겠습니다."
내가 백기를 들고 나서야 맹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병간호를 저 혼자서 하기에는 조금 난감합니다. 아무래도 여인분이다 보니 저도 보조가 필요한데, 혹시 여자 무인이나 식솔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내가 직접 만질 수 없지 않냐는 간접적인 시위에 맹주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의원이라도 여인과 단둘이 같은 곳에 지낸다? 아이고, 망측하여라.
"아, 그거라면.... 지금 장원 안에는 현재 단 세 명밖에 없습니다. 제 딸, 그리고 무당의 태극화가 있습니다. 다행히 태극화 소저께서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예?"
이게 무슨 말인가. 안개 너머 용궁과도 같은 넓은 장원에 한 명-이 아니고 세 명밖에 없다니. 맹주는 쓰게 웃으며 호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형독에 당한 날로부터, 식솔도 하인도 모두 물렸습니다. 장원에 손님 두 분이 오기 전까지는 연이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야한 여자가 누군지 아느냐. 바로 자취하는 여자다.
불끈.
나는 아랫도리에 몰리는 혈기를 강제로 억눌렀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지만 괜히 직접 들으니 아랫도리의 혈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럼 아가씨 혼자서 모든 가사를 다 한다는 말씀입니까?"
"예. 다행히 연이가 집안일을 좀 할 줄 압니다. 넓은 장원을 홀로 관리하고 있지요. 사실상 제 가문의 안주인입니다."
불끈불끈. 더는 들었다가는 내공의 운용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나는 맹주가 펼쳐놓은 마지막 함정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맹주님, 나머지 한 명은 또 누구입니까? 제가 밖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건 분명-"
"저예요, 오랜만입니다."
다리 너머에서 흑발의 미소녀가 단아한 한복을 차려입고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녀를 보고 표정을 굳히며,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용봉지회에서 뵙고 다시 인사드립니다. 마교의 소공녀입니다."
"...역시 소공녀가."
"의원님, 그녀 또한 밖에 있으면 여러모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의원님께는 죄송합니다만, 함께 지내주십시오."
"끙...."
독고연을 치료하기 위해 장원에 기거하는데 흑백 무림 제일화 둘과 함께 지내라? 맹주는 나를 도대체 어떤 존재로 보고 있을까.
"......맹주님, 제 스승과 마교의 관계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압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그 어떤 마인도 이곳에 침입할 수 없을 겁니다. 제 맹주직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의원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천마는 예고도 없이 누군가를 납치한다거나 그런 알량한 짓을 하지 않습니다."
"끙...."
신의의 제자로서 마교의 존재에게 납치당하는 것을 경계하는 건 당연지사. 나는 마지막 함정을 무사히 빠져나와, 모든 과정을 밟았다. 마지막은 단 한마디만 하면 끝.
"맹주님을 믿습니다."
"오오...!!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무붕."
"여기서부터는 제가 인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맹주님, 바쁘신데 어서 가시지요."
"소공녀의 호의에 감사하오. 그럼...연이를 잘 부탁합니다."
쿵. 맹주는 포권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나 또한 그에 맞절하며 예를 표했다.
서로가 서로를 속내를 감춘 채, 우리는 등을 돌렸다.
- 계획대로.
한쪽 입꼬리가 씰룩 올라가려는 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맹주 또한 그러리라. 언뜻 보기에는 이득교환인 것 처럼 보이지만....
'내가 더 이득이지.'
나는 독고연을 가질 테니까.
* * *
까악, 까악.
독수리 같은 까마귀가 날개를 접고 창가에 도착했다. 한창 안에서 여인을 상대로 허리를 움직이던 남자는 까마귀가 도착하자마자 양물을 빼내며 까마귀에게 다가갔다.
"아아, 자기. 나 가기 직전이었는데.... 헉, 도, 독수리?!"
"닥쳐라."
남자가 기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안광에 기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입이 붙잡히고 말았다.
"읍, 으으읍!!"
천마신공으로 이루어진 검붉은 거대한 손에 입이 막힌 여인은 아등바등 떨며 괴로워했다.
"어디보자...독고연에게 심어놓은 금제가 슬슬 발동될 때가 되기는 했는데."
남자는 여인이 괴로워하든 말든 독수리의 발목에 묶인 편지를 한 손으로 풀어 펼쳤다.
"음.... 이봉결정전에 이시아 그것이 나타났다? 비천삼마도 없이?"
남자, 대공자는 종이를 손으로 구겨버렸다.
"염마가 있던 곳에서도 나타났더니, 이제는 빙마가 있는 곳으로 와? 이 년, 내 계획을 망가뜨리려고 작정했군."
대공자는 실실 웃으며 손을 움켜쥐었다. 캑캑거리던 여인은 손발을 부르르 떨다가 픽 움직임이 멈췄다.
"어떤 무공이 좋을까.... 그래, 아미파가 좋겠군."
방금 전까지 살을 섞던 기녀를 죽인 대공자는 봇짐 안에서 빈 책자를 하나 꺼내 붓을 들었다.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글은 순식간에 한 편의 꽉 찬 책으로 완성되었고, 대공자는 서책을 보자기에 감싸 까마귀의 발목에 묶었다.
"빙마에게 전해라. 한상옥녀검(寒翔鈺女劍)의 비급이다. 10년 전 감숙성에서 죽은 아미파 고수의 무공이니, '멸보사태'로부터 진전을 이어받았다고 해라. 내가 간살하고 치운 년이니 뒷 일은 걱정하지 말고."
까마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날아올랐다.
"독고연에게 걸린 금제가 완성되면...흐흐, 이런 년으로 만족하지 않아도 되겠지."
남자는 자신이 죽인 기녀를 향해 손을 뻗었고, 죽어있던 여인이 갑자기 까무러치며 몸서리를 쳤다.
"헉, 허억, 허억...!!"
"미, 미안해, 괜찮아?"
청년은 표정을 싹 바꾸고 걱정어린 눈빛으로 여인을 다독였다. 한동안 눈을 깜빡이던 여인은 겁먹은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가 청년을 향해 물었다.
"나...어떻게 된 거야?"
"그, 우리 아가가 말한 대로 목 졸라 달라고 해서 졸랐는데...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아. 미안해."
"아, 아니야. 기절...한 내 잘못이지."
여인은 청년을 끌어안으며 웃었다. 청년과 함께라면 세상이 어찌 되든 관계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사랑해, 주지(柱指)."
"나도."
청년, 대공자 주지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여인을 안았다.
* * *
잠시 뒤.
맹주가 급히 뒤돌아 다리를 떠난 사이, 나는 소공녀-이시아와 적당한 거리를 벌리고 다리를 걸었다.
"맹주가 참으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군. 한창 바쁠 때 나한테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니 말이야."
"딸의 병을 치료할 유일한 길이니까. 그나저나 당신도 대단하네. 맹주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사기라니? 내가 독고연의 병을 모르고 이곳에 찾아왔을 리가 없지 않소. 치료법도 알고 있소."
안휘에서 본격적으로 떠날 채비를 마친 날, 굳이 신의의 제자라고 사칭한 이유는 독고연과 접촉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또 미혼향이라도 쓰려고?"
"끙, 알고 있었군.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
독고연에게 거짓말을 통하지 않는다. 설령 거짓을 말해도 그녀가 독고자영에게 모든 일에 대해 시시콜콜 말하게 될 것이므로, 진짜 치료법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지."
"그래서 어떻게 치료할 거냐니까?"
"정면돌파요."
치료법은 단 하나뿐이다. 마침 환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다리 맞은 편, 나를 맞이하러 나온 독고연은 나를 보고 활짝 웃었고,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선언했다.
"십팔음뇌절맥(十八陰惱絶脈)"
"네...?"
"그대가 앓는 병의 이름이오. 구음절맥의 두 배나 되는 고통을 수반하며, 치료하지 않으면 병이 걸린 해로부터 10년이나 8년이 지나는 해에 죽기 때문에 십팔음뇌절맥이라고 부르지."
"......."
만나자마자 병의 이름을 얘기한 나에 대해 독고연은 표정을 굳히며 경계했다. 하지만 무림맹 내부의 독고 세가 별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내 신원은 증명되었다.
"정말...신의의 제자 분이 맞으십니까?"
"의원, 무붕이라고 하오. 나에 대한 신원은 두 소저께서 인정해주실 거요."
사공희와 이시아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 아닌 흑백제일화가 내 신원을 보증하고 나서니, 독고연은 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군요.... 그럼 저를 치료하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 단, 그대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도록 하겠소."
나는 나보다 훨씬 체구가 낮은 독고연에게 무릎을 낮춰 시선을 맞췄다.
"이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녀가 내 말을 듣고 뺨을 때릴 수 있게.
독고구검을 익힌 자를 상대하는 방법 또한 단 하나. 어쭙잖은 방어나 환검은 통하지 않는다. 공격 일변도의 독고구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강공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부터 필살기를 날렸다.
"나와 성교를 하는 것이오."
정면돌파다.
[작품후기]
연참을 하라니 이 독자들은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