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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원이 된 이유
사공희, 이시아.
언젠가는 서로 언니 동생-누가 과연 동생이 될지 모르겠지만-하게 될 두 여자가 만났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잠깐 인사를 하기 위해 마주했을 뿐, 그 전에 먼저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사공희가 별장 안으로 들어간 이상, 우리도 별장 안으로 들어올 필요가 있었다.
"먼저 가 있어. 우리도 곧 들어갈게."
"기다리고 있겠어요, 상공."
사공희는 다리 너머로 마저 떠났다. 무림맹주가 일부러 그녀를 별장 안에 숨겨둔 만큼, 우리가 다리 너머로 '정식'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금 귀찮지만 중간 과정이 필요했다.
"갑시다, 소공녀."
나는 다시 이시아를 등에 업고 장원을 빠져나왔다. 주변에 펼쳐진 결계에 걸리지 않고 다리를 드나드는 방법은 단 하나, 허공답보.
"업을 때마다 엉덩이 주무르는 건 그만하지 않을래?"
"좋으면서."
"죽어, 진짜."
여자와 내공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나는 신선처럼 하늘을 걸어 장원을 빠져나왔고, 아예 허창까지 빠져나와 북문 너머까지 달렸다. 인적이 드문 숲에 착지한 나는 미리 숨겨둔 나무상자에서 옷을 꺼내 들었다.
"준비됐소?"
"물론."
이시아는 검은 장포를 집어던졌고, 안에는 내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옷을 입었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적당히 뒤섞인 의복은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복색이었고, 지나가는 모두가 신기해서 한 번은 꼭 보고 지나갈 법한 의복이었다.
"우, 우으...."
하지만 그녀는 내게 알몸을 보일 때보다 훨씬 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손은 자꾸만 치맛자락 끝을 붙잡고 있었고, 어색한 복장에 자꾸만 다리를 후들거렸다.
"나, 나 진짜 너 믿고 이거 입는 거다?"
"물론.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것이오. 누가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릴 수 있겠소?"
"이, 이러고 가는데 안 건드린다고?"
"당연하지. 너무 아름다워서 감히 인간 따위가 건드릴 생각을 하겠는가? 하하하!"
나는 이시아의 하반신을 마음껏 만끽했다. 상반신에 자신감이 없는 그녀를 위해, 길쭉하고 훤칠한 체구를 살려 나는 그녀의 하반신에 아무것도 입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정정.
- 옆트임으로 다리 다 드러내고 다니는 애들도 있는데, 치마 짧게 하는 건 음탕하다니 이상하지 않냐? 그러니까 우리 혈교의 일반 제복 중에 여자 교인들은 치마를 무릎 위 한뼘까지 내려오게 한다.
나는 마교 소공녀에게 혈교 간부급 여고수들이 입는 치마를 입혔다.
"짧기는 짧군."
치마를 허벅지 중간까지 닿도록 하였으며, 다리를 쭉 뻗는 것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단단히 조이게 했다. 안에는 검은 속바지를 입혀놓았지만, 역시 맨다리를 남들 앞에 훤히 드러내는 건 무가의 여인이라고 한들 범상찮은 행위기는 했다.
"남들의 이목을 끄는데 충분할 거요."
실제로 혈교 여간부들이 모여 소림을 박살 내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 박살 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냥 변태잖아. 치녀라고 소문날 거야. 으으...."
"괜찮소. 소천마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오."
"그건 또 무슨 의미야?"
얼굴이 붉어진 이시아는 검은 장갑을 잡아당기며 나를 흘겼다.
"그건 내가 음란한 탕녀라는 거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일단 보기에는 그렇긴 하지. 하지만 걱정 마시오. 앞으로 그대가 무림 의문화를 이끌 선두주자가 될 테니."
현재 이시아의 옷은 상반신은 노출 하나 없는 평범한 복색이지만, 아래로 향하는 시선은 당연히 사람들을 오해하게 할 것이다. 세상 그 누가 다리를 8할 가까이 드러내고 다닌단 말인가.
'이제 여기서부터 서서히 퍼지게 될 것이다.'
하얀 종이에 떨어진 핏방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듯, 내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혈교의 문화는 무림의 심장으로부터 사방으로 확산될 것이다.
"여신을 보고 추종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소?"
혈교주는 말했다.
- 여자들이란 자고로 남이 자기보다 훨씬 예뻐 보이면 질투하면서도, 상대를 따라 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이들이란다. 이렇게 다리 다 드러내고 다니잖아? 아마 다리에 자신이 있는 여걸 중에 3할은 다 무릎 아래 드러내고 다닐걸?
'혈교주, 과연 당신의 말이 옳은 지 내가 확인해보리다.'
미래, 혈교의 의문화는 분명 남녀의 음심을 자극하는 형태였지만 동시에 살인집단의 제복이라는 악명이 깃들어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혈교도 없고, 순수하게 이시아가 가진 매력을 드러내기만 할 뿐이다.
다리의 선 만큼은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이시아이기에, 사람들은 이시아의 다리를 보고 '다리를 다 드러내다니 음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를 보고 선녀 같다고 말할 것이지, 그 누구도 감히 음탕하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인즉슨 속으로는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 아니야?"
"생각으로는 나라님도 욕하는 세상인데 뭔들 못할까? 지금 내 생각을 읽어보시오."
"뻔하지. 사공희랑 나랑 같은 침대에 눕혀놓고 흑백제일화를 동시에 취하겠다는 음란한 생각밖에 없어 보이는 걸."
아니, 어떻게 알았지. 하지만 절반만 알고 있으니 정답은 아니다.
"...크흠. 틀렸소. 내 남근을 걸고 당당히 말할 수 있소."
"뭐? 진짜? 그럴 리가 없는데."
이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당히 의아해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진짜로 둘을 동시에 취할 생각이 없었다.
'셋.'
사공희, 이시아.
그리고 독고연.
'둘이 아니라 셋이랑 할 생각만 해도 아래가 뻐근해지는구나.'
"표정만 보면 음흉한 생각 하고 있는데...음...."
이시아는 내 표정을 읽어내려고 했지만, 아직 내공이 그리 깊지 못했다. 하지만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어차피 나중에는 셋이서 함께 나를 상대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럼 갑시다, 소공녀. 나도 준비가 끝났소."
소공녀가 의복으로 시선을 끌듯, 나도 변복을 마쳤다. 암행과 잡입에 어울리는 흑의가 아닌, 유생과도 같은 복장으로 갈아입은 내 옷에는 진한 약재의 향기가 솔솔 풍겼다.
"각각 따로따로 들어가는 거요. 지금부터는...."
나는 이시아의 어깨를 잡고 내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대가 홀로 무림맹을 향해 가야만 하오."
* * *
웅성웅성.
허창성 북문이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로 가득 찼다. 한구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구파일방, 팔대세가. 올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왔는데 여기서 더 올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미 참가할 사람은 모두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혹시나 늦게 오는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이미 참가 기한이 지나버렸고, 지금부터 오는 자들은 손가락 쪽쪽 빨면서 구경이나 하는 처지가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왔길래 이리도 소란이 크게 일어난단 말인가. 한구만은 인파 사이를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헉!"
눈앞에는 여신이 있었다. 중원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아니 보였다가는 관아에서 음란조장으로 잡아갈 법한 복색의 치녀가 있었다.
'미쳤다.'
여신인가, 치녀인가.
청순하면서도 정숙한 상반신과 대비되는 음란하기 짝이 없는 하반신에 한구만은 자세가 괜히 불편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름 문파에서 이름 날린다고 하는 고수들, 심지어 도사들마저도 허리를 엉거주춤 서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인파를 반으로 가르고 나타난 사내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키가 컸다. 사람들은 그가 머리에 두른 붉은 띠를 보고 그의 정체를 한 눈에 파악했다.
"본인은 대 남궁 가의 적자, 폭룡 남궁패라고 하오!"
쩌렁쩌렁 울리는 남궁패의 목소리는 북문 전체를 휩쓸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전부 묻어버린 그의 사자후에 여인은 붉은 입술을 살짝 잡아당기며 웃었다. 그 미소를 본 모두가 군침을 삼켜야만 했다.
"그쪽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오랜만?"
"저런. 반년 만에 만나는데 못 알아보다니. 섭섭합니다."
"서, 섭섭...크흠! 미안하오."
남궁패는 순순히 사과했다.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과 반년 전에 만났다는 데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는 건 중죄였고, 남궁패는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이런 미녀를 잊을 리가 없는데?'
환골탈태로 얼굴이 여신처럼 변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남궁패는 기억을 더듬다가 지워버린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
누군지는 안다. 하지만 이곳에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식의 선에서 존재를 배제했던 존재다.
"설마...소공녀?"
"훗."
여인은 짧게 포권을 취하며 모두를 향해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마교의 소공녀. 무림맹주의 초청을 받고 이봉결정전에 참가하는 여인분들을 응원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서, 설마 마교인들을 끌고 온...?"
"그럴 리가요. 저는...혼자서 왔습니다."
소공녀는 두 팔을 벌리며 눈으로 뒤를 가리켰다. 이미 소공녀의 뒤는 수많은 무인이 원진을 펼치고 둘러싸고 있었고, 소공녀가 도망칠 틈은 없었다.
"제가 이곳은 초행길이라 무림맹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릅니다. 안내해주실 게 아니라면, 비켜주십시오."
여인의 몸이지만 그 누구보다 사내다운 패기에 무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구만 또한 단독으로 백도 무림의 중심에 들어온 소공녀의 행동에 살짝 지려버렸다.
"오란다고 진짜 오냐...."
잠시 뒤.
무림맹에서 온 무인들이 급히 소공녀를 호위-겸 감시하듯 달려와 그녀를 맹으로 인도했으나, 소공녀의 뒤를 따르는 이들 중 마교인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 * *
"소공녀, 무림맹에 온 걸 환영하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공녀는 맹주를 비롯한 맹의 주요 요인들을 앞에 두고도 당당했다. 맹주는 부맹주, 군사, 총관등을 비롯한 숱한 이들과 전음으로 빠르게 논의를 주고받으며 소공녀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했다.
- 마교의 함정이 분명하오.
- 하지만 비천삼마도 없지 않은가?
- 진짜로 혼자서 맹에 왔다고? 천마가 그걸 가만히 눈 뜨고 보고 있으리라 생각하는지?
- 초대장을 보냈다고 진짜로 오면 곤란한데.
맹의 그 누구도 소공녀가 온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애초에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소공녀, 진실을 말해주시오.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이오?"
결국 맹주가 나서서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맹의 초절정 고수들은 소공녀를 상대로 눈에 힘을 주고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지, 본심을 숨기는지 파악하고자 했다.
"이유라.... 다른 건 없습니다."
소공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웃음을 쳤다.
"백도제일화가 당당히 나섰는데 흑도제일화가 고개를 숨겨서야 하겠습니까?"
"아!"
맹주를 비롯한 맹의 사람들은 금방 이해했다. 백도와 흑도, 두 세력의 대표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둘은 이미 세간의 이목대로 여러모로 호적수였다.
무공으로서도, 여인으로서도.
"소공녀는...여러모로 대단한 여인이로군."
"태극화에게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부심과 자존심만으로도 전쟁이 나는 곳이 무림이 아니겠는가. 백도제일화가 이봉결정전에 얼굴을 비추러 온 이상, 흑도제일화가 모습을 숨기면 세상 사람들은 분명 비교하게 될 게 뻔했다.
- 역시 검은색보다는 흰색이지.
현실이 어떻든, 세간의 평도 질 수 없다. 자존심 때문에 당당히 백도 무림 한복판에 들어온 그녀의 행동은 무모하면서도 감탄스러웠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직 숙소를 정하지 못해서."
"자, 잠깐 기다리시오."
패기(覇氣)가 느껴지는 건 좋았으나, 그로 인한 혼란은 사양이다. 맹주는 자리를 일어나 떠나려는 소공녀를 급히 제지했다.
"맹 밖에 있으면 여러모로 곤란하오. 그러니 맹의 장원에서 당분간 기거하는 건 어떻소?"
"장원...? 딱히 무림맹의 도움을 받고자 한 건 아니었는데.... 아, 혹시 태극화가 그곳에 있습니까?"
"그, 그렇소."
태극화가 있다는 말에 소공녀는 입꼬리를 씩 비틀었다.
"그럼 비무장도 있겠네요, 후후. 알겠습니다. 맹주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리하여 소공녀는 포권을 취하며 예를 표했다. 맹주는 소공녀를 장원으로 보낸 뒤, 맹의 간부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맹주, 우려가 됩니다. 괜찮겠습니까?"
"괜찮소. 별장에는 태극화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아이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혹시나 소공녀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내 딸이 제압할 것이오. 그러니 걱정마시구려. 이제-"
"맹주! 손님이 오셨습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자는 맹의 총관이었다.
"무슨 일인가."
"그리도 찾으시던 분께서 맹의 앞에 계십니다!"
"내가 찾던 사람...? 서, 설마?!"
맹주는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그분께서 오셨느냐?!"
"예!!"
어떠한 병도 고칠 수 있는 신의의 제자.
용봉지회가 끝난 뒤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북을 떠난 신출귀몰한 청년.
어쩌면 환자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이봉결정전에 들리지 않을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반년.
드디어, 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이 맹에 도착했다.
"무붕!!"
맹주는 자리를 박차고 무붕을 맞이하기 위해 뛰쳐나갔다.
[작품후기]
??? : 내 딸에게는 불치병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