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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다
모든 사람은 인생의 전환점을 가지고 있다.
“천한 것의 핏줄 주제에 어디서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냐!”
나, 백성기에게 인생의 첫 전환점이라고 한다면 일곱 살 때 형이라고 생각했던 자에게 맞아 죽을 뻔한 일이었다.
하루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붓글씨를 가르쳐주며 서로 웃고 지내던 형, 이제는 그 새끼라고 불러야 할 자는 나를 목검으로 무참히 때렸다.
가문 안에서 나를 구해주는 이는 없었고,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가주도 나를 창고에 가뒀을 뿐 약 하나 발라주지 않았다.
“삼봉 아저씨, 저는 왜 맞아야 해요?”
“그건 네가 이 가문의 자식이 아니라서 그러는 것이다.”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은 일곱 살의 나에게 진실을 알려줬다.
어머니였던 이가 가주인 남편 몰래 호위무사와 통정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나였다는 것.
부친은 나를 당연히 자신의 자식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나를 지켜줘야 했을 모친은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십수 년.
나는 지학이 되기 전에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설령 이복형이라는 자가 나를 상대로 무공 초식을 연습한다며 목검으로 폭행을 일삼을 때도, 나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고통을 참았다. 그래야 내일 먹을 밥이라도 조금 얻어먹을 수 있으니까.
“살고 싶으면 성을 버리고 가문을 떠나라.”
어느 날 나를 본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백’이라는 성을 버렸다.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미묘한 성기라는 이름만으로, 나는 약관의 나이에 무가의 제자가 되었다.
“일류가 되기에는 기골이 망가졌고, 이류가 되기에는 너무 늦었군. 삼류가 네 한계다.”
나를 가르친 스승은 내 한계를 명확히 짚었다. 일부러 내 한계를 알려 나를 무인이 아닌 길을 걷게 하려고 했지만, 나는 부서진 뼈를 깎고 깎으며 삼류를 간신히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
“뭐야? 그 나이 먹고 아직도 삼성에 이르지 못해?”
"내가 열 살 때 한 게 쟤는 아직도 안 되네!"
하지만 이미 어려서부터 무인의 길을 걸은 이들과의 실력차이는 명약관화.
나는 그들이 보기에 하급 무사에 지나지 않았고, 뱁새는 봉황의 걸음을 따라 갈 수 없는 법이었다.
내가 열 걸음을 움직여야 그들이 한 걸음 움직인 만큼 따라갈 수 있었다. 내가 열흘 동안 익힌 검법을 그들은 한 시진도 안 되는 시간에 깨우쳤다. 머리로 이해해도 몸이 그걸 따라주지 못했다.
“오성은 뛰어나나 이미 근골이 뒤틀렸다.”
“내공을 쌓기에는 이미 하단전이 망가져 버렸다.”
“무인의 길을 계속 걷는 것이 정녕 의미가 있느냐?”
스승은 나를 계속 무인의 길을 그만두도록 종용했다.
“성기야. 무공을 폐하고 농사를 짓는 건 어떠냐? 외공만 다스리면 장문인도-성기야!!”
나는 스승을 떠났다. 나중에 가서야 스승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엔 스승조차 나를 버리려 한다는 배신감에 세상 죽고 싶었다.
그 때, 정마대전이 터졌다.
마교의 발호에 따라 정파와 사파, 그리고 여기에 혈교까지 어우러진 무림 전체의 전쟁이 발생했다.
스승은 무림의 싸움으로 내가 헛된 죽음을 하지 않도록 배려하였으나, 휘어진 척추처럼 심사가 뒤틀린 나는 그 깊은 속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폭혈! 마교의 심법이니라! 네 생명을 담보로 일류의 힘을 가질 수 있을 터!”
나는 마교에 투신했다. 내가 몸을 담았던 정파의 정보를 일부 팔아넘기는 거로 나는 마교의 졸개가 될 수 있었다.
졸개라고는 하지만 수명을 대가로 쓰는 힘 덕분에 일류에서 절정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내 몸이 망가질수록 나는 더욱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정파의 숱한 이들을 죽이며 널리 이름을 날렸다.
추마귀(醜魔鬼).
인간을 포기하여 추할 대로 추해진 마귀.
목숨을 걸고 100대 고수를 죽인 시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이미 인간으로서 떨어질 만큼 떨어져 버렸다. 스승을 죽이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고, 마교의 소모품으로 쓸모를 다한 나는 무림맹의 감옥에 갇혔다.
“확실히 추하군요. 좋은 강시 재료가 될 겁니다.”
내 몸이 썩어들어가는 것처럼, 무림맹 안도 깊게 썩어있었다.
혈교는 맹의 배신자를 통해 내 몸을 확보하여 강시로 만들었고, 나는 강시 안에 갇혀 수많은 고수를 혈교 소교주의 조종하에 죽이고 죽였다.
그리고 나는 쓸모가 다했다.
“소교주님! 도망치십시오!”
“쳇, 혈강시! 가서 몸으로 저년들을 막아라!”
혈강시로 몸이 박살 나고 목과 몸통만 남고 나서야 나는 온전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혈강시로 혈교의 꼭두각시로서 살아간 지도 어언 20년. 비로소 나는 나의 온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기나긴 싸움이었습니다. 극락왕생하시길.”
죽음 직전, 나는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검에 목이 잘렸다. 나를 향해 애틋하고 처연한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단칼에 베어 죽였다.
지옥에 떨어질 텐데 극락왕생이라니, 이 얼마나 모순이란 말인가. 그렇게 나는 죽었다.
죽었다.
죽었어야 했다.
“......?”
눈을 뜬 순간은 내가 처음으로 맞아 죽을 뻔했다가 기절하여 눈을 뜬, 백가의 창고였다.
나는 과거로 돌아왔다.
* * *
“가주. 상처는 치료해뒀습니다. 다만 상처가 워낙 깊어 앞으로 무공은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상관없네.”
현천 백가의 가주, <현검(賢劍)> 백수광은 총관의 보고에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었다. 총관이 백가의 불편한 진실을 안다면 백수광을 이해할 법도 했지만, 가문의 수치를 여럿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총관. 성기 그놈은 왠지 나를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성기 도련님께서는 돌아가신 안주인님을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분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그래. 그렇지.”
백성기. 올해로 고작 7살이 된 소년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제 어미의 모습이 드러났다.
안휘 제일의 미녀라고 불리던 여인이 가문의 위세를 벗어던지고 백수광의 여인이 되었지만, 그녀가 뒤로 저지른 행위는 백수광의 혈을 뒤틀게 했다.
“보준이는 지금 뭘 하고 있지?”
“방에서 근신하고 있습니다.”
백가에는 두 명의 후계가 있다.
백보준, 백성기. 백보준은 나날이 갈수록 백수광을 닮아갔고, 백성기는 나날이 갈수록 백수광의 사별한 아내를 닮아갔다.
백보준에게는 두 부부의 모습이 얼핏 보일지언정, 백성기에게는 오직 한 명의 모습만 남아있었다.
유년 시절에야 우락부락한 제 얼굴을 닮지 않았다는 것에 웃으면서 넘겼지만, 그게 실제로 닮을 이유가 하등 없다는 것에 백수광은 백성기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아, 아버지! 형님이 저를 죽이려 듭니다! 왜, 왜 그렇게 저를 바라보십니까?!
“.......”
수년 동안 자신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키웠다.
하지만 내 자식이 아닌 다른 이의 자식을 키웠다면, 그 분노는 누구를 향해야 할까.
무덤이라도 파헤쳐서 목을 잘라도 분이 풀리지 않는데, 그 대상과 너무나도 닮은 남의 자식이 나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
백수광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애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가주님! 크, 큰일입니다!”
하인 하나가 급히 방문을 열고 뛰쳐 들어왔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하인은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성기 도련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
* * *
‘과거로 돌아온 게 맞는 것 같지?’
야심한 밤.
나는 성벽 위에서 세가를 내려다보며 쓰라린 몸을 다독였다. 형이라는 작자에게 얻어맞은 상처는 아물기 시작했지만, 일곱 살 유아의 몸에 남은 멍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씨발, 더럽게 아프네.”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할 말은 아니지만, 너무 고통스러웠다. 혈강시로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 지 20년이 지났는데, 죽음의 고통보다 마구잡이로 휘두른 목검으로 남은 피멍이 더 아팠다.
“저 개 같은 집안. 부친이라는 놈이 쓰레기니 자식새끼도 쓰레기지.”
나는 패륜을 당당히 저질렀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억울함을 견딜 수 없었다.
“개족보 집안 주제에….”
이름조차 부르기 싫은 죽은 모친이 원인을 제공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백수광도 썩 좋은 인간은 아니었다. 적자인 백보준도 실은 모친의 아이가 아니라 모친의 여동생-
성기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이런.”
가솔들이 하나둘 뛰쳐나와 나를 찾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이는 일부 가솔들은 귀찮은 티를 숨기지 못하며 찾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저들은 알음알음 진실을 아는 자들이 분명했다.
‘붙잡혀 봐야 뒤지게 처맞을 테니 도망쳐야지.’
가문을 도망치기로 한 날까지 죽어라 맞을 수는 없다. 일곱 살 어린아이가 집을 떠날 용기를 가지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이미 한 번 집을 탈출한 내게 마음을 다잡는 건 식은 죽 먹기.
‘문제는 내공인데.’
어린아이의 몸도 어지간한 청년에 준하는 체력으로 만들어 주는 게 내공의 힘이다. 하지만 무가의 자식이라고 한들 심법 하나 제대로 얻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다시 시작하는 인생, 시작부터 꼬이는구나.’
전생이라고 부를만한 삶에서는 근골이 뒤틀리더니, 이번 생은 기맥이 뒤틀리게 생겼다.
‘그래도 맞아 죽는 것보다는 낫지.’
나는 몸을 돌렸다. 주변에는 관가의 경비들이 횃불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고, 세가의 가솔들이 나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에 다소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잡히면 죽는다. 귀찮음이 역력한 그들의 눈빛에는 나에 대한 살기로 가득했다.
즉, 내가 관병들에게 걸리는 순간 바로 가문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런 미래는 사양이며,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성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쏴아아--
대해와 같은 강물이 잔잔히 흘러간다. 깎아지른 성벽 아래, 어린아이 하나 떨어진다고 크게 신경 쓸 사람은 없었다.
“...폭혈.”
유아의 몸에 쌓인 쥐꼬리만 한 내기를 강제로 일으켜 세운다. 닫힌 혈맥을 두드리는 움직임에 나는 호흡을 몇 번이고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다.
-근골만 안 망가졌어도 최소 일류는 되었을 텐데.
“똑같은 인생을 되풀이할 수 없지.”
유일한 탈출구인 강으로 투신하여 도박을 걸어보느냐.
그도 아니면 순순히 가문에 사로잡혀 일류의 가능성조차 막히게 근골이 박살이 나느냐.
“썅.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통.
나는 성벽 위에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어둠이 짙게 깔린 강물에 비친 내 얼굴은 망가지기 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제법 반반했다.
‘얼굴이 터지기 전에는 이런 모습이었구나.’
첨---벙!
나는 떨어지기 직전, 간신히 몸을 둥글게 말아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 * *
“으잉? 저게 뭐시여.”
산에서 약초를 캐는 걸 생업으로 하는 수염 덮수룩한 남자, 삼구는 강물에 두둥실 떠내려오는 무언가에 기함했다.
“아이고, 또 시체 내려온다!”
등허리만 두둥실 떠오른 작은 체구는 처음에는 짐승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삼구는 그게 어린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말세여. 어쩌다…쯧쯧.”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삼구는 아무리 봐도 익사하여 떠내려오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다음 생에는 부디...씨방, 살아있잖여?!”
“푸하!”
소년은 머리를 들어 올리며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다시 수면 아래로 집어넣었다. 마치 숨을 꾹 참았다가 아주 잠깐 들이마시는 것처럼, 소년은 스스로 익사하지 않도록 ‘버티고 있었다’.
“아이고, 거 기다려 보아라!”
삼구는 약초를 담아둔 망태기에서 밧줄을 꺼내 들었다. 그리 긴 밧줄은 아니었지만, 마침 소년이 떠내려오는 위치와 아슬아슬하게 닿을 길이였다.
휘리릭.
삼구가 멀리 밧줄을 던지자, 등만 내민 채 가만히 떠내려가던 소년의 움직임이 급격히 변했다.
첨벙첨벙!
물개처럼 헤엄쳐오는 소년의 움직임은 삶에 대한 의지로 절박함이 느껴졌다. 삼구는 소년이 헤엄치는 물살로 밧줄이 움직이는 것이 절로 안타까웠다.
“잡아!”
덥썩! 소년은 팔을 쭉 뻗어 밧줄을 휘어잡았다. 삼구는 급히 밧줄을 당겨 소년을 뭍으로 끌어당겼다.
“괜찮냐?! 꼬마야, 정신을 차려 보아라!!”
“...여긴 어디오?”
오? 소년답지 않은 말투에 삼구는 심사가 뒤틀렸다.
옷차림은 분명 명문가의 자제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어딘가 사람을 억누르는 듯한 정체불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여, 여기는….”
“구해줘서 고맙소, 형장. 내공이 없어 죽을 뻔했소. 후.”
“...내공? 서, 설마?!”
삼구는 태연하게 일어나는 소년을 앞에 두고 비명을 지르며 놀라 나자빠졌다.
“반로환동의 초고수?!”
“......허.”
소년은 어이없는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삼구의 근처에는 <환생검제 제2권>이라는 이름의 낡은 서책이 놓여있었다.
“저잣거리의 이야기에 너무 심취한….”
순간, 소년은 씩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부끄러운 걸 보였으니 어쩔 수 없군. 살인 멸구를 하는 수밖에.”
“아,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흐음. 그런가? 그렇다면 내 자네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
삼구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소년의 눈빛은 분명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삼구를 이용하려는 의지가 가득한, 세파에 찌든 인간의 악의가 서려 있었다.
“내 육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좀 신세 좀 지지.”
무림인의 폭거에 삼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무공을 가르쳐줌세.”
“예, 예!”
인적이 드문 강가.
달빛에 비친 강물에 중년 남성이 일곱 살 소년의 앞에서 구배지례를 하는 모습이 비쳤다 파문에 사라졌다.
[작품후기]
색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