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네가 왜 여기서 나와? (1)
114화.
“어으… 지금 몇 시야.”
화창하게 눈을 찔러오는 햇살을 느끼며 최종택이 눈을 비볐다. 반쯤 감긴 눈을 자극하는 눈곱이 유독 따갑게 느껴진다.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하니 오후 2시.
‘9시간 정도 잔 건가.’
평소 6~7시간 정도만 자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오래자긴 했다. 심지어 어제도 10시간 가까이 자지 않았던가.
요즘 잠이 많아졌다고 봐야했으나 사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어제는 진짜 장난 없었지.’
아리아와의 긴 밤을 떠올린 그가 혀를 내둘렀다.
안전구멍 안에서 길거리에 사람이 지나가든 말든 상관없이 즐기던 건 지금 생각해도 진귀한 추억이었으니까.
스릴적인 것도 그렇고, 아리아 자체도 어찌나 이쁜지 피카츄로만 여기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쾌락이었다.
‘그래도 피곤하긴 하네.’
백보아의 요망한 맛과 채유린의 자극적인 맛, 그리고 어제의 섹스까지.
다양한 자극으로 몸을 혹사시켰더니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
‘한 20번은 한 거 같아.’
이 정도면 당분간은 전혀 섹스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
하나 그건 보통의 남자일 경우였다.
‘오늘은 체력운동 한 번만 해야겠어.’
우리의 최종택은 평범한 성욕을 가진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번 일들로 인해 얻은 건 쾌락뿐만이 아니었다. 백보아나 아리아와 더 가까워진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실질적인 보상이 꽤나 컸다.
[이름 : 최종택]
[레벨 : 39]
[능력치]
[근력 : S (75 / 100)], [민첩 : S (60 / 100)]
[체력 : S (65 / 100)], [마력 : S (85 / 100)]
[풀발이 적용중입니다.]
‘크으… 이제 진짜 S등급이 머지 않았네.’
절로 감탄이 나오는 수치.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간신히 풀발을 해야 S등급에 턱걸이로 걸쳤던 것 같은데 이제는 SS등급을 넘보고 있다.
특히 다소 부족했던 체력이 대폭적으로 늘어났으니 밸런스가 고루 잡힌 셈.
‘물론 풀발이 SS등급까지 올려준다는 보장은 없지.’
솔직히 말해 아닐 확률이 더 높았다. 저번에도 생각했듯 이미 S등급 스킬치고 상상이상의 효율을 내고 있는 게 풀발이니까.
S등급 스킬로 능력치를 SS등급까지 올릴 가능성은 희박했다.
물론 이것도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걸 감안하면 이제야 S등급 헌터를 향해 가고 있는 건가…’
살짝 맥이 빠지면서도 묘한 뿌듯함이 든다.
이제는 당당하게 준 S등급 헌터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대로 능력치들까지 모두 S등급을 찍으면 그때부턴 파워 랭킹에도 들 수 있을 거다.
이 모든 게 며칠 내에 일어난 일이라니…
이게 섹스 트레이닝의 효과인가.
흐뭇한 눈으로 상태창을 보고있는데 휴대폰이 진동을 토해낸다.
[피카츄 : 으으… 죽을 거 같아요. 걷기 힘들어요. 대체 얼마나 박은 거에여?]
아리아였다.
그녀도 방금 일어났는지 아주 앓는 소리를 내며 징징거린다.
[피카츄 : 진짜 너무 힘들어. 이 변태 그만하자니까 그만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면서 은밀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격하게 움직이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 때문인 듯했다.
백보아나 예나도 그렇고, 자신과 진심 어린 섹스를 하는 이들은 다들 저런 꼴이 되는 걸 생각하면 영략없는 그의 잘못이다.
하지만 오늘은 억울했다.
[나 : 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만하자하면서 계속 허리 움직였으면서.]
[피카츄 : 그, 그거야…]
[나 : 그리고 중간에는 너가 더 하자고 졸랐거든?]
[피카츄 …]
마지막에 힘들다고 그만두려는 걸 몇 번 더하긴 했지만, 그 전까지는 아리아가 더욱 적극적이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그만하자할 때도 몸은 솔직하게 움직였으니 이게 어찌 자신의 잘못이겠는가.
[피카츄 : 이익. 아무튼요! 내일 브리핑 있는데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죠!]
[나 : …내일? 오늘이 아니라?]
[피카츄 : 던전 탐사가 좀 더 늦어져서 브리핑 날짜 미뤄졌잖아요. 교관님이 말 안 해줬어요?]
그에 최종택이 급하게 예나의 카톡을 들어가보았다.
[전직차도녀 : 종택씨, 던전 탐사가 늦어져서 브리핑이 그 다음날로 미뤄진 것 같아요.]
[전직차도녀 : 혹시 내일 바쁘시진 않으시죠?]
[전직차도녀 : 할 게 없으시다면 같이 식사라도…]
[전직차도녀 : …종택씨?]
‘아…’
어제부터 3시간 간격으로 온 카톡들을 보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다른 여자랑 떡치느라 못 본 것 아닌가.
신경 써주기로 했으면서 최근 너무 무신경했다.
‘최근 너무 정신이 없어서 생각을 못했네.’
여러 의미로 다이나믹한 일정을 보낸 그의 입장에서 변명할 거야 많았지만, 뭐가 됐든 그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었다.
‘음. 많이 삐치셨겠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던 최종택이 이내 휴대폰을 쥐었다.
이럴 땐 남자답게 돌직구다.
[나 : 요즘 바쁘게 지내느라 연락을 확인 못 했네요. 죄송해요.]
깔쌈하고 정직한 사과.
이 얼마나 깔끔하고 댄디하단 말인가.
죄질에 비해 상당히 설명과 정성이 부족했지만, 최종택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 뿌듯한 얼굴이었다.
[전직차도녀 : 아, 그랬군요.]
그 성의에 반한 걸까.
예나에게서 곧장 답장이 왔다.
[전직차도녀 : 알겠습니다. 그럴 수 있죠. 그리고 저도 최근 훈련하느라 바빴어서 괜찮습니다.]
[나 :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밥은 브리핑 끝나고 먹어요.]
[전직차도녀 : …그래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나 : 감자ㅌ….]
[전직차도녀 : 감자탕은 안 됩니다.]
[나 : ……그럼 국밥?]
[전직차도녀 : 아뇨, 제가 알아서 알아오겠습니다. 그저 몸만 잘 챙겨서 오세요.]
텍스트로 보는데도 정색이 느껴진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궁서체인가. 언제 말투가 풀렸냐는 듯 살벌한 그녀의 모습에 최종택이 머리를 긁적였다.
‘왜 다들 감자탕의 매력을 몰라주지?’
국밥이 갓성비라면 감자탕은 고급 티오피인 것을.
이래서 여자들이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은 그가 카톡을 몇 번 더 주고받곤 뒤로 벌러덩 누웠다.
예나도 어느 정도 풀린 거 같고, 아리아도 징징거리는 게 잠잠해졌으니 이제 좀 쉬어볼까 싶었던 것이다.
지이잉-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눕자마자 기가 막히게 진동하는 휴대폰을 보며 최종택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또 누구야?”
아마 백보아거나 두형이놈이 아닐까 싶다. 그가 연락하는 이는 몇 없고, 심지어 그중 대부분이 최근 연락을 안 하니까.
한데 이게 웬 걸?
“어?”
연락온 사람은 백보아도, 두형이놈도 그리고 누나새끼도 아니었다.
[한지수]
최종택이 다니던 대학퀸카이자, 헌터가 된지 얼마 안 됐을 때 친해졌던 인물.
“지수? 지수가 갑자기 웬 일이지?”
승급 시험 이전까진 친하게 지냈고, 병원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던 친구.
여러모로 인상 깊은 친구이기도 했다.
하나 그 후로는 왜인지 제대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었는데…
지이잉- 지잉-
심지어 카톡이나 문자도 아닌 전화라.
검은 화면에 뜬 다이얼 표시와 함께 지속적으로 진동을 토해내는 휴대폰을 다소 당혹스런 얼굴로 바라봤다.
“음, 받아보면 알겠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에 벙찐 것도 잠시.
금방 정신을 차린 그가 살짝 헛기침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응. 나 지수야 종택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거린다. 전화 너머인데도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 달콤한 게 꼭 솜사탕 같은 음색이었다.
대학퀸카에 과거 동경하던 인물이라서일까.
막상 전화를 받으니 괜히 긴장된다.
이게 그 파블로프의 개인가 하는 그건가?
‘그래도 전에는 좀 친해졌던 것 같은데…’
워낙 오랜만이라 그런지 지금은 그저 어색했다. 하기야 최소 3개월 만의 연락이니 어색할 법도 하지.
그간 너무 많은 일이 있기도 했고.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지. 혹시 뭐 하는데 방해한 건 아니지?
“아냐. 조금 전에 일어났어.”
-저번에도 그렇더니 아직도 낮밤 자주 꼬이는구나?
“뭐, 자취하면 다 그렇지. 최근 좀 바빴어서 그런 것도 있고. 넌 요즘 어떻게 지내?”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했던가. 막상 대화를 주고받다보니 짙었던 어색함이 차츰 옅어져갔다.
-나야 뭐…. 아! 나 A등급 헌터 됐어. 얼마 전에 승급했지 모야.
“어, 진짜? 얼마 전까지 C등급 아니었어?”
-응응. 최근에 크게 깨달음을 얻을 일이 좀 있었거든. 덕분에 능력도 개화해서 승급할 수 있었어.
“오오, 대단한데? 사신 길드 에이스 어디 안 가는구만.”
-에이, 그건 너무 띄워줬다. 넌 거의 준 S등급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뭘,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기지.
아니라고 하면서도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하다.
예전에었으면 그 간들어지는 웃음에 가슴이 설렜을 텐데 지금은 그냥 흐뭇할 뿐, 그 외 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와 처음 섹스를 했을 때는 이게 연인인가 싶었는데.
다른 이들과 했을 때랑은 다르다고 느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기야 그때가 진심이었으면 진심 어린 섹스라고 떴겠지.’
아마도 그땐 대학퀸카라는 특성에서 오는 동경심 아니었을까.
이제는 하다하다 진심이냐 아니냐를 시스템으로 구분하게 될 줄이야. 이걸 편하다 해야할지 불쾌하다해야할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래서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 혹시 A등급 된 거 자랑하려고?”
최종택이 더 대화에 집착하지 않고 미련없이 본론을 꺼낼 수 있는 것은.
한데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응? 뭐야, 얘기 못 들었나보네?
“음? 무슨 얘기?”
“흐응…그렇구나. 아니야. 그때 가서 아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아.
놀란 듯 하던 그녀가 이내 묘한 침음을 흘린다. 흥미로움과 장난끼가 골고루 분배되어있는 듯한 목소리.
“그게 무슨 소린데?”
당연히 최종택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지수는 죽어도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 그저 아니라며 낮게 웃을 뿐이었다.
-아냐. 오랜만에 목소리 들어서 반가웠어. 안부차 연락한 것도 있고 뭐… 잘부탁해.
“어어?”
-아, 길드장님이 나 찾는다. 미안, 그럼 끊을게!
그리곤 뚝 끓기는 통화.
전화가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니 있던 최종택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냈다.
“이게 뭔 일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