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몽마? 어림도 없지! (1)
64화.
1.
헌터 갤러리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협회가 협회 했다.
헌터 협회의 무능한 대처를 비하하는 의도로 흔히 쓰이는 말.
하나 그들의 말과 달리 협회는 유능한 편이다.
상식적으로 대기업 합격률보다 낮은 협회에서 하는 일 처리가 무능할 수가 없다.
최첨단 장치로 예측하고, 유능한 인재가 막는다.
그 단순한 루트를 완벽하게 해내는 게 헌터 협회였고, 실제로 사건을 막는 확률이 90%가 넘어가는 거에서 증명이 됐다.
그런 그들이 한없이 멍청해질 때가 있는 이유.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키이잉-!
위잉-! 위잉!
"마력 수치가 이상합니다!"
예측이 불가능한 사고니까.
정상적인 패턴의 사고가 아닌 경우, 장비가 잡아낼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더, 던전이 생길 것 같습니다."
예고 없는 게이트 현상.
갑자기 치솟은 마력 수치에 협회 직원들이 소리치자 협회장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디인가!"
"영등포 시가지 인근에서 거대한 마력이 느껴집니다. 이 패턴을 보면……"
그에 빠르게 대답하던 팀장이 말끝을 흐렸다.
마른침을 삼킨 그에게서 심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족인 것 같습니다."
"맙소사."
그에 협회장은 물론 직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정도였다.
마족이라는 단어가 그들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특히 협회장에게는 그 의미가 더욱 컸다.
'그 마족 하나 때문에 S등급 헌터가 전부 농락당했으니까…'
10년 전.
처음 '녀석'이 나타났을 때 S등급이었던 협회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
거대한 뿔, 아름다운 얼굴.
창백한 피부와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녀석'은 잔혹했고 강했다.
S등급 헌터 열 명이 모여 간신히 도망쳤을 정도로.
'끝내 물러나긴 했지만…'
결코 페베해서 물러난 게 아니었다.
그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물러났을 뿐.
다시 '녀석'이 찾아오면 그때는 막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물론 모든 마족이 녀석 같진 않다.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마족도 많았지만, 협회장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마족들의 힘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들이 가진 힘은 일반적인 몬스터와 다르다고.
오히려 헌터와 비슷한……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협회장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등급은 어느 정도 될 거 같나?"
"파동으로 봐서는 B등급으로 측정이 되는데…… 마력의 수치로만 보면 A급 상위와 비슷합니다."
"…큰일이군."
협회장의 안색이 눈에 띄게 초조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족의 던전은 같은 등급의 헌터만이 출입할 수 있는데…… 당장 투입 가능한 헌터들이 있나?"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세 명 정도는 있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
협회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캄캄해진 시야가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이걸 어찌한단 말인가….'
평소라면 시간을 들여 헌터들을 모아 던전을 클리어하겠지만, 마족의 던전에선 그럴 수 없었다.
마족은 게이트가 생기는 순간.
마음만 먹으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한 마디로 게이트 붕괴가 일어나는 것이다.
"……최종택 파티라면."
눈을 질끈 감은 채 협회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이라면 클리어할 수 있겠나."
"…리치를 혼자 잡았던 것을 미루어봤을 때."
한 박자 멈춘 팀장이 안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예상대로라면 충분히 승산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가…."
작게 대답한 협회장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고심하듯 아무런 말이 없던 그가 이내 감았던 눈을 떴다.
형형한 빛을 내뿜으며 그가 이를 악물었다.
"소집하게."
2.
스타버스.
영화관 인근에 위치한 카페에서 최종택은 에이드를 마시며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매끈한 다리가 들어왔다.
트인 골반 쪽부터 쭉 뻗은 다리가 검은색 스타킹이 예술이었다.
특히나 밋밋하지 않게 포인트를 준 가터벨트는……
'어우.'
유심히 꼰 다리를 바라보던 최종택이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종택아. 저년은 요망한 년이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하필 별생각 없이 내려다본 시야에 저런 절경이 보일 줄이야.
크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떼려는데 갑자기 꼬인 다리가 풀렸다.
스윽.
동시에 그의 시선도 멈추었다.
허공에서 맴돌던 다리가 내려오고 이내 반대 다리가 위로 올라갔다.
시선을 잡아두는 마성의 다리였다.
본능적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밑에 뭐 떨어트렸어요?"
"아뇨."
퍼뜩 정신이 든 최종택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에 백보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너무 빤히 보길래 필요한가 했죠."
'……오우야.'
틀린 말은 아닌데 너무 절묘하다.
빨딱 힘이 들어가려는 밑을 다리로 누르자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종택 씨, 연애 못 해보셨죠."
"……"
뜬금없는 질문에 최종택은 생각했다.
'갑자기 명치 후드려 까네, 쉬벌련이.'
명치가 너무 아팠다.
왠지 대답하기가 싫어서 퉁명스럽게 에이드를 빨고 있는데 후속타가 이어졌다.
"하긴, 그러니까 눈치가 그렇게 없죠."
'…존나 아프네.'
그가 지끈거리는 명치를 어루만졌다.
못마땅하게 쳐다보지만, 눈이 마주친 그녀는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질문은 계속되었다.
"평소에는 뭐하고 지내요?"
"으음…"
이번엔 나름 정상적인 질문에 최종택이 잠시 생각했다.
고민은 짧았다.
집에서 가장 자주하는 건 하나였으니까.
"체력 훈련이요."
그러자 백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뭐 이상한 거 하는 거겠죠."
"……"
쭉 빨던 빨대가 그대로 멈추었다.
'어떻게 알았지?'
궁예의 후손이라도 되나?
관심법은 실존하는 건가 싶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게임이나 영화 같은 건 안 보시나요?"
"잘 안 보긴 해요."
"그쵸. 이상한 거나 보겠지."
'…쉬발련.'
뻔하다는 듯 대답하는 모습이 얄밉다.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난 어떤 삶을 살아온 거지?'
순간, 그런 회의감이 들 정도.
팩트융격기에 너덜너덜해진 그가 발끈해서 물었다.
"그러는 님은 뭐하시는데요?"
"저 기도하죠."
"아 되게 재미없겠다."
생각해보니 너무 뻔한 질문이었다.
자매님이 수녀복을 입고 활동하는데, 평소에 기도를 하지 뭘 하겠는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다 벗고요."
"…?"
내가 뭘 들은 거지?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꿀꺽.
절로 넘어가는 침에 최종택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매일 보던 건데도 언뜻 비치는 검은색 속옷이 자극적이게 느껴졌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백보아가 슬쩍 몸을 가렸다.
그리곤 전혀 민망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뭘 생각하시는 거죠? 변태."
'…아니 지가 벗었다매. 개같은련이.'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았다.
더 말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오늘 대화로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다.
탁.
최종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쟁을 앞둔 장군처럼 결연한 그의 얼굴에 백보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섰네요."
"…!"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건 모르지만, 일단 다리를 가린 최종택이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끝으로 시선을 돌린 백보아가 중얼거렸다.
"오락실이네요? 저게 왜요?"
"한 판 하러 가시죠."
그리 말하는 최종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물론 그녀와 놀 생각에 신나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게임으로 조져주지.'
능력치상 피지컬이 좋은 걸 바탕으로 참교육해줄 심산이었다.
빤히 보이는 속셈에 백보아가 피식 웃었다.
"그래요. 그거라도 이겨야지."
그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 선다.
그 당당한 뒷모습에 최종택이 머리를 긁적였다.
벌써 진 기분인 건 왜일까.
어쨌든 그렇게 오락실로 향한 최종택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이길 수 있는 게임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다른 게임들은 종택 씨 피지컬이 너무 좋으니까 테트리스 어때요?"
"……"
백보아가 선수를 쳤다.
그녀 말대로 테트리스라면 피지컬이 거의 필요 없는 게임.
하나 최종택은 자신만만했다.
"후훗. 제가 기가 막히게 하죠."
"어머?"
단순히 허세는 아니었다.
'내가 어? 왕년에 테트리스 랭커였어.'
하릴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던 그의 유일한 두 가지 취미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 그를 백보아가 이길 리 만무.
[Win!]
"크으…! 봤어요?"
순식간에 최종택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것도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의 쾌감에 최종택이 한껏 기쁨을 표현하자 백보아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하… 역시 넣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네요. 못 당하겠어요."
"……"
그러며 씨익 웃는 그녀.
그 중의적인 말에 최종택의 템포가 가라앉았다.
'…시발, 이겼는데 왜 이긴 것 같지가 않지?'
뭐가 문제일까.
아마 자신이 문제라는 건 죽어도 모를 거다. 그렇게 혼자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백보아가 무언갈 발견했다.
"어? 이번에는 저거 어때요?"
"음? DDR이네요."
"…뭔가 어감이 이상한데요?"
DDR.
흔히 펌프로 알려진 리듬 게임.
이제는 없어지는 추세이건만, 오랜만에 보는 DDR에 최종택이 작게 감탄했다.
그리고 그건 백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거 한 번도 안 해봤어요. 30분 정도 남았는데 하실래요?"
드물게 눈을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에 최종택이 피식 웃었다.
"그래요, 그럼."
"그럼 제가 먼저 할게요."
그리곤 쪼르륵 펌프 앞에 달려간 그녀가 지폐를 넣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봉을 잡고 선 그녀.
마치 아이처럼 기대하는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었다.
'저런 면이 있었네.'
늘 짓궂고 여유로운 모습만 보다 어린 면을 보니 처음으로 어려 보인달까.
'하긴, 이제 스무살이라고 했으니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믿기지 않았다.
엿보기 구멍으로 나이 안 보인다고 사기치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게임 스타트!]
빰- 빠람-! 빰-
'잘 어울리네.'
때마침 게임이 시작되어 열심히 발을 놀리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20살의 모습이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 그럴까.
이상하게 열심히 방향키에 맞춰 춤을 추듯 이동하는 그녀를 예뻐 보였다.
콩콩 뛰는 어색한 몸놀림.
그럴 때마다 휘날리는 머리카락.
슬쩍 들춰지는 치마.
그 모든 것에 시선이 머물렀고, 어느 순간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휙-
"어…?"
.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 같은 요망한 미소가 아닌, 아름다운 미소.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린 그녀의 웃음이 상큼하게 다가왔다.
'어라…?'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 시야 속에서 환히 웃는 얼굴을 보고 있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과 함께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흘렀다.
'아, 또 개지랄하겠네.'
뻔한 레파토리라 생각했을 때.
홱-
'…응?'
예상과 다른 반응이 나왔다.
그녀가 뭐라 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린 것이다.
'어라? 뭐라 안 하네?'
그에 최종택이 의문을 표하는 사이 게임이 끝났다.
하지만 그녀는 내려오지 않았다.
그저 봉을 등지고 서 있을 뿐.
'지쳤나?'
하긴, 능력치가 F등급이니 그럴 수도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고 가만히 기다리는 동안 백보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뜨거웠다.
'아… 어떡해.'
최종택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든 상태였다.
'부끄러워.'
처음 하는 펌프에 정신이 팔려 표정 관리를 못한 것이다.
고개를 흔든 그녀가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한 그녀가 이내 평소와 같은 얼굴로 싱긋 미소지었다.
"이제 종택 씨 차례에요. 99점인데 이길 수 있겠어요?"
"아, 뭐…"
왠지 머쓱해진 최종택이 적당히 대답하려 할 때였다.
지이이잉-!
위이잉-! 위잉-!
"응?"
"어? 뭐야."
사방에서 격한 진동 소리가 울렸다.
그에 오락을 즐기던 사람들이 모두 휴대폰을 바라봤다.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는 모습은 꽤나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진동은 계속되었고, 이내 최종택과 백보아의 휴대폰도 진동을 토해냈다.
지이이잉-
"…어? 협회장님?"
"저도 협회에요."
다만, 그들과는 조금 다른 진동이었다.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던 그들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를 수신한 최종택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죠?"
-재난 메시지 아직 못 봤나?
다급한 목소리.
그에 최종택이 대답하기도 전에 말이 이어졌다.
-지금 자네 있는 곳 근처에 마력 수치가 높은 던전이 생기고 있네. 마족 던전이라 빠른 대처가 절실한데 당장 투용 가능한 헌터가 자네들밖에 없어…
"아…"
그 후로도 빠르게 등급과 위험성을 설명한 그가 이내 진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미안하네만, 혹시 그곳으로 갈 수 있겠나. 아리아와 예나 교관도 곧 갈 수 있다고 이미 연락을 받았네.
"아…"
그는 잠시 백보아를 바라봤다.
때마침 그녀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붉은 눈에서 짙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최종택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끝내긴 좀 아쉬운데…'
모처럼 분위기가 달아올랐는데 이대로 끝내야한다니.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알겠습니다. 지금 그쪽으로 갈게요."
-정말 고맙네. 사례는 충분히 치르겠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협회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참! 이번 던전은 평범한 던전이 아닐세! 마족 던전으로 B등급 던전이지만, A등급 상위 급의 보스가 있네. 조심해야해.
"마족요?"
-우리는 그 던전을 이렇게 이름 붙였네.
한 박자 쉰 협회장이 이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몽마의 둥지.
"…!"
동시에 최종택의 눈이 커졌다.
'잠깐만… 마족… 몽마… 서큐버스?'
그의 머릿속으로 무언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이윽고 한 이미지가 떠오른 순간.
'오히려 좋아.'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서 있던 백보아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잔뜩 신난 그를 째려본 백보아가 이내 홱 고개를 돌렸다.
"흥!"
흥칫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