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3화 〉오히려 좋아 (2) (63/124)



〈 63화 〉오히려 좋아 (2)

63화.


8.


"후우…"


전화를 끊은 백보아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뜨겁다.
붉게 상기 되어있을  분명한 얼굴을 고운 손에 파묻은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이 정도로 돌직구를 날릴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답답해서 자신도 모르게 질러버린  정말 수락할 줄은 몰랐다.

'아… 진짜 데이트하는 건가? 뭐 입어야 하지…?'


마음의 준비가 안 될 수밖에 없는 일.
평소보다 확연히 빨리 뛰는 심장이 맞닿은 무릎을 통해 느껴졌다.
작고 하얀 발가락이 배개 너머로 꼼지락거린다.
고민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평소대로 입고 나가는  좀 그러겠지?'


평소 옷에 큰 관심이 없는 그녀였다.
정확히는 옷을 살 일이 없었다.
희생하신 신부님과 수녀님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수녀복을 입고 다녔으니까.
애당초 잘 보이고 싶은 사람도 없었고.

'아… 어떡해.'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그녀도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데이트인데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한 편으론 불안감도 커졌다.


'그렇다고 꾸미면 너무 대놓고 티 나는 거 같은데.'


평소 그녀가 보여주는 여유로운 모습과는 상반되는 모습.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붉게 물든 얼굴이 옅어 보이게 만드는 앵두 빛 입술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럼 오늘… 하는 건가?'


그녀의 시선이 속옷으로 향했다.
검은색 가터벨트와 레이스가 달린 검은 브레지어.
그녀가 즐겨 입는 속옷이건만, 지금은 괜찮은지 걱정이 들었다.


'마음에 들어할까?'


무언가를 상상하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아무런 감정 없이 하기는 싫은데…'

아직은 아니었다.
최종택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끙끙거리던 그녀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런 그녀의 위로 메시지가 떴다.

[관리자가 '그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신탁을 내립니다.]

헌터로 각성한 때부터 보던 신탁.
이제는 익숙해진 메시지에 백보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알아요."


지겹도록 본 메시지였다.
그를 처음 본 날부터 계속 저 소리였으니까.
하나 그녀는 구원을 위해 계산적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처음 최종택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양팔로 무릎을 감싼 그녀가 파묻은 고개를 슬쩍 들었다.

"이게 아니어도……"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화답하듯 알림이 울렸다.

[관리자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아윽…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그 응원에 백보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민망한  손사래를 치던 그녀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침대를 내려오며 작게 투덜거렸다.

"빨리 준비하면 되잖아요."

천천히 잠옷의 단추를 풀자 새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잡티 하나 없이 맑은 피부.
그 사이로 봉긋한 가슴골과 함께 핑크색 유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툭. 투욱-

그 밑으로 서서히 드러나는 살결.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배를 드러낸 그녀가 이내 잠옷을 벗었다.

스윽.

순식간에 바지까지 벗자 털이 없는 매끈한 몸매가 드러났다.
아담한 체격과 봉긋한 가슴, 적당히 튀어나온 골반.
들어갈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이상적인 몸매였지만, 가장 특이한 건 털의 유뮤였다.
음부는 물론, 전신에 털 하나 없는 몸.
특유의 분위기가 어울러지니 보는 사람에게 하여금 아름답다 느끼게할 정도였다.

"으음…"

하나 거울을 보는 그녀의 얼굴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조금 더 컸으면 좋겠는데…'

평균을 상회하는 크기건만.
같이 다니는 아리아와 하도 커서 그런지 영 빈약하게 느껴진 탓이다.
살짝 입술을 삐죽인 그녀가 이내 화장실로 들어갔다.

[2 : 13 PM]


약속 시간은 오후 4시.
여유로운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겐 빠듯하게만 느껴졌다.


9.
서울 시가지.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 선 최종택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연신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04 : 02 PM]


'곧 올 시간인데…'

약속 시간 5분 전에 도착한 그는 4시가  순간, 10초 단위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우… 맨날 보던 사이인데 오늘따라 왜 이러냐.'


한 방 먹여줄 생각만 하던 여자건만.
데이트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괜히 그녀와의 만남이 신경 쓰였다.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던 복장도 깔끔하게 바뀐 게 그 증거였다.


'그보다 데이트라니… 평소에 나한테 마음이 있었나?'

그때, 문득  생각에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쉬벌, 근데 왜 나한테 평소에 그렇게 장난친 거야?'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약간 초등학생들이 솔직하지 못해서 장난치는 그런 건가?
어쩌면 지금도 장난치려고 부른 걸지도 모른다.


'그 요망한 년이라면 그럴 만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최종택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그는 시야가 밝아지는  느꼈다.
영화 속 연출처럼. 주변이 흐려지며 시점이 그녀에게만 잡혔다.
선명해진 시야 사이로 물기가  마른 머리카락과 청초한 얼굴이 보였다.

"어…"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평소 복장 그대로인데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인다.
급하게 나와 덜 마른 머리카락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그녀를 의식하고 있어서 그럴까.
얼굴에 머무르던 그의 시야가 밑으로 향했다.


'오우야…'

살짝 비치는 검은색 브레지어를 넘어 촉촉한 가터벨트에 닿은 순간.

띠링-

[풀발이 발동되었습니다.]


어김없이 메시지가 떠올랐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그녀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 아니에요."


머쓱하게 대답한 최종택이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진짜 데이트 같잖아.'


이 어색한 분위기.
묘한 심장의 간질거림을 종택이는 참지 못했고, 이내 씹덕의 망상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최종택을 빤히 바라보던 백보아가 한 발짝 다가왔다.


화악-


'…어.'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 때문일까.
평소보다 더욱 진한 샴푸 향에 순간 시간이 멈춘 기분이었다. 그 묘한 긴장감 속에서 그녀의 씨익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벌어진 순간.


"꼴리셨나 보네요?"
"……"


간질거리던 기류가 멈추었다.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온 최종택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또 시비야?'


하여튼 저년은 입만 열면 시비다.

'데이트라고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상대가 그녀라는 걸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각하지 못했다.
아직도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을.
 탓에 평소처럼 태연하게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런 그를 묘한 얼굴로 바라보던 백보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 혼자 영화도 보지 못하는 몸인데… 빨리 가요."
"엥?"

한데  말이 가관이었다.

"저 보호해주시기로 했잖아요."
"엥? 데이트하자면서요?"


황당해서일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최종택이 아차 헀다.
이러면 자신만 기대한  같지 않은가.
하지만  기회를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
그의 말에 살짝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반달 눈으로 접으며 음흉하게 물었다.


"어머? 저랑 데이트하고 싶었나 봐요?"
'쉬발련이?'

최종택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지는 물음이었다.
그 반응이 재밌던 걸까.
씨익 웃는 백보아의 모습에 최종택이 허탈함에 헛웃음을 냈다.

'그럼 그렇지, 저 요망한 년…'


그런 그를 힐끔 보던 백보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함의 한숨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다행이다. 역시 눈치를 감자탕에 말아 먹어서 그런가 바로 평소대로 돌아오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갈까요."
"어딜요?"


대답이 퉁명스럽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모습에 백보아가 씨익 웃었다.

"데이트 가야죠."
"……"

순간, 멈칫한 사이 그녀가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언젠 아니라매 쉬발….'

하여튼 좆 같은 년.
어쩌다 저런 년에게 코가 꿰여서…
한숨을 내쉰 그가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투덜거리는 그를 슬쩍 곁눈질한 백보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10.
영화관.
데이트 장소로 손꼽히는 명소.
그런 만큼 커플이 많았고, 자연스레 최종택의 시선도 백보아를 향했다.
카운터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아냐, 종택아.  요망한 년에게 현혹되지 말자.'


이게   요망한 년의 술수다.
그렇게 자기암시를 하는 사이, 영화를 고르던 백보아가 손가락을 뻗었다.

"이게 요즘 재미있다면서요?"


최종택의 시선이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돌아갔다.

[장난치는 그녀와 둔감한 남자]


"……"

제목부터가 요망한 영화였다.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여자와 둔감한 남자가 꽁냥 거리는 멜로 영화. 왠지 지금 상황과 묘하게 겹치는 느낌에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뭐 이딴  보냐.'
"싫어요?"

그게 눈에 보인 걸까.
불쑥 물어오는 말에 최종택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럼 이걸로 예매할게요."

그러자 싱긋 웃은 그녀가 카운터로 향했다.

"……2장 주세요."
"네. 시간은 5시 반 거 괜찮으세요?"
"네. 좌석은……"


최종택이 뭘 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예매를 마친 그녀가 시간을 확인하곤 말했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데 카페 가는 건 어때요?"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도 먼저 앞장선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왜 리드 당하는 거 같지?'

분명 저년이 한창 연하이건만.
이상하게 페이스가 휘말리는 느낌이었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따라붙은 그가 나란히 걸었다.  달라붙어서인지 옷깃이 조금씩 스쳤다.

"……"
"…크흠."


묘하게 어색해진 분위기에 최종택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던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복장도 같고, 사람도 같다.
한데 딱 달라붙어 몬스터에게서 그녀를 지켰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게 다 데이트라는 요망한 단어 때문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묘하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그중에는 커플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이 남자였다.


'뭐지?'

그 시선을 따라 이동하자 보였다.
훤히 드러난 검은색 가터벨트가.

'아…'


최종택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복을 입은 것만으로도 시선이 끌리는데 가터벨트를 입었다?
도저히 안 볼 수가 없는 구조다.
심지어 수녀복도 평범한 수녀복이 아닌, 치파오처럼 트인 수녀복이 아닌가.

'음.'


순간, 최종택의 시선이 다리에 머물렀다.
확실히 남자들이 사족을   정도로 매끈하게  빠진 다리였다.


'좀 신경 쓰이네.'


그래도 이건 너무 시선을 끌지 않는가.
몰랐을 땐 괜찮았는데 한 번 의식하고 나니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질투하시는 건가요?"
"……"


눈이 마주친 백보아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짓궂은 미소.
그걸 보고 있자니 문득 최종택도 장난끼가 돌았다.
똑바로 눈을 마주친 그가 당당하게 말했다.


"네. 질투해요."
"……"


순간, 백보아의 몸이 떨렸다.
잠시 멈칫한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지만,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원래의 얼굴로 돌아간 그녀가 놀리듯 말했다.

"저는 종택 씨가 저한테 관심 없어 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그리곤 대답할 틈도 없이 등을 돌렸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녀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얼굴이 빨개진 그녀의 입가가 살짝 흐물거렸다.

띠링-

[관리자가 흡족해하며 팝콘을 듭니다.]


 순간 떠오른 메시지에 백보아의 얼굴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관음증 아줌마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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