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44화 (64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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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민희는 확실히 어른이었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혼자 답 안 나오는 거로 고민한 게 바보 같았어.

이렇게 바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인데 뭐하러 혼자 머리를 굴린 거야. 멍청하게.

어쨌든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느끼게 되었다.

어른의 마음. 여유. 그런 것들.

이렇게 배우면서 철이 들어가는 거겠지. 나는 아직도 애새끼가 맞으니까.

벙커와 방주를 몇 번 오가며 승미세안과 민희가 만날 시간이 정해졌다.

내일 정오. 장소는 내가 사는 벙커.

바로 함께 사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민희가 내 집으로 들어오게 되는 모양이 됐다.

그래. 뭐, 이거면 된 거지. 이렇게 차근차근 가는 것도 괜찮을 거야.

어쨌든 승미세안과 민희의 일이 일단락됐기에 상당히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시 크라켄 본부로 순간 이동해서 온 나는 아까 이곳을 왔을 때와는 완전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땐 어두컴컴한 밤이었지. 내 마음도 밤처럼 어둡고 깜깜한 상태였었고.

하지만 지금은 저기 해가 뜨고 있는 것처럼 마음속도 밝아졌다. 환하고 상쾌한 느낌이야.

그렇기에 나는 크라켄 본부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보호막 숙련을 할 수 있게 됐다.

간간이 포션을 한 번씩 마시며 즐거운 기분으로 본부에 있는 놈들이 아침을 맞이하는 것을 바라본다.

사실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작일 수도 있지.

서로 만나는 것이 끝이 아니다. 만나고 난 다음이 진짜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

그저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다. 서로 문제없이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라고.

승미세안도 민희도 천성적으로는 착한 여자들이니까.

그렇기에 크게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 뿐.

만나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저 잘 되길 바랄 뿐이지.

승희랑 미나, 세아, 안나는 그래도 비슷한 또래였기에 그나마 쉽게 어울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민희는 나이 차이가 좀 있잖아. 승희, 세아랑은 열 살 정도 차이 날 텐데.

세대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아무튼 다를 거야.

그런데 과연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또 내가 쓸데없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 진짜. 내가 걱정해 봐야 무슨 소용이냐.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그냥 여자들을 믿자. 그거면 됐지.

그렇게 머리를 비우고 보호막 숙련을 하며 계속해서 본부를 바라본다.

이제 곧 정오. 녀석들이 사냥하러 갈 시간.

근데…. 준비하는 게 조금 다르다. 짐을 챙기고 있네? 그것도…. 스킬 13개 있던 놈들이?

느낌이 빡하고 왔다. 녀석들이 개인 짐을 챙길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 그거 말고는 없지.

정오가 되기 직전, 녀석들은 전부 본부 바깥에 모였다.

여기 본부의 치프도 밖으로 나와 오늘 떠나는 녀석들과 가볍게 농담하며 쾌활하게 웃는 모습.

정오가 되자 게이트 하나가 열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게이트에서 나와 치프와 악수한다.

그 남자를 보면서 약간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는 티어13녀석들.

게이트에서 나온 남자는 치프와 짧게 대화하더니 티어13녀석들을 게이트 안쪽으로 들어가게 한다.

드디어 때가 왔네. 기다리고 있었다 새끼들아.

문이 열렸으니 바로 가봐야지. 과연 저 게이트 너머는 어떤 세상이 있으려나?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봉인하고 버프를 모두 건 다음 게이트를 지나가는 한 놈의 짐에 살짝 달라붙어 게이트를 넘어간다.

그리고 늘 하던 데로 하늘 위로 블링크 했다. 근데…. 뭐야 여기는? 섬인가? 바닷가?

일단 위치를 저장하고 주변을 살펴보며 탐지를 돌렸다.

제법 잡히는 기척들. 확실히 백 단위는 넘는 거 같은데.

여기가 어딘지 부터 알아봐야겠지? 일단 이 짓을 몇 번 해봐서 그런지 노하우가 생겼다.

먼저 낮과 밤.

크라켄 본사가 있는 샌 안토니오는 정오였다. 근데 지금 여기도 밝다.

해의 위치로 봐선 이제 막 해가 떠오른 지 그리 오래되진 않은 거 같다.

그리고 시간. 주변을 돌아보면 아직 잘 작동하고 있는 시계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오전 일곱 시. 사실 이것만으로도 여기가 어딘지 확인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샌 안토니오가 정오일 때 오전 일곱 시인 곳을 찾아본다.

한곳밖에 짚이는 곳이 없다.

지상 낙원의 섬. 하와이.

근데 사실 이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도 없지. 간판만 확인하면 되는 거니까.

잠깐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내 추리가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호놀룰루, 와이키키, 하와이라는 단어는 간판 어디에서도 볼 수 있었고 따듯한 기온과 멋진 해변, 야자수들은 여기가 하와이라는 걸 확실하게 증명해준다.

이것 참…. 웃기네. 어쩌다가 이렇게 하와이까지 오게 됐냐.

다시 아래를 살펴보니, 크라켄 본사에서 온 녀석들은 한 호텔로 인도되고 있었다.

녀석들도 깔끔한 호텔과 바다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나 보다. 표정들이 좋네.

단지 좋은 경치를 봐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자기들이 승급했기 때문에 좋은 걸까?

어쨌든 나에게도 새로운 실마리가 주어진 셈이라 기분이 좋다.

이놈들의 기억에서는 뭘 읽을 수 있을까? 부디 건질 수 있는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녀석들은 새로 배정받은 호텔로 들어가 각자 짐을 풀었다.

어두침침한 지하 벙커에 있던 놈들은 전망 좋은 호텔 방을 배정받고 나니 확실히 기분이 좋아 보인다.

들뜬 모습이 확실히 보이네. 무슨 관광객 같잖아?

문제는 녀석들의 이후 일정은 정말 관광객과 다름없었다.

뷔페식 호텔 조식을 먹고 간단하게 교육을 한 시간 정도 들은 녀석들은 그야말로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영복을 입고 바다로 나가는 녀석도 있고 뭘 더 할 수 있을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놈들도 있다.

웃긴 건…. 저들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원래 여기 있었던 녀석들.

아마 먼저 티어13을 찍고 온 놈들인 거 같은데…. 그들은 교육 같은 것도 없이 그저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한다.

서핑하는 녀석들도 있고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놈들도 있다.

알로하 셔츠를 입고 음료를 한잔 든 채 바닷가에서 책을 읽는 녀석도 있고 데이트를 하는 녀석들도 있다.

그야말로 자유로움 그 자체인 곳.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네.

재밌는 건 호텔들이 모여있는 곳 한가운데는 상점들도 있었다.

돈을 받거나 하는 모습은 없다. 그냥 음식을 달라고 하면 주고 음료를 달라고 하면 준다.

그렇게 음료를 받아 해변 공원을 가로질러 해변으로 가는 비키니 차림을 한 금발 여자.

따듯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간 그녀는 파라솔이 설치된 선베드에 누워 느긋하게 여유를 만끽한다.

조금 뒤 복근이 튼실한 남자 하나가 그런 여자에게 다가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여자는 안경을 조금 내리고 남자의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고 남자는 그녀의 옆에 앉더니 본격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얼마 뒤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가볍게 뭔가를 먹고 그대로 한 호텔 방으로 들어가는 남녀.

그리고 시작된 동물의 왕국.

어우. 정말…. 다이나믹하게 섹스하네.

마치 쾌락에 목마른 짐승 두 마리 같다. 무슨 서양 포르노 보는 기분이네. 좀 과한 느낌이야.

박고 박고 박고…. 어쨌든 뭐, 즐거워 보인다. 지들이 좋다는데 내가 과하니 마니 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한참을 섹스한 남녀는 서로 만족할 때까지 물고 빨고 박더니 쿨하게 관계를 끝냈다.

남자는 침대에 널브러져 있고 여자는 간단하게 몸을 씻은 뒤 다시 비키니를 걸치고 다시 음료를 받으러 내려간다.

그리고 또다시 바닷가로 향하는 모습.

점심이 될 때쯤엔 그런 일들이 아주 흔한 모습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눈이 맞아 호텔로 들어가는 남녀. 아니, 꼭 남녀 한 쌍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여러 쌍이 함께 한 방으로 가서 다 같이 물고 빠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여자 하나에 남자 여럿이 붙어서 가는 경우도 있고.

진짜 동물의 왕국이네. 여기는 무슨 섹스 아일랜드인가?

웃긴 건 오늘 처음 오게 된 녀석들이었다. 오늘 크라켄 본부에서 온 뉴비 놈들.

마치 도시에 처음 온 듯한 촌뜨기의 모습으로 주변 상황을 살피는 녀석들.

하지만 먼저 왔던 친절한 선배들의 도움으로 그들 역시 빠르게 이 섬의 분위기에 물들어간다.

하. 진짜 웃기네. 대체 여기는 뭐 하는 곳일까?

아직 그리 오래 지켜보진 않았지만, 굉장히 어처구니가 없다.

먹을 것 걱정도 없고 안전의 위협도 없고….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되는 건가?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대가라는 거야?

빨리 기억을 읽어 봤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녀석들이 알고 있는 게 뭔지, 여기에서 왜 이러고 있는지에 대해 빨리 알아내고 싶네

이정도로 녀석들이 자유롭게 다닌다면 밤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긴 하다.

먹잇감으로 할만한 녀석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물론 녀석들이 알고 있는 게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거라도 미리 알고 있는 게 나을 거 같다.

일단 오늘 온 크라켄 본부의 늅늅이를 먼저 찾아본다.

아까 오전에 받았던 교육. 그게 뭐였는지 궁금하다. 그것부터 알아봐야지.

먼저 와있던 여자 선배에게 헌팅 당해 호텔 방으로 온 남자 놈 하나.

방금까지 신나게 섹스하고 침대에 누워서 '이곳은 천국이야'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

여자가 나간 뒤에도 앞으로의 생활이 기대되는 듯 얼굴 가득한 미소를 지우질 못한다.

새끼. 그렇게 좋을까? 하긴. 안좋을 리가 없겠구나.

일단 녀석을 재웠다.

다들 창문을 활짝 열고 있어서 멀리에서도 수면을 걸기가 쉬운 건 좋네.

그리고 다가가 바로 기억을 읽는다.

읽을 게 많지 않아 기억 읽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다시 바깥으로 나가 녀석에게 무효화를 뿌려준다.

자기가 잠깐 졸았다는 거로 착각한 녀석. 뭐…. 저놈은 됐고.

녀석들이 받은 교육은 그리 복잡하진 않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에 대한 간단한 교육.

하면 안 되는 것들도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딱 세 가지.

스킬을 쓰지 말 것, 섬을 벗어나지 말 것,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 것.

그것만 거스르지 않으면 이 섬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즐거운 생활을 만끽할 수 있다는 말.

할 수 있는 것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야말로 지상 낙원 같은 곳?

내가 봤던 것처럼, 음식과 음료는 얼마든지 무료로 얻을 수 있다.

책이나 음악, 동영상이나 전자기기 같은 것들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고.

게다가 몸이 불편한 이들은 힐이나 질병 해제, 신체 복구까지도 마음껏 받을 수 있다.

이놈들은…. 무슨 사회 실험하나? 이해를 할 수 없네.

대체 이놈들로 뭘 하려고 이렇게 같은 편의를 다 봐주는 거지?

뉴비의 기억은 됐으니 이번엔 여기 있던 녀석들의 기억을 읽어 봤다.

운이 좋게도 녀석은 이곳에 온 지 꽤 된 거 같다. 한 두어 달 정도?

그래서 그런지 알고 있는 게 제법 많다. 여기에서 시간을 확실하게 보낼 방법들.

뉴비들은 아직 모르는 진짜 오락이 있는 곳.

일단 도박장. 그래. 이런 게 없을 리가 없지.

근데 그것도 불법이 아니다. 크라켄에서 지어놓은 깔끔하고 전문적인 도박장이 있다.

갖가지 도박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곳. 대신 하루에 지급되는 칩의 개수는 한계가 있는 거 같다.

하긴…. 무제한으로 하는 도박이 무슨 재미가 있겠어. 허무하기만 하지.

그리고 웃긴 건…. 마약을 제공하는 곳이 있다.

그것도 불법이 아니다.

전문가가 정확한 용법과 적절한 투여를 함으로 최소한의 투약으로 최고의 효과를 내게 해주는 곳.

취향에 따른 칵테일 믹스는 물론이고 이력 관리를 통해 적절하게 관리까지 해주는 곳이다.

게다가 애프터 서비스로 질병 해제까지 확실하게 걸어준다.

미친놈들. 어처구니가 없네.

이건 사회 실험 수준이 아닌데? 대체 뭐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무슨 의도일까?

그 외에도 각종 취미 활동이나 시음, 시식…. 모든 것이 가능한 곳.

하와이는 그런 곳이 되어있었다.

녀석들이 모여있는 섬 바깥으로 나가서 주변의 다른 섬들을 돌아봤지만, 주변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딱 호놀룰루가 있는 저 섬. 저곳만 저렇게 되어있어.

근데 생각해보면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긴 하다.

풍경도 좋고 살기도 좋잖아?

게다가 일반인들이 비행 같은 거로 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다.

GPS가 맛이 간 이상 배나 비행기로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거리가 몇천 킬로씩은 되는 곳이니까.

문제는…. 이곳을 만든 의도를 모르겠다는 것.

그건 아까 뉴비들을 데려온 그놈의 기억을 읽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녀석은 함부로 재울 수는 없으니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겠네.

그렇게 하와이 시간으로 오후 네 시 정도가 됐을 때, 나는 집으로 순간이동 했다.

한국 시간으로 따지면 오전 11시. 슬슬 이쪽도 준비해야지.

정오에는 승미세안과 민희가 만나기로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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