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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
부서진 에펠탑을 지나 이번엔 동쪽으로 계속 날아가 봤다.
내가 비행 속도가 빨라져서 그런 거겠지만, 유럽은 되게 작게 느껴진다.
파리에서 고작 한 시간 정도 날았는데 어느새 독일을 벗어나 폴란드 국경에 닿았으니까.
그렇게 이동하면서 알게 된 건 독일에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소규모로 모여 사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있는 게 보인다.
아직 여기는 잡아 죽인 놈이 없었나 봐.
기억을 읽어봐도 이 사람들은 세상이 망하기 전부터 계속해서 살던 사람들이다.
어디에서 이주해오거나 한 사람들이 아냐.
그래서 그런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별 관심 없는 사람들.
누구를 해치거나 싸울 생각 없이 그저 살아남는 것이 목적인 이들.
그냥 생각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놈들이지만 그냥 놔두고 떠났다.
죽이는 것보다 그냥 놔두는 게 낫다. 그래야 다음에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까.
하다못해 다음에 왔을 때 죽어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정보가 되지.
누군가 왔다 갔다는 걸 알 수 있잖아?
그렇게 조금 더 돌다가 다시 런던으로 순간이동 했다.
사람들이 잘 시간이 됐으니 슬슬 기억을 읽어봐야지.
근데 버킹엄 궁전에 있는 놈들은 크라켄 본부에 있는 놈들과는 다르게 일찍 잠드는 놈들이 별로 없다.
우르르 모여서 왁자지껄하게 술판을 벌이는 녀석들.
버킹엄 궁전 정원에서 불을 피우고 바비큐를 해 먹는 건 조금 색다른 느낌이긴 하겠네.
술 마시고 음식을 먹고 소리 지르면서 노래 부르고 떠드는 모습.
아까 처음 온 캐나다인도 불려 나와 이들과 어색하게 어울린다.
아니…. 잠이나 쳐 잘 것이지….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정말.
그런 녀석들을 바라보며 소주 생성 숙련을 한다.
빨리 좀 끝냈으면 좋겠네. 기다리기도 지겨워.
시간이 지나며 한 놈씩 자리에서 빠져나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결국 마지막에 남은 놈들까지 자리 정리도 안 하고 적당히 취한 모습으로 들어간다.
어휴. 드디어 들어갔네. 드럽게 꾸물거리기는.
하나둘씩 불이 꺼지는 방. 그렇게 버킹엄 궁전이 드디어 어둠에 물들었다.
근데…. 이래도 되는 건가?
불침번 같은 건 없는 거야? 경계는? 그냥 무방비?
아니 애초에 술을 처먹은 것부터가 문제다. 그걸 놔두는 윗대가리 놈들도 이해가 안되고.
무슨 캠핑 하러 온 거야? 워크샵이라도 왔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야. 어처구니가 없어.
그렇게 녀석들이 전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한놈씩 기억을 읽는다.
술냄새와 고기냄새가 진동하는 놈들. 아. 진짜 싫다. 특히 술 냄새는 참기가 힘들 정도다.
이 새끼들은 대체 뭘 먹었는데 냄새가 이렇게 심해? 맘에 안 드는 것투성이네. 진짜.
더 짜증 나는 건 이놈들은 읽을만한 기억이 별로 없다는 거다.
별로 아는 게 없는 놈들. 영양가가 없다. 기다린 보람이 없어.
그런 녀석들을 무시하고 바로 윗대가리 녀석을 찾았다.
아까 캐나다인을 데리러 온 녀석.
그러니까 이놈들이 부르기로는 유럽 지부장이라고 하는 녀석.
녀석은 크라켄 본부의 치프보다는 높은 거 같은데…. 이놈도 아는 게 그렇게 많지는 않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들이야. 사고방식이 궁금하네.
자세한 설명도 없이 임무만 휙 던져주고 '자네가 필요한 일이야. 해줄 수 있겠나?'라고 말하면 사명감 넘치는 얼굴로 '맡겨만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녀석들.
아주 지들이 무슨 슈퍼 솔져인 줄 아나 봐.
이 정도로 헌신적이고 사명감을 가질 필요가 있는 거야?
그래도 뭐,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니 됐다. 정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까.
여기 유럽 지부장 녀석을 빼고 나머지들은 그냥 용병 같은 녀석들이다.
일정 기간 전선에서 '봉사' 와 '헌신'을 하면서 생존하면 비로소 정식으로 크라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조건.
아마 서민준이 왔어도 똑같았을 거다. 여기 용병 놈들이 전부 미국인인 건 아니니까.
근데 대체 크라켄 이놈들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런 놈들이 자발적으로 이렇게 소속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네.
그런 건가? 피할 수 없으면 합류하라?
그게 나쁜 선택은 아니다.
아니긴 한데…. 이 세상의 진짜 목표를 알고 있는 나에겐 약간 우스운 이야기다.
용병으로 들어온 녀석들이 아무리 봉사와 헌신을 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걸 순순히 받아줄까?
받아줄 리가 없을 거 같은데.
어쨌든 그건 그렇고….
유럽의 판도를 대략 알게 되었다.
현재 유럽은 세 개의 세력이 격돌하는 중이었다.
하나는 미국.
이미 캐나다와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영국을 전부 정리한 녀석들.
씨발. 남미도 까고 있으면서 북쪽은 이미 다 정리했다고? 하여간 양키놈들도 대단한 놈들이네. 짱개 못지않아.
이크. 너무 심한 욕인가? 미안해. 양키들아. 말이 너무 심했지?
어쨌든 그렇게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 영국을 무인도로 만들어버린 녀석들은 이제 프랑스를 치고 있다.
파리까지 가면서 사람을 찾을 수 없던 건 여기 있는 놈들의 작품이었어.
그리고 또 다른 세력. 유럽의 이름 모를 언노운.
언노운이라고 하니까 왠지 무명같네. 뭐, 사실 대충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
어쨌든 언노운은 혼자인지 다수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정보가 없는 이유는 만나는 놈들은 다 죽었거나 도망치기 바빠서 정보를 얻을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
그나마 알려진 정보로는 스위스 독일어를 한다는 점? 그리고 스킬이 엄청나게 많다는 거?
그래서 이놈들은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근데 이놈이 장룡 같은 놈이라면 한 놈일 수도 있어. Q&A를 쓴 놈일 수도 있고.
마지막 세력은 나도 아는 이름. 스멜리 코퍼레이션.
러시아의 경호회사. 교관 놈들과 경호원들.
그놈들이 결국 동유럽 쪽을 다 밀어버리고 서서히 서쪽으로 진출하고 있는 거였다.
하긴…. 핏맨 같은 놈들이 있다면 어지간한 놈들로는 막기가 힘들겠지. 게다가 교관은 한둘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유럽 땅에서 세 세력이 서로 민간인 학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런 거 보면 아까 봤던 독일 사람들은 운이 좋은 거네. 딱 정중앙에 있어서 아직 화를 피한 거잖아?
그렇게 정보를 알아냈긴 했지만…. 사실 뭘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이놈들이 위치와 장소를 정하고 만나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전부 알 수도 없다.
사실 지들끼리 싸우다가 알아서 서로 죽어주면 그게 좋은 거긴 한데.
언노운이라는 놈이 상당히 걸리네.
만약 녀석이 나 같은 놈이라면…. 상당히 위험한 놈이다.
결국, 여기 있는 이 잡놈들이나 스멜리 코퍼레이션 놈들도 신나게 코인을 모아서 녀석에게 상납하는 꼴 밖에 안 되잖아?
귀찮네. 번거로워.
녀석이 본거지가 있으면 모를까, 그런 게 없다면 찾아서 죽이기도 쉽지 않다.
대체 어디에 있을지 알고.
그래도 베일에 싸여있던 유럽의 상황을 어느 정도는 알아내서 다행이다.
그동안 신경을 못쓰고 있어서 조금 찝찝하긴 했는데.
그럼 이제 남은 지역은…. 아프리카와 중동인가? 아. 호주도 있구나.
근데 호주는 뭐 크게 신경 안 써도 되겠지. 오세아니아 대륙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거기 인구는 남한 인구보다 적다.
땅덩이만 큰놈들.
언제 한번 확인은 해봐야겠지만, 그리 위협적이진 않을 거야.
아마 소나 키우고 있으면서 스테이크나 먹고 있겠지.
중동은 내가 잘 몰라서 모르겠지만, 아프리카는 무시할 수 없다.
거기도 인구가 많잖아. 게다가 거기는 알려진 것보다 더 인구가 많을 수도 있어.
어쨌든 활동 범위가 전 세계로 늘어나 버리니 신경 쓸 게 많아져서 귀찮네.
이럴 줄 알았으면 세계사에 관심을 가져볼걸.
그나마 세계지리는 쪼금 알고 있는 게 다행이랄까.
볼일은 다 봤으니 다시 미국으로 순간이동 한다.
정보가 많아지긴 했지만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크라켄 본부를 지켜보면서 스킬 숙련하기.
일단은 그게 먼저야.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시간 낭비하느니 일단 내실부터 다지는 게 맞아.
이쪽 유럽은 생각날 때마다 들려서 한 번씩 확인해주는 거로 충분해.
밤이 돼서 전부 각자 방으로 돌아간 크라켄 본사의 녀석들.
딱히 녀석들을 보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들을 지켜보면서 소주 생성 숙련을 한다.
그렇게 머리가 어지럽고 더는 하기 힘들 때까지 소주를 생성한 나는 바로 벙커로 돌아갔고, 그대로 쓰러져서 내게 수면을 걸고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시간은 거의 자정이다.
아. 정말 낮밤 바뀐 생활을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힘드네.
시차 때문인가? 묘하게 힘들어.
내가 일어나서 나가자 막 잘 준비를 하려는 네 여자가 보인다.
"오빠 일어났네요?"
승희를 비롯한 미나와 안나가 나를 보고 웃어준다.
"어!? 마침 잘 일어났어! 있잖아! 내 이야기를 들어봐."
그리고 세아의 흥분한 목소리.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자기가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며 말한다.
"그래서…. 그랬는데…. 그래가지고…."
뭔가 이야기가 길지만, 결국 요약하면 간단하다.
관리되고 있는 료칸을 발견했다는 것.
세아의 말대로라면 나이 조금 있는 여자 주인과 그 딸이 있는 료칸을 발견했다는 거다.
게다가 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이미 온천욕을 한번 하고 왔다는 것.
"...바보야?"
"왜!?"
"그 사람들 믿을 수 있어? 갑자기 공격하면? 온천에 수면제라도 탔으면?"
"하. 오빠 진짜 사람 안 믿는구나? 설마 내가 그것도 확인 안 했을 거 같아?"
"뭘 어떻게 확인했는데? 기억이라도 읽어 봤어?"
"꼭 기억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거의 사흘을 지켜봤다고. 별문제 없어. 나도 괜찮으니까 움직인 거야!"
그래…. 뭐 세아가 그렇게 생각 없는 애는 아니니까.
그래도 위험은 확인해야겠지. 확실하게 알아보는 게 가장 좋아.
"거기 게이트 열어봐. 내가 확인하고 올 테니까."
"어렵게 찾은 곳이야. 엉망으로 만들지는 마."
"나도 알아."
세아가 게이트를 열어줬고, 나는 바로 넘어갔다.
어두컴컴한 산속. 그리고 그런 산골짝에 있는 그럴듯한 건물들.
세아가 말한 료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주변에 여러 건물이 있긴 한데 기척이 느껴지는 건 딱 한군데뿐이다.
두 사람의 기척. 저게 세아가 말한 모녀인가?
천리안과 투시로 살펴보려 했지만, 너무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
그래도 오래 보고 있으니 어둠에 눈이 익어 어느 정도는 보이게 됐다.
두 사람은 자는 거 같다. 평범한 중년의 여자, 평범한 젊은 딸.
딱히 이쁘거나 하진 않네. 아쉽게도.
미모의 료칸 여주인과 그 딸의 모녀 덮밥 같은 걸 상상한 내가 나쁘네. 내가 잘못했어.
아래로 내려가 두 사람을 재우고 기억을 읽었다.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던 이유, 이렇게 사람 없는 곳에서 둘만 있는 이유.
뭔가 의심을 가지고 기억을 읽었지만, 내가 틀렸다.
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어.
의외로 이 둘은 험한 일도 당한 적 없고 끔찍한 경험을 겪은 적도 없다.
대대로 이어오던 가업을 그저 이었을 뿐인 사람들.
세상이 주변 사람들이 전부 살길을 찾아 떠났지만, 그저 그럴 용기도 없어서 남아있던 모녀.
다행히 둘 다 스킬을 성장을 골랐기에 작은 논밭과 닭들을 키우면서 소박하게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
참…. 이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지극히 평화로운 사람들이네. 어떻게 보면 이들이 가장 행복한 걸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은 사람들이야.
다시 벙커로 돌아가자 다들 자러 들어갔고, 세아만 남아서 안자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확인했어?"
"어. 별거 없더라. 근데 너 되게 사근사근하게 굴더라?"
여주인과 딸의 기억에서 세아는 굉장히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아가씨였다.
매번 나에게 반말을 하는 괄괄한 모습을 보다가 얌전한 모습의 세아를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니 상당히 색다른 기분이 들 정도.
"캭! 내가 뭐 아무한테나 이러는 줄 알아!?"
"뭐야. 그럼 이러는 게 나한테만 특별 대우하고 있는 거였어?"
소파에 앉아있는 세아의 옆에 앉은 다음 그녀의 등과 다리 사이에 팔을 넣고 번쩍 들어서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의외로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안기는 세아. 아예 나의 몸에 체중을 실으며 자신의 몸을 기댄다.
"왜 가만히 있어?"
"쫌. 그런 건 입으로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래. 미안."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던 세아.
"나 거기 료칸 계속 갈 거야."
"가. 크게 문제는 없을 거 같아. 딱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노리는 것도 아니고. 스킬이라고 해봐야 여주인이랑 딸 둘 다 성장이던데. 문제 없겠지."
"집에 있는 식량 조금 써도 돼?"
"어. 마음대로."
"그리고."
"음?"
"나랑 같이 한번 가자."
"나?"
"어. 그럼 누구겠어.“
”나랑만?"
"아니. 다들 같이 갈 거야. 승희랑 미나 언니랑 안나도. 근데 둘만 한번 가."
덤덤한 척하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약간 부끄러운 듯 평소와 반응이 다르다.
귀여운 녀석. 이렇게 말하면 또 사람 설레잖아.
"그래. 알았어. 가고 싶을 때 말해. 언제든지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