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11화 (51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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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미친 결과물요?"

"저 사람.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뭐라고 해야 하나. 대단한 사람이긴 합니다. 기발함? 천재적인? 그런 게 있어요."

"흐음. 하긴. 아까 보인 반응만 봐도 정상인은 아닌거 같더군요. 아, 그런데…. 개성 공략이요?"

"아아. 그거요. 일단 가실까요? 여기 계속 있으실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가죠. 그럼."

"근데. 저거 공기총…. 대체 저건 또 어디서…."

"아. 저도 할 말이 많네요."

"러시아에서 가져오신 겁니까?"

"아뇨. 저건 부산인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정 부장의 방으로 돌아갔다.

소파에 앉아 지난번에 다 못했던 부산과 일본의 이야기까지 해주니 정 부장은 정말 신나는 표정으로 말한다.

"캬. 그럼 한국통이에요?"

"통…. 와. 세대 차이 확 나네요. 근데 부장님 세대도 통이라고 하진 않았을 거 같은데? 그때는 짱 시대 아닌가요?"

"한국 짱은 좀 맛이 안 살잖아요. 한국 짱이 뭐야. 한국 짱이. 응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네요. 한국 짱…. 큭."

나와 정 부장은 왜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큭큭 대고 웃었다.

아. 이거 별거 아닌데 왜 웃기지.

암튼 둘 다 바보같이 큭큭거리다가 한참 만에 멈추고 다시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또 웃었다.

미치겠네. 제정신이 아닌가 봐.

"아어. 진짜 오래간만에 웃었네요. 암튼…. 큭. 아오. 그만해야지. 아무튼, 아직 숨은 실력자가 더 있을 수 있죠. 은둔 고수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한국 특성상 대도시에서 벌써 두각을 보인 게 아니면 뭐, 쉽지 않겠죠. 코인은 농사지어서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 이제 그럼 부장님 차례에요. 개성 공략? 그 개성을 말하는 거예요? 개성공단의 그 개성?"

"네. 맞아요. 개성까지 가는 길은 전부 정리됐어요."

"와. 생각보다 빠르시네요."

"파주로 갈 생각을 접었으니까요. 원래는 파주, 그러니까 문산에서 한 번 더 터를 잡은 다음 올라갈라 그랬죠. 근데 성철 씨 말을 듣고 그냥 여기서 바로 밀고 가기로 했어요. 게다가 북한은…. 아. 혹시 북한 상황은 아세요?"

"블라디보스토크 가면서 봤죠."

"아. 직접 보셨으면 확실히 아시겠네. 거긴 정말 평화로워요. 다들 배 채우느라 정신이 없어."

"그래 보이더라고요. 우리나라 70년대? 80년대 그쯤 농촌 같은 느낌이던데."

"맞아요. 거의 그런 느낌이죠. 그래서…. 정리하기도 편하고요."

그런 말을 하는 정 부장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나 미안함, 가식 같은 건 없었다.

이게 이 사람의 가장 좋은 점이다. 이야. 오늘 좋은 점 많이 찾네.

하긴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라는 소리지.

인권이니 민간인이니 뭐니 어쩌니 그런 소리 하면서 어설프게 일을 처리했다면 실망했을 거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런 느낌이 없다. 정리했다고? 정말 깨-끗하게 정리했겠네.

사람 하나 남기지 않고.

"코인 수급이 제법 됐겠네요. 실행하는 사람들의 반발은 별로 없습니까?"

"애초에 지원자로 뽑았으니까요. 나약한 소리 찍찍할 사람들은 뽑지도 않았습니다."

"믿음직스럽네요. 근데 진짜 웃기네. 그거 알죠? 우리는 살인마들을 뽑아놓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거잖아요?"

"뭐, 세상이 세상이니까요. 저나 성철 씨나 그보다 더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쵸. 저야 뭐. 어휴. 할 말이 없죠."

잠시 정적. 그렇다고 자괴감이나 자기합리화를 위한 침묵은 아니다.

그냥 문뜩 와닿은 거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을.

"그럼 그 개성에는 사람이 많아요?"

"사람이 많지는 않아요. 원래 별로 큰 도시는 아니거든요. 게다가 알다시피 도심은 식량을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죠."

"근데 공략이라면서요?"

"스킬 좀 있다고 으스대는 놈들이 있더라고요."

"오올. 어느 정도인지는 아시고요?"

"많아야 다섯 개 정도라더군요. 그거 듣고 얼마나 웃었던지."

"왜요?"

"저는 성철 씨를 아니까."

"또 접니까."

"아니…. 100배 줌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돋보기 보고 놀라겠느냐고요."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제게는 그렇게 보여요. 스킬 한 개 있는 사람과 열 개 있는 사람의 차이가 단지 열 배인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긴 하죠."

"어쨌든 우리 전력이랑 비교하면 사실 엄청난 놈들이거든요? 우리들 수준이라고 해봐야 이제 스킬 서너 개 정도니까."

"오. 네 개 찍은 사람들이 있어요?"

"있죠. 성철 씨의 그녀들."

"엥? 아아. 지금 거기 누가 갔어요?"

"다요. 탐색조 분들은 전부 다 개성 근처로 갔어요."

"진짜요? 정현이나 지아도?"

"네. 우리 펜스의 마스코트들인걸요. 근데 또 싸움은 제일 잘해."

"아…. 고생하겠네. 죽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걱정되시면 한번 가보실래요?"

그러면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 부장.

어휴. 그렇게 대놓고 떠보시면 내가 할 말이 없지.

"안 가요. 어차피 못 가게 할 거면서. 게다가 갈 거라고 생각도 안 했잖아요. 새삼스럽게."

"얼래. 너무 티 났습니까?"

"우리끼리는 이러지 맙시다. 난 정 부장님 같은 사람하고 머리 싸움하기 싫어요. 힘들어."

"뭐, 이 핑계 저 핑계 대긴 했을 겁니다만 필사적으로 말리진 않았을 거예요. 물론 성철 씨가 갈 생각이 없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었지만."

"가서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는데 뭐하러 가요. 괜히 부장님이 만들어 놓은 식탁에 숟가락 올리려다 밥상 뒤집는 꼴만 나지."

내 말에 정 부장은 빙긋 웃는다.

그래. 지금 거기에 가는 건 절대 하면 안 되는 짓이다.

갈 거였으면 애초에 처음부터 내가 이끌고 통솔하며 갔어야 했다.

지금 가서 내가 싹 쓸어버린다고 해도 결국은 말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쉬운 걸 왜 진작 안 오고 이제야 어기적거리며 등장했냐' 부터 시작해서 온갖 소리는 다 들을 거다.

얻는 것은 쥐똥만큼 밖에 없는데 잃을 것만 잔뜩 있는 자리.

게다가…. 이제와서 내가 거기에 가는 건 정 부장에게도 좋지 않다.

이들에게 맡겨놨으니 나는 그저 끝까지 뒷짐 지고 있을 수밖에 없어.

"장비나 이런 쪽으로 우리가 우수하니 크게 문제없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들은."

게다가 이 남자는 내가 여자들 몇 명 말고는 이곳에 크게 애정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걸 아는 사람에게 칠푼이 같은 모습을 별로 보이고 싶진 않다.

게다가 그건 그녀들을 위해서도 좋지 않고.

"뭐, 걔들도 겪어봐야죠. 크게 걱정하진 않아요."

"그래요. 경험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아. 그나저나. 오늘 오신 목적은 그럼 다 이루신 건가요? 식량만 챙기시면 되나요?"

"네. 아. 근데 아까 그 경호업체는 왜 물어본 거예요?"

"아. 그거요? 아까 보여드린 화살 있죠? 포획 화살."

"네."

"그걸로 그 녀석들에게 통할까 해서 물어봤죠. 성철 씨라면 알 수 있을 거 같아서."

"통해요. 일반 경호원들. 스킬 여섯 개 일곱 개 이 정도 녀석들은 통할 거 같아요. 물론 개인 기량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화살을 피하긴 쉽지 않죠. 보호막을 상시 켜놓기도 힘들고. 근데 그렇게 시야를 막아도 제압이 안 되지 않나요?"

"저희의 주공격 수단은 어쨌든 최루탄이니까요. 블링크만 못하게 해도 위력이 확 올라가거든요."

"아. 어쩐지. 그럼 되겠네요. 포획 화살이랑 최루탄 콤보라. 이야. 당하면 정말 속절없이 당하겠네. 어디 보자. 도망갈 수 있는 건 순간이동밖에 없나? 페이즈 아웃이랑? 근데 그거 최루탄. 독해요? 당하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감이 안 잡히네."

"군대 안 갔었다고 했죠?"

"네."

"성철 씨가 화생방을 안 해봤으니 설명이 안 되네."

"그게 그렇게 힘든가요?"

"음. 한번 해볼래요? 체험?"

그러면서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정 부장.

"와. 올해 들었던 농담 중에 가장 재밌는 농담이었어요."

근데 정 부장의 눈이 심상치 않다. 왠지 진짜 체험시키고 싶어하는 느낌인데.

"안 해요."

"아. 아쉽네. 살면서 한 번쯤은 해봐야 하는데."

"그거 왠지 나만 당해본 게 억울하다…. 뭐 그런 뉘앙스인데요."

"그거 맞아요."

"캬. 솔직하신 분."

그렇게 실없는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나는 중요한 이야기를 슬슬 꺼냈다.

"부장님."

"네?"

"여기 펜스에는 없는 사람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쵸. 어지간해선 다 있죠. 핵물리학자 이런 사람은 없지만."

"아. 그건 좀 빡쎄네. 암튼, 그럼 당연히 도축하는 분도 있을 거고요?"

"도축요? 어휴. 다섯 명 있죠. 아. 다섯 명 맞나. 네 명 됐나? 암튼 있어요."

"그럼 소 한 마리만 잡아줄 수 있어요?"

"소? 소를요?"

"좀 힘든가요?"

"아뇨. 소 정도야 뭐 널널하니까요. 왜요? 소고기가 먹고 싶어서요?"

"네. 그리고…. 곱창도 가능해요?"

"물론이죠. 소 잡고 부속을 다 내다 버리는 거 아니니까."

"이야. 역시 이사장 그 새끼는 죽일 만했어."

"크크크. 그럼 지금 바로 갈래요?"

"아. 지금 바로 돼요?"

"어휴. 우리가 날마다 소를 몇 마리 잡는다고 생각해요. 가요. 가면 막 잡은 것들 있을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일어서서 식당 쪽으로 향했다.

확실히 인원이 많으니 이런 게 좋다. 필요한 게 바로바로 얻어진다는 건 즐거운 일이야.

그렇게 도착한 식당 뒤쪽에 있는 도축장.

생각보다 깔끔한 시설. 그리고 막 잡고 있는 소 한 마리.

하루카가 생각났지만, 비교가 안 된다.

하루카가 이제 막 찌르기 베기를 하는 검사라면 지금 소를 잡은 이 아저씨는 거의 절정고수 같은 느낌이다.

저게 매화검수고 저게 신검합일이 아닐까?

무슨 칼질 한 번에 뼈가 저렇게 쓱 발려 나가냐. 진짜 장인의 세계는 대단하구나.

정 부장이 아저씨에게 다가가 부탁하자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한다.

"시간 좀 걸릴낀데 계속 지켜볼끼가!?"

슥슥 칼질을 하며 무심하게 말하는 아저씨. 처음엔 나한테 물어보는지 몰랐다.

"네? 아. 저한테 하신 말이에요?"

"니 말고 또 누 있나?"

"구경해도 되는 거면 보죠."

"그라끼가."

그러더니 안쪽을 향해 소리친다.

"장수야!"

밖에서 빠릿빠릿하게 생긴 남자 하나가 들어왔고, 남자는 그저 턱짓을 한번 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걸 보고 바로 준비를 했고 새로운 소 한 마리를 들여온다.

근데 캬. 아저씨 느낌 있네. 나도 나중에 저렇게 과묵하고 카리스마 있는 중년이 될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지켜보는데…. 진짜 홀리는 기분이다.

신기하네. 어떻게 저렇게 되지?

두 사람이 쓱쓱 요래 요래하니 저 커다란 소가 순식간에 내가 아는 그 고기의 모습으로 변한다.

이야. 마술이야. 마술. 신기해.

한 시간쯤 됐나? 어느새 차곡차곡 담기게 된 소 한 마리 분량의 고기.

마무리를 하고 칼 손질을 한 아저씨는 별거 아니라는 눈빛으로 무심하게 자신이 썰어놓은 고기를 보며 말한다.

"가가라."

"고맙습니다."

그러면서 수납을 열어 고기를 그대로 담았다.

무심하던 눈빛의 아저씨는 수납을 보고 탐난다는 표정이 된다. 와. 표정 변화도 있었네.

하긴, 저런 사람들에게 수납은 최고의 스킬인데.

나는 잠시 고민했다가 안에서 양주 두 병을 꺼냈다.

어차피 나야 술은 안 먹으니까. 이게 얼마나 좋은 건진 모르겠지만, 뭐 왜 이런 걸 줬냐는 소리는 안 하겠지.

일단 제일 좋아 보이는 거로 두 병 꺼냈으니까.

"머꼬."

"선물요."

"만다꼬."

"저 때문에 괜히 고생하셨으니까?"

잠시 내가 꺼내놓은 양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저씨는 그걸 집어 아까 그 장수라고 불렀던 남자에게 건네주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니 자주 와라."

짧은 그 말에 많은 게 느껴진다. 참…. 재밌어. 원래는 나이든 남자는 정말 끔찍하게 싫은데, 저런 사람들은 괜찮단 말이지.

그렇게 가볍게 꾸벅 인사하고 도축장을 나왔다.

"저 때문에 괜히 같이 기다린 거 아니에요?"

"아니요. 어차피 저도 온 김에 여기서 해야 할 것들 처리했으니까요. 괜찮아요."

하긴, 계속 정신없이 뭔가를 확인하고 어딜 갔다 오고 하더라니.

정 부장 이 사람도 참 바쁘구나. 역시 세상엔 쉬운 게 없지.

"식당에 식량 준비해놨으니 가죠. 그리고 바로 갈 거죠?"

"빨리 갔으면 좋겠죠?"

"네. 어휴. 평소에는 빨리 가더니 오늘은 너무 오래 있었어. 빨리 가요."

"크크크."

나도 모르게 애 같은 웃음이 나온다. 하여간 여긴 유쾌한 사람들이 많아서 좋아.

그렇게 식량을 챙기고 펜스를 나섰다.

확실히 펜스는 잘 얻은 거 같아. 덕분에 이렇게 소고기도 얻었고.

햐. 오늘 저녁 각오해라. 벙커에 고기 냄새로 진동을 하게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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