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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 계획
아침.
방해받지 않고 나름 만족스러운 아침을 보낸 미나의 얼굴이 밝다.
너무 티 내는 거 아냐? 저러면 다들 어지간히 둔하지 않은 이상 알아챌 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말해주는 것도 웃긴다. 그냥 놔둬야지. 알아서 잘 할 거야. 그런 여자니까.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오늘도 비행하러 나가기 전에…. 의정부를 먼저 들린다.
캐슬. 이제는 의정부로 이전했으니 뉴캐슬인가?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피식하고 웃겠네.
이미 아침 시간이 조금 지나서 그런가 민희는 내가 쓰던 방에 없었다.
업무를 하고 있나? 어디 있으려나.
공중에 올라가 탐지와 천리안, 투시를 켜고 사람들을 훑어본다.
사람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아서 빠르게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금방 발견한 민희.
사람들 사이에서 둘러싸여서 뭔가를 하는 모습.
바로 그쪽으로 내려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희는 물론 주변 사람들도 내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놀라지도 않는다. 다들 몇 번 봤다 이거지?
"왔어요?"
"뭐해?"
"스킬 숙련요."
"아. 광역 스킬 무효화?"
"네."
민희는 스무명 가까이 모아놓고 스킬을 쓰고 있다.
스무명이 스킬을 쓰면 민희가 지우는 방식.
와. 사람 동원이 되니까 이게 가능하네. 이러면 20배 빠르게 스킬 숙련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잖아?
20명이나 모을 줄 몰랐네. 이야. 역시 사람이 많으면 이런 게 가능하구나.
"지금 숙련도는?"
"고급 35퍼센트요."
"어. 그러면 한 3,300번 남은 건가?"
"음. 그러네요."
"스무명? 이야. 금방 하겠네."
"그렇게 빨리는 못 해요. 이들도 스무 번 스킬을 전부 쓸 수는 없으니까."
"왜? 아. 포션 다 먹었지?"
"네."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광렙 기회가 있는데 안한다? 그건 업무 태만이다.
신경을 못 쓰고 있었으면 모를까, 신경 쓴 이상 바로 봐줘야지. 게다가 20배 빠르게 숙련을 할 수 있는데 안 한다고?
그건 말도 안 된다. 내가 대가리에 총을 맞지 않는 이상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어디 보자. 3,300번. 20배 빠르게 되니까 165번. 민희 너는 중급 포션이니까 다섯 개만 먹으면 되네. 자. 일단 받고."
중급 포션 열 개를 사서 민희에게 안겨준다.
"다섯 개라면서 왜 열 개를 줘요?"
"일단 받아. 그리고…."
모여있는 스무명. 165번이니 이들은 스무 번씩 쓸 수 있으니 하급 포션 아홉 개씩.
포션을 사서 스무 명에게 골고루 나눠준다.
포션을 받고 어리둥절한 모습. 하긴, 이들 중에는 포션을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
"자. 지금부터 구령에 맞춰서 스킬을 씁니다. 빠르고 절도있게. 165번 정도는 금방이니까 시키는 대로 하세요. 자. 그럼 '준비'라는 말에 각자 버프를 켜요. 버프를 킨 다음 자기의 오른손을 듭니다. 오른손을 모두 드는 걸 확인하면 민희는 바로 무효화를 써. 자기 버프가 꺼지면 바로 오른손을 내리세요. 다들 협조만 잘되면 금방 끝나는 일입니다. 자. 그럼 바로 해보죠. 준비."
다들 황당해하면서도 내 말은 고분고분 따라준다.
준비라는 말에 다들 각자 버프를 쓰고 오른팔을 든다. 다음 민희의 무효화.
다들 오른손을 내리는 걸 확인하면 내가 다시 준비라는 말을 한다. 그렇게 반복.
합만 잘 맞으면 165번 정도는 금방 끝난다. 중간에 포션 마시는 시간을 합쳐도 한 시간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
다들 웃긴 듯 하하 호호하는 분위기에서 숙련은 진행됐고, 한 시간이 조금 넘자 민희가 마스터 했다고 말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민희가 웃으면서 스무명을 일일이 고맙다고 말하며 내보낸다.
고마운 건 저들이 고마워해야 할 텐데 말야. 공짜로 스킬 숙련했잖아? 뭐, 그리 많은 분량은 아니라고 하지만.
"당신이 왜 그리 스킬이 많은지 알 거 같아요."
"음? 왜?"
"스킬 숙련에 관해서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효율성만 따지는 모습이 그래요."
"아아. 근데 이건 나만 그러는 게 아니잖아. 다들 하는 건 비슷비슷할걸?"
"아니요. 다들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세상엔 당신 같은 사람이 우글우글했겠죠."
"우글우글한데."
"당신 만큼은 아닐걸요?"
"뭐, 그것까진 모르겠고."
"조금 잘난 척해도 되는데."
그러면서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에게 바짝 붙어온다.
화장한 미녀가 화장품 냄새와 향수 냄새를 은근히 풍기고 나에게 붙는 모습은 언제 느껴도 좋다.
물론 지금 다른 여자들이 부족한 건 아니다. 화장을 안 해도 충분히 설레니까.
하지만 이건 이 나름대로 맛이 있다.
뭐랄까. 세상이 망한 것을 잊게 해주는 느낌?
"잘난 척 같은 건 수명을 줄이는 일밖에 안 돼. 바보 같은 짓이야."
"흐응. 그래도 사람인 이상 그러기 쉽지 않은데."
"아뜨거 하고 데어봤는데도 그 짓을 한다면 그건 아메바 같은 놈이겠지.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아."
"그래요. 그게 당신의 매력 중에 하나니까."
그러면서 씨익 웃는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두근두근해지는 웃음.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교태를 부리는 것도 아닌데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듯한 저 미소…. 역시 위험해. 위험한 미소야.
아침에 미나랑 한번 하고 왔는데도 벌써 아래쪽에 힘이 은근히 들어가잖아? 하여간 대단한 새끼야.
"매력이라니. 살면서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네."
"어머. 그래요? 당신 정도면 괜찮은데?"
"그래? 근데 왜 지금까진 그런 일이 없었을까."
"글쎄요. 다들 눈이 삐었나 보죠. 아니면 당신이 꼭꼭 숨어있었던가."
"크. 아부가 너무 심한데. 말해봐. 뭐 바라는 거 있지?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칭찬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내가 뭔가 필요한 게 있을 때 아부하는 사람 같아요? 난 그냥 해달라고 하는데."
"아. 그러네. 그건 그렇지."
"풉."
그러면서 또 웃는다.
아까는 사람을 현혹하는 매력적인 미소였다면, 지금은 정말 재밌어서 내는 자연스러운 웃음.
웃음에도 이렇게 여러 종류가 있다. 그리고 나는 웃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그 좆같은 매혹 걸렸을 때 미소 빼고. 아니지. 그것도 사람 따라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나 이제 뭐 배워요? 아니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방으로 갈래요?"
"그래. 가면서 이야기하자. 근데 안 바쁜가 봐?"
"바쁜 건 어느 정도 처리됐어요. 어차피 내가 없을 때도 알아서 할 일 잘하던 사람들이었는걸요. 솔직히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원래 그런 자리는 하는 일이 없는 게 정말 좋은 조직인 거겠지."
"그 말도 맞네요."
그렇게 웃으며 내 팔짱을 끼고 집무실로 향한다.
중간에 여러 사람이 알아보고 꾸벅 인사를 했고, 민희는 그런 사람들에게 인사하면서도 내 팔짱을 풀진 않았다.
약간 묘한 느낌이네. 어디서도 이래 본 적이 없는데.
얼굴이 간질간질한 느낌이다. 살짝 부끄럽기도 하고 뻘쭘하기도 하고…. 암튼 그렇다.
예전 같았으면 정말 생각도 못 할 일인데.
아무리 반사를 켜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여자의 팔짱을 끼고 걸어간다?
과거의 권성철이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절대 안 믿었겠지. 아마 저 새끼 누구냐고 그랬을 거야.
방안으로 들어온 나와 민희는 소파에 앉았다.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다리를 꼰 민희.
스타킹을 신은 다리와 그 발끝에 걸려있는 하이힐. 그리고 그걸 까딱까딱하는 모습.
"그런 걸 신고 잘도 다니는구나."
"그쵸? 나도 신기해요. 운동화 같은 걸 신고 다녀도 되는데."
"그걸 신는 이유가 있는 거야?"
"어. 글쎄요. 그런 거죠. 제 전투화라고 해야 할까요?"
"전투화? 하이힐이?"
"편한 운동화에 저지 차림으로 돌아다닐 수도 있겠죠. 화장도 안 하고 털털하게 다녀도 누가 뭐라고 하진 않을 거예요."
"맞아. 사실 그게 가장 편하지."
"이렇게 한껏 꾸미고 다니는 건 내 만족이 가장 크긴 하지만 나를 보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 같은 것도 있어요. 준비된 자세라는 것. 예의를 갖춘 거라는 것. 나를 보고 조금이라도 더 호감을 느끼게 하는 것…."
"뭔지는 알 것 같네. 적당히 차려입고 나온 사람과 완벽하게 갖추고 나온 사람을 보고 받는 느낌이 다른 건 당연하겠지."
"그쵸?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이러고 있는 게 이렇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나는 끝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게다가 당신이 화장품들을 구해줘서 조금 더 맘에 들게 이러고 있을 수도 있고."
"나야 좋지. 보는 게 즐거우니까."
"헤에. 한 5년 뒤에도 당신이 그런 말을 해줘야 할 텐데."
"5년 뒤? 왜? 무슨 일 있나?"
"무슨 일이 있냐고요? 무슨 일은 언제나 있어요. 항상 나이를 먹고 있는 걸요!"
"아아. 난 또 뭐라고. 그런 거에 너무 집착하지 마."
"에이. 당신은 몰라요. 어린데다가 남자잖아."
재밌는 반응이야.
나를 보고 어린 남자라고 해주는 사람은 민희가 유일하다.
뭐,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들은 몇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여자들은 나에게 반응해주지 않는다.
"5년 뒤에도 살아있느냐가 가장 큰 문제지. 나이 먹는 것쯤이야."
내 말에 민희는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당신은 절대 안 죽을 거 같은데요."
"모르지. 스킬이 많다고 여벌 목숨이 하나씩 더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당신이 죽는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는데."
이 여자는 나를 왜 이렇게 높게 쳐줄까.
하긴, 봐온 것이 있으니 그렇겠지. 만남이 길진 않았어도 짧은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해도 자꾸 몸이 붕 뜨는 느낌이다.
나를 너무 고평가한단 말이지. 듣기에는 좋은데 몸에는 안 좋은 느낌이야.
완전 불량식품 같은 여자네.
그런 불량식품에 손이 자꾸 가려 한다.
포장지를 뜯어서 실컷 맛보고 싶다.
스타킹, 하이힐, 갖춰 입은 옷. 세팅한 머리와 화장한 얼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 근데 오늘은 참아야지. 너무 이르다.
중간에 방해받을 확률이 너무 높아. 게다가 나도 아직 오늘의 비행은 하지도 않았고.
"니 스킬에 대해서나 이야기 하자."
내 말에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민희. 아쉽나? 살짝 유혹하는 느낌이 나긴 했는데.
"그래요. 이제는 뭘 배우면 되죠? 복수도 끝냈으니 이젠 사람들을 지키는 스킬을 배우면 될까요?"
"배울 스킬이야 많지.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게 스킬이니까. 근데 민희 너는 둘 중 하나가 되겠네. 회귀와 블링크."
"아. 회귀!"
"그래. 그게 있으면 사람들의 생활이 정말 편해질 거야. 숙련도 편할 거고. 너의 생활도 상당히 편해지겠지."
"좋네요. 회귀라."
"게다가 블링크, 순간 이동, 게이트의 트리도 있어. 세 가지 스킬들에 대해서는 딱히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좋은지 알고 있지?"
"그럼요. 당연하죠."
"원하는 대로 해. 개인적으론 블링크 트리가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왜요?"
"회귀는 내가 대신해줄 수 있으니까."
"흐음. 그러네요."
"일단 게이트까지 배워. 그리고 어디론가 숨어버려. 먼 곳 섬 같은 곳으로."
"아. 지난번에 말했던 그 이야기네요."
"맞아. 섬 같은데 짱박혀버리는 것만큼 좋은 게 없어. 그러려면 게이트는 있어야 하지."
"흐음. 그래요. 그럼 블링크 배우죠. 뭐. 근데 그거 쓰기 어렵지 않나요?"
"어려워도 배워야지. 근데 한번 써보면 확 이해 될 거야. 어려울 게 없어."
"알겠어요. 블링크로 할게요."
그러면서 바로 스킬을 배우는 민희.
나는 그사이에 포션을 사서 앞에 있는 탁자에 쌓아놓는다.
이것도 지금처럼 코인이 남아 돌 때나 가능한 짓이니까. 미리미리 사주는 게 낫지.
"또 이렇게…."
"줄 때 받아."
"당연하죠. 설마 준다는 데 안 받겠어요? 근데 포션을 이렇게 준다는 건 이제 가겠다는 소리잖아요?"
젠장. 왜 다들 내 행동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걸까.
내가 존나 단순한 새끼긴 한가 보다. 이렇게 뻔히 들여다보이는 걸 보면.
"할 게 많아."
"아쉽네요."
"밤에 한 번 올게."
"흐음…. 꼭 그것 때문은 아닌데."
"그게 뭔데?"
"이런 거?"
그러면서 자신의 앞 단추를 하나 풀어서 블라우스 자락을 열어젖힌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가슴골.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제길. 내가 졌네. 언제나 패배하는 권성철이야.
"계속 있다간 진짜 덮쳐버리겠네. 간다."
"이야. 이걸 참네."
그러면서 다시 앞 단추를 잠그는 민희. 시원하게 웃는 모습이 요망하다.
나는 그런 민희를 두고 다시 러시아 가는 길로 순간 이동했다.
흐. 미녀와의 섹스를 걷어차고 다시 길고 긴 장거리 비행이라니.
슬프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