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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에 익숙해진다는 것
비행을 배운 승희, 투명화를 배운 미나, 괴력을 배운 세아.
셋 다 새로운 스킬들을 얻었기에 스킬 숙련에 대한 열의가 상당했다.
본인들도 느낀 거지. 새로운 스킬들을 배우면서 자신이 강해지는 느낌을.
그리고 그것을 본 안나 역시 탐지 숙련에 박차를 가했고, 결국은 점심 무렵 탐지를 마스터 했다.
"후우…. 끝!"
"오. 안나 고생했어. 고생했어."
물약을 많이 먹어 상태가 그렇게 좋진 않은 안나는 내가 등을 토닥여주자 빙긋 웃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안나의 미소는 참 눈부시다. 보는 사람이 따듯해질 정도로.
"나. 투명화?"
"응. 맞아. 투명화."
"오케이. 오케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혼자 꼼지락거리더니 '투명'이라고 작게 말한다.
모습이 사라지고 자신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안나.
얼마나 흥분했는지 러시아 어로 뭐라고뭐라고 말하는데…. 역시 다들 처음 배우면 저러는 건 비슷하단 말이지.
이제야 모두들 투명화가 생겼다.
생각보다 오래 걸린 느낌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지. 일단 미나의 첫 스킬을 생각하면 대단한 거야.
어쨌든 마음 놓고 다 같이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된 거 같다. 바깥에 나가는 건 조금 느긋하게 추진해 보도록 하고….
나도 내 숙련을 서둘러 본다.
수납처럼 열고 닫기만 하면 되는 스킬들은 숙련 올리기가 어렵지 않아서 좋다.
포션 먹는 것도 중급 포션을 먹어서 부담이 반으로 줄어든 것도 크고.
덕분에 지금 고급 22퍼센트. 남은 건 3900번. 포션 98개.
각 잡고 앉아서 먹으면 이틀이면 마스터 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그건 정말….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이대로 여자들은 스킬 숙련에 매진할 것 같고…. 아마 지치면 쉬겠지?
나도 그냥 계속해서 스킬만 숙련 하고 싶지만, 세상은 나를 그렇게 쉽게 가만두지 않는다.
자양동은 해결됐지만, 아직 물류 센터가 남았다. 세희 년도 한번 봐야 하고 연수원도 다녀와 봐야 하고.
게다가 내일은 펜스 쪽에 지원이랑 지아도 만나야 한다.
어휴. 뭐가 이렇게 많아.
스케쥴이 계획되어있는 삶은 너무 싫다. 그냥 자연스럽고 물 흐르듯이 살고 싶다고.
며칠 몇 시. 이렇게 약속이 잡혀버리면 생활 사이클이 거기에 맞춰져야 해서 억지로 조절되는 느낌이 든다.
나같이 나다니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런 게 정말 참기 힘들다. 그 사이에 뭔가 더 끼워 넣으면 그건 더 힘들고.
"으으…."
"나가려고요?"
"응. 할 게 많으니까."
"다녀와요."
승희의 다정한 배웅.
"올 때 붕어빵."
"붕어빵은 무리고 붕어빵 기계는 구해서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오?"
농담으로 한 소린데 세아의 표정이 그럴듯하다는 표정이 된다. 웃긴 녀석.
근데 사실 뭐…. 가져오는 건 어렵지 않겠지. 뒤져보면 어딘가 있긴 있을 테니까.
붕어빵 기계를 가져와도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지만.
그렇게 벙커를 나와서 하늘로 높이 솟구쳐 오른다.
비행을 배우고 나선 하늘 높이 나는 게 즐거워졌다. 인간을 벗어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 전까진 인간으로 아등바등 살아남고 있던 느낌이라면, 비행을 배우고 난 다음에는 한껏 자유로워진 것 같다.
아무래도 시야가 넓어져서 그렇겠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둘 다?
먼저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정세희 년부터 보고 가기로 했다.
사실 식량도 넉넉하게 넣어놨으니 안 봐도 상관없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는 확인해 봐야지.
빠르게 본진으로 날아가 벙커 근처에서 탐지를 돌려본다.
주변에 유일하게 잡히는 기척 하나.
페이즈 아웃으로 벙커로 내려간 뒤 해제를 하고 반사만 걸었다.
벙커 내부에서 아직도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정세희 목소리의 '잘못했습니다'.
왠지 듣기 싫어져서 그대로 꺼버렸다.
그러자 방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창문에 세희 년의 얼굴이 보인다.
마치 무기물 같은 얼굴.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닌 모습이다. 살짝 무서울 정도로.
그리고 정세희가 나를 보고 짧게 중얼거렸다.
"매혹."
그리고 반사된 매혹에 걸려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여자.
뭐지? 미쳤나? 반사가 있는 건 뻔히 알 텐데?
나를 보고 웃고 있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광역 스킬 무효화를 썼다.
이렇게 창문으로 방안에만 무효화를 쓰면 효과가 방 밖으로는 삐져나오지 않는다.
스킬 효과는 벽을 통과하거나 하진 못하니까. 물론 창문에 바짝 붙어있으면 영향을 받긴 할 테지만.
바로 매혹이 풀린 세희.
그러더니 바로 다시 나에게 매혹을 걸었다.
병신같이 또다시 매혹에 걸린 여자.
뭐지? 뭐 하는 거지? 혹시 내가 무효화를 걸면서 내 반사도 실수로 날아가게끔 유도하는 건가?
근데…. 저 여자가 광역 스킬 무효화의 존재를 아나?
뭐…. 지금껏 당한 걸 곱씹어보니 '이럴 것 같다'라는 식으로 추측은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하여간 나를 바라보며 웃는 게 기분 나쁘다.
내가 누군지도 정확하게 모르면서. 무슨 짓을 했는지도 기억에 없으면서.
다시 무효화를 썼고, 매혹이 풀린 세희는 다시 나에게 매혹을 건다.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걸까? 반사 당할 걸 알면서도 왜 계속 매혹을 거는 걸까?
드디어 머리가 맛이 갔나? 지능이 퇴화하기라도 했나?
정말 알 수 없는 년이야. 왜 스스로 매혹이 걸리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건지.
그렇게 다시 무효화를 걸려다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직도 나를 보면서 웃고 있는 여자.
마치 사창가의 창녀 같은 모습이다. 아무 남자에게나 웃음을 보이며 자신의 몸뚱이를 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반사를 당해서 매혹이 걸릴 걸 알면서도 스스로 매혹을 거는 여자.
왜? 왜 매혹을 당하고 싶어 하지?
지금 저 행동의 의미는 본인이 의도한 확실하게 의미가 있는 행동이다.
의미…. 대체 뭘까. 왜 매혹이 걸리길 자처하는 걸까.
매혹에 걸리는 건 끔찍한 느낌일 텐데. 매혹을 건 사람을 무조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상태.
너무나 사랑하고 간절하게 원하기에 원하는 모든 것에 거역하지도 못하고 무작정 따를 수밖에 없는 상태.
그걸 스스로 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자신의 몸, 자신의 정신, 자신의 생명.
주도권을 모두 매혹 건 사람에게 전가하는 행위.
그건…. 자신의 상태를 포기하는 거다. 자신의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기에 피신하는 거다.
매혹이라는 상태로.
조금…. 아주 조금 뭔가가 이해 가기 시작했다.
혹시 맨정신으로 있을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를 보자마자 냅다 매혹을 건 게 아닐까?
실수로라도 내가 반사를 안 켜고 있었다면 나를 매혹해서 지금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겠지.
그리고 내가 반사를 켜고 있더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을 거다.
스스로 매혹에 걸림으로 역시 맨정신인 상태를 벗어날 수 있으니까.
재밌네. 재밌는 여자야.
이런 건 또 기가 막히게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걸 순순히 봐줄 생각은 없다.
지금 상태가 싫다고? 그래서 도피하려 한다고?
그럼 당연히 더 도피할 수 없게 해야지.
자물쇠를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매혹에 걸린 상태로 나를 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여자.
내가 지금 내 좆이라도 빨라고 한다면 4박 5일이라도 빨 기세다.
오줌마려운 개새끼 같은 상태. 추하디추한 모습.
수납을 열어 테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살포시 세희의 입을 막아버렸다.
팔도 모아서 이쁘게 묶어주고 아래에 차고 있는 정조대는 풀어줬다.
그리고 조금 많이 물러나서 광역 스킬 무효화를 썼다.
매혹이 풀리면서 세희의 눈에 혐오와 증오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안타깝다. 정말로."
다리는 묶어 놓지 않았기에 벌떡 일어나서 나를 향해 몸을 들이받는 세희.
하지만 힘없는 여자의 몸통 태클이라고 해봐야 별로 위협적이지도 않다. 꼼짝도 안 하고 그대로 태클을 받아낸다.
내던지다시피 침대로 던져버리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들이 받히는 여자.
팔이 묶여있기에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다시 몸을 일으켜 나에게 또 달려온다.
이번엔 어설픈 발차기.
피하거나 잡을 수 있었지만, 그래서는 다칠 것 같아서 그대로 맞아줬다.
그랬더니 오히려 나를 차 놓고는 자기가 나동그라지는 모습.
이게 뭐냐…. 무슨 개그도 아니고.
"으으으으…."
입이 막혀있는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세희. 한심한 모습.
갑자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 대화를 안 한 지 좀 됐지.
"네 입에 있는 테이프랑 팔. 풀어줄 건데…. 한 번만 더 매혹 쓰면 그냥 깔끔하게 죽이고 끝낼 거야. 그러니 자살을 원하면 매혹 써."
그렇게 말하곤 바로 입과 팔을 묶은 테이프를 뜯어버렸다.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씩씩거리고 있는 모습.
나는 별다른 말 없이 그냥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외모 자체는 이쁘장 한데다가 알몸이지만 전혀 아무런 욕구가 생각나지 않는 몸뚱이.
벌어진 다리 사이의 음부가 훤하게 보여도 그냥 고깃덩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한참을 씩씩거리고 호흡을 고른 세희가 처음 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대화하겠다고 생각한 걸 후회했다.
어휴…. 이딴 년이랑 대화할 생각을 하다니. 내가 병신이지.
"아냐!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냐! 나는…. 왜 나를 안 죽이고 나에게 이러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내 표정과 반응을 보고 실수했다고 생각했는지 다급하게 말하는 세희.
"네가 나에게 원한이 있다는 건 알겠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가 누구였는지 정확하게 기억 못 해! 네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신이 망가졌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래서 누가 누구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 못 해!"
"지랄하지 마. 매혹 걸렸을 때는 잘도 말해놓고."
"맞아. 그것 때문이야. 내가 너에게 매혹을 걸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야! 나는…. 나는 저 스피커에서 나온 일들을 전부 기억 못 해! 낯설다고!"
흥미로운 이야기다.
매혹이 걸렸을 때 오히려 자신의 상태가 또렷해진다고?
평상시엔 그 정도로 또렷한 상태가 아닌데…. 매혹에 걸리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건가? 스킬의 효과로?
모를 일이다. 알 수가 없어.
정말 너무나 복잡하고 정신이 없다.
그리고…. 모든 게 다 번거롭고 귀찮아졌다.
이 정세희란 여자에 대해서. 전부다.
내가 이 여자를 살려놓고 여기에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내 과거를 붙들어 놓은 추한 짓처럼 보였다.
세상이 멸망하고 나는 변했다.
오히려 더 좋아졌지. 물론 하는 짓은 쓰레기가 됐지만.
그런 내가 이 여자, 정세희를 살려놓을 이유가 없긴 했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 그저 미련일 뿐이었다.
못다 이룬 꿈, 바라 마지않던 것, 복수라는 이름으로라도 엮어 놓고 싶던 것.
하지만 이젠 별로 상관이 없다. 부질없어졌다.
정세희는 이제 권성철이라는 배의 닻일 뿐이다. 닻을 내리고 배를 나아가려고 해봐야 제자리만 맴돌 뿐이다.
복수라는 명목으로, 매혹 스킬 마스터를 가진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를 살려두고 있지만…. 나는 안다.
이 여자와는 잘될 리가 없다는 것을.
이 여자의 머리를 비우고 백치로 만들어 놓는 게 아닌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 언제 다시 기억이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종착지가 정해져 있지만…. 도착하기를 꺼리고 여기저기 빙글빙글 돌고 있는 꼴이다.
기름과 시간을 낭비하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제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가 됐다. 나도, 정세희도.
"세희야."
매혹을 걸지 않은 그녀를 이렇게 부드럽게 불러본 적이 있을까?
"옷 입어."
그렇게 한마디를 하고 방 밖으로 나왔다.
옷이라고 해봐야 성채 놈이 입혔던 홀복 비슷한 치파오와 롱패딩 밖에 없지만, 그거라도 걸치고 바로 방 밖으로 나오는 세희.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잡아."
머뭇거리면서도 나의 단호한 말에 손을 잡는 세희.
그런 세희를 에스코트하며 벙커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느껴지는 추위에 몸을 움츠리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를 덥석 안고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꺄악! 뭐 하는 거야!"
무서운지 나에게 바짝 안기는 세희. 왠지 그런 그녀의 손길이 따듯하다고 생각했다.
하하. 병신 같은 새끼.
이런 순간에도 그런 걸 갈구하는 거냐.
나는 그렇게 세희를 안고 나와 그녀가 함께 다녔던 대학교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