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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따란. 여러분이 좋아하는 물약 타임이 왔습니다!"
테이블 위에 한가득 쌓인 포션.
그리고 매우 좋지 않은 표정의 네 여자.
한숨을 내쉬는 승희와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짓는 세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미나, 그저 해맑은 안나.
"젠장…. 이걸 평생 해야 한다고?"
"당연하지. 배움에 끝은 없는 법이니까."
세아가 투덜거려봤지만, 나에겐 씨알도 안 먹힌다.
마지못해 포션을 하나 들었다가 그대로 다시 내려놓는 세아는 잔뜩 괴로운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해야지…. 에휴."
"스킬 네 개만 마스터 하면 물약을 반 정도는 덜 먹을 수 있어. 그러니 힘내봐."
"스킬 네 개…. 그게 애 이름이야?"
"그런 이름 지으면 나중에 애한테 욕 많이 먹겠네."
"어휴…. 그냥 빨리 먹고 자야지…."
포기하고 스킬을 쓰기 시작하는 세아. 승희도 마찬가지로 옆에서 투명화를 쓰기 시작한다.
안나도 이젠 제법 익숙한 발음으로 탐지라고 중얼거리는 모습.
근데 왜 안나는 한국어로 스킬이 나왔을까? 짱개 새끼들 보면 한국어 전혀 모르는 놈들도 스킬 쓰던데….
뭔가 에러가 있는 거겠지? 이 스킬 만든 놈들 거지 같은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니까.
"미나는 나갔다 오자. 옷 입어."
"아. 맞다. 네. 알겠어요."
"왜 미나 언니만!"
"세아 니가 몸에 병이 없어서."
"뭐야. 내가 병이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 없어야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근데…."
"암튼 다녀온다. 스킬 숙련하고 있어. 더 못 먹을 거 같으면 자러 가고."
"으으…. 쳇."
힘없이 손을 흔들어주는 승희와 해맑게 웃어주는 안나.
안나는 의외로 포션 먹는 게 안 힘든가 보다. 하긴, 체질 따라가는 거니까. 생각보다 몸도 튼튼하고.
기본 체력이랑 상관이 있는 걸까? 승희야 그렇다 쳐도 세아는 그나마 괜찮은 편인 거 같던데.
모르겠네.
해가 진 겨울. 미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고, 잠시 고민했다.
굳이 여기로 들개들을 데려올 필요 없잖아? 미나를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냐?
어차피 개들이 만약 덤비거나 해버리면 네 마리까진 재우고, 더 많으면 그냥 미나를 안고 날아버리면 되니까.
"미나야. 이리 와봐."
"네?"
"꽉 잡아? 높게는 안 날 거지만…. 위험할 수 있으니 몸부림치면 안 돼?"
"어…. 뭐하려고요?"
"일단 한번 안겨보시죠."
신뢰란 이래서 좋은 거야. 불안한 표정이지만 나에게 바로 안겨 오는 미나.
그런 그녀를 꼭 끌어안고 땅에서 조금 떠서 개들이 많았던 공터로 날아갔다.
"오와아아아…."
"얼래. 생각보다 안 무서워하네?"
"네? 어차피 오빠가 안고 있잖아요? 무서워할 필요는 없죠."
"헤에. 그거 기분 좋네."
그래. 이런 게 신뢰지. 의외로 달콤한 거였어. 다만…. 이렇게 배신당하면 정말 더없이 치명적이겠지?
뭐…. 이젠 미나가 나를 배신할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하지만.
아까 내가 들개들을 잡아 왔던 곳. 그곳에 가니 의아한 장면이 펼쳐졌다.
우리가 근처에 오자 들개들이 우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숫자는…. 거의 스무 마리 정도? 그 모습에 일단 땅에 착지는 안 했지만…. 이 녀석들에게 적의가 느껴지진 않는다.
그리고 그 앞에 다가오는 네 마리의 들개.
"어…. 저 아이들…. 아까 치료했던 아이들 같은 데요."
"얼래. 그걸 알아봐? 다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어?"
꼬질꼬질하고 털이 덥수룩한 들개들. 색이나 크기, 종류가 확 차이가 나는 놈들은 구분이 되는데…. 비슷한 놈들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
"확실하진 않는데…. 맞는 거 같아요."
"설마 지금 자기들 치료해줬다고 이렇게 모인 거야?"
"그런 거…. 아닐까요? 그거 말고는 짚이는 게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공격할 것 같지도 않고. 일단 굳이 안 재워도 될 거 같으니 한번 스킬 써볼래?"
"알겠어요."
내가 땅으로 조심스럽게 착지했고, 미나는 질병 해제를 쓰기 시작했다.
미나가 스킬을 쓰자 아까 그 네 마리가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나머지 놈들도 하나둘씩 엎드리기 시작한다.
희한하네. 분명 잠들어있었을 텐데. 어떻게 우릴 알아보고 나왔지?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자기들을 돕는 걸 아는 건가?
아…. 냄새. 아까 내 냄새를 맡았으면 기억할 수는 있겠다.
으음…. 개들이 생각보다 똑똑하네. 하긴…. 개는 원래 똑똑하지.
어쨌든 덕분에 스킬은 편히 올리게 됐네. 스무 마리라…. 아까 네 마리에 백번 정도였으니 마리당 스물다섯 번.
그럼 스무 마리면 오백 번.
"미나 지금 스킬 몇프로지?"
"저 고급 32퍼요."
그럼 앞으로 삼천 사백 번. 어휴. 한참 멀었네.
"오빠. 저 포션 좀."
"아. 맞다. 자."
포션을 사서 바로 건네주자 뚜껑을 열고 한 번에 원샷하는 미나.
나는 몇 개 더 사서 미나의 주머니에 넣어줬다.
그리고 아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나야. 여기 앉아서 해라."
"네? 아…. 괜찮은데."
"아냐. 내가 안 괜찮아. 빨리 앉아."
땅바닥에 주저앉은 내 다리 위에 살포시 앉은 미나.
나는 그런 미나의 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앗 차거! 이이…. 오빠 이러려고 앉으라고 한 거죠!"
"으음…. 손이 차갑나? 잠시만."
나는 내 몸 안에 손을 넣고 손을 녹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다시 미나의 옷 안에 손을 넣었지만 역시 손이 닿자 움찔하고 놀란다.
"아직도 차갑잖아요…."
"걱정 마. 금방 따듯해 질 거야.“
”으으…. 정말. 가슴 너무 좋아해.“
스무 마리 남짓한 개들이 환히 보는 앞에서 스킬을 쓰고 있는 미나와 그 가슴을 만지고 있는 나.
이게 무슨 장면이냐. 정말…. 어처구니없는 장면이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미나만 안고 있었다.
한마리 한마리 돌아가면서 해제를 써주고 있는 미나, 그리고 그런 미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들개들.
날씨가 꽤 추웠지만 나는 미나를 안고 있어서 그나마 괜찮았고, 미나 역시 내가 가슴을 만지고 있어서 그런가? 그리 추워 보이진 않는다.
어차피…. 감기라도 들게 되면 미나가 해제해주면 되니까. 별다른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게 크다.
예전에는…. 감기 한번 걸리면 드럽게 서러웠는데….
이대로 못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됐었던 시절.
게다가 죽이든 약이든 뭐 있는 것도 없으니…. 쌩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에서도 불면증은 잠드는 걸 방해했다.
바닥까지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수면 스킬을 쓰면 뒤질 것 같아서 스킬도 못 쓰고 뜬 눈으로 앓았던 기억.
그때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지.
"하아…."
한참을 그렇게 스킬을 쓰고 한숨을 한번 푹 쉬며 다시 체력 포션을 먹는 미나.
"괜찮아? 무리하는 거 아냐? 아까 포션 다섯 개 먹었었잖아."
"으음…. 괜찮아요. 일단 여기 보인 아이들은 다 치료해 주고 싶어요."
"무리하진 말고."
"알겠어요.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볼게요. 계속…. 그렇게 안고만 있어 줘요."
"이러고 있는 게 힘이 된다면 얼마든지."
스킬 숙련을 할 땐 스킬 쓰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오히려 포션을 먹고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며 정신 유지하는 게 더 오래 걸리지.
뒤로 갈수록 포션을 먹을 때 어지럽고 매슥거리는 게 심해지기에 그 텀이 점점 길어지기 마련이다.
미나는…. 지금 포션을 상당히 많이 먹었다. 거의 스무 개 정도?
분명 상태가 끔찍할 텐데 계속해서 개들에게 해제를 걸어주고 있다.
음…. 미나도 그런 타입이구나? 자신보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타입.
그게 고작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들개라도 본인의 고통보다 우선하는 성격.
상당히 위험한 타입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딱 죽기 쉬운 타입.
남을 위해 몸을 내던지는 걸 절대 주저하지 않는 타입.
좋지 않아.
조금 이기적이어도 되는데.
"다…. 된 거 같아요. 오르는 게 없네요. 하아…."
미나가 스킬을 멈추고 작게 중얼거린다.
나는 그녀의 옷 안에서 손을 빼고 뺨을 만져주며 말했다.
"고생했어. 그럼 이제 들어가자."
"후우. 네."
차갑게 얼어버린 뺨. 그래도 내 손의 온기로 조금 따듯해졌으면 좋으련만.
나와 미나가 일어서자 가만히 엎드려 있던 들개들도 일제히 몸을 일으킨다.
진짜 똑똑하네. 저것들 개 아닌거 아냐?
전부 개로 변신한 변신 스킬 가진 놈들이라거나…. 아니겠지?
"안녕…. 얘들아…. 다음에 또 보자…."
그 와중에도 힘없이 개들에게 인사하는 미나.
나는 그런 그녀에게 팔을 벌렸고, 미나는 내 품에 쏙 안겼다.
그대로 하늘로 천천히 솟구쳐 오르자 스무 마리의 들개들이 일제히 우리를 바라본다.
컹!
저 녀석이 대장인가? 한 마리가 고맙다는 듯 짧고 크게 울었고, 그대로 우르르 몸을 돌려 한쪽으로 사라진다.
"신기한 녀석들이네."
"그러게요…. 상당히 영리한 것 같아요…."
"전부 다 반려동물이었던 녀석들은 아닐 텐데…. 목줄은 왜 없지."
"아고…. 저는 팔에 힘이 없어요…. 저 좀 꽉 안아줘요."
진짜 힘이 없는 것인지 어리광을 피우는 건진 모르겠지만 미나를 꼭 안는데 다른 이유가 필요하진 않잖아?
어차피 저런 요청이 없었어도 꽉 안을 거였으니까.
그렇게 벙커로 돌아가니 이미 다들 방으로 돌아가 있었다.
일단 미나를 먼저 방으로 데려가 옷을 갈아입히고 침대에 눕혔다.
"씻고 자야 하는데…."
침대에 누워서 살짝 웅얼거리는 미나.
나는 그런 미나의 입술에 키스했고. 미나는 빙긋 웃으며 힘없이 바로 잠든다.
음…. 그렇게 힘든가? 빨리 포션 먹는 게 익숙해 져야 할 텐데.
미나의 방문을 닫고 승희의 방으로 들어갔다.
배를 내놓고 잠들어있는 승희. 이건 뭐 잠든 왈가닥 큰딸 이불 덮어주는 아빠 같네.
승희의 입술에도 살짝 키스해주고 방에서 나왔다.
어디 보자. 다음은 세아 방.
세아는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로 인상을 잔뜩 쓰며 자고 있다.
얘는 뭐 안 좋은 꿈을 꾸나?
"세아님 최고. 세아님 최고."
귀에다가 작게 속삭이고 머리를 몇 번 쓸어넘겨 줬다.
인상 쓴 이마가 조금 풀리는 걸 보니 좀 웃기네. 이런 게 효과가 있나?
그렇게 세아의 입술에도 키스하고 나온다.
이제 안나 차례.
안나의 방을 들어가자 책상에서 뭔가를 보고 있던 안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안 잤어?"
"썽철. 왔어?"
"안나. 괜찮아? 스킬 숙련 한 거 아냐?"
"스킬? 했어. 나. 아니야. 어…. 어…. 잠깐."
안나는 자신이 보고 있던 것을 파라락 넘기더니 어느 한쪽을 보고 나에게 말한다.
"어지럽다!"
아. 사전이구나. 내가 저번에 가져온 거 그거네.
"스킬 숙련은 했는데 안 어지럽다고?"
"맞아! 썽철 똑똑해!"
그러더니 뭐가 그리 좋은지 해맑게 웃는다.
참…. 저렇게 웃음이 많은 여자가 그렇게 죽는 표정으로 살고 있었다니.
게다가 그때 안나의 곁에는 수면제까지 있었다.
쯧. 좀 더 잔인하게 죽였어야 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게 손짓을 하는 안나.
"썽철. 나. 알려줘. 단어."
"음? 어떤 거?"
나는 안나에게 다가갔고, 안나는 단어 하나를 펜으로 동그라미 친다.
"아….' 열 폭'…. 이런 단어는 당연히 사전에 없지. 근데 뭘 보는데 열폭이라는 단어가 나와?"
나는 그러면서 안나의 책상 위에 있는 펜을 하나 들어 '열등감 폭발'이라고 썼다.
다시 사전을 찾아보더니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말하는 안나.
"폭발? взрыв? explosion?"
"아니지…. 익스플로전은 진짜 터지는 거잖아. 이렇게 쓰면 안 되겠구나. 어…. 잠시만."
이거 생각보다 까다롭네. 미나는 이런 안나 옆에서 일일이 봐주고 있는 거야? 존경스럽구먼.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종이에 '열등감이 많이 쌓여서 터지다.'라고 적어줬다.
다시 내가 써준 걸 사전으로 찾아보더니 이번에도 다시 나를 보며 말한다.
"터지다? взрываться? 이것도 explosion. 이상해."
어우…. 내가 더 이상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어…. 그러니까. 폭발…. 터지다…. 그러니까…. 아."
이번엔 종이에 '표출하다.'라고 썼다.
"표출하다. выражать. 오. 이해. 이해. 오케이."
하아. 정말 어렵다. 이렇게 어렵게 공부하는구나.
나는 저 글자 어떻게 읽는지 감도 안 잡히는데. 안나는 정말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네….
안나에게 조금 더 잘해줘야겠어.
"썽철. 하나 더."
"응? 뭔데."
그러더니 안나가 단어 하나를 또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엔 SEX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안나를 어이없게 바라보자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는 안나.
그러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내 목에 팔을 감는다.
"секс"
안나의 입에서 나온 섹스라는 단어는 상당히 뭐랄까…. 이질적이다.
야하거나 음란한 행위가 아닌…. 뭐라고 해야 하나. 아름다운 행위? 그런 느낌?
대체 이 여자는 내가 왜 좋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아무리 그녀를 구렁텅이에서 구해줬다고 하지만…. 그 정도로 이렇게 나를 좋아할 수 있는 걸까?
내 손을 잡고 살그머니 방 바깥으로 나가는 안나.
그러더니 내 방으로 들어가 빙글 돌아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하는 안나.
나는 하나하나 드러나는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