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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멸
내 말에 회의실 안에 있던 이들의 표정에 비장함이 서린다.
나는 그 눈빛이 맘에 들었다.
놀라거나 당황하는 것이 아닌, 각오를 다지는 눈들.
그래. 하물며 개새끼도 자기 밥그릇이 차이면 맹렬하게 짖는 법이다.
근데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감히 우리의 터전을 넘봐? 이건 참을 수 없지.
"위치는 자양동. 정확히 어딘지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면 건대 입구 근처입니다. 짱개의 숫자는 거의 백이 넘어요. 하지만, 그들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모든 지휘는 제가 합니다."
숫자가 백이 넘는다는 소리에 잠깐 놀랐던 이들이 내가 지휘한다는 말에 바로 안정되는 모습.
그래도…. 제법 신뢰를 받고 있구나. 다행이네.
"이 전투는 형수님과 하율이 빼고 모두 참여합니다."
내 말에 이번엔 다들 약간 웅성거렸다.
특히 진영이. 자신의 동생인 현정이와 애인인 서현이를 번갈아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하긴 그럴 만하겠지. 내가 여자들까지 전부 간다고 할 줄 몰랐을 테니까.
"아니…. 나는 왜? 나도 갈 거야!"
오히려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는 말에 발끈하는 유정.
"아뇨. 형수님은 여기에서 하실 일이 있어요."
"뭐!?"
"어차피 하율이 때문에 안되는 거 아시잖아요. 형수님은 여기에서 모두가 무사히 돌아올 때를 위해서 준비해 주세요.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을 때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도록. 그것만큼 중요한 게 어딨어요. 오히려 형수님이랑 하율이만 여기 놓고 가는 게 더 불안한데."
내 확고한 표정에 유정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우리 열아홉 명이 모두 따듯하게 배를 채울 수 있게 준비할게."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다들 그 모습이 뭔가 뭉클했나 보다.
아까 당황한 표정을 짓던 진영이도 눈빛이 깊어졌다.
한 손으론 현정이의 손을, 다른 손으론 서현이의 손을 꽉 잡고 남자다운 표정을 짓는 녀석.
"일단, 차를 가져올게요. 다들 꼼꼼하게 준비하고 밖으로 나오세요. 손에 익은 무기, 따듯한 옷,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물건, 전부 준비하세요. 그럼 20분 뒤에 밑에서 보죠."
내 말이 끝나자 다들 우르르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승규 형."
"어."
"다른 차 한 대는 형이 운전해줘야겠어요."
"다른 차? 이 많은 인원이 탈 수 있는 차가 있어?"
"밖에 앞 유리가 깨진 승합차가 하나 있을 거예요. 그건 제가 운전할 거고, 짱개놈들이 모였던 곳에 승합차 한 대가 더 있어요. 그건 제가 지금 바로 가져올게요."
"아…. 그래. 알겠어."
"그럼 다들 준비 좀 도와줘요. 빨리 다녀옵니다."
그렇게 말하고 페이즈 아웃으로 벽을 뚫고 나와 바로 해제하고 비행으로 몸을 날린다.
큰일이야. 점점 문으로 다니는 일이 없어지네.
승합차를 몰고 물류센터 앞으로 가니 다들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뭐…. 다들 알아서 준비는 한 거 같은데, 모르겠다.
내가 이들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과연….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닐까?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동현이가 들고 있는 끝이 뾰족한 기다란 파이프였다.
저 녀석…. 정말 저걸 할 셈인가. 반 정도는 농담이었는데.
"차 두 대로 나눠서 갈 거예요. 적당히 분배해서 타세요. 바로 갈 거니까."
알아서 차에 타는 사람들. 그리고 그걸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유정과 해맑은 표정의 하율.
그런 둘을 남기고 차는 바로 출발했다.
백미러에 보이는 둘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간다.
부디. 유정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기를.
차가 달리는 동안 차 안의 분위기는 깊게 가라앉은 분위기다.
아무리 정당방위라지만 사람을 죽이러 가는 길, 그것도 한둘이 아니고 백 단위.
즐겁게 웃으면서 갈 분위기가 아니긴 하지.
그런 그들에게 뭔가 힘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런 재주는 없으니까.
그냥 조용히 스스로 전의를 태우는 게 낫겠지.
저쪽 차는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승규가 부드럽게 모두를 다독이고 있으려나?
그래도 한번 봤던 길이라 다행히 헤매지는 않았다.
이 많은 사람을 태우고 가는데 헤매면…. 시작부터 모양 빠지잖아.
게다가 뒤에 승규의 차도 쫓아오는데.
짱개 소굴과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리자 다들 이제야 실감이 나는가 보다.
얼굴에 보이는 감출 수 없는 불안감.
짱개놈들을 지우기 전에 저 표정에 있는 근심들부터 지워야겠네.
"잠깐만 있어 봐요."
나는 바로 비행을 써서 하늘로 솟구쳤다.
내가 생각한 작전, 그걸 실행하려면 딱 좋은 장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건 서울 시내라면 어디에나 무조건 있을 수밖에 없는 곳.
그렇게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내 눈에 금방 원하는 장소가 눈에 띄었다.
내가 날아간 곳은 바로 공원.
음…. 이정도면 거리도 좋고 딱 좋네.
다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온 나는 모두를 이끌고 공원으로 이동했다.
짱개를 잡으러 왔는데 텅 빈 공원으로 오니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부터 오늘의 작전을 설명해 줄게요."
집중해서 나를 바라보는 눈들.
"먼저…. 민주."
"네? 나요?"
당사자뿐만 아니라 다들 깜짝 놀라는 모습. 하긴, 스킬이 기름 생성인 민주를 먼저 부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겠지.
나는 포션을 잔뜩 사서 그녀의 주머니에 넣어주며 말했다.
"지금부터 휘발유를 만들어.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럼 포션을 먹고 더 만들어. 계속."
"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어차피 다 쓰고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 말에 승규의 눈이 부릅떠진다.
역시 똑똑해. 무슨 짓을 할지 눈치챘구나?
"뭐해. 빨리 만들어."
"어…. 바로요?"
"응. 오늘의 승리는 니가 핵심이야. 그러니 빨리 만들어."
영문도 모른 채 기름 생성이라고 외치기 시작한 민주.
그녀의 바로 앞에 만들어지는 휘발유 통. 이건 한 번에 여러 개가 나오지 않나 보네.
"다음…. 민준이랑 동현이."
"네."
"네."
"너희들은 민주가 만들어놓은 기름통을 들고 이 주변에 뿌릴 거야. 저기 저 건물 보여?"
내가 가리키는 큰 건물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저 건물이 짱개 소굴이야. 저길 기준으로 저기에서 이 공원까지 거리. 그만큼을 반지름으로 하는 커다란 원을 그린다고 생각하면서 휘발유를 뿌려. 빈틈없이."
"네???"
"원이요?"
나는 공원 바닥에 마체테로 쓱쓱 그림을 그려가며 다시 설명해줬다.
"저 큰 건물이 원의 중심. 여기는 우리가 있는 공원. 저 건물에서 여기 공원까지의 거리를 반지름으로 하는 커다란 원을 그리라고. 불을 지르면 불의 장벽으로 이 일대를 가둬 놓을 수 있게."
"아…."
"헉."
동현이와 민준이뿐만 아니라 내 말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이 헛바람을 삼켰다.
그래. 내가 하려는 짓은 캠프에서 했던 짓과 별다를 게 없다.
다만 인간이 몇 배는 더 많다는 것과 범위가 훨씬 넓다는 것. 그리고 휘발유를 써서 본격적으로 불을 지를 거라는 것.
"조금 삐뚤빼뚤해져도 상관없는 거죠?“
반쯤은 질린다는 표정과 반쯤은 흥분된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보는 동현이.
"어. 대신 끊기지 않게 휘발유를 잔뜩 부어. 아끼지 말고. 어차피 기름은 계속 만들어 내면 되니까. 민준이가 가속화로 계속 기름 날라주고 동현이가 날아서 기름 뿌려. 시작 위치는 여기 공원 옆부터야. 한 바퀴 삥 돌아서 이 공원 반대편까지 이어지면 돼. 바로 가."
"네!"
"알겠습니다!"
양손에 기름통 하나씩을 든 두 명이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사람들이 나를 경악하며 바라본다.
"걱정 마요. 전부 태워 죽일 생각은 아니에요. 바람이 예상보다 많이 불어서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타죽으면 그것도 지들 팔자죠."
별거 아니라는 듯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은 사람들은 잘 들어요. 여러분들은 중요한 일을 해야 해요. 단순하게 스킬로 치고받는 게 아니라 우리는 진형을 갖출 거에요. 그것도 아무도 해보지 않은 짓을. 제대로 된 공격 스킬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보여줄 거에요."
그렇게 말하고 승규를 한 자리에 세웠다.
"잠들어도 바로 깨울 테니 걱정하지 마요."
그렇게 말하고 제법 떨어져서 조금씩 앞으로 가면서 승규에게 수면을 썼다.
39미터가 되는 순간 승규가 잠들었고, 나는 그가 쓰러질 뻔 하자마자 바로 광역 스킬 무효화를 썼다.
용케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는 승규.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두어 발자국 앞으로 간 나는 바닥에 금을 주욱 그었다.
그리고 승규가 서 있던 자리로 가서 금을 주욱 그었다.
바닥에 그어진 두 개의 선.
모두를 보면서 그 두 개의 선을 가리키고 말했다.
"이게 우리 모두의 안전을 지켜주는 선이야."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이런…. 역시 나는 이런 걸 설명하는 거에 소질이 없어.
"서현이랑 소희. 앞으로 나와봐."
또다시 의외의 이름이 불리자 다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현이와 소희를 바라본다.
"너희 둘은 보호막이지."
"네."
"네."
"여기 이선. 너희는 여기에 보호막을 걸어야 해."
"보호막요?"
"여기에?"
"그래. 해봐. 이쪽에 서서 저쪽을 막는다는 느낌으로 둘이 보호막을 적당히 붙여."
"어…. 이렇게요? 보호막!"
"보호막!"
보호막 두 개가 생겨났고 나름 적당히 잘 만들어졌다.
"잘했어. 둘 다. 너희 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보호막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해. 지금까지 보호막이 깨지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항상 주시해. 없어지거나 깨지거나 부서지거나 그러면 지금 이 모양 그대로 다시 만들라는 말이야. 근데, 보호막은 스킬 숙련이 올라도 개수는 안 올라가나?"
"개수는 상관없어요. 다만 모양을 바꿀 수는 있어요."
"아. 그래? 그럼 서로 보호막을 쓴 사이에 조그만 틈을 만들 수 있나? 아주 작을 필요는 없고."
"어…. 이렇게요?"
서현이가 보호막을 조금 변형했고 소희 역시 거기에 맞춰서 따라 만들었다.
두 개의 커다란 보호막, 그리고 그사이에 생긴 한 뼘 정도의 틈.
"딱 좋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유지해. 그리고…. 이 옆으로는 못 늘리나?"
"우리를 감싸는 모습으로?"
"어. 맞아."
서현이 이 녀석. 예전에는 답답했는데, 지금은 제법 스킬 쓰는 게 능숙해졌다.
서현이가 보호막을 더 늘렸고, 소희 역시 그걸 보고 대칭으로 보호막을 늘렸다.
우리 일행은 고글 모양 보호막에 둘러싸인 모습이 되었고,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이 위에는?"
"아…. 위에도요? 잠시만요…."
"그럼 뒤에도 막아요?"
이번엔 소희의 질문.
"뒤까지 가능하겠어?"
"네. 고급 보호막이라 그 정도는 돼요."
"저도요."
"그럼 최대한 막을 수 있는 만큼 다 막아."
보호막이 이쁘게 모두를 감쌌다.
중앙에 길게 틈이 나 있는 것 말고는 완전히 감싸게 된 모습.
음…. 맘에 드네.
"억…. 이러면 못 들어가요. 기름통 가져가야 하는데?"
어느새 다가온 민준이가 보호막을 통통 치며 말한다.
"마침 잘 왔다. 너 금속화 쓴 다음 전력으로 이거 때려봐."
"네?"
"해봐."
"잠시만요."
예의 그 광택 빛 나는 몸이 된 민준이가 뒤로 사라지듯 물러나더니 냅다 달려와 그대로 보호막을 후려친다.
데엥!!!!!!
마치 종이 울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고, 나는 쳐보라고 한 것을 후회했다.
안 들렸겠지? 소리가 너무 컸네.
민준이가 전력으로 쳤지만, 보호막은 꼼짝도 안 했다.
음…. 이거 안 깨지는 거야? 상당히 큰 충격이었는데도 멀쩡하네.
그럼…. 이정도면 됐고.
"보호막 풀어. 그리고 언제든지 방금 만들었던 것을 계속 만들 수 있게 해."
"네."
"알았어요."
일단 보호막은 됐고, 이제는 쟤들 차롄가.
나는 미래와 함께 온 아이들, 이제는 제법 커져서 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 두 명.
이름이…. 그래. 승주와 중현이. 그 두 명에게 다가갔다.
평소에 제대로 말 한번 안 해본 녀석들. 얘들도 내가 조금 어색한지 나를 보고 약간 서먹한 모습을 보인다.
쯧. 남자애들이라고 너무 신경 안 썼나.
"미래랑 지원이도 와봐. 승규 형도요."
모두가 내 앞에 서자, 나는 승주랑 지원이를 보고 말했다.
"승주 네가 바람 칼날이지?"
"네."
"지원이는 파이어 볼이고."
"네."
"너희가 오늘 메인 딜러다."
내 말에 깜짝 놀라는 두 사람.
"바람 칼날은 공격 스킬 중에도 상당히 강력한 스킬이야. 상대를 지정할 필요도 없고 살상력도 좋지. 오늘 너는 아마 지쳐 쓰러질 정도로 스킬을 써야 할 거야."
내 말에 겁먹기는커녕 의욕을 불태우는 승주.
젊은 게 좋긴 하네. 이렇게 의욕만땅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