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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언제나 생각하는 게 있다.
사람이 언제 가장 방심하는가?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특히 나처럼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놈에겐.
사람은 24시간 365일 긴장하고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방심은 본인이 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해도 누군가에겐 빈틈투성이로 보일 수 있는 거니까.
그런 방심을 찌르는 것.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파고드는 것.
그게 이 망한 세상에서 사람을 죽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물론 거기에 걸맞은 능력도 있어야 하겠지만.
이 녀석이 그렇다.
최 원장.
이사장과 의기투합한 발정 난 아저씨.
그가 죽는 이유는 방심했기 때문이다. 그거 말고는 이유가 없다.
아, 능력 부족도 있네.
평소대로 자신을 맞이한 채원이가 이사장실로 자신을 안내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꼴을 당할 거라는 생각은 못 했겠지.
아마 어서 들어가서 채원이의 엉덩이와 가슴을 주무르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을 거다.
얼마나 몸이 달아올랐으면 이렇게 매일 오겠어. 멍청한 새끼.
최 원장 역시 배 나온 아저씨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보니 관리 잘한 40대 후반의 남자였다.
참 즐겁게도 노는구나. 있는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잘 모르겠어.
그 좋은 머리를 좀 더 건실한 방향으로 굴리지…. 이게 뭐냐 대체.
뭐…. 도덕적으로 따진다면 사실 내가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어쨌든 쓰러져 잠들어 있는 이상 이 남자는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익숙하게 테이프로 몸을 결박하는 나를 바라보는 채원과 부장.
"당신은 정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해지네요."
부장의 중얼거림.
글쎄. 내가 살아왔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 나를 혐오하게 되지 않을까?
"일단 이놈은 됐고, 다음은…."
최 원장의 운전기사. 이놈은 죽여야 하나?
아니지. 혹시 모르니 일단 살려 놓는다. 들을 걸 다 듣고 죽여도 상관없지.
운전기사 역시 고치로 만들어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이제 남은 건 이 여자.
괜찮은 여자다. 점수로 따지면 92점쯤.
웃고 있는 채원이랑 비슷할 정도의 미모. 아마 이건 내 주관적인 점수가 들어가서 약간의 가산점이 있는 거겠지?
긴 생머리에 몸에 달라붙는 드레스. 나이는 20대 초반? 가슴이 크다. 신기한 모양이야. 이건 수술한 건가? 그럼 5점 감점
뭐…. 수술을 했건 말건 내 알 바 아니지. 어차피 이 여자를 안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까.
매혹을 걸고 여자를 깨웠다.
한참을 흔들어 깨우자 부스스 일어나는 여자. 역시나 매혹에 걸려있으니 보여주는 환한 웃음.
음. 역시 미소의 힘은 대단한 거야. 그게 자발적이든 인위적이든.
"내가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유미연이요."
"그래. 미연아. 니 스킬은?"
"매혹요."
역시 그렇군. 뭐 매혹으로 의기투합했으니 당연하겠지.
"이 남자. 어떻게 할까?"
미연이의 표정이 경멸과 혐오가 가득 찬 표정으로 돌변하더니 그대로 결박되어있는 원장에게 달려들었다.
마구잡이로 발로 차고 찍는 미연이를 말리느라 본의 아니게 끌어안게 됐고 그 와중에도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 때문에 살짝 딴생각이 든다.
에휴. 나란 새끼는….
게다가 매혹에 걸려있으니 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면 됐는데. 하여간…. 멍청하다니까.
채원이가 미연을 안고 다독여준다.
그래. 둘은 서로를 알고 있겠지. 게다가 둘 다 가장 큰 피해자들이고.
나는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미연에게 조용히 말했다.
"복수 하고 싶지?"
복수. 그건 머릿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악몽을 끝내는 마침표 같은 거다.
덧없고 허무하지만 그게 없다면 마음속에 남아있는 앙금과 회한이 끝없이 자신을 좀먹게 된다.
이런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행위.
매혹까지 걸린 미연이에겐 나의 말이 더없이 달콤한 말로 들리겠지.
"네…."
"기회를 줄게. 그러니 나를 도와줘."
굳이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아도 충실하게 내 말을 들을 테지만, 나중을 위해서 이런 서사는 필요하다.
뭐 어차피 내가 매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어떤 걸 하면 되죠?"
"일단, 원장에게 매혹 걸어."
"매혹."
매혹이 걸린 걸 확인하고 원장의 조인트를 깠다.
여자를 깨울 때는 부드러운 손길을, 남자를 깨울 때는 조인트를.
네 번의 발길질에 깨어난 원장.
그의 눈과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버리자 '에구구구' 하며 앓는 소리를 낸다.
"내 말에 거짓 없이 성실하게 대답하라고 해줘."
"이분의 말에 거짓 없이 성실하게 대답해."
혐오감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 어휴. 무섭네. 무서워.
좋아. 준비는 다 됐고…. 이제 고구마 줄기를 따라서 하나씩 캐볼까?
"최 원장?"
"네…. 네."
"네 본거지는 어디지?"
"제 본거지는…. 도봉구 창동에…."
원장이 말하는 주소를 받아적고 계속해서 물어본다.
"거기 네 부하가 있나?"
"아뇨. 없습니다."
"부하가 하나도 없어?"
"네."
뭐지? 이 새끼는? 독고다이야?
"맞아?"
미연이에게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진짜야?
"정확하게 말하면 있었는데 전부 처리했어요."
"엥? 처리해? 뭐하러?"
"저 사람 하나면 충분하다고요. 많아 봐야 유지하는데 식량도 많이 드니 필요 없다면서 처리했어요."
운전기사를 가리키며 말하는 미연.
"원래 몇 명이나 있었는데?"
"열 명 정도요."
"그걸 다 직접 처리했어?"
"네."
"음. 합리적이긴 한데…. 독하네. 뭐,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긴 하지."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유지비를 줄였다고…. 근데 왜 줄였지? 수입이 줄어들어서? 근데…. 이놈은 뭐로 식량을 벌지? 지금 세상은 의사가 필요 없는 세상인데?
"야. 너는 뭐로 식량을 버냐?"
"전 약품 같은 거로 식량을 구합니다."
"약품?"
"네. 향정신성 약품이랑…. 미다졸람, 프로포폴…. 그런 것들…."
"프로포폴?"
잠시만…. 이거 혹시 설마….
"야. 너 상동 살았냐?"
"네. 자택이 상동이었습니다."
아…. 이새끼가 씹쌔끼들 있던 동네에 있던 그 원장이구나!
씹쌔끼들이 구한 프로포폴. 정종찬에게 건네줬던 거. 그걸 이놈한테 구한 거였어. 와. 이게 이렇게 이어진다고?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근데 뭐…. 이제는 아무 의미 없지.
"그러니까…. 쓰레기라는 거네? 의사라는 새끼가 사람들에게 약을 팔아?"
기분 나쁜 새끼. 물론 사람을 죽이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약을 팔아서 중독시키는 건 더 끔찍하다.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 거잖아? 약물 중독이라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지금 세상에서 마약은 나쁜 게 아닙니다…. 질병 해제를 쓰면 마약 중독에 걸리지 않고 얼마든지 효과만 누릴 수 있어요."
맙소사.
머리에서 천둥벼락이 친 느낌이다.
이 돌팔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그랬지? 약물 중독이 질병 해제로 치료가 된다고…?
씨발. 정말 맙소사다. 맙소사. 이게 또 이렇게 된다고?
중독이 없는 마약이라니. 미쳤네. 미쳤어.
"그래서…. 네가 로얄클럽에 들어갈 수 있던 거야?"
"네. 그렇습니다."
"아니…. 그럼 그 모든 마약 중독은 질병 해제로 부작용을 다 없앨 수 있는 거야?"
"네. 맞습니다."
"그 뭐냐…. 뽕. 필로폰인가? 뭐 그런 것도 그렇다는 거지?"
"네."
말세다. 말세야.
세상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다이나믹 했어.
정말 내가 우물 안 개구리가 맞구나.
부작용이 없다고 해도 마약은 마약이다.
아무리 질병 해제로 완벽하게 후유증을 없앨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머리에 새겨진 거부감과 혐오감이 더 크다.
해보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아.
근데…. 그게 살인과 뭐가 다르지?
살인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깊게 생각해 볼 문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종이와 펜을 원장에게 던져주고 팔을 풀어줬다.
"거기에 네가 아는 로얄클럽 맴버에 대해서 아는 걸 전부 적어. 이름, 위치, 규모, 하는 일, 스킬…. 전부다."
종이와 펜을 받아든 원장이 뭔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미연이에게 말했다.
"미연."
"네."
"너 말고 다른 여자들이 있나? 원장에게 잡혀있는?"
"네."
"몇 명?"
"두 명요."
"그래? 둘 다 매혹 스킬인가?"
"아니요. 그렇진 않습니다."
"그래…. 그럼 네가 가면 그 여자들 전부 풀어줄 수 있나?"
"저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하지만…. 저자를 데려가면 가능할 것 같아요."
운전기사를 가리키는 미연.
어차피 이 여자는 내게 매혹 당해있으니 딴 길로 셀 염려는 없겠지.
"풀려나면, 갈 곳은 있어?"
"아니요…."
"거기 여자들은?"
"그건…. 물어봐야 알겠죠."
"그래. 가서 풀어줘. 그리고 물어봐. 만약 갈 곳이 없으면 이곳으로 오라고 해. 너도."
매혹이 있는 여자들은 한곳에 모아놓는 게 낫다. 그리고 선의와 자발적으로 이곳을 지키게 하는 게 낫다.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면 결국 골치 아파지는 병기. 그렇게 생각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매혹의 힘은 그 어떤 스킬보다 압도적이니까.
"알겠어요."
"기왕이면 이곳에서 살았으면 해. 여긴 너와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험난한 세상보단 여기가 조금 더 살기 편하겠지."
"네. 고마워요."
"원장은 죽이지 않고 있을게. 만약 떠나더라도 돌아와서 원장은 처리하고 가."
솔직히 말해서…. 저 여자를 세상에 놔줄 생각은 없다.
만약 기어코 떠난다고 한다면…. 글쎄. 그땐 다시 좀 생각을 해봐야겠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서 위협이 되는 것보단 내 손으로 끝내는 게 나을지도.
뭐, 그건 지금 결정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 여자는 여기 머물 것 같은 분위기고.
"저 운전기사. 매혹해서 다녀와."
"알겠어요."
미연이 바로 운전 기사에게 매혹을 걸었다.
내가 마체테로 테이프를 끊어줬고, 둘은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뭔가를 적고 있는 원장. 아는 게 많은가 보네. 좋은 일이지. 다 내 밥이니까.
"뭔가…. 여기가 굉장히 위험한 곳이 되어가는 느낌인데요."
약간 걱정스러운 듯한 부장의 목소리.
"그렇죠? 매혹은 참 위험한 스킬이긴 해요. 저야 당할 일 없지만…. 부장님은 안 그렇잖아요? 내가 떠나는 순간 채원이가 부장님을 날름 매혹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 일 없어요."
단호하게 말하는 채원.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빙긋 웃었다.
"물론 그럴 일 없겠지. 하지만 모든 가능성이 있는 일들은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니까."
의심받는 것이 기분 나쁜지 이마를 살짝 찡그리는 채원.
음…. 이쁘네. 요 며칠 못했다고 아랫도리가 불끈불끈하는 느낌이야.
"그래도 부장님. 걱정하지 마요. 그래서 내가 데려온 여자들이 있는 거니까."
본인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좀 그렇긴 하지만, 나는 차라리 이게 솔직함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그냥 말했다.
"매혹을 가진 여자들은 투명화를 쓰는 여자를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이를테면 가위바위보죠. 매혹을 가진 여자들, 투명화를 가진 여자들, 탐지를 가진 집행부. 서로를 견제하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못 하게 하는 것. 아시겠죠?"
내 말에 부장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아직도 약간 뾰로통해져 있는 듯한 채원이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너희들이 제어된다는 보장이 있어야 비로소 너희가 자유로워지는 거니까."
"알고 있어요."
그래. 아는 것과 기분이 나쁜 건 별개지.
"가서 쉬어. 이제 할 일은 다 했으니까. 내일부터는 부장님의 지시를 받아. 기본적으로 너희는 이곳을 지키는 최종 병기 같은 거야. 그러니 굳이 일하진 않아도 돼. 그러니 하고 싶은 걸 해."
"알겠어요."
"부장님도 들었죠? 잘 알아서 부탁합니다."
"어휴. 몸은 하나인데 일거리만 잔뜩 늘어나는군요."
"어쩌겠어요. 머리 좋은 사람은 그런 걸 감수해야죠. 아니면 사람을 더 뽑던가요. 그럴 권한은 다 드렸으니 알아서 잘 하세요."
"정말 여기 안 있을 겁니까? 저는 그쪽이 여기 있었으면 합니다만."
그래. 내가 내 여자들이 없었다면 여기에서 호의호식하고 살았겠지.
괜찮은 여자들도 많고…. 아마 잘 살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내 여자들과 내 집이 있다.
복잡하고 귀찮게 사는 것보다 한가롭게 사는 게 낫다. 뭐하러 여기 있겠어?
"식량이나 챙겨주세요. 미연이가 돌아오면 이 새끼랑 이사장 처리하고 갈 거예요."
로얄클럽에 대해서 다 썼는지 펜을 놓고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원장.
녀석을 재우고 입과 팔을 다시 테이프로 묶었다.
"끙. 그렇습니까? 일단은…. 알겠습니다."
채원이와 부장이 모두 집무실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나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원장이 쓴 종이를 보며 생각했다.
우물 안 개구리.
근데 그 개구리가 보통이 아니야.
이젠 그 개구리가 우물을 벗어나 밖에서 거들먹거리던 놈들을 도륙 낼 시간이고.
칼을 들고 설치는 개구리라니. 웃기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찬찬히 종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