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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전동 휠을 타고 물류 센터로 가면서 남겨 놓은 네 여자에 대해서 생각했다.
여자들이 수긍하긴 했지만,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다.
워터파크에 질러놓은 불이 당장 꺼지진 않을 거라는 것, 그리고 그 네 명에게도 그리 나쁜 제안이 아니라는 것.
그렇기에 시도한 일이지만 솔직히 잘 될지는 모르겠다.
세상이 망한 이후 이런 식으로 사람에게 제안을 해본 건 처음이다.
내 방식은 아냐. 원래의 나였다면 넷 중에서 윤서만 본진으로 끌고 가서 감금해놓고 나머지 셋은 죽였다.
하지만 나도 조금 미래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하잖아.
물류 센터가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 유지가 될지 모른다.
당장 아까 그 여자 넷이서 물류 센터로 침입하면 과연 막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뭐, 번개 트랩도 있고 물리적으로 침투할 수 있는 루트는 다 막혀있으니 어찌어찌 막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확신하긴 어렵지만.
투명화가 괜히 유능한 게 아니니까…. 탐지가 있고 그걸 조직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이상 쉽지 않겠지.
어쨌든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그 동산인지 뭔지 거기를 그대로 먹어치울 생각을 하는 것도 그 이유다.
내가 직접 농사짓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소일거리라도 싫다. 나는 흙 주무르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모르지…. 나이가 조금 더 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물류 센터에 도착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투명화 동현이가 승규를 불렀고 나와서 내 이야기를 들었다.
비닐하우스 쌀농사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보이는 승규. 당연히 그럴법하다.
그에게 자급자족 실현만큼 중요한 사항은 없으니까.
승규가 운전하는 트럭에 나와 진영이, 금속화를 쓰는 민준이까지 해서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근데…. 이렇게 대놓고 차를 타고 가도 괜찮을까요?"
걱정이 많은 진영이의 조심스러운 질문. 무슨 마음인지 안다. 몰래몰래 숨어다니던 진영이에겐 다소 충격적인 일이겠지.
"걱정 마. 누가 발견하고 다가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니까."
내 말뜻을 이해한 그는 부러운 표정을 나를 바라본다. 하긴 스킬이 소주 생성이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가 가지.
"너 스킬 숙련도는 어떻게 되냐?"
"저요? 마스터죠."
"아? 그래? 그럼 코인이 없어서 두번째 스킬을 못 고르고 있나?"
"네. 하하."
"나도 그런데."
"저도…."
운전을 하는 승규와 민준이도 멋쩍은 듯 대답한다.
그래. 숙련이야 시간이 해결해주지만 결국은 코인이다. 쓸만한 스킬을 배우려면 20만이나 30만씩 필요한데 그게 쉽진 않지.
나처럼 열심히 모아놓은 단체를 한방에 잡아먹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단기간에 벌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들에게 그런 건 무리다.
"근처에 다가오는 사람들은 없죠?"
"없지. 외부 사람 못 만난 지 한참 됐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당연히 좋은 일이긴 하지만, 힘을 길러야 하는 이들 입장에선 썩 좋은 것만은 아니다.
평화와 강해지는 것은 공존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들에게 코인 셔틀을 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고…. 그렇다고 나가서 사냥하라고 하기도 쉽지 않고.
이 사람들도 문제네.
이런 기회가 있을 때 적당히 30만씩 들고 있는 놈들이랑 우연히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30만 코인을 들고 있는 사람 셋이서 갑자기 달려 나오다가 트럭에 치이는 거야.
그럼 겸사겸사 해결되고 좋을 텐데.
하긴 그런 로또 당첨 같은 일이 일어나긴 어렵지. 별 되도 않는 망상을 하고 있어.
비닐하우스가 있는 아파트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승규는 운전을 꽤 잘했고 막힐 게 없으니 차를 몰고 움직이는 것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습격당할 염려만 없다면 차보다 좋은 이동 수단은 없지.
있다면 비행 스킬 정도?
아파트에 도착하고 비닐하우스를 본 승규는 상당히 인상 깊은지 이리저리 살피면서 사진을 찍는다.
아마 물류 센터에도 적용하고 싶은 거겠지.
진영이와 민준이도 관심이 생기는지 이것저것 살펴본다.
확실히 이 시스템은 농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호기심이 생길만한 구조다.
비닐하우스에서 쌀농사라니. 왠지 멋지다.
"이거면 일 년에 두세 번도 수확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렇지 않을까요? 동남아 같은 데서 이모작 삼모작 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근데 지력이 감당될까요? 쌀농사는 물대서 하는 거라 괜찮나?"
"글쎄. 나도 전문가가 아니라서…. 공부해봐야지. 일단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근데 이 겨울에 벼가 자라고 있는걸 보니 참 신기하긴 하네."
그렇게 구경을 다 하고 쌓여있던 쌀들을 전부 트럭에 실었다.
자라고 있는 작물들을 보는 승규의 시선이 못내 아쉬워 보인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머무르면서 다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싹 수거해가고 싶어하는 표정.
하지만 자신의 처지가 있어서 그런지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트럭에 오르는 표정이 영 찝찝한 표정이네.
그렇게 다시 물류 센터로 돌아오는 동안 역시 사람을 하나도 못 마주쳤다. 아쉽게.
뜨내기들이 하나둘씩 물류 센터 근처로 지나가면 그게 가장 좋을 텐데.
아니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들이 외부의 공격을 앞으로 평생 안 받으면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게 가장 좋은거지.
물류 센터에 도착하고 바로 떠나려는 나를 보고 승규가 말한다.
"가려고? 쌀 좀 챙겨가지? 보니까 도정을 못 해서 현미인 거 같은데, 현미라고 싫거나 하진 않잖아?"
"그런 건 상관없는데…. 무거워서. 게다가 지금 배낭도 무겁고. 나중에 차 끌고 올게요."
"그래라. 네건 언제나 챙겨놓으니까 자주자주 들리고."
"알겠어요."
그렇게 물류 센터를 나와 벙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잔뜩 무게 잡고 나와놓고 금세 돌아가려니 약간 뻘쭘하긴 하지만…. 뭐 어때. 당연히 스킬 숙련이 더 중요하지.
벙커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마주치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윤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동산이나 캐슬 같은 곳이 최소 세 군데 더 있다고.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이 없는 게 이해가 간다.
의정부, 남양주, 수원, 인천, 부천이랬나? 서울의 사방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죄다 끌고 가고 있다면 이렇게 사람을 마주치기 어려워지는 게 이해가 간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도심에서 음식을 구하려고 뒤적거리다가 굶어 죽거나 사람들에게 습격당해서 죽는 것보단 그런 곳에 가서 맘 편하게 일하고 음식을 받는 게 나을 수 있겠지.
거지 같은 삶보단 소작농의 삶이 나을 수도 있으니까. 나라면 둘 다 절대 안 하지만.
근데 시작이 소주 생성 같은 거면 솔직히 힘들긴 하겠다.
그걸로 뭘 어떻게 할 거야. 음…. 나라면 어떻게 할까?
빈손이라고 방심시키고 소주를 소환해서 대가리를 후려치기?
아니면 화염병이라도 만들어서 사람들 사는 곳에 불 지르고 다니기? 나쁘진 않네. 화염병 만들 줄은 모르지만.
근데….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스킬로 소주 생성은 조금 너무 했어.
하긴 진영이라고 세상이 이런 식으로 돌아갈지 알았겠어? 사실 사람들이 무작정 서로 죽이는 게 아니고 적당히 살아남은 사람끼리 힘을 합쳐 살아가는 세상이었다면 제법 좋은 스킬이었겠지. 무제한 소주 생성이라니. 술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꿈의 스킬이잖아.
이렇게 과격하게 흘러간 게 운이 안 좋았을 뿐이지.
다시 캠프 쪽 생각을 해본다.
과연 다시 캠프로 돌아갔을 때 여자들이 남아있을까?
불은 대체 언제 꺼질까?
가장 안 좋은 상황이라면 불은 이미 꺼졌고 코인은 다 주워갔으며 여자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떠난 거?
뭐…. 씁쓸하긴 하겠지만 그리 손해가 크거나 하진 않네. 물론 그러니까 이런걸 제안한 거지만.
가장 좋은 상황은 여자들이 외부 나갔던 놈들을 다 잡은 상태로 모두 남아서 기다리고 있는 것?
그럼 약속한 대로 동산을 공략할 수 있을 텐데.
아. 모르겠다. 나중에 다시 가봤을 때 확인할 수 있겠지.
그리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건 아니니까…. 내 제안을 받아들이길 바라야지.
대체 사람들은 이렇게 강제력이 없는 약속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지?
구속력이 없는 상태에서 신뢰와 이해득실만으로 뭔가를 약속하다니. 정말 신기하다.
뒤통수 맞을 일이 없는 제안인데도 이정도인데, 까딱하면 자기가 좇 될 상황이 되는 약속 같은 건 어떻게 하는 거야?
그래서 동산이나 캐슬 같은데 일하러 들어가는 사람이 이해가 안 가는 거다.
들어가자마자 착취당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누가 구해주거나 제재해 주지도 않는데 그걸 어떻게 믿고 들어가냐는 거다.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그런 상황이라도 지금 상태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정도로 암담한가?
그런 상황이 돼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어쨌든 이해가 안 간다.
벙커에 거의 도착했다. 여전히 한가로운 주변.
오늘이 토요일이니 수요일 오전까진 나흘 남은 상황.
회복 포션도 챙겨왔고 코인도 넉넉하니 투명화는 배울 수 있겠네. 승희랑 세아는 또 물약 먹어야 한다면 질색을 하겠지만.
벙커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상대로 다들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반가워하면서 놀라는 표정은 조금 웃기다. 그리고 나를 보자 요염하게 웃는 안나.
어우…. 표정만 봐도 야하네.
어젯밤의 일들이 자연스럽게 다시 생각난다. 어우…. 너무 좋네.
"빨리 왔네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어보는 미나.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한번 만져주며 말했다.
"아니. 생각보다 빠르게 목표량을 채우고 와서. 거창하게 말하고 나갔는데 금방 돌아오게 됐네."
그러면서 조심히 배낭을 내려놓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배낭을 내려놓자 승희와 세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배낭을 바라본다.
내가 배낭을 열어 안을 보여주자 끔찍한 표정으로 바뀌는 두 사람.
"으악!"
"캭…. 이게 뭐야! 이건 어디서 났어?"
역시나 반응이 격렬하다. 나는 배낭을 거실로 옮겨서 회복 포션을 바닥에 차곡차곡 옮겼다.
"으아…. 싫다!"
"그…. 그걸 왜 여기다 쌓는 거야. 설마? 지금부터?"
"맞아. 씻고 나올 테니까 준비해. 바로 시작할 거야. 최대한 빠르게 숙련하고 싶으니 조금 하드하게 할 수도 있어."
"꺄악!"
"으엑."
호들갑 떠는 승희와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짓는 세아.
어쩌겠니 너희들이 도망갈 구석은 없단다.
"저도 해요?"
미나가 내게 가까이와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영 하고 싶지 않아 하는 표정. 나는 그런 미나를 향해 웃어주며 말했다.
"아니. 일단 내 숙련이 먼저라서. 미나랑 안나는 조금 나중에 하자."
"아. 그래요? 다행이네."
"다행이라고!? 이 배신자!"
"왜! 우리만! 미나 언니도 해요!"
꽥꽥거리는 승희와 세아를 무시하고 씻으러 들어갔다.
앞으로 지긋지긋하게 해야 하는데 벌써 저렇게 싫어하면 어떻게 하냐.
그리고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강해지는 건 좋은 거 아닌가? 이렇게 해주면 고맙다고 해도 시원찮은데…. 하여간 가스나들.
씻고 나오니 승희와 세아가 도축 당하기 전의 소 같은 표정으로 거실에 앉아있다.
싫니 어쩌니 해도 결국은 할 수밖에 없다. 그래. 빠른 포기가 정신건강엔 좋은 거야.
"자. 이제 시작해볼까?"
"에휴."
"하아."
한숨을 푹푹 내쉬는 승희와 세아.
그리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이 그걸 지켜보는 미나와 그저 생글거리며 웃는 안나.
두 사람은 우리 옆에서 한글 공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