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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53화 (15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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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일단 자세한 건 모르겠다.

이게 질병이 없다 하더라도 스킬 사용 성공으로 인정 돼서 숙련도가 오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우리 몸에 질병이 있는 건지.

둘 다 가능성은 있다.

탐지 같은 건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해도 숙련이 올랐으니까.

아니면 그런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몸 안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미세한 작은 병들, 가만히 두면 알아서 사라지는 아주 작은 질병들.

그런 것들이 무수하게 많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의사도 아니고 의학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서 자세히 모르겠지만 말이지.

생각해보면 말이 되긴 한다. 가벼운 염증 같은 것들도 따지고 보면 질병이잖아? 그런 게 몸 안에서 없어졌을 수도 있지.

어쨌든 숙련도가 오른다면 됐다.

어차피 질병 해제 스킬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니까. 다음 스킬을 위해 마스터를 하는게 목적일 뿐이다.

그러면서 건강도 좋아지면 당연히 좋은 거겠지.

"날마다 자기 전에 질병 해제를 한계까지 쓰고 자. 숙련도가 안 오를 때까지."

"네. 알았어요."

"숙련도가 안 오르면 쓸 필요 없어. 체력 낭비니까. 귀찮더라도 항상 스킬 창을 보고 쓰도록 해."

"네."

펑펑 오는 눈을 보면서 이런 스킬 이야기나 하고 있다니.

좀 더 로맨틱해도 좋을 텐데.

어쩌겠어. 내가 이런 놈인걸.

그리고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로맨틱과는 완전 상관없는 정반대의 이야기고.

"미나야."

"네."

"뭐 하나만 물어보자."

"말해요."

"너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니?"

"살인요…."

"응.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마주치면 공격 스킬을 써서 죽이든 무기로 내리쳐서 죽이든 그렇게 해야 해. 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거야."

"무리라고 말하면…. 철없는 소리겠죠?"

"글쎄. 모두가 비정상인 세상에선 정상인 사람이 비정상인 거지."

"하아."

일찍이 4년 전쯤에 고민하고 각오했어야 하는 것을 이제 와 하려니 쉽지 않을 거다.

그래도 언제까지 그걸 미룰 수는 없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세상이잖아.

죽이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자신이 죽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해야죠. 내가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 알다시피 지금의 세상은 생존하는데 두 가지 방법밖에 없어. 자력으로 음식을 생산하거나, 사람을 죽여서 코인으로 음식을 사거나."

"네."

"그리고 자력으로 음식을 생산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어. 혼자는 무리지. 농사를 짓든 가축을 키우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사람이 늘어나면 그만큼 필요한 양도 많아지지. 이런 것들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해."

"네."

"내 이야기를 조금 할까?"

미나는 내 말에 약간 관심을 보였다.

지금까지 미나를 만난 이후로 내 이야기는 거의 한 게 없다.

이 여자에게 나는 그저 가끔가다 찾아와서 음식을 주고 가는 알 수 없는 남자다.

내가 미나에게 그 대가로 뭔가를 요구한 적은 없었다.

우리가 한 섹스는 서로의 호감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강압이나 대가성이 아니었어.

"나는 음식에 대한 걱정은 없어. 나에겐 물류창고라는 곳이 있으니까. 거기엔 향후 몇 년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고,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시설과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어. 대부분 내가 구해준 사람들이지.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사람이란 이야기는 아니야. 그냥 변덕으로 죽이지 않고 살려준 사람들이니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미친놈의 장광설로 밖에 안 되는 이야기지만, 미나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살진 않아. 내 아지트는 다른 곳에 있지.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가 있어.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있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이야기할까? 나는 너를 포함해서 셋…. 아니 넷 정도와 함께 살고 싶어."

세아에게도 그랬지만, 이런 문제를 질질 끌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구차하게 변명이나 거짓을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나중에는 신뢰라는 댐을 붕괴시키는 작은 구멍이 되니까.

"이 집. 내 동생 어쩌구 그러면서 내가 이야기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저 내 전리품 중의 하나였지. 너를 속이려고 거짓을 말한 건 아냐. 그저 네가 마음 놓고 쉴 수 있게 하고 싶었을 뿐이지. 이제, 나는 너한테 제안을 할 거야."

그다지 충격을 받거나 실망을 한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돌 출신이다. 표정을 숨기는 것 정도는 숨 쉬듯이 해왔던 일.

함부로 미나의 생각을 추측하고 싶진 않다.

"셋 중 하나야. 여러 여자나 만나고 다니는 나 같은 쓰레기랑 함께 살던가, 아니면 내가 말한 물류센터로 가서 살던가, 아니면 나에게 실망하고 떠나던가."

아무 말이 없는 미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나는 사족일 수도 있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적어도 세 번째 것은 선택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에게 실망했어도 물류센터에서는 있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너를 보내고 싶지는 않아."

나는 이런 놈이다.

끝까지 내 욕심만 챙기는 그런 녀석.

그래도 내 딴에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나에게 보이는 내 감정 역시 진실했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소소한 거짓이 있었긴 했어도 그건 피치 못할 불가항력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창밖의 눈이 어느새 서서히 진눈깨비로 변하고 있다.

나쁘지 않네. 진눈깨비가 된다면 쌓인 눈을 녹여주니까.

어차피 발자국이 남는 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눈처럼 확실하게 발자국을 남기진 않잖아.

미나가 이불을 계속 덮고 있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이불에서 빠져나가 베란다 문을 닫았다.

싸늘한 기운. 춥다.

방금까지 미나와 한 이불 안에 들어있으면서 느꼈던 따듯한 온기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의 냉기.

과연 나는 다시 저 온기를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 다음에 내가 올 때까지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생각해봐."

나는 벗어둔 옷을 주워들며 말했다.

그러자 이불을 벗어 던지고 내가 다가와 안기는 미나.

"나쁜 사람.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데 뭘 선택하라는 거에요."

알몸의 미나에게서 전달되는 온기.

이렇게 빨리 다시 느끼게 될 줄 몰랐는데.

"인제 와서 떠나라고요? 다른 곳에 가서 살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살짝 울먹이는 미나.

"다른 여자가 있다고요?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게 뭐 어쩌라고요. 그런 건 상관없어요. 그렇게라도 같이 있는 게 차라리 낫지."

세아도 그렇고 미나도 그렇고…. 잘 모르겠다.

이렇게 쉽게 될 거란 생각을 못 했는데. 어떻게 이게 되지?

세상이 망한 탓이 크겠지.

기존의 도덕관념과 가치관을 모조리 때려 부숴놨으니까.

어쨌든 내겐 잘된 일이다. 세 가지 관문 중에 두 가지를 넘겼으니까.

이제 마지막 남은 건 승희.

그녀의 허락만 받으면 되겠네.

"고마워."

"나쁜 사람."

"미안해."

"됐어요. 왜 미안해해요. 그냥 당당하게 말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나는 오빠한테 들러붙어 살 뿐인데."

"그렇게까진 생각 안 해도 돼. 너랑 나는 일방적인 기생 관계가 아니야. 충분히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공생 관계라고."

"내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그냥 내 앞에 있는 것 자체가 내겐 도움이야."

다소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말은 생각보다 잘 먹혔나 보다.

하긴, 어느 누가 자신이 소중하다고 말해주는데 싫어하겠어.

나와 미나는 옷을 입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감기가 들것 같으니까.

옷을 입고 거실의 온도가 어느 정도 돌아왔을 때쯤 미나는 내게 다시 질병 해제를 걸었다.

"불면증…. 있다고 했죠?"

"응."

"이거 스킬도 숙련도가 오르면 다음 단계가 된다고 했고요."

"응."

"내가 이 스킬을 전부 올리면 오빠의 불면증을 치료해 줄 수 있을까요?"

불면증 완치라니. 설레는 단어다.

정말로 그게 가능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알겠어요. 날마다 숙련도 열심히 올릴게요."

"무리는 하지 말고. 스킬은 체력을 사용해. 너무 많이 쓰면 탈진할 거야."

나는 혹시 몰라서 체력 포션을 다섯 개 정도 구매해서 미나에게 쥐여줬다.

"막 쓰지는 말고 몸 상태 안 좋을 때만 마셔. 숙련도 올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오버할 수 있으니까."

"알았어요."

파카를 입으면서 번뜩 생각나는 게 있었다.

"책. 구하러 못 나갔네."

"괜찮아요. 다음에 와서 가면 되죠."

"그래. 꼭 금방 올게."

"자주…. 좀 와요.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알았어. 근데 어쩔 수 없어. 사람 죽이러 다니느라 바쁘니까."

너무 자극적으로 말했나.

생각 좀하고 말할걸.

“몸조심하고요.”

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다시 가만히 안기는 미나.

이 여자는 왜 이리 안기는 걸 좋아할까. 뭐…. 나야 좋지만.

잠시 그렇게 안고 있다가 배낭에서 스킬 리스트를 꺼내서 미나에게 보여줬다.

"이게 뭐예요?"

"스킬 리스트. 아마 처음에 질병 해제 고를 때 봤을 거야."

"제대로 못 보긴 했지만요."

"그래. 그러니 지금이라도 잘 봐둬. 거기에 맨 위에 있는 스킬들이 네가 질병 해제를 마스터 했을 때 고를 수 있는 스킬이야. 그리고 밑으로 갈수록 추가되는 스킬들이고. 대략 이름들만 봐도 어느 스킬인지는 짐작이 될 테니 그걸 보면서 뭐가 좋을지 생각해봐."

"아…. 네."

"웃기는 이야기지만 결심을 한 이상 이제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잘 죽일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해. 이해하지?"

"네."

"그러니 스킬들을 보고 생각해봐. 어떤 식이 좋을지. 다음에 와서 나와 이야기 하자."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올게."

"네."

미나가 내 목을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

아까 들어올 때의 모습이 퇴근한 신혼부부 남편이었다면, 지금은 출근하는 남편 같네.

아파트를 나서자 진눈깨비는 어느새 그냥 비가 되어있었다.

비가 온다는 건 온도가 0도 이상이 된다는 소리겠지.

그래서 그런지 날은 그다지 추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몇 센티 정도 쌓였던 눈들이 비를 맞아서 찰박거리며 물먹은 눈이 되어간다.

이정도야 뭐 밟아도 티가 안 나겠지. 어차피 비가 전부 쓸고 내려갈 테니까.

아직 백마촌에 오는 놈들이 더 있을 테지만, 가는 걸 관뒀다.

승희에게 가자. 가서 솔직하게 다 이야기하고 그녀에게도 허락을 받자.

기왕 시작한 일이고 두 명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받았는데 더 미룰 필요는 없지.

빨리빨리 해결할 건 해결하자. 그래야 내가 돌아다니기 편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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