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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스킬
비어있는 방 하나를 찾아 들어가 편하게 몸을 눕혔다.
아오. 어지러. 정말 할 짓이 못되네.
속도 매스껍고 아주 상태가 지랄 같다. 그렇다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스킬. 뭐가 또 새로 추가되었나 살펴봐야지.
어떤 말도 안 되는 스킬들이 또 생겼으려나.
일단 예전에 스킬을 적어놨던 종이를 꺼내서 펼쳐놓고 하나씩 확인해봤다.
그렇게 많이 생긴 건 아닌데…. 뭐 이러냐? 골때리네.
먼저 제일 눈에 띄는 건 '스킬 광역 무효화'와 '스킬 무효지대' 두 가지다.
이름만 들어도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스킬들.
아니 그래도 씨발 이 개새끼들은 좀 스킬 설명이라도 써주지.
좇 빠지게 숙련도 올리고 사람 죽인 대가로 벌어들인 코인 써서 스킬 배우는데 뭐 설명 한 줄 없어. 지랄 같은 새끼들.
에이 씨발. 투덜거려봐야 무슨 소용 있겠냐. 최대한 이름 보고 유추하는 수밖에 없지.
나만 이러는 게 아니고 전부 다 이러고 있을 테니까…. 설마 나만 안 나오는 건 아니겠지?
스킬 광역 무효화….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일정 범위에 걸려있는 스킬들을 모두 무효화시키는 것 같다.
그거 말고는 생각되는 게 없다. 옛날 게임에도 이런 스킬들은 있었으니까.
흔히 말하는 버프형 스킬들. 보호막이나 반사. 금속화, 가속화라던가 설치형 트랩 스킬들. 그런 스킬들을 전부 지워버리는 스킬.
게다가 범위라 반사의 영향도 안 받을 거 같다.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스킬이 아닐까 싶다. 이걸로 반사를 지우고 수면이든 매혹이든 마음껏 걸 수 있다는 뜻이니까.
아…. 미리 써보기 그런 거 없나? 범위나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알고 싶은데.
게다가 기껏 찍으니까 무슨 스킬은 지워지고 무슨 스킬은 안 지워지고 이러면 개꼴 받잖아.
그리고 스킬 사용 불가지대.
이거는 뭐 잘못 해석할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말 그대로 일정 범위를 스킬 못 쓰는 지역으로 만드는 스킬 같은데.
그렇다면 이것도 상당히 좋아 보인다. 문제는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것?
범위와 지속시간. 이게 가장 중요하겠지. 그리고 깔아놓은 사람의 스킬은 나갈 수 있는가도 중요하고.
남들은 못 쓰고 나만 쓰게 한다면 개사기고, 다 같이 못 쓰면 조금 생각해 봐야 하는 거고.
버프형 스킬들을 쓴 채로 이 지역 안에 들어가면 사라지느냐도 중요하다.
만약 사라진다면…. 이 범위 안에서는 신체 능력 좋은 놈이 짱 먹는다는 소리잖아? 아니면 무기 잘 쓰는 놈들이 유리하다는 거지.
스킬 무효지대가 반경 50m 막 이래 버리면…. 그 범위 안에선 칼찌 잘 놓는 사람이 최고가 되는 건데….
밖에서 걸고 온 스킬이 유지가 된다면 병신같다고 생각되는 공격 스킬들이 활용도가 상당히 높아진다.
막 이상한 공격 스킬들도 압도적으로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니까.
결국, 조건과 범위와 지속시간이 중요하겠네.
어차피 나는 안 찍을 거지만.
그 외에도 새로 생긴 스킬들은 몇 개가 더 있었다.
파티.
뭘까 이건. 진짜 그 파티를 말하는 건가?
솔직히 이건 설명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딸랑 파티 하나 써놓고 끝인 건 너무 심한 거 아냐?
이 파티가 흔히 생각하는 그 파티라면 대충 생각나는 기능들이 몇 개 떠오르긴 하는데…. 가설일 뿐이잖아.
모르겠다. 어차피 파티가 왜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으니 패스.
경험치를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뭐 코인이라도 균등 분배되나?
블링크.
단거리 텔레포트의 그 블링크인가? 쓰면 눈에 보이는 곳으로 순간이동 하는? 설마 랜덤 이동은 아니겠지.
솔직히 조금 탐난다. 이보다 더 좋은 생존기가 어딨어. 물론 사용 범위가 있긴 하겠지만…. 게다가 쿨타임 없이 연속으로 쓸 수 있으면 완전 개사기 일 텐데.
근데 설명이 없어서 이것도 미지수다. 어떻게 보면 가속화보다 구릴 수도 있어.
페이즈 아웃.
뭘까? 씨발. 진짜 설명 없는 거 좇같네.
흔히 말하는 게임에서 나오는 페이즈 아웃이면…. 신체를 아스트랄계로 잠시 이동하여 위험을 회피하는 그런 스킬일 텐데.
근데 이게 무슨 쓸모가 있나? 잘 모르겠다. 아니 대체 누가 설명도 없는 이런 스킬을 쓰냐고 씨발.
뭐 복권이야? 당첨이면 대박이고 꽝이면 그냥 손가락만 빨라는 거야?
아 매번 스킬 찍을 때마다 왜 이렇게 화를 내야 하냐고 씨발 놈들아.
그리고 그 외에도 이름만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공격 스킬도 몇 개 있었다.
화염 지대, 서리 폭발, 썬더 필드, 늪지대 생성.
음…. 이런 공격 스킬이 필요한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론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
딱 봐도 광역 스킬이잖아? 근데 광역으로 쳐죽일 만큼 사람이 많은 게 아닌데?
모르겠다. 캐슬이나 그런데 쓰면 효과가 있을지도? 근데 그거 하나 때문에 이런 스킬을 찍는 건 그냥 스킬 낭비 같다. 하나하나 쳐 죽이는 게 낫지.
그나저나…. 스킬들이 점점 노골적이다. 사람들을 대량학살하는 것을 유도하는 느낌.
의도가 보이는 거 같아서 약간 기분이 찝찝하다.
적어도 이들이 원하는 게 뭔지는 확실히 알게 된 기분.
이들이 원하는 건 생존이 아니고 경쟁과 반목, 화끈한 살인인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삶의 편의에 관련된 스킬들이 이렇게 나오지 않는 게 말이 안 돼.
스킬을 한 번씩 다 훑어보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이중에서 건질만 한 건 스킬 광역 무효화다.
이것만 있으면 정종찬 그 씨발 놈도 잡을 수 있다. 게다가 매번 사람들 재울 때마다 반사 당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되고.
그야말로 지금 가진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스킬.
당연히 이걸 고르는 게 맞지만…. 가장 큰 문제가 하나 있다.
숙련도 올리기가 지랄 같다는 것.
뭔가를 무효화시키려면 무효화 될 스킬이 걸려있어야 한다.
빈 땅에 사용한다고 스킬 숙련도가 오를지가 미지수다. 오르면 다행이지만, 안 오르면 골때리는 상황.
숙련도 올리는데 체력을 두 배로 써야 한다는 이야기다.
재우고, 무효화. 재우고 무효화. 아니면 매혹하고 무효화. 뭐가 됐든 지랄 같아진다.
숙련도 올리는 걸 그렇게 고생해서 올리는 게 과연 현명한 짓인가? 이건 매혹보다 더 피곤해질 수 있다는 소린데.
그에 비해 반사는 간단하다.
그냥 반사 쓰고 해제하면 끝이다. 얼마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원하는 대로 숙련을 올릴 수 있다.
굳이 전투하거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잖아?
고민. 고민. 고민.
근데 결국은 답이 정해져 있다. 반사가 우선이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테니까.
승규나 미래가 근처에 다가와도 상관없어진다.
게다가 세아나 승희가 공격 스킬을 얻어도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고.
반사를 먼저 찍자. 반사를 찍고 빠르게 스킬을 올리자. 그런 다음 스킬 광역 무효화를 찍는 거야.
그럼 전투에서는 거의 무서울 게 없어진다. 광역 공격 스킬과 물리 공격에는 답이 없긴 하지만, 그거야 천천히 해결하도록 하고.
['반사' 스킬을 배우는데 10만 코인이 소모됩니다. 배우시겠습니까?]
가격이 싼 것도 좋네. 나는 당연히 예를 눌렀다.
스킬 창에 생긴 반사 스킬.
바로 써본다. 뭐 별로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음…. 지속시간 20분이라.
희주가 지속시간이 1시간이었을 텐데. 희주는 고급 반사였었고.
그럼 이것도 매혹처럼 20분. 30분, 한 시간, 두 시간 이렇게 되는 건가?
나쁘지 않네. 어차피 고급은 금방 찍으니까. 뭐든 마스터 찍는 게 노가다라서 그렇지.
반사가 걸려있으니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다.
사람의 신뢰에 의지해야 했던 안전이 스킬로 인해 보호받는 기분.
게다가 적어도 정종찬이 가속화를 쓰고 다가와 나를 번개로 지져 죽일 걱정은 안해도 되잖아?
그 짓 하는 순간 지가 번개 구이가 될 테니까.
포션을 많이 처먹어서 어지럽고 메스꺼운 것도 어느 정도 사라졌다.
이정도면 충분히 움직일 수 있겠어.
밑으로 내려가다가 승규와 마주쳤다.
"어? 언제 왔었어?"
나를 배려해서 거리를 벌리는 승규.
"아. 이제 그렇게 거리 안 벌려도 돼요."
"어? 드디어 믿어주는 거야?"
"아뇨."
승규는 나에게 세세 콜콜 물어보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한번 쓱 짓고 넘어갈 뿐인 남자.
그래 저런 사람이 리더면 믿을 만하지. 승규 같은 사람이 타락하거나 변질하는 건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다.
자기 가족이 위협당하거나 위해를 받을 경우.
그것만 아니면 저 책임감 강한 아저씨는 가족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겠지.
"마침 잘 만났어요. 이야기할 게 있는데."
"그래? 그럼 조금 걸을까? 근데 잠깐 밑에 좀 같이 갔다 가자."
"그래요."
승규는 주방으로 쓰고 있는 곳을 가서 딸아이를 안아 들었다.
"하율아. 오빠한테 인사해야지. 오빠 안녕? 해봐."
"오빠…. 맞아요? 아저씨 아니에요?"
"그런가. 그렇네. 오빠라고 하긴 나이 차이가 크네. 근데 보통 반대 아니냐? 오빠라고 해주면 좋아해야지. 그걸 왜 정정하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저도 양심이 있죠.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나는데 오빠는 좀…."
"하하. 그래. 뭐든 상관없지."
그렇게 하율이를 안아 든 승규는 나와 비닐하우스 쪽으로 향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심각한 건가?"
"아뇨. 그런 건 아니고. 혹시 겨울에 한가해요?"
"글쎄.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한가하진 않지. 가끔 나가서 구해와야 하는 것들도 있고."
"혹시. 땅바닥을 팔 수 있어요?"
"바닥을? 뭐하러?"
"안전용으로? 벙커처럼요."
"글쎄. 쉽지는 않겠지. 굴착기 같은 게 있으면 모를까."
"음. 그 정도 깊이 말고요. 한 지하 100미터 정도?"
"그건 무리지. 현실은 마인X레프트가 아냐. 그렇게 깊게 팔 수는 없다고."
"그렇겠죠?"
"왜. 갑자기?"
나는 컴퍼니와 캐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전부 승규에게 말해줬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승규는 조금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 됐다. 하긴 쉬이 넘길 일은 아니지.
"하긴…. 그런 놈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어. 지금 우리는 그런 놈들에게 딱 좋은 먹잇감이긴 하지."
"공격 스킬을 잔뜩 들고 있는 놈들이 열씩 몰려오면 여기는 절대 못 버텨요. 게다가 탐지 스킬에 대해 너무 취약해요."
"근데 그렇다고 지하 벙커를 만드는 건 크게 의미가 없어. 어차피 여기 외관은 누가 봐도 사람이 사는 곳이잖아? 탐지 범위를 피해서 숨는 건 말이 안 돼. 방어에 치중하는 편이 낫지."
"하긴. 그렇겠네요."
"일단 우리도 계획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마."
"계획? 뭔데요?"
"글쎄.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장기적인 계획이야. 우리는 이 주변 반경 일대를 다 숲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숲?"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야지. 나무를 아무리 가려봐야 완벽히 숨길 수는 없어. 주변 논밭을 비롯한 이 주변 일대를 다 숲으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야. 그럼 이 안에 뭐가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진 않겠지."
"숲으로 만들 정도로 나무를 키우려면 제법 오래 걸리겠네요. 아무리 성장 스킬이 둘이나 있어도."
"어차피 남아도는 건 시간이니까. 그리고 나무는 알아서 크기도 하잖아. 자연과 시간이 우리 편이 되는 셈이지. 이 물류 센터 앞 도로를 폐쇄하고 반경 200미터 정도만 숲으로 만들어도 탐지 가진 놈들이 들어올 생각은 안 할 거야. 들어올 생각이 들지 않는 숲으로 만들 생각이니까."
"흠. 알겠어요. 차라리 그게 땅 파는 것보단 현실성이 있네요."
"그렇지? 우리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비닐하우스에 도착하자 품에 안겨있던 하율이가 승규의 품에서 내리더니 밭작물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런 하율이를 보고 미소짓는 승규.
이 남자를 합류시킨 건 확실히 잘한 거 같다.
나름대로 계획이 있고 똑똑하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미소라니. 보는 내가 다 든든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