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23화 (12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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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백화점 다른 여자

시월 중순.

아무도 치우지 않는 낙엽이 도로에 잔뜩 쌓이고 가을비와 밀려드는 토사로 곳곳이 엉망이 된다.

점점 도시는 도시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이 도시에 언제까지 살 수 있게 될까?

벙커의 성능은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시공사가 날림으로 지은 건 아닌지 아직은 어떠한 이상 징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카메라도 그렇고 지금은 크게 문제가 없지만…. 과연 얼마나 유지가 될까?

물류센터 근처에 집이라도 지어야 하나? 고민이 된다.

그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을지 확신도 없는데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니. 이것 참 불합리하네.

미나는 노트북을 받고 상당히 좋아했다.

할 게 없어서 집 청소를 하는 여자다. 영화가 이만큼 있으면 당분간은 지루해하지는 않겠지.

마치 새집처럼 깨끗해진 아파트. 마치 신혼집 같다.

아이돌이랑 신혼집이라니. 그것도 나름 설레네.

"답답하지 않아?"

"답답하긴 하죠. 그런데 나가는 건 무서워서."

"같이 나가볼까?"

여자들한테 돌아가면서 똑같은 패턴을 적용하는 감이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필요한 일이긴 하니까.

"괜찮겠어요?"

"난 늘 다니잖아."

"하긴…. 그렇네요. 그럼 지금 바로?"

"그래. 기왕 하는 거 바로 하자."

그런데 막상 나가려니 미나가 입을 옷이 없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옷들은 제법 얇아서 이대로 나가면 추울 거 같은데.

"아. 일단 이거라도 입고 가야겠어요."

옷장 한쪽 구석에서 꺼낸 옷.

뭐지? 남자 옷인가?

이 집에 원래 있었던 지연의 옷도 아닌거 같은데.

"어차피 가서 옷을 가져올 거면 이런 거라도 대충 걸치고 가죠."

조금 헐렁한 면바지와 라운드 티를 입은 미나.

저게 바로 오버핏이라는 건가?

사이즈가 안맞는데도 마치 일부러 저렇게 입은 것처럼 어울린다.

"역시 아이돌. 뭘 입어도 이쁘네."

"놀리지 마요."

"아냐. 내가 뭐 하려고 이런 거로 놀리겠어?"

내가 계속 신기한 듯 바라보자 미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정말…. 외모로 봤을 때는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겠어.

아마 살아남은 여자 중에 가장 이쁜 게 아닐까?

아니면 내가 콩깍지가 씐 걸지도.

황량한 거리를 미나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니 길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조금 오버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정말 그런 생각이 든다.

살다 보니 아이돌이랑 팔짱을 끼고 길도 걷고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이 이따위로 변한 게 마냥 손해는 아닌거 같아.

미나랑 가는 곳 역시 지하철역에 있는 백화점이었다.

얼마 전에 세아랑 와놓고 또 미나랑 같은 곳을 오다니.

조금 찔리네. 뭐, 걸리지만 않으면 됐지.

"명품 매장 이런 건 관심 없어?"

"뭐하러요. 지금 와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데."

"그렇긴 하지. 올라가자."

세아와는 다르게 미나는 2층의 여성 의류 코너로 가서 바로 매장들 안쪽으로 향한다.

세상이 망했을 때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어서 그런지 지금 가지고 가기 딱 좋은 옷들이 있다.

"구경해도 되죠?"

"물론이지. 그러려고 온 거잖아?.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다 챙겨 돼.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이러니까 VVIP라도 된 거 같네요."

"아. 그 쉬는 날 쇼핑할 수 있다는?"

"네."

"너도 해봤어?"

"아뇨오. 그런 걸 할 정도의 급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아이돌이 그런 거 하면 안 좋은 소문 난다고요."

정색하며 말하는 미나.

그러더니 바로 매장들을 돌아다니며 옷들을 고른다.

확실히 비율 좋은 아가씨가 작정하고 옷을 고르니 패션에 무지한 내가 봐도 상당히 멋지다는 느낌이 든다.

"이건 어때요?"

"이쁘네? 그런 옷은 뭐라고 불러?"

"음. 스티치 원피스?"

"그렇군. 어차피 이름 들어도 금방 까먹겠지만."

"모르겠으면 또 물어봐요. 얼마든지 다시 말해주면 되니까."

"됐어. 뭐 이쁘면 됐지. 이름이 중요한가."

그렇게 만족한 표정을 하고 다시 매장 안으로 가더니 옷을 갈아입고 내게 온다.

"이건요?"

"오. 좋다. 오피스룩인가? 인기 많은 회사 신입 여직원 같네."

"네에? 회사에 이러고 입고가면 불여우라고 소문날걸요?"

"누구한테? 다른 여직원한테?"

"그럼요. 작정하고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이런 거 입고 왔다고 두고두고 씹힐 거에요."

"회사도 안 다녀봤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봐온 게 있으니까요."

"근데 그 치마는 뭐라고 불러? 그게 생각보다 야해 보이던데."

"이거요? 이건 H라인 스커트. 음. 좀 그렇게 보이긴 하죠."

"허리 얇고 골반 큰 여자들이 그런 거 입으면 다들 눈을 못 떼지. 너처럼."

"헤에. 내가 골반이 큰가? 커 보여요?"

"글쎄. 커 보이는 거 같은데. 허리가 워낙 얇아서 더 그런지도?"

미나의 허리는 거의 세아와 비슷할 정도다.

저런 걸 보면 아이돌은 아무나 하기 힘들다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미나의 팔이나 발목은 내가 맘잡고 부러뜨리면 바로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니까.

말 그대로 또각 하고 부러질 것 같다.

"그럼 이것도 챙겨야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또 옷을 고르러 가는 미나.

본의 아니게 미나의 패션쇼를 보고 있는데도 그리 지겹지가 않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니까? 보고 있자니 다음 옷은 뭘 입고 나올지 기대가 될 정도다.

"짠."

"오."

이번엔 조금 더 평범한 회사원 같은 옷차림이다.

아까 전 옷이 도발적인 신입사원의 승부 오피스룩이라면 이번 옷은 남자에 관심 없는 시크한 여대리의 오피스룩 같은 느낌.

"이건 아까랑 비슷하지만, H라인 롱스커트에 무난한 흰색 블라우스."

"그러게. 비슷하긴 한데 이게 더 차분해 보이긴 하네. 이것도 좋다. 근데 내일 회사가? 자꾸 그런 옷만입네."

"눈에 띄는 게 이런 류라서…. 평소에 입어보고 싶기도 했고."

"하긴, 아이돌 옷은 뭔가 좀 더 요란하지?"

"그렇죠. 평상시에 입고 다니면 약간 민망하죠. 무대용 의상은 무대에서 입는 거니까."

“지금은 입고 다녀도 아무도 뭐라고 안하는데. 나한텐 보여줘도 된다고.”

“구할 수 있으면요.”

“꼭 구해와야겠네. 어디서 구하지?”

“글쎄요. 코디 언니네 집? 아니면 사무실?”

그렇게 말하더니 자기가 말해놓고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하긴, 소속사 새끼들이 그 지랄을 했는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쁘겠지.

나는 화제를 전환할 겸 미나에게 말했다.

"겨울에 나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좀 두꺼운 옷들도 챙겨야 하지 않아?"

"아. 이미 기모 레깅스랑 그런 것들은 충분히 챙겼어요. 널찍하게."

다행히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거기에 호응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하는 미나.

"그래? 그럼 됐고."

"그…. 기다리기 지겹죠?"

"아냐.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걸. 계속해도 돼."

"그래요? 오랜만에 나와서 저만 신난 거 같아서 미안하니까…."

"괜찮아. 괜찮아.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해도 돼."

"고마워요. 그럼 조금만 더 볼게요."

천성이 착한 여자다. 배려심도 있고 조곤조곤한 스타일이다.

똑똑한 데다가 대화하기가 참 편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온화한 분위기라 그냥 곁에서 보고 있기만 해도 시간 가는지 모르는 느낌.

"이건 어때요?"

"오. 이쁘네. 근데 웃긴다. 그거 니트? 그런 소재지?"

"네. 맞아요. 니트 원피스."

"근데 그렇게 목 있는 데가 잔뜩 파여있으면 안 춥나? 소재는 따듯한 소재인데 그렇게 파버리면 의미가 있는 거야?"

"글쎄요. 보온을 추구하면서도 맵시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기다려봐요."

다시 돌아가더니 이번엔 비슷한 옷인데 목이 폴라로 되어있는 니트 원피스를 입고 왔다.

"그래. 그건 좀 따듯해 보이네."

"멋이나 패션 이런 거보다 오로지 보온성에 중점을 두는군요?"

"봐줄 사람이 많으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아니잖아. 지금은 보온이 최고지. 한겨울에 바깥에서 며칠씩 잠복하고 있으면 맨살 드러난 부분이 없어야 하니까."

"와…. 한겨울에 뭐요? 잠복? 대체 어떤 삶을 산 거예요."

"어…. 그러게. 난 무엇을 하며 살았나."

지금 굳이 저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으휴. 여자랑 대화 안 해본 티 내기는.

"암튼, 둘 다 이쁘다. 뭐 안 어울리는 옷이 없네."

"그래요? 그래도 이쁘게 봐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러더니 잠시 고민을 하는 미나.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뇨…. 옷들이 부피가 좀 있어서 더 가져가기는 힘들어 보여서."

"적당히 가져가. 어차피 필요하면 또 오면 되잖아. 여기 있는 건 누가 가져갈 사람도 없는걸."

"헤헤. 그렇네요. 굳이 욕심낼 필요는 없죠. 그럼…. 하나만 더 챙겨도 되겠죠?"

"물론이지. 얼마든지."

"알았어요. 금방 올게요."

내심 이러고 노는 게 기쁜지 미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탈의실로 향한다.

그런 미나를 보며 슬그머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역시 이런 기회는 올 때 잡아야지.

나는 미나가 향한 탈의실 쪽으로 걸어갔다.

천으로 가려진 탈의실. 미나가 옷을 갈아입으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대로 다가가 천을 활짝 열었다.

"꺄악! 엄마야! 아이! 뭐에요! 옷 갈아입는데!"

속옷만 입고 있는 미나. 부끄러운지 들고 있던 옷으로 자신의 몸을 가린다.

거울에 비친 능글맞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어휴. 저 웃음 봐라. 완전 변태 새끼네.

"아직 옷 갈아입고 있잖아요! 가서 기다려야죠. 여긴 왜 왔어요."

"글쎄. 뭐하러 왔을까?"

내 말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미나.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 내가 뭘 하러 온 건지 뻔히 알겠지.

"아니…. 그게…. 진짜 여기서요?"

"뭐 어때. 아무도 없는데."

"그래도 조금 여기는…."

더 미나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허리를 휘감아 내 몸에 바짝 붙였다.

그리고 속옷 차림의 아이돌과 백화점 탈의실에서 키스한다.

정상적인 세상이었다면 기껏 생각했다가도 '병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자빠졌네.'라고 하며 금세 지워버렸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걸 실현하고 있다.

그것도 상대 아이돌이 적극적으로 호응까지 해주고 있는 상태로 말이지.

키스하면서 미나의 속옷을 바로 벗겨냈다.

탈의실에서 알몸이 된 미나가 거울에 비치며 전신 구석구석이 드러난다.

곁눈질로 보아도 흠잡을 곳 하나 없는 깔끔한 외모.

거울에 비친 잘록한 허리와 움푹 파인 기립근, 잔뜩 업 된 엉덩이를 보며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살짝 추운지 미나의 몸에 닭살이 돋아있어 오돌토돌한 피부가 느껴진다.

지금은 그래도 곧 따듯해질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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