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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오피스텔
방패와 석궁, 하이바에게 수면을 걸었다.
내 수면은 나 같은 지독한 불면증 환자가 아니면 어지간해선 실패할 리가 없기에 바로 털썩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맨몸에게 수면을 걸지 않은 이유는 별거 없다.
어차피 어둡고 상대가 어디 있는지 모르면 스킬을 쓸 수 없을 테니까.
만약 목표설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스킬이면 무슨 스킬일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마체테를 움켜쥔 채 비상구의 불빛에 의존해서 맨몸의 모습을 살폈다.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자세를 낮추는 맨몸.
자, 이제 어떻게 할래? 도망갈래? 스킬 쓸래? 아니면?
도망간다면, 나는 바로 자는 놈들 아무나 처리해버리고 쫓아가서 재우면 된다.
스킬을 쓰면 상대의 전력을 알 수 있다.
과연, 맨몸 너의 선택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맨몸은 빠르게 자신의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 같더니 확 잡아당기며 던졌다.
붉은빛과 매캐한 연기가 지하주차장에 가득 찼다.
켁...이거 그거지? 홍염? 연막신호탄?
이 미친놈들이 이런 건 어디서 구해서 다니는 거야?
웃긴 건 저 맨몸 새끼도 익숙한 게 아닌지 연기가 너무 많이 나와 당황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야? 써본 적 없는 거야? 그냥 간편하게 쓰면 주변의 시야가 뿅 하고 보일 줄 알았던 거야?
차 뒤에 있는 나는 거리가 제법 되기에 오히려 별 피해가 없었다.
어찌할지 모르고 당황해하는 맨몸. 스킬은 안 쓰나?
어차피 죽여버리면 스킬 따위 뭔지 알 필요 없어진다는 생각이 든 나는 차 뒤편으로 돌아 조심스럽게 벽 쪽으로 돌았다.
불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다시 찾아오면 바로 습격해 버린다. 그러면 내가 보이지 않으니 스킬이 뭐든 쓸 수는 없겠지.
자신이 던진 홍염을 발로 꺼트리려 하는 맨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오피스텔에 한 짓을 보며 굉장히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하는 짓은 완전히 어설프다. 이래서 실전 경험이 중요한 거야.
불빛이 점점 사그라지는 게 보였고 맨몸이 자신의 발로 완전히 빛을 밟아 꺼트렸다.
다시 어둠이 찾아온 지하주차장.
빨간색 잔영이 아직도 눈에 남아있는 듯하다.
매캐한 연기를 그대로 마시며 바보 같은 짓을 하던 맨몸의 위치를 똑똑히 알아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빈 깡통을 내 반대편에다가 휙 하고 던졌다.
까앙!
아마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이 팔렸겠지?
나는 그대로 달려가 마체테를 휘둘렀다.
퍽
"악!"
거리가 조금 안 맞았는지 마체테가 박히는 소리가 아닌, 때리는 소리가 났다.
"돌!"
쨍그랑!
후웅하는 소리 밖에 못 들었는데,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다시 마체테를 휘둘렀다.
퍽!
밝은 빛이 나며 아직도 연기가 가득한 지하주차장을 잠시 비췄고, 빛이 사라졌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와씨. 근데 방금 뭐였지?
일단은…. 전기를 켜야겠다.
자꾸 전기가 깜빡이면 다른 놈들이 더 올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지금 여기를 정리해야 해.
전기실로 들어가 다시 변압기를 켜자 웅웅웅거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빨리 밖으로 나왔다.
1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쓰러져있는 세 명. 일단 석궁 놈이 가지고 있던 석궁과 화살들을 챙기고 서둘러 마체테를 휘둘렀다.
[25,388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27,902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31,481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엄청난 코인들.
나는 맨몸이 죽은 자리로 와 마지막 코인까지 먹었다.
[22,443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이놈들의 코인을 보니 이놈들이 오피스텔에 살던 인간들을 털어먹은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한두명 죽여서 나온 코인이 아니다.
그간 경험상 한사람 평균 코인은 거의 2천 근처였던걸 보면, 적어도 몇십 명은 죽인 거다.
되게 어설퍼 보이는 놈들이었는데…. 생각보다 엄청나네.
후우. 어쨌든 정리는 됐다.
혹시 또 누군가가 들어올지 모르니, 나는 다시 SUV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차 안에 들어오니 그제야 긴장이 풀린다.
적어도 이 오피스텔을 이렇게 만든 놈들은 해결했어.
그렇게 긴장이 풀리자 드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예지가 있었다면, 그리고 꼬인 것 없이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지금까지 있었다면 이놈들에게 희생됐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가 내가 너무 병신같아서 관뒀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니, 나도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예지에 대한 생각을 잊기 위해 석궁 놈에게 얻은 석궁을 살펴봤다.
이야…. 이건 정말 멋지다는 느낌이 든다.
거의 총아냐? 이정도면? 총에 앞부분만 화살을 걸 수 있게 줄을 매달아 놓은 느낌이다.
석궁 놈에게 가져온 화살은 11개. 아 석궁은 화살이라고 안 부르나? 볼트였던가? 뭐 아무튼.
열한 발이라…. 이게 몸에 박혀서 죽으면 볼트도 같이 사라지나? 그럼 무용지물인데?
위력은 아직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부피가 커서 들고 다니기가 힘들다.
어떻게 하면 석궁의 머리가 오므라드는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부피가 크다. 무게도 적지 않고.
일단은 원거리에서 한 명을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긴 한데. 모르겠다. 이건 연습을 좀 해보고 쓸지 말지 생각하자.
급하게 처리하느라 아까 그놈들이 가진 것을 다 못 털어본 게 아깝다.
뭔가 그럴듯한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 보였는데.
왜 씨발 죽이면 지니고 있는 거랑 다 같이 사라지냔 말야. 몸만 뿅 하고 사라지면 얼마나 좋아.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시선을 고정하며 다시 잡생각에 빠진다.
아까 맨몸이 썼던 스킬은 뭘까?
돌이라고 했는데, 후훙 소리가 나고 유리창이 깨졌단 말이야? 돌이랑 유리창이랑 대체 뭔 상관이지? 아…. 돌이 나가서 유리창을 깬 거야?
그래. 그런 거 만화에서 본 적 있는 거 같다. 스톤 불릿. 해석하면 돌 총알? 그런 거겠지?
스킬을 쓰자마자 바로 나갔다면 상당히 괜찮은 스킬이다. 게다가 차 유리면 방탄인데 그걸 깼다고? 그럼 위력도 괜찮네.
제대로 머리에 맞으면 머리가 바로 깨지겠는걸? 몸에 맞으면 어떻게 되지? 아프고 마나? 설마 몸도 뚫으려나?
어차피 죽어버린 녀석은 별 관심이 없지만, 스킬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둬야 한다.
언제 어떻게 마주칠지 모르니까.
아…. 그러고보니 그놈들 방탄복 같은 것도 입고 있었는데.
아깝네 정말. 내가 너무 성급하고 멍청했어.
아무리 총기가 별로 없는 우리나라라고는 하지만 방탄복 하나 정도 있는 건 참 좋은데 말야.
아니지…. 우리나라에 총이 왜 별로 없어. 군인들이 있는데.
가장 의문인 집단이다. 군인들.
세상이 망해버리고 나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군인들이었다.
총은 스킬이고 뭐고 사정거리 밖에서 그냥 즉사시킬 수 있는 사기 중의 사기다.
그리고 대한민국에는 그런 군인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군인들을 봤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다.
군인은 물론이고 총도 없고 화약 무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어찌 된 일일까? 왜 군인들이 안 보일까? 총들은? 세상이 이 꼴이 나고 군인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이런 상황까지 대비해서 뭔가 행동방침이라도 있는 걸까?
좀 알고 싶지만…. 알 길이 없다.
그렇게 별의별 상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지하주차장에는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다.
음…. 몇번 더 깜빡여 볼까? 그럼 누구라도 몰려오겠지?
아냐. 그러고 싶진 않다. 이만큼 한 것도 나 같은 쫄보 새끼한테는 상당히 오바한 거였으니까.
밤 열 시 정도까지 기다려본 나는 이곳을 나가기로 했다.
이정도 됐으면 더 올 놈은 없다고 봐야지.
나라고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일단 지하주차장을 나가 2층까지 올라갔다.
창밖으로 주변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
2층에 올라온 나는 오피스텔 방문을 하나씩 열어봤다.
아마도 전기가 꺼졌을 때 밖에 나온 이들 중 자신의 집 문을 잠그지 못한 사람이 꽤 됐나 보다.
열려있는 문이 몇 개 있었다.
불이 켜져 있는 방, 한쪽에 모여있는 통조림과 쓰레기들.
언제 빨았는지 모르겠는 듯한 이불. 그리고 화장대.
화장대라. 이건 여자방이겠구나.
호기심이 든 나는 방안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옷장을 여니 여러 벌의 옷이 걸려있었다. 그런데…. 사이즈가 조금 커 보인다.
내 몸에 대보니 나보다 덩치가 있어 보인다. 으음…. 기분이 나빠졌어.
방을 나섰다. 다음 방으로 가니 여기는 누가 봐도 남자 방이었다.
패스. 기분 나빠. 아니지…. 뭐라도 있겠지? 한번 볼까?
처음 서랍을 열고 남자 속옷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더 나빠졌다.
뒤지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그대로 방을 나왔다.
몇 개의 방을 열어봤는데 다 남자 방이었다.
기분이 아주 나빠진 나는 그냥 원래의 목적을 생각하고 밖을 살펴봤다.
조용한 바깥. 조용하다고? 그럼 그냥 가야지.
혹시나, 혹시나 몰라서 3층으로 올라갔다.
또, 남자 방, 또 남자 방, 또…. 아니다.
방문을 여니 여자 구두가 보였다. 그리고 빨래 건조대에 걸려있는 여자의 속옷.
게다가 다른 옷들도 제법 사이즈가 작았다. 이 방은 좀 더 뒤져볼까?
옷장을 열어보니 여러가지 옷들이 있었다. 흠. 입은 거를 보면 뭔지 알겠는데 옷만 보니 그냥 천 쪼가리야.
그렇게 옷장 안에 있는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는데 안쪽에 상자 같은 게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걸 열자 딜도가 나왔다.
와. 생전 처음 본다.
정말 남자인 내가 봐도 흉측하게 생겼다. 이 딜도 반대편에 이건…. 큐방이야? 바닥에 붙이는 거?
이 방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본격적인 분이었네.
게다가 안에는 바이브레이터도 있었다. 망가에서만 보던 그것.
정말로 스위치를 켜니까 부우우웅하고 미친 듯이 떨기 시작한다. 맙소사. 진짜 이런 걸 보지에 넣는다고?
일단 그것들을 내려놓고 방을 한번 둘러봤다.
그래. 여깄다. 여자의 백.
백을 뒤진 나는 지갑을 찾았고, 안에서 신분증을 찾았다.
어디 보자…. 오. 생긴 게 꽤 이쁘다. 나이도 나보다 한 살 많네.
아깝다. 이 여자는 아까 그 네 명한테 죽었을까? 아니면 강간당했을까?
어쨌든 살아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놈들의 코인을 생각하면…. 다 죽었다고 봐야지.
나는 딜도와 바이브레이터를 챙겨서 배낭에 넣었다.
약간 추잡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 알아? 나중에 여자한테 써볼 수도 있잖아?
그렇게 거의 일주일을 투자한 나는 대량의 코인과 석궁, 그리고 딜도와 바이브레이터를 득템하고 벙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