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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오피스텔
하루를 더 기다려 봤지만, 거짓말같이 누군가 튀어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대학교 갔을 때는 기가 막히게 뭐가 자꾸 튀어나오더만, 이번엔 운이 없나 보다.
일단 집으로 돌아와서 한숨 자고 카메라를 확인하고 다시 오피스텔로 갔다.
뭐가 됐든 이걸 깔끔하게 확인을 해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이대로는 신경 쓰여서 살 수가 없어.
또 이틀을 지켜봤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다. 다시 집에가서 쉬고 또다시 나왔다.
이 정도 했으면, 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봐야겠지? 아무리 내가 쫄보라지만 이보다 더 신중하게 구는 건 오바야.
새벽을 틈타 오피스텔 1층으로 진입했다.
그 어떤 소음도 없는 침묵의 건물. 그리고 어둠.
내 발걸음 소리가 너무 커서 한걸음 떼는 게 굉장히 신경 쓰일 정도다.
엘리베이터도 센서 등도 그 어떤 것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봐선 건물 전기를 통째로 끊은게 맞는 것 같다.
근데 저 비상구 등은 왜 켜있지? 저건 전원이 다른가? 아니면 건전지를 쓰나?
암튼 다행이다. 저게 없으면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보일 뻔 했어.
자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마음 같아서는 이 오피스텔의 모든 방을 한 번씩 다 훑어보고 싶지만, 혼자서는 무리다.
내가 알기론 한 층에 20세대는 되는데, 25층에 20세대면 방이 500개다.
그걸 언제 다 훑고 있어…. 완전히 통제하지도 못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나는 지하로 내려갔다.
변압기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있으면 지하에 있을 테니까.
지하 3층까지 내려가니 변압기가 있는 곳을 찾았다. 나를 반겨주는 고압 표지판과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표지판.
문이 잠겨있을까? 그럴 거 같지는 않다. 다행히 내 바람처럼 문이 열렸다.
경첩에서 나는 끼이익 소리가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게 당연하겠지. 중간에 잠시 쉬었다고 해도 5일을 지켜봤는데.
안을 살펴보니 크게 특이해 보이는 건 없었고 뭐가 변압기인지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일단 꼼꼼하게 안을 살펴본 후, 나는 밖으로 다시 나왔다.
지하주차장 바로 앞이라 차들이 몇 대 있었기에 일일이 살펴봤다.
이 상황이 됐는데도 차들의 문은 다 잠겨있다.
한대 정도는 열려있는 게 있을 법한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저 뒤져보는데 마침 차 문이 열리는 차가 있었다.
제법 덩치가 있는 SUV. 이 정도면 딱 좋다. 위치도 좋고, 크기도 널찍하고.
이 자리라면…. 전기실로 들어가는 놈들을 다 확인할 수 있겠다. 괜히 다른 차 유리를 박살 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네.
자 이제 대규모 도발을 할 시간이다.
이 오피스텔을 이 꼴로 만든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 주변을 완전히 떠난 게 아니라면, 내 도발에 안 걸릴 리가 없겠지.
전기실로 가서 변압기를 살펴봤다.
다행히 전장함이 그리 어려운 구조는 아니었다. 아마도 이 내려가 있는 차단기가 메인 차단기 같다.
그 위로 무식할 정도로 굵은 전선들이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나름 공과대생이라 스위치 올린다고 감전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차단기를 올렸다.
묵직한 스위치가 올라가며 철컥하는 소리가 났고, 건물이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웅웅웅웅웅
전기실에 전기가 들어왔다.
문밖으로 나가니 지하주차장에도 불이 들어와 있다. 좋아. 이제 내가 할 일은 도발에 걸린 놈들을 기다리는 일뿐.
아까 문이 열린 SUV로 가서 뒷자리에 몸을 숨겼다.
과연, 언제 올까? 만약 오피스텔이 안 보이는 쪽이라면 바로 오지는 않겠지.
며칠을 기다릴 각오로 이 짓을 한 거니 상관없다. 나는 불면증 환자니까.
그렇게 차 뒤에 편하게 몸을 숨기고 기다리다 보니 몇 가지 허점들이 생각났다.
갑자기 꺼져있던 건물 전기가 전부 켜졌다면 이걸 끈 놈들 말고도 다른 놈들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
음…. 낮에 해놓을 걸 그랬나? 이래서야 주변의 잡놈들을 다 끌어당길 것 같은데.
뭐가 됐던 내가 여기 숨어있는 것은 모를 테고, 나는 매복에는 자신이 있으니 상관없지만…. 괜히 일을 크게 벌인 느낌이네.
뭐가 됐든 세 놈 이하로만 와라. 제발.
내 우려와 다르게 지하주차장은 한없이 조용했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는 지하주차장.
입구 쪽은 틀어막혀있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계단은 막혀있으니 이곳으로 올 수 있는 길은 저 1층에서 내려오는 길밖에 없을 텐데.
불면증 때문에 잠은 오지 않고 하도 문을 노려보고 있다 보니 몽롱한 기분이 든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3시다. 아직 열두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다고?
내가 생각을 잘못 한 걸까. 오피스텔 불을 전부 꺼버린 놈이든 아니면 다른 놈들이든 누구라도 들이닥칠 줄 알았는데.
나 혼자 며칠 동안 뻘짓을 한 걸까? 그냥 돌아가는 게 맞나?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회의감.
며칠을 매복할 생각으로 왔는데 고작 열두 시간 만에 이 모양이다.
아무래도 난 초심을 잃은 게 분명해. 배에 기름이 낀 거야.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의심과 불안, 후회를 모두 무시하고 얌전히 차 안에 누워있다.
언제부터 내가 할 만큼 해보기도 전에 포기부터 생각하는 놈이 된 걸까.
수중에 코인 좀 생겼다고 절박함이 사라진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짜릿한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을 분비하는 내 대가리 새끼.
문을 노려보고 있는 내 눈이 번쩍번쩍 빛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문 안쪽으로 들어오는 사람.
와. 쟤들은 뭐지?
제일 먼저 들어온 녀석은 방패를 들고 있었다.
전경들이 들고 다니는 반은 투명한 방패. 정말 밑에는 경찰 POLICE 라고 쓰여 있기도 했다.
게다가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녀석은 석궁을 들고 있었다. 와. 저거 진짜 석궁인가?
앞장선 탱커와 원거리 딜러야? 게다가 자세는 나름 그럴듯해 보이는데…. 묘하게 어설프다. 게임으로 배운건가?
그리고 석궁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남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벌써 셋. 설마 더 있나? 제발 세 명이어라.
아쉽게도 한 명이 더 들어왔다. 손에 삼단봉을 들고 하이바를 쓴 채 주변을 돌아보는 남자.
네 명 다 남자고 방탄복 같은 것을 입고 있다. 뭐 하는 놈들일까? 경찰이나 군인은 아닌 거 같은데. 그냥 민간인 놈들이 파밍 좀 열심히 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무리 봐도 게임 열심히 한 20대들 모임 같아….
그들은 나름 대오를 갖추며 전기실 쪽으로 가자는 듯 수신호를 보낸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수신호는 의미가 있는 거야? 뭔가 자신들은 체계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봤을 때는 그냥 특공대 코스프레 한 것처럼 밖에 안 보인다.
아마 자기들 딴에는 자신들이 기깔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네 명. 조금 피곤하다.
세 명이면 이미 저들은 자고 있을 텐데, 네 명. 이걸 어쩐다.
저 중 가장 위험해 보이는 놈은 세 번째에 들어온 아무것도 안든 놈이다.
아마도 스킬이 나름 좋으니 아무것도 안 들고 있겠지. 그리고 그다음은 석궁 든 녀석.
저게 어느 정도 위력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발사가 되는 거라면 눈먼 화살에 맞고 내 목숨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저 중에 세 놈을 재워야 하는데…. 일단 세 번째랑 석궁은 무조건 재우기로 하고 방패랑 하이바 중에 누굴 재우나.
제 딴에는 신중하게 전기실로 향하는 네 명.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들이 이 오피스텔 전기 내린 놈들은 아닌 거 같다.
전기 내린 놈들이면 좀 더 이 안쪽에 익숙할 것 같으니까.
이걸 어쩐다…. 모험을 해봐야 하나. 저 석궁은 탐나긴 하는데.
방패가 전기실의 문을 열었고 방패 뒤에 몸을 가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석궁이 들어가고 맨몸도 들어갔다. 마지막 남은 하이바는 지하주차장을 한번 휙휙 둘러보더니 마지막으로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차 문을 조용히 열고 나갔다.
네 명이긴 하지만, 저들의 움직임을 보면 틈을 봐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차에 몸을 숨기고 저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저 안쪽에는 별거 없으니까.
우우우웅.
지하주차장의 불이 전부 꺼지고 윙윙거리며 시끄럽게 돌아가던 펜이 다 꺼졌다.
뭐지? 전기를 껐어? 그럼 저놈들이 오피스텔을 털어먹은 놈들이야?
심장이 요란하게 뛴다. 상대가 세 명일 때와 네 명일 때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
세 명이면…. 긴장이나 흥분 따위는 하나도 없이 평온함 그대론데 말이지.
끼이익
전기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조심스러운 발소리와 옷 스치는 소리가 난다.
저대로 다시 나가는 건가? 그렇다면…. 1층으로 다시 가는 거겠지?
초록색으로 빛나는 비상구 표시 덕분에 네 명이 1층으로 올라가는 문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 지금이 기회다.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어.
내 눈엔 저들이 보이고 저들은 나를 볼 수 없을 때, 바로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