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 주도 패시지
패시지의 심장인 천년궁으로 향하는 천년로千年路.
재질을 알 수 없는 매끈한 석판이 서문에서부터 중앙성까지 일직선으로 포장된 대로는 쓰레기나 먼지 하나 없는 데다 석판도 때가 묻지 않아 무척이나 깨끗하고 기묘한 길이었다.
이른 시간이라지만 사람도 없고 동물도 없다. 있는 거라곤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전시의 공기 뿐.
=환인 성제님, 지금 마차를 준비…….=
『관광이나 우호 증진을 목적으로 한 방문이 아닌 만큼 마차는 사양하겠습니다.』
=네, 네.=
무정하게 제안을 뿌리친 환인은 마수 영령 중 베헤마를 불러들였다.
작은 집채만 한 반투명한 마수가 으르렁거리며 달려와 서자 르아웬 추기경과 그녀를 뒤따르던 교단 전투 신관들이 뻣뻣해졌다.
사자와 호랑이, 용을 섞은 듯한 대형 트럭 사이즈의 흑회색 마수는 대지의 짐승 베헤모스의 유생幼生으로, 포유류임에도 변태하는 특이한 성질을 지닌 생물이다.
유생이라 지칭되는 만큼 성공적으로 변태하면 베헤모스라는 최상위의 괴수가 되어 ‘살아있는 재해’라 불리게 된다.
덩치는 천차만별이지만 큰 놈은 소도시만큼이나 거대한 정도에 날개가 생겨나거나 용과 같은 쌍뿔을 지니거나 온몸에 금강석만큼 단단한 비늘이 돋거나 하는 등, 거의 모든 생명체의 특징이 랜덤하게 발현되는 대괴수.
오래 산 베헤모스는 지성과 영성을 얻어 신수가 된다고 알려진 만큼 그 유생인 베헤마도 7~8급에 이르는데, 그런 새끼 괴수가 영령 형태로 달려와 멈추니 병력들이 흠칫 놀라는 게 당연한 일이다.
『타라.』
환인이 베헤마의 머리에 올라서서 지하율과 두 김씨에게 손짓하니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르아웬도 흠칫 놀라 바람의 상급 계약 정령을 불러내 그리핀처럼 생긴 그 등에 올라탄다.
「크허어어엉—!」
그 직후 베헤마가 앞으로 뛰쳐나가니 르아웬도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사제들을 내버려 두고 뒤쫓아오는 추기경과 주도 패시지의 상공을 뒤덮는 영혼의 군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하율이 그에게 말했다.
“아저씨. 여휘의 역장은 안쪽하고 바깥쪽하고 기능이 좀 다른 걸로 보여.”
“어떻게 다르지.”
“바깥은 물리력 반발, 마력 조준 반사, 접촉 저항, 위상력 방사로 방어랑 요격에 특화되어있고…… 안쪽은 광역 공간 이동 제약, 내부 폭발 억제, 대기 위상질순환, 위상력 흡수…… 이렇게 되어있어.”
“생체 광역 방어 병기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기능이군. 이런 걸 역장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는 건가.”
“나도 놀라워. 설마 안팎이 다른 성능이라곤 예상도 못 했으니까.”
환인의 혼잣말에 지하율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베헤마의 목을 따라 머리로 올라와 그의 옆에서 턱짓으로 중앙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다 이중 역장이야. 방금 말한 건 내성벽 바깥하고 외성벽 안쪽의 역장 효과고, 천년성을 뒤덮은 성벽 안쪽 역장은 또 기능이 달라. 뭔가 의도가 느껴지지 않아?”
“여휘가 이것까지 미래를 내다보고서 큰 그림을 그렸다고 말하고 싶나.”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해서 계속 패시지 내려다보고 있었던 거 아냐? 누가 도망치는지 안 도망치는지.”
그 말대로다. 신의 눈은 거리가 얼마나 되었든 생명이 지닌 영혼의 색을 장애물 상관없이 야간 투시경처럼 볼 수 있다.
그 눈으로 내성벽 안쪽 중앙성 전체와 여덟 왕가, 이제는 일곱으로 줄어든 왕가의 대저택을 시야에 담고 있었다.
“……내성벽 역장의 기능은 뭐지.”
“반발과 흡수, 위상력 억제, 폐쇄. 세 가지뿐이야.”
“위상력 억제라면 내부에서 위상력을 사용한 모든 행위가 제약받겠군.”
“위상력을 에너지원으로 쓰지 않는 방랑자 출신 직업자나 유일, 희귀 직접자들 빼고.”
환인과 지하율의 시선이 무겁게 교차하였다. 그래서 성 내부의 탈출 반응이 없었던 거군.
“김철수, 김영수. 즉시 가서 타비아누스 투르시온을 확보해라.”
“옙.”
“예압.”
지시를 내린 순간 망설임 없이 모습을 감추는 둘. 환인은 이어서 지하율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공간 이동 제약을 읽어냈다는 건 네 능력으로 필드를 펼쳐 패시지 한정으로 공간 이동 현상을 봉쇄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해라.”
“거 사람 험하게 부려 먹는 아저씨네!”
열여덟 여고생의 얼굴을 잔뜩 찌푸린 지하율은 못 한다는 말 대신 눈을 감고 힘을 모으더니 온몸으로 불타오르는 푸른 위상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환인은 그런 그녀를 보며 베헤마를 멈춰 세웠고, 그 순간 지하율이 두 손을 하늘로 뻗는 것과 동시에 푸른 에너지의 빛기둥이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에너지는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 무언가와 충돌하더니 돔 형태로 뻗어나가 패시지 전체를 뒤덮는다.
막의 형태를 한 그것의 표면은 위상력이 파도치는 듯해서 보고 있으면 불안감이 치솟는 이미지다.
“《세 시간이야. 세 시간 안에 결판내도록 해.》”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지하율의 눈에서도 짙은 위상력의 안개가 뭉클거리며 흘러내리고 있다.
세 시간이면 충분하겠지.
잠시 주위를 돌아본 환인은 해골만 남은 뱀과 일부 고등급 나가 영령을 불러다 지하율을 지키라 명령을 내렸다.
정신 집중형 결계로 보이니 그녀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
베헤마가 몸을 엎드리니 길이만 수십 미터인 해골뱀이 똬리를 틀어 지하율을 칭칭 휘감는다.
그녀의 모습은 해골뱀의 뼈로 대부분 감추어졌지만, 일부 보이는 위치에는 평균 5급의 나가족 오십이 자리 잡고 주변을 엄중히 감시했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르아웬이 당황한 얼굴로 길에 선 환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성제 예하? 지금 이것은…….=
『결명회와 범죄자들이 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공간 이동 차단 결계입니다.』
=그, 그런 것이라면 교단의 성법사들이 이미 펼치고 있습니다만…….=
『이중 조치면 더욱 확실하겠지요.』
할 말을 잃은 르아웬을 두고 초시공으로 몸을 50m 정도 띄운다. 그러자 도심 대부분이 눈에 들어오며 분위기 또한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고무줄처럼 변한 것이 그의 감각에 잡혔다.
날이 밝았기에 일과를 시작하러 슬금슬금 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던 이들이 다시 집으로 뛰어 들어가며 자아내는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들.
영적 신성을 얻었기에 사람들이 뿜어내는 감정 또한 느낄 수 있게 된 걸까.
‘현대에서 살아가려면 이런 능력은 모두 봉인에 가깝게 억눌러야겠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잠시 발생한 짬을 이용해 영혼 감응을 펼쳐 도시 전체를 감응 범위 안에 집어넣는 한편 모든 영혼을 끌어당겼다.
이전에 이랬다면 역류하는 영혼의 기억 탓에 머리가 오버히트를 일으켰겠지만, 지금은 압도적인 우위 관계이기 때문인지 기억의 역류는 벌어지지 않았다.
환인은 몰려든 영혼을 분류해나갔다.
생전 능력이 뛰어난 무인이나 무사였다면 즉시 약식 계약으로 영령화를 진행하고, 아닌 영혼은 결명회, 일곱 왕가, 귀족 등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한다.
어느 것과도 관계가 없는 영혼은 평온의 파동을 펼쳐 곧장 성불시켜주었고, 귀족 등과 약간이라도 연이 있는 자들은 모두 영혼 구슬로 만들어 영혼고에 보관했다.
환인의 근처를 어슬렁거리듯 바람 정령을 타고 슬금거리던 르아웬은 그걸 보며 얼굴을 희미하게 일그러트렸다.
그를 향해 몰려든 영혼의 숫자는 족히 기백에 가까운 수준.
‘승령천제가 벌어지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분명 한두 달 정도 영혼사가 찾지 않았기에 쌓인 영혼이 어느 정도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저 숫자는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도시에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살인 범죄 행각이 벌어지지 않고서야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인 거다.
환인도 환인 나름대로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영혼들과 의식을 링크해서, 링크했다기보단 일방적으로 정보를 얻어내는 방식이지만 그렇게 손에 넣은 정보를 토대로 해당 정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하니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영혼 중에는 귀족 출신도 있었기에 직접 조사해보고 싶은 곳이 많이 생겼는데, 직접 두 발로 뛰자니 시간이 부족하고 곧 돌아올 김철수와 김영수에게 지시하려니 뭔가 미덥지 않다.
환연이 있다면 금방 확인해줄 텐데.
“…….”
중앙성의 가장 높은 탑에 홀로 위치한 강하고 찬란한 영혼의 빛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풍선처럼 도시 상공을 떠다니는 옥타 크로커스를 영혼 구슬로 회수했다.
그리고 시야를 본신으로 옮긴다.
리지나 호는 포말을 일으키며 상급 물정령 둘과 백려강의 물조작 권능으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거리를 대충 셈해보면 앞으로 3~4시간 뒤 요르문센 섬에 도착할 속도.
환인은 안주머니 쪽을 토닥였다. 그 신호에 환연이 품에서 머릴 빼꼼 내밀며 그를 올려다본다.
「왜?」
“혹시 환령계로 넘어간 뒤 다른 장소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나.”
「가능해. 패시지에서 곤란한 상황에 봉착했나봐?」
“그래. 영혼을 통해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도시를 빠르게 수색해야 하는 데 네 도움이 필요하다.”
환연은 그의 품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선수 앞에서 배를 끌어가는 상급 물정령을 가리켰다.
「내가 가면 배 속도는 지금의 1/4 아래로 떨어질 거야. 그래도 괜찮아?」
그녀의 이야기에 옥타 크로커스를 영령화 시키자 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퐁— 하는 효과음과 약간의 물방울을 뿌리며 모습을 감춘다.
동시에 상급 물정령들도 환령계로 돌아가 버렸기에 환인은 옥타 크로커스를 시켜 배를 끌라고 명령을 내렸다.
=도령?=
배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안느가 물 정령과 옥타 크로커스가 교대하는 모습을 보고 눈을 살짝 크게 뜨며 그에게 다가선다.
“왜 그러지.”
=갑자기 저 문어가 배를 끌기 시작하길래…… 패시지에서 볼일은 다 봤어?=
“아직 보는 중이다. 결명회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결계를 펼쳐놓고 대대적인 수색을 진행하기 직전이지.”
=아항.=
그즈음 환연도 분신체1쪽에 모습을 드러냈기에 그녀와 대화하며 안느와도 대화를 나눈다.
=그래서 르아는? 만났어?=
“입구에서 무릎 꿇고 날 기다리고 있더군. 조금 괘씸해서 괴롭히는 중이다.”
=엥?=
괴롭혀? 르아를? 도령이 왜? 걔가 뭔가 실수했나?
혼란스러워 머리 위에 무수한 갈고리를 띄우는 안느를 보고 작게 웃음 지은 환인은 그녀의 엉덩이를 팡- 소리 나게 때려주었다.
“환연을 저쪽으로 불렀으니 섬에 도착할 때까지 옥타 크로커스가 배를 끌 거다. 백려강에게 가서 이야기해줘라.”
바쁘니 잠깐 저리 가 있으라는 신호에 안느는 입술을 귀엽게 삐죽이고는 맞은 자리를 긁으며 정신을 집중하는 백려강에게 가버린다.
환인도 시점을 전방으로 향하고 분신체 1로 시야를 돌려 환연과 대화에 집중했다.
「증거물도 수집할까? 몇 가지, 결명회한테 제공받은듯한 아이템이 보여. 현대의 기술력을 써서 만든 물건이 틀림없어.」
“내 존재 자체가 증거물이니 수집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영혼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 집안과 가문의 인물들에게 정령력으로 마킹해놓기만 해라.”
「한 번에 몰아 죽일 생각인가 보네.」
“직접 죽이는 것은 품위가 없는 짓이지.”
「……지금까지 죽인 놈들은 뭔데?」
환연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환인은 태연했다.
“같은 사람을 사냥해 먹는 것들을 사람이라 불러줘야 할 이유가 있나. 그것들은 내 기준에 사람 미만이었다.”
그의 담담한 대답에 바람정령과 땅정령, 불정령, 물정령을 총동원해 패시지를 쥐잡듯이 뒤지던 환연이 그를 빤히 바라본다.
저 인간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미 뭔가를 준비해놨단 이야긴데.
「말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내가 죽을 정도로 고생했으니 놈들도 죽을 정도로 고생해봐야 하지 않겠나.”
「동태복수? 좋지. 그것들이랑 연관된 놈들은 그렇게 한다 치면, 결명회는?」
그 질문에 환인은 웃음 지었고 환연은 오싹, 소름이 돋아 팔을 마구 문질렀다.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그 인간들 곱게 죽긴 글렀네.
“그리고 하나 더. 거인숲에서 마주쳤던 가야 시라넬을 기억하나.”
「하지. 안느 동기 친구.」
“그녀가 도시에 있는지 전체적으로 살펴봐다오. 없다면 흔적만이라도 찾았으면 한다.”
「걔 실종됐다고 보고받았잖아. 죽지 않았을까?」
“죽었다면 죽음에 연관된 인물들을 찾아야 하니 어쨌든 흔적이 필요하다.”
「알았어.」
가야=시라넬이 정말 죽었다면 그녀와 연관된 인사들도 그녀와 똑같은 꼴로 만들어주고 그녀의 명예를 살려주어야 한다.
그게 그녀와 한 약속이니까.
3분 후.
가야=시라넬은 환연의 탐색으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가 찾아보지 못한 곳은 정령 침입 방지 대책이 마련된 7대 왕실 가문 대저택 내부와 중앙성 안쪽 전체뿐.
‘일단 그 일은 미루어두고.’
환인은 신의 눈으로 중앙성 북쪽을 계속해서 돌아다니고 있는 영혼색 둘, 김철수와 김영수를 주시했다.
국장을 찾으러 간 둘은 처음에는 성 북동쪽 지점을 훑는다 싶더니 지금은 중앙성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돌입한 지 5분이 넘었는데도 저러고 있다면 국장이라는 여자는 저 둘의 능력에 대한 대비를 해뒀단 이야기겠지.
환연도 그 생각을 했는지 그의 옆에서 팔짱을 끼며 눈썹을 찌푸린다.
「환인. 철영수 그놈들 잡힌 거 아냐? 왜 이렇게 늦어?」
“잡히지는 않았다. 국장이라는 자가 납치 예방 대책을 마련해놨는지 성안을 헤집는 중이지.”
「아이참. 그러면 돌아와서 새 지시를 받아야지 멍청하게.」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수행하려고 계속 찾는 중일테지만, 환인은 실망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고 할까.
자신도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중앙성을 향해 날아가자 영령군이 뒤를 따른다.
그들 영령군을 전개시켜 성을 포위하도록 하니 바람정령을 타고 뒤를 따르던 르아웬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성제 예하!? 천년성을 공격하시는 것은……!=
『르아웬 추기경.』
=……예?=
『지금 제게 명령하시는 겁니까.』
=큭…!!=
성제와 시선이 닿는 순간 르아웬은 영혼이 강제로 추출되는 듯한 환상과 감각을 느꼈다.
죽으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듯한 극심한 이물감과 괴리감.
그 충격에 늘상 펼치고 있던 신체 수호 성술은 전부 강제 취소되었고 기승 중이던 정령까지 역소환되어 지상으로 추락한다.
지상 50m. 머리부터 떨어지면 아무리 추기경이라 해도 술법사 계통인 이상 머리가 수박처럼 깨지며 죽을 높이.
환인은 그런 그녀의 멱살을 움켜잡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단 채 억양의 고저 차 없이 입을 열었다.
『추기경도 알다시피 제게도 제법 유능한 정보 집단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절 조사한 것처럼 저도 나름 추기경을 조사해봤더니…… 제법 흥미로운 보고서를 받을 수 있었지요.』
=윽…… 으, 오… 오…….=
『오해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매형이 되실 분에게 미인계로 접근하여 정보를 빼내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입장이 곤란해질 정보를 뿌려 큰 재산상 피해를 준 것까지 전부 말입니다.』
=……!=
두개골을 열고 뇌를 손으로 주물럭거리는 듯한 감각에 허덕거리면서도 르아웬은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오해…십니다……! 제발, 제발…!=
안색이 납빛으로 변한 르아웬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냉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저쪽에 보이는 분수로 던졌다.
휭— 날아가 그대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가라앉은 르아웬이 허벅지 깊이의 분수대에서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분수 가장자리에 매달려 헐떡인다.
환인도 알고 있다. 르아웬이 한 일은 장인어른이신 그라파든과 장모이신 슈아나데의 안위를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계획이 문제다.
그녀가 한 행동을 요약하면 장인어른 부부가 적당한 이유로 왕위에서 물러날 수 있게끔 일부러 아주 예전에 저지른 실수를 공론화시켜 정치적 공격을 받게 한 것이다.
의도는 이해한다.
만약 장인어른이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투르시온 가문과 본격적인 정치적 대립을 벌이게 됐을 것이고, 그리되면 미리아스툼은 투르시온과 푸른 나뭇잎의 탑, 차원 관리국, 결명회 의 공격을 받기 시작해 큰 위험에 빠졌겠지.
미리아스툼은 자신의 공식 연인인 안느의 친가.
시일이 흘러 이쪽의 의도가 명확해진다면 투르시온은 미리아스툼을 열정적으로 공격하면 했지 내버려 둘 이유가 없으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뭐가 문제인가 싶지만, 그녀가 고른 선택지와 그로 인해 미리아스툼이 잃은 것이 문제다.
르아웬은 미리아스툼과 접촉하기 위해 미인계를 골라 미리아스툼 차기 가주인 엘레델=슬라인=미리아스툼에게 접근하였다.
그와 친분을 쌓는 한편 땅신 교단과의 친분을 그에게 만들어주어 안전을 확보시켜주고 그를 통해 장인어른 부부의 정치적 실수와 약점을 빼돌렸다.
그런데 서로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서일까. 르아웬과 엘레델이 ‘진심으로’ 깊은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땅신 교단이 미리아스툼 가문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추기경이 왕실의 안주인으로 들어가게 된 거다.
장인어른을 공격한 정치적 실수도 ‘하필이면’이라는 단어를 쓸만한 것이었다.
정치와 치세에는 정답이 없는 법, 좋은 뜻으로 진행한 국책 사업이 안 좋은 결과를 내놓는 경우는 적지 않고 장인어른 부부가 선택한 것도 그 연장선의 일이었다.
도시의 육류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목장의 확장이 강력한 괴수를 불러들여 작게 형성된 마을이 소멸하는 일 따위, 니오네브레스에서는 흔한 일이며 어쩔 수 없는 재해이지 않은가.
그 점을 공격당한 미리아스툼 왕가는 괴수의 습격으로 소멸한 마을 관계자에게 ‘도덕적인 의미에서’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되어 재정이 제법 악화되고 말았다.
배상금의 태반은 당연히 투르시온의 주머니로 들어갔고.
의도는 좋았다지만 과정과 결과가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환인은 안느보다 훨씬 작지만 그녀보다 어른스러운 느낌의 르아웬이 분수 가장자리에 매달려 할딱이는 것을 보며 담담하지만 탓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선택한 것은 과정도, 결과도 좋지 않았습니다. 의도야 그분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지만 계획을 위해 미인계로 매형을 이용하였으며 계획을 위하여 소모한 정치적 실수도 미리아스툼의 위세를 크게 깎아 먹은 짓이었습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그, 그……!=
“장인어른께서 왕위에 계속 계시는 것이 큰 위험부담으로 다가왔다면 안느의 위치를 핑계 삼아 영도와 이어질 정치적 파장을 우려하여 사퇴한다는 걸로 충분했습니다. 그 후 안느의 소식 전달과 저에 대한 정보 공유 등을 이유로 세 분과 친교를 다져도 되는 일이었고 말입니다.”
=…….=
아! 그, 그 일 때문에 화가 나셨던 거였구나…….
분명 안느를 끼고 통신할 때까지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어쩐지.
르아웬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콜록거리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 느껴질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언이 아닌 통언으로 말씀하시는 걸로 보아 화가 조금은 풀리신 걸까.
그래도 조금은 하소연하고 싶은 기분이다. 당시에는 정말 분위기가 일촉즉발이었기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인데…….
=죄송…합, 니다. 제… 성급한 판단으로 인한, 실책이었…어요.=
“그 일은 나중에 안느가 있는 자리에서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탁탁탁탁……!
여러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린 환인은 성쪽에서 르아웬과 비슷한 수준의 아우라를 가진 성술사 한 명과 땅신 교단의 고위 직업자 인사들이 흙빛이 된 얼굴로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의복과 무장 상태를 보면 성술사는 르아웬과 같은 추기경일 테고 나머진 교단의 고위 전투직이겠지.
마주쳐봤자 하등 영양가 없는 말만 오갈 게 뻔하다.
환인은 그들을 반쯤 르아웬에게 떠넘기고 초시공으로 다시 도시 상공에 올라와 신격을 본격적으로 방출하기 시작했다.
대기가 옅게 떨리며 아신의 존재감이 도시에 넓게 넓게 퍼져나가니 도시를 채우던 팽팽한 전운의 긴장감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초목이 두려움에 벌벌 떨듯 숨 막히는 중압감이 패시지 전체에 내려앉는다.
집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1명도 없다. 밖을 돌아다니던 작은 동물들도 둥지에 숨거나 빛이 들지 않는 구석에 웅크려 벌벌 떤다.
그들과 달리 중앙성을 포위 중이던 땅신 교단의 병력과 중앙성의 왕실 병력 양쪽은 신위를 목격한 신자처럼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중앙성 안쪽으로 보이는 영혼의 색 주인들도 마찬가지다.
고위 귀족, 왕족일 게 틀림없는 자들의 영혼빛이 주저앉거나 쓰러져 부들거리고 비틀거린다.
“환연, 따라오지 말고 이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어라.”
「여휘 보러 가?」
“그래. 빠르게 정리하고 돌아오지.”
성 전체에 일시적인 정신 공격을 가한 환인은 초시공을 발현, 중앙성의 탑 최상층에 보이는 강하고 휘황찬란한 영혼의 색을 지닌 인물 곁으로 이동했다.
그랬는데…….
『……?』
인물이지만 인물이 아니다.
『석상이라니, 지하율이 그리 말한 이유가 있었군.』
여휘는 역장을 펼치는 동안 모든 활동이 강제로 중단되며 움직이지 못하고 의식주도 불가능해진다. 그 대신 전공격全攻擊 무효화라는 신의 권능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하였었지.
환인은 여휘로 판단되는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젬카인드라고 하였던가.
석상 같으면서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금속 질감까지 든다. 판타지 소설에서 숭경의 대상이 되는 여신교의 신상神像이 저러하지 않을까.
환인은 혈색이 도는 듯한 입술과 분홍색 유두, 알몸에 금장신구만 착용한 3m 크기의 석상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 오른손을 들었다.
지금 여휘의 상태는 일종의 트랜스 상태. 평온의 파동을 쬐면 영혼의 자극에 트랜스에서 깨어나겠지.
마악 신식 평온의 파동을 터트리려던 환인은 어디선가 가녀린 여성의 음색이 울려퍼지는 것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계의 신이 될 분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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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으어어..
[작품 설정]
여휘
돌가루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