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801화 (801/813)

801 슈브론 해저 미궁

해저 미궁 탐색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빠르게 진행할 수 없었다.

일단 환경적인 문제로, 물속이다 보니 움직임에 막대한 저항이 가해져 평범하게 걸어서는 10초에 1m도 걷기 힘들다. 애초에 바닥에는 산호가 가득 깔려있어 걸을 수도 없고.

헤엄치면 빨라진다지만 지상에서 걸어 다니는 거에 비하면 거북이처럼 느리다.

그마저도 해류가 가해지면 헤엄쳐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뒤로 떠밀리기 일쑤.

미궁 가장자리에서 미궁 영역에 들어선 환인은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시자한 장로의 제자들에게 아영과 김철수, 김영수를 맡겼다.

제자들의 등에 업혀있으면 이동 속도 제약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더욱이 인어와 함께 있으니 공기 방울을 갱신받기도 쉬워진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수중 보조가 필요 없다.

그녀들은 물속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몸놀림을 보여준다. 위상력을 체외로 발현해 물의 저항을 낮추는 한편 발바닥으로 위상력을 일순간 내뿜으며 선회와 기동을 선보일 수 있는 것이다.

장거리 이동은 인어에게 비할 수 없지만, 전투 시에는 인어에 버금가는 순간 가속력으로 단거리를 이동해 전투력을 드러낼 수 있다.

백려강의 신체는 용인이라서일까. 물속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자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수중 적응을 보여주었다.

외뿔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올 때마다 가속과 감속, 선회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졌고 목 부분에 아가미 비슷한 것이 생겨나며 수중 호흡까지 가능해진 것.

물속 유영 속도는 저 인어들도 한 수 접어줄 정도였는데 여기에 물리 법칙을 살짝 비껴간 신비궁이 있으니 그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자잘한 1~2급 이형종은 다가올 틈도 없이 신비궁에 꿰뚫려 즉사했고 무식한 방어력을 앞세워 어뢰처럼 돌진해오는 갑각류 이형종은 용龍과 같은 그녀의 근력 앞에 산산이 조각나기 일쑤였다.

=핫!=

어뢰처럼 쏘아져 오는 3급 바다거북 이형종의 돌진을 우아하게 회피한 백려강이 등딱지를 향해 주먹을 내려친다.

쿠직!

꾸루르르르르……!

등딱지가 박살 난 거북 이형종이 내장을 토해내며 천천히 가라앉고, 저쪽에서는 세 눈 방어가 안느의 워해머에 골통이 박살 나 퍼덕이며 침몰한다.

그 장면을 물 정령의 보조를 받으며 지켜보던 환인은 무서울 정도로 파란 물속을 슥— 둘러보았다.

잠깐의 전투에 도망갔던 오색 화려한 물고기들이 돌아와 죽은 이형종의 살점이나 내장을 뜯어먹고 있었다.

이형종들의 싸움에 부산물을 몇 번이나 챙겨 먹은 듯 익숙함이 만들어내는 광경.

크라빈의 늪지 미궁과 달리 완전히 개방되어 율캄 인근의 삼림형 미궁처럼 이형종과 여타 일반 생물들이 공존하는 풍경이다.

여자들이 잠시 전투를 벌일 동안 주위를 살피고 온 시자한 장로가 이실리테, 안느에게 말을 걸었다.

=여러분. 저쪽으로 강한 이형종의 기운이 셋 정도 느껴집니다. 5급 언저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곳이면…… 해구가 있는 곳이네요. 그런데 색이 진한 게 있고 옅은 게 있는데 무슨 차이일까요.=

이실리테가 가죽 지도를 펼쳐 확인하자 안느가 대답했다.

=깊이를 색으로 표시한 걸 거야. 여기 새까만 게 가장 깊은 거고 색이 옅은 건 반대로 얕고.=

그런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린 이실리테는 산호초가 뒤덮인 암초가 작게 솟은 것을 발견하곤 확실히, 하고 중얼거린다.

저 암초도 지도에 표시되어있는데 지도에는 짙은 색이 아니라 미궁 바깥과 같은 파란 색이었던 것.

잠시 해구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 여자들은 과연, 싱크홀처럼 거무튀튀한 아가리를 쩍 벌린 넓고 거대한 구덩이를 볼 수 있었다.

어찌나 넓은지 계곡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데다 밑이 무저갱처럼 어두워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야, 영수. 공간 지각에 바닥이 보여?=

“……형태가 엄청 복잡함다. 거기다 안쪽에 뭔가…… 물살이 겁나 빠르고 강한 거 같아요. 멋모르고 내려갔다간 물귀신 되기 딱 좋을 거 같은데요.”

김영수가 해구 안쪽 형태를 손짓·발짓으로 설명하지만 설명이 조잡해 뜻은 거의 전달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함부로 들어갔다간 큰일 나겠다는 것.

안느는 루모의 힘을 빌려 주먹만 한 빛의 구슬을 해구 안쪽으로 던졌다.

크기는 작지만 루모는 안느와 인연이 강해지며 동시에 힘도 강해져 중급 수준을 다시 회복한 상태.

빛 구슬이 수백 미터 규모의 해구를 옅게나마 밝히면서 하강하는 모습을 일행이 침을 꼴깍 삼키며 구경한다.

그때였다.

“어. 어?! 뭔가 올라와요!! 빨라!!”

=……! 모두 해구에서 떨어져!=

김영수의 외침과 동시에 광원 끝, 해구 깊숙한 곳에 음침한 빛 두 개가 떠오르는 것을 본 안느가 고함친다.

여자들은 황급히 해구에서 멀어지고 아영은 재빨리 장전해놨던 상급 보호를 일행 모두에게 걸었다.

그리고 김철수는 이를 악물었다.

거대한 생명체일수록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 여파를 심하게 낳는다.

예를 들어 전투기가 마하의 속도로 도시 지표 가까이 비행한다면, 대기과학 측면으로 비행이 가능한가는 둘째치고 그 속도와 충격파에 건물 지붕이 홀라당 벗겨지게 된다.

그와 같은 맥락이지만 물속에서는 그 여파가 한층 더 심해진다.

물이 매질이 되어 물리적인 힘을 사방에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이다.

저 거대한 괴물이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해구에서 빠져나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강한 물리력을 동반한 보이지 않는 와류가 소용돌이처럼 변해 주변을 집어삼키겠지.

대형이 엉망이 되는 것은 물론 자세까지 무너져 공격을 무방비하게 허용할 수도 있다. 이실리테 누님과 안느 누님은 무사하시겠지만……!

하여튼, 김철수는 심장이 오싹하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며 차원 단절을 넓게 펼쳐 해구를 덮었다.

완벽히 덮는 건 무리지만 대형 생물이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펼치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게 차원 단절로 펼친 벽을 끔찍할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들이받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꽈아앙—!!

“크억……!”

차원벽에 큰 충격이 가해지자 김철수가 숨 막히는 비명을 토해낸다. 능력에 가해진 충격이 역류해 그의 가슴을 진탕 시킨 것이다.

충격이 물을 매개 삼아 무겁게 퍼져나가는 것도 잠시, 정체불명의 첫 돌격을 막아낸 차원벽은 두 번째 가해진 돌격에 결국 산산이 부서졌고 김철수는 되돌아온 반발력에 반쯤 눈을 까뒤집었다.

하지만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 미궁 4시 방향 해구의 주인, 7급 거대 이형종의 등장 충격파를 완벽히 억제한 상태.

차원벽을 부순 거대한 괴물이 해구에서 스르륵 빠져나와 일행을 분노에 불타는 눈으로 노려본다.

지름 100여 미터의 거무튀튀하고 민둥민둥한 대가리에 끔찍한 수준의 허연 삼백안, 거기에 아귀와 맞먹는 톱니 이빨 주둥이까지.

기절한 김철수를 업고 있던 인어가 황급히 이탈하고 이실리테와 안느가 잔뜩 분노한 아귀곰치를 향해 달려들었다.

“…….”

환인은 리지나 호의 은신처를 나온 뒤부터 아신의 능력에 대해 고찰했다.

30일 안에 미궁을 돌파하고 아드네빌라를 깨워 메리아놀을 뒤집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수로라도 신위를 발현하는 일이 없게끔 능력을 검토하는 것도 중요하다.

‘신력과 율력을 쓰면 신들이 주시할 것 같으니.’

신의 관심을 받아봤자 유익할 일은 없다. 자애신은 유달리 자애로운듯하지만, 다른 신들까지 그러란 보장은 없으니까.

여자들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미궁 돌파에 관한 것은 자신들에게 맡기라고 한 상태.

환인은 어느 정도 떨어진 장소에서 이실리테와 안느, 백려강과 시자한이 고층 빌딩 사이즈의 7급 괴수 아귀곰치와 싸우는 것을 지켜보며 눈을 반쯤 감았다.

‘아신…… 하위신이라고해도 그 신적인 존재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능력을 검토할수록 이게 정말 신의 능력인가 싶은 생각이 자꾸 든다.

환인이 느끼기에 니오네브레스에서 아신이라 불리는 자들은 정확히 말하면 신神이 아니라 인류를 초월해 경지의 끝에 닿은 신인神人이라고 할까.

한 마디로 고위 귀족의 직속, 수석 하인…… 그러니까 집사 같은 위치다.

귀족은 아니지만 경력이 길어질수록 귀족에 대해서는 귀족보다 더 자세히 알게 되기도 하는 직업.

신의 가까이서 신의 수발을 들어주기에 신력을 깨우치고 율력을 얻고 신격화를 이루지만, 진짜 신은 되지 못하는 존재.

신인.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애신과 마주하며 오감을 넘어 육감으로 그 존재를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감은 말하고 있었다. 신의 권역에서는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고 말이다.

더욱이 정체 모를 우주 같은 공간에 영역을 창조하는 능력, 하늘에 신의 눈을 투영하는 능력, 영혼을 권능 영역으로 끌어오는 능력까지.

그 외에도 환인은 육감으로 느꼈다.

신… 자애신은 세상의 법칙과 율법, 섭리 등 모든omni 것을 알며 그것을 조작할 수도 있다고.

「환인. 생각이 복잡해 보이네.」

“……자애신인 그분만 뵙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성급하지만…… 네 말대로 복잡한 생각을 들게 하는 것들이 심경을 어지럽히고 있지.”

쿠아아아아아—!!

이실리테의 초거대 검기에 왼쪽 눈을 포함해 머리 일부가 도려내진 아귀곰치가 포효를 지른다.

위상력이 담긴 포효가 물을 타고 몸을 진동시켜 내장까지 진탕 시키니 여자들이 큭, 윽, 짧게 신음을 흘리며 위상력으로 몸을 보호한다.

환인은 상념을 방해하는 아귀곰치의 포효에 사나워진 심기를 고스란히 투사했다.

…아아아—……?!

격통과 격노로 휘발되어가던 아귀곰치의 이성이 환인의 존재감 투사에 일순간 제자리로 돌아온다.

피라미 시절, 산호의 틈에서 처음 거대한 은상어를 보았을 때 느꼈던 두려움이 아귀곰치의 신경을 장악했다.

그런 두려움은 필연적으로 아귀곰치의 마비를 불러왔고.

=하앗!=

추왁—!

움찔하고 찰나 간에 굳은 아귀곰치의 두터운 목을 거대한 빛의 검섬이 뼈째 잘라버렸다.

10m에 이르는 빛의 대검으로 필살기를 날린 이실리테는 조용히 해구로 떨어지는 아귀곰치의 머리를 보며 다중 검기를 수납하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에게 안느가 다가서며 말한다.

=흐아~ 이슬이 네 필살기는 진짜 멋지네. 방심했다지만 저 큰놈의 목을 단숨에 뎅겅 자르구.=

=네가 더 멋있어. 저런 놈의 몸통 박치기를 완벽하게 막내면서 해구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잖아.=

=뭐 나 혼자만 한 것도 아니니까. 벨이 신비궁으로 요체를 쏴서 움찔거리게 하지 않았으면 크게 밀려났을걸?=

환연의 상급 물정령이 죽은 아귀곰치의 시체를 해구에서 끌어 올리는 걸 보며 말하던 안느는 뒤쪽을 곁눈질하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까 도령이 신위를 쏜 거지?=

=눈이랑 머리 일부가 베였는데도 포효를 지르다 말고 굳었잖아. 주인님이 하신 게 틀림없어.=

=7급 이형종이면 신수한테도 개긴다고 알려졌는데 그런 괴물을 한순간이지만 겁먹게 했다는 게 진짜 놀랍네.=

=주인님은 신수 같은 게 아니고 신님이시니까.=

당연한거지.

그녀는 은신처를 나오기 전에 그가 아주 잠깐 보여주었던 신의 편린을 떠올렸다.

말씀하시던 도중 평범하게 바꾸셨지만, 처음에 들려주셨던 그건 틀림없이 아신위의 편린이었다.

그걸 진심으로 투사하면 신성 개입…? 그것만큼은 아니겠지만 필멸자 정도는 얼마든지 억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그녀들 근처에 공간 도약으로 뿅- 하고 나타난 김영수가 보고해왔다.

“안느 누님. 해구 안쪽을 좀 살펴봤는데요. 이리저리 구불구불한 통로 안에 그 백청룡이라는 신수가 있을 거 같지는 않아요.”

=안에 들어가 봤어?=

“예. 저 괴수 곰치가 있었던 곳…… 그러니까 이쯤까지만 넓고 나머지 통로는 너무 좁아서 사람이 겨우 들어가거나 할 정도예요.”

=수정 같은 투명한 보석 같은 건 안보였고?=

“곰치 괴수 새끼 같은 건 좀 있던데 다른 건 없었어요.”

=그럼 4시 쪽 해구는 아니겠네. 다음은 6시 쪽 해구로 가야겠다.=

여자들은 빠르게 아귀곰치의 사체를 정리했다.

대충 먹을 수 있는 곳은 잘라내서 보관하고 혹시 위상석이 있지 않을까 탐색 도구로 시체를 훑는다.

그러던 중 아귀곰치의 심장에서 7급 주먹만 한 적색 위상석을 발견한 안느가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걸 듣고 모여든 일행도 기뻐했다.

7급 위상석이라니, 시세가 정해져 있지 않은 귀물 중의 귀물이 아닌가. 그럼에도 판다면 못해도 네자릿수 금화를 받을 수 있는 물건이다.

아영은 영롱한 7급 위상석의 자태에 황홀해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언니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구로 넘어가면 위상석 못 쓰지 않아요?=

=쓸 수야 있지만 사용하면 에너지가 빠르게 감소하니까…….=

=그러니까. 지구로 넘어가기 전에 위상석을 다 처분해야 할 거 같은데.=

아영이 백려강의 이야기에 대꾸하자 안느가 위상석을 건네받으며 대답했다.

=율이 언니라면 그것도 개량할 거 같으니까, 굳이 위상석을 처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니아마드에서 엄청난 양의 금을 얻었잖아. 도령은 그것만 해도 지구에서 엄청난 부자라고 말하더라.=

=헐. 진짜요? 오빠가 엄청나다는 수식어를 쓸 정도라니…… 어느 정돈지 짐작이 안 가네요.=

그녀의 너스레에 여자들이 작게 웃었다.

4시 쪽 해구를 나온 일행은 6시 방향 해구로 나아가는 동안 단 한 번도 이형종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아니, 이형종이 아예 모습을 감췄다. 이형종이 아닌 생물은 많았지만 이형종은 아귀곰치의 포효에 죄다 도망간 듯한 모양새.

=개방형 미궁의 이형종은 평범한 동물처럼 행동하고 그런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네요….=

노란 열대어 떼가 평화롭게 무리 짓는 것을 구경하던 백려강의 이야기에 안느가 교단에서 배운 지식을 이야기해주었다.

=미궁의 이형종이 침입자에게 문답무용으로 공격하는 건 정신 침해 때문이라는 말이 있어. 그리고 정신 침해는 너희도 알다시피 미궁이 흘려보내는 기운인데, 폐쇄형 미궁은 정신 침해가 옅어질 일이 없지만 개방형은 다르잖아?=

=탁 트여있어서 이형종도 평범한 생물처럼 겁도 먹고 그런다는 거네요…?=

=응. 아까 영수가 아귀곰치 해구에 새끼들이 많았다고 했거든. 그걸 생각하면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이형종이 새끼를 낳는다는 게 곧 생물의 본능이 싹텄다는 말이니까.=

과연…….

수십 분 뒤. 주변을 경계하며 6시 해구에 도착한 여자들은 아귀곰치가 있던 해구보다 더 넓고 어두컴컴한 곳을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시커먼 공간으로 해류와 미세 모래가 바닷속 폭포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장소.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면 결코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을 광경이다.

자연스럽게 일행의 임시 리더 역할을 맡은 안느는 저 뒤쪽, 점점 심각해져 가는 환인의 얼굴을 확인하곤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역시 들어가기보단 밖에서 확인해보는 게 좋겠지?=

“예. 이번에는 제대로 경계하면서 빛의 구슬을 던지는 게 좋을 거 같슴다.”

김철수의 의견에 안느가 고개를 끄덕인다.

=염두에 둘게. 영수, 이쪽 해구는 바닥에 공간 지각이 닿아?=

“아뇨. 전혀…….”

아까 아귀곰치 해구에서 이형종을 놓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낱낱이 살펴보지만, 해구의 바닥은 그의 감지 범위 밖이었다.

안느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워해머와 방패를 고쳐 쥐며 말했다.

=다들 전투 준비해.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긴장하고, 철수는 광역 공격이 주변으로 쏟아지거나 위험해 보이는 일행이 있으면 차원벽으로 잘 막아줘. 영수도 공간 도약으로 위험한 일행이 보이면 안전지대로 대피시켜주고=

“예.”

“옛, 누님.”

이실리테와 백려강, 아영, 시자한은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하니까.

그녀들과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영은 상급 보호 성술을 각자에게 걸어주고 백려강은 신비궁을 장궁 형태로 확장시켜 어깨에 힘을 준다.

안느도 루모를 몸에 강령시키며 신체 능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린 다음, 빛의 구슬을 해구에 던지기 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행은 해구에서 좀 떨어진 산호초 평원에 자리잡고 전투 준비를 끝낸 상태.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안느는 준비한 빛의 구슬을 블루홀처럼 시커먼 해구 안쪽으로 던졌다.

천천히, 실제로는 빠르지만 천천히 내려가는 듯 주위를 밝히며 하강하는 빛의 구슬.

=……!=

해구 가장 아래쪽에서 희끄무레한 윤곽의 괴물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빛의 구슬이 미끼 역할을 한 것처럼 희미한 무언가가 무수하게 얽히고설킨 듯 꿈틀거리는 역겹고 혐오스러운 광경.

꽉, 워해머를 움켜쥔 순간 빛의 구슬은 그런 괴물의 모습을 비추었고, 괴물의 정체를 알게 된 안느는 크게 소리치며 해구에서 쏜살같이 멀어졌다.

=옥타 크로커스야!!=

옥타 크로커스. 크로커스 꽃모양의 지느러미가 몸통을 감싼 대형 문어 괴수.

최소 7급에 어쩌면 8급 일수도 있는 그놈에게 선박째로 끌려오는 경험을 한 백려강과 아영, 두 김씨가 긴장하며 입술을 깨문 그 순간.

쿠쿵— 두쿠웅—…….

깊은 심해의 색과 질감을 지닌 거대한 두족류의 다리 세 개가 거대한 기둥처럼 치솟더니 해구 가장자리를 내려쳤다. 아니, 가장자리에 올렸다.

이어 해구 쪽에서 천천히 드러나는 거대한…… 문어의 머리.

거대하다. 몸뚱이만으로 폭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해구를 온통 차지할듯한 거대함이다.

대왕고래 정도는 한끼 식사로 삼아버릴 것 같은 사이즈에 여자들이 굳는다.

그녀들의 머릿속에 ‘커도 너무 큰데……?’ 같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안느가 인어의 호흡을 먹으란 신호에 일행이 인어의 호흡 젤리를 복용한 순간이었다.

“다들 미안하군. 전투의 각오를 다졌을 텐데.”

=어.=

=아, 주인님?=

“형님?”

환인이 환연의 도움을 받아 스르륵— 유령처럼 옥토 크로커스에게 나아간다.

이어서 그의 몸 주변으로 무수한 황금빛의 알갱이가 떠오르는 것을 목격한 일행은 이후 벌어진 일에 입을 살짝 벌리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

황금빛 하나 하나가 혜성의 꼬리 같은 빛을 남기며 옥타 크로커스에게 일제히 날아간다.

그 빛알갱이의 향연에 위기감을 느낀 옥타 크로커스가 빌딩 크기의 다리를 휘두르자 다리에 닿은 황금빛의 알갱이가 무수하게 터져나가며…… 옥타 크로커스의 다리가 소멸했다.

아니, 빛의 알갱이가 폭발하며 닿은 부분이 마치 물에 녹는 것처럼 사라졌다.

———!!!!

옥타 크로커스가 놀란 것처럼 몸을 거칠게 꿈틀거리니 시꺼먼 밤하늘 같던 가죽에 희고 붉고 노란 색이 현기증 날 정도로 번갈아 가며 빠르게 반복된다.

도시에 들어가 몸을 한 바퀴 돌리면 마을이 그대로 소멸할 것 같은 거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빛의 꽃이 소리 없이 수천, 수만 번 계속해서 피어난다.

그으으오아아아아아…….

옥타 크로커스가 내뱉는 포효에는 고통이 아닌 두려움만 묻어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질것 같던 포효가 10초 20초 지날 때마다 흐려지더니 완전히 멎고, 빛의 꽃이 피어나는 것도 때를 맞춰 멈춘다.

=……어, 없어졌어.=

=옥타 크로커스가 사라졌어요…….=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옥타 크로커스의 모습에 여자들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일행의 머릿속에 무수한 갈고리가 떠오른다.

옥타 크로커스가 어디 갔지? 주인님이 쓰신 기술에 지워졌나?

오빠는 방금 지상에서 신력을 써선 안 된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방금 그건 도령의 신식 영혼 화살…? 아니다. 신식 영혼 폭발이겠구나.

오라버니께서 갑자기 나서신 이유가 뭘까. 아까 표정이 심각하시던데 그것과 이유가 있는 걸까?

형님 혼자 메리아놀을 그냥 지워버릴 수 있으신 거 같은데 우리 도움이 필요하긴 한가?

잠깐 정신을 놨던 안느가 여자들과 함께 굳은 표정의 환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도령. 아까 그거…….=

“잠시.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 바깥의 일이다. 너희도 이리 와라.”

머뭇거리는 김철수와 김영수까지 불러들인 환인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영도에서 통신이 들어왔다. 주도 패시지의 땅신 교단이 궐기해 중앙협의회와 여덟 왕가를 향해 교리 검증을 선포했고, 교단의 전투 병력이 주도 중앙협의회를 포위했다고 한다.”

안느와 아영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해당 신을 모시는 교단이 해당 신을 섬기는 왕가를 공격했다고?

“여기서 늑장을 부릴 때가 아니다. 뿌리가 드러나게 된 결명회가 미친 짓을 저지를 수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아드네빌라를 찾은 다음 패시지로 향해야 한다.”

=어, 응. 알았어. 하지만 아드네빌라 님이 어디에 있는지는…….=

“신안으로 아드네빌라의 선력 흔적을 포착했다. 흔적은 미궁의 중심부로 이어지고 있으니 곧장 거기로 간다.”

환인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중급 물정령이 사람 머릿수만큼 나타나 그들의 손을 잡고 이끈다.

그 바쁜 움직임에 잠깐 어버버하던 안느가 정신을 차리고 환인에게 다시 물었다.

=도령. 급한 마음은 이해하는데 여기서 패시지까지 천 킬로미터 가까이 되잖아. 여기 일을 마쳐도 패시지까지 가는 거리를 생각하면 늦지 않을까? 교단이 결명자들을 사로잡을테니까, 조금 느긋하게 찾아가면…….=

“그건 다소 낙관적인 생각이다. 아까 내가 말했었지. 각 주도의 사도는 신의 챔피언일 수 있다고.”

결명회가 어떤 기술을 가졌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이 상황에서 결명회가 미쳐 사고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사도가 사망하거나 크게 다치는 일이 벌어진다면…….

“신들에 의한 아포칼립스가 성큼 다가올 거다.”

…….

잠깐 이해를 못해 굳어있던 안느가 입을 열자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 종말? 세계의 종말을 말하는 거야?=

“그래.”

환인은 자신의 능력과 아신 존재 이유를 검토하고 검증하면서도 계속 자애신이 자신을 놓아준 이유를 생각했다.

드라우닐의 태도에 따르면 신이 아신, 하위신을 놓아준 일은 수천 년간 신들의 하인으로 움직이던 드라우닐도 처음이라는 표정이었다.

그에 따른 반응, 자애신의 행동, 세상에 퍼져있는 아신에 대한 정보와 사도들의 존재, 교단의 아신에 관한 관심…….

이것들을 섞고 신이라는 자들이 세상에 보이는 관심이나 행동을 곁들이자 결론은 하나 밖에 나오지 않았다.

‘자애신을 비롯해 다섯 신은 이 세상을 초기화할 생각이다.’

그게 언제 벌어질 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각 도시에 있는 신의 사도가 죽을 경우, 신들의 관심은 니오네브레스에서 완전히 떠나갈 것이고, 아포칼립스의 도래는 틀림없이 앞당겨진다.

=그, 그럼 어떻게 해?! 지금 당장 르아웬한테 연락해서 땅신 교단의 행동을 제지해야……!=

얼마나 당황했는지 안느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이미 조치해놓았다. 대성녀에게 다른 4대 교단에 연락해 시간을 벌어달라 부탁했고 땅신 교단 병력은 중앙성을 아직 포위하고만 있으니 시간은 있다.”

=아……!=

“그리고 초시공으로 현현시킨 내 분신체가 패시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녀의 선력이 깃든 호우라는 불확정 요소를 멈춰 세우고, 본신의 힘을 패시지에 현현시킨 분신체에 집중해야 하는 거다. 그러니…….”

환인은 미궁 중앙 해구 쪽에서 무수하게 떠오르는 이형종을 보고 혼령주를 준비하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은 이 소란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망할 백청룡을 찾아 멱살을 잡는게 급선무지.”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1: 엌ㅋㅋㅋ 저새끼 저걸 찍어서 맞추넼ㅋㅋㅋㅋㅋㅋ

???2: 저런 놈을 풀어줘? 씨, 다시 잡아와!!

???5: ^^

???4: 하.....

???3: (침묵)

[작품 설정]

블루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