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33화 (733/813)

733 소도시 라펩

귈탐과 그녀의 전사들이 정교 기관원들을 꽁꽁 포박해서 끌고 나가자 곧장 벌벌 떠는 하녀들이 들어와 바닥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청소하고 양탄자까지 고급스런 적색의 새것으로 교체했다.

사달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하녀들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여자친구들과 짧지만 담소도 나누고 그랬었는데…….

=고생했어. 이거 가져가서 먹…….=

=힉……! 화, 화화황공하옵니다…!=

사탕 같은 것을 몇 개 건네주기 위해 다가가던 안느는 자신이 말을 걸자마자 화들짝 놀라 납작 엎드려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쓴웃음을 삼켰다.

두 번 말 걸었다간 심장마비에 걸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물러가도 돼.=

어중간한 배려보단 차라리 속 편하라고 물러가라 지시하자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일어나 꾸벅꾸벅 허릴 숙이고는 뒷걸음질 쳐서 거처를 나가는 하녀들.

아쉽다는 마음을 표정에 드러내던 안느는 다시 소파처럼 만든 자리에 앉아 백려강의 안마를 받는 환인에게 물었다.

=도령, 벨티칼 수뇌부의 스탠스가 어떤지 알아냈어?=

“창피하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엥?=

=네에?=

말을 건 안느는 물론이고 근처에서 날카로워진 신경을 진정시키고 있던 여자들도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상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면 내면의 심중까지 꿰뚫어 보던 그였는데 알아내지 못했다니?

새가 날아가다 날갯짓을 까먹어 추락했단 소리보다 더 놀라운 일이지 않은가.

여자친구들의 그런 시선에 환인은 변명 아닌 변명을 꺼내 들었다.

“적굉이란 놈의 언행에는 논리가 파탄 나 있어. 놈의 행동을 보고 떠올린 결론은 말이 되지 않아. 이성적으로 판단해봐도 앞뒤 이야기가 맞지 않고.”

적굉은 대놓고 사비족 우선주의에 선민의식을 탑재했다. 그런 놈을 보낸다는 것은 대화하겠다는 의사가 없음을 드러내는 행위다.

하지만 벨티칼 입장에서는 자신과 얼굴을 붉혀서 얻을 이득이 없다.

“이후 메리아놀을 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나는 대외적으로 홀로 메리아놀을 거꾸러트리려 하는 미친놈이다. 차라리 상종하지 않으면 않았지 일부러 역린을 건드릴 이유가 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

=오빠가 그 빨간 놈을 보고 내신 결론은 뭔데요?=

아영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자 환인의 표정이 드물게 찡그려진다.

눈에 보약이 될 것처럼 빼어난 미소년이 저러니 아영은 심장이 콩닥거려 은근슬쩍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가만히 있다간 제 혼자 발정날 것 같아서.

“…적굉이 윗선의 보고 허가 체계를 깡그리 무시하고 멋대로 찾아온 거다. 그러면 지시사항도 없을 테니 저놈이 제멋대로 군 게 설명되지만…….”

환인은 도저히 이런 결론을 믿기 어려웠다.

국정과 행정을 골목길 구멍가게처럼 주먹구구로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기관의 일개 기관원이 이따위로 행동한다고?

여자친구들이 자신의 뜻에 공감해주리라 생각했던 환인은 뜻밖에 그녀들 대다수가 어색하게 웃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백려강만 환인의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이다가 언니들과 친구가 머리를 긁적이거나 시선을 피하는 것에 깜짝 놀란다.

환인도 어이없음을 느끼며 물었다.

“일개 인원이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을 독단으로 저지른다고?”

=어어, 오빠는 너무 상식적이고 이성적이라서 그런 거……죠? 위계질서, 중요하죠. 네. 하지만 어딜 가나 또라… 머리 나사 풀린 놈은 있기 마련이고 불행하게도 높은 신분과 빼어난 배경 덕분에 꼴리는 대로…… 으흠! 멋대로 구는 놈들도 있거든요.=

중간중간 단어 선정에 실수하며 설명해주는 아영. 그것만으로도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영도에서 만난 호천명 친왕의 수행과 같은 맥락이군.”

말하자면 적굉 저 놈은 9급 호족 가문의 후계자, 혹은 공작 가문의 직계 후손인 기사단 수석 기사 정도의 위치인 거다.

제어하려면 기관의 기관장이나 사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주술사제 정도가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환인은 기막히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해서 얼굴을 찡그렸다.

상념이라고 해야 할까. 잡생각이 많아진다.

이런 세계에서 용케 자신의 계획이 크게 어긋나지 않고 잘 이어져 왔구나 하는 생각.

머리 아프게 지혜를 짜내서 계획을 꾸미는 것보다 그냥 논리고 뭐고 명분만 챙겨서 상대를 박살 내는 게 제일 편한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때까지 열심히 머리를 써왔던 게 억울하다는 생각…….

덕분에 환인의 안에서 벨티칼의 위상이 대폭 내려갔다.

라드세아, 히스론드, 메리아놀처럼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라 유사 국가, 덩치만 큰 마을 수준의 관리 집단 체계만 있는 곳으로.

‘그나마 귈탐 같은 인물이 있어 국가와 비슷한 형태가 유지되는 거겠지.’

환인의 상념이 정리되었을 즈음 여자친구들의 대화가 그의 귀에 닿는다.

=이슬아. 이제 다중 검기를 다섯 자루 쓸 수 있어?=

=응. 그동안 왜 안됐을까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몸에 익은 느낌이야.=

=이슬이 아가씨도 보면 재능 덩어리니까?=

=검희 직업의 강력함은 그 직선적이고 명료한 점이라고 하잖아요. 그나저나 다섯 자루라니, 검희의 시조가 다섯 자루의 검기를 다뤘다고 들었는데 이실리테 언니가 시조랑 동급이라는 뜻인가?=

=…….=

이실리테는 그녀들의 감탄에 희미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남은 평생 5급에 검기 세 자루가 전부일 거라는 각오도 했었다.

희귀 직업의 시초가 되는 사람은 당시에 유일 직업자라고 불렸다. 당연히 그에 걸맞은 막강한 위력과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시일이 흘러 시초자와 같은 직업이 여러 번 등장하며 직업의 원천 능력이 약화되었다.

시조도 다섯 자루를 펼치는 게 고작이었는데 자신은 약화된 직업으로 세 자루나 쓰고 있지 않은가.

그랬기에 자기 자신을 설득해 세 자루로도 만족하였었는데 이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다섯 자루를 넘어 여섯, 일곱 자루를 다루게 되어 주인님께 도움이 되어드려야…….

=야, 이슬아. 등급도 올랐는데 새 능력은 안 나왔어?=

안느의 질문에 잠깐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하던 이실리테는 검기를 불러내어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벌어진 현상에 여자들은 으엑, 질렸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고 환인도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

황금빛을 정갈하게 내뿜으며 존재감을 자랑하던 다섯 자루의 검기가 말 그대로 허공에 녹아든 것처럼 사라진 것.

백려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이실 언니… 검기를 수납하신 건…… 아니죠?=

=네.=

=안 보이는 투명 검기라니 사기잖아!=

=오우……. 검희의 시초자는 말년에 비기를 각성해서 그녀에게 적수가 없다는 전승이 있는데 그게 투명 검기였나 보네요.=

=다중 검기 몇 자루에 투명 검기를 섞어 쓰면 당해낼 사람이 없을 테니까…… 아니, 잠깐. 그럼 검희 시조는 다섯 자루가 아니라 더 많은 검기를 썼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

=어? 그러네. 율이 언니 말대로일 수도 있겠다. 평소 보이는 건 다섯 자루고 나머진 투명 검기로 숨겨두고 있다가 비장의 순간에만 쓰면…….=

여자들은 왠지 서늘해져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이실리테가 다중 검기를 다루는 모습에서 단 세 자루뿐이라 해도 살벌하게 위협적이란 건 절실히 깨달았었다.

그런데 그게 다섯 자루에, 숨겨진 검기가 몇이나 더 있는지 모른다고?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이실리테가 호승심에 불타오르자 아영과 안느가 짓궂게 속닥거린다.

=오. 이실리테 언니 얼굴 멋져. 같은 여잔데도 반할 거 같아!=

=그치? 전직 산적 두목이라 그런지 가끔 상남자 느낌을 뿜어내서 되게 매력적이라니까. 가끔 덮쳐서 한입에 잡아먹고 싶어질 정도야.=

=우와~ 안느 언니님 야해. 킥킥…… 힉!?=

=으헥! 야, 야야 농담! 농담이니까……?! 아야야, 아팟!=

얼굴이 빨개진 이실리테가 다중 검기 한 자루를 몽둥이처럼 만들어 휘두르자 아영은 기겁해서 도망가고 안느는 사색이 되어 위상력으로 만들어낸 버클러를 써서 그녀의 공격을 흘리거나 막아낸다.

그녀의 왼팔에서 빛나는 푸른색 방패에 이실리테가 놀라 물었다.

=안느, 너 팔에 그거 뭐야?=

=어? 이거? 위상력에 꽤 여유가 남아서 어떻게 쓰면 좋을까 연구하다가, 네 다중 검기를 보고 얻은 힌트로 우연히 만들어본 거야. 내 실 방패는 너무 큰데다 쓰기 어려운 장소가 있기도 해서.=

신기해하던 이실리테가 그녀의 위상력 버클러를 한 대 퍽 때리자 안느가 질색하며 왼팔을 털어댄다.

=아 아프다고! 아직 충격이랑 고통은 다 걷어내지 못해서 40% 정도는 고스란히 느껴진단 말이야!=

=개량의 여지가 남아있는 거네. 내가 도와줄게.=

=……응?=

=혼자 머리를 싸매는 것보다 옆에서 도와주면 기술에 더 빨리 익숙해지고 숙련도도 늘어날 테니까 더 좋지 않겠어?=

싱긋 웃으며 다중 검기가 아닌 다중 둔기 네 자루를 소환해내는 이실리테.

그걸 본 안느가 땀을 삐질 흘리다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에 사색이 되었다.

=아악! 나 죽네!=

=괜찮아. 나도 다섯 자루 적응 훈련은 해야 하니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미친년아! 꺄악!=

“큭큭.”

오랜만에 보는 그녀들의 개구쟁이 같은 모습에 작게 웃던 환인은 바로 옆 공간이 살짝 일그러지며 빛바래지는 광경에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간이 일그러진 부분이 세피아 색인 것은 환령계의 특징인가.

거기서 빠져나온 환연이 자연스럽게 환인의 다리 사이에 앉으며 지쳤다는 듯이 후— 길게 숨을 내쉰다.

“고생했다. 일은 잘 끝났나.”

「누구랑 계약하거나 특정 장소에 깃든 상급, 최상급 애들 말고는 다 떠나는 거 확인했어. 상급이 셋에 최상급이 하나인데 최상급 물 정령하고 계약한 인간은 너도 아는 인간이야.」

자신이 아는 인간이라면…….

「청이라는 갈색 도마뱀 여자.」

만엽이라는 이구아나 사비족과 함께 왔던 그 여자인가. 떠올리고 있으니 환연의 염탐 정보가 이어진다.

「벨티칼 고위층은 영도하고 구조가 비슷하더라. 기관이랑 연구소가 있고 거기 책임자가 대족장이라는 인간을 보좌하는 느낌이었어.」

환령계의 시간 흐름은 현계와 비교하면 매우 느리다.

안쪽에서 밖을 보면 수십 배로 감속시킨 영화를 보는 느낌이라 뭘 말하는 지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정령 아이들이 떠나는 거 보고 난리가 난 건 확실해.」

“…대족장과 만엽이라는 사비족의 반응은 어땠지.”

「대족장은 대사주로 보이는 뱀이랑 얽혀있어서 반응은 못 봤고 만엽이란 인간은…… 내가 보기엔 환인 네가 여기 있는 거 알아차린 느낌이던데? 뭔가 당혹스러운 거 같긴 했어.」

“아영 네가 한 말이 맞아떨어진 거 같군.”

=오빠가 꿰뚫어 보신 게 정답이었던 거죠 뭐. 아하하……. 에휴.=

환인의 냉담한 분위기에 아영이 아하하 웃다가 한숨을 폭 내쉰다. 정답을 맞히긴 했지만, 기분이 영 좋지 않다.

=자기, 그럼 어쩔 거야? 지금 도시를 떠날 거니?=

“대강 벨티칼의 스탠스를 확인하긴 했습니다만…….=

환인이 말끝을 흐리자 환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는다.

「미리 말해둔 게 있어서 떠나간 애들을 불러오는 건 가능해. 속박이 끊어져서 다시 불러놓는다고 해도 언제 또 떠나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겠지만.」

자신의 계획을 짚어내고 거기에 맞는 조치까지 해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일단 내일까지 머물러보겠습니다. 일을 저지른 게 있으니 저쪽이 어떻게 나올지 반응을 확인해야겠으니까요. 이모렐, 오늘은 방문객을 더 받지 않을 테니 나가서 거처 앞의 하녀에게 내일 아침까지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전해라.”

=예, 성제님.=

“유르파는 밖에서 이쪽을 보거나 엿들을 수 없도록 차폐술을 걸어주십시오. 환연은 정령에게 부탁해서 누가 다가오고 멀어지는지 주시해다오.”

=응.=

「그래.」

이제는 기다릴 뿐이다.

눈치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귈탐이라면 자신이 곧장 떠나지 않고 있는 데서 이유를 대강 짐작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겠지.

자신이 귈탐과 헤뷜트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뒤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환인이 빈백 같은 의자에 좀 더 몸을 파묻으니 20cm보다는 조금 더 커져 30cm 정도 된 환연이 그의 가슴에 올라가며 색기가 은은히 감도는 눈빛으로 묻는다.

「환인, 이제부터 시간이 빈다는 거지?」

“……그렇다만.”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환연은 어른의 미소를 지으며 요구했다.

「그럼 내가 고생한 데 대한 포상을 요구하겠어. 들어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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