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23화 (723/813)

723 라펩으로 가는 길

환인은 라펩으로 향하며 중간중간 영도의 대성녀와 통신을 이어나갔다. 삼국 연합 조사대와 메리아놀의 동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벨티칼의 일부 파벌이 항의해오는 것은 늘상 있던 일이라 중히 여기지 않은 까닭이 크오. 용린족 일은 성제가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라 생각하여서 전달하지 않았던 것인데……. 으음.]

대성녀는 환인이 헤뷜트에서 보고 들은 것, 그리고 구주의 독니가 가져온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심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의 생각이 너무 짧았군. 참으로 미안하오.]

“마음 쓰지 마십시오. 사비족이 용린족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황은 변함없으니까요.”

[그래도 구주의 조언자라는 여인이 한 말이 조금이나마 그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니오?]

“……?”

[……??]

환인이 응? 하는 표정을 짓자 대성녀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의문을 표정에 띄웠다.

[설마, 정말 관심을 끊었던 것이오?]

“그렇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비족이 이토록 폐쇄적이고 원시 부족 문화의 국가 단체였을 줄 그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알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상위 진화 형태가 있다는 것 자체가 불완전한 종족입니다. 그에 대한 반발이 나온다는 것이 종족성의 불안정을 인정하기 싫어 나오는 태도이니까요. 나중에 가면 결국 받아들이고 샤스라와 같은 용린족이 되기 위해 손을 벌려올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알려줄 수 없는 일이지…….]

그의 육합등약 덕분에 종족의 한계를 탈피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려줄까.

“방법을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그러한 단계가 실재한다는 것만 보여주면 그만입니다. 나머지는 그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요.”

한도 끝도 없이 매정하게 들리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이치가 그러하다.

진정한 용린족이 될 방법을 알려달라 억지를 쓰는 것은 교황들이 신의 시련을 돌파한 환인에게 그 방법을 1부터 100까지 알려달라 떼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니까.

[떼를 써온다면 사비족은 더욱 고립되는 결과를 낳겠군.]

“예. 교단들의 눈밖에 날테지요. 더욱이 헤뷜트에 도착하고 신식 영혼의 눈으로 도시 전체를 살펴봤지만, 위협적인 요소는 거의 없었습니다.”

주술사제의 능력처럼 미지의 직업과 기술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으나, 현재 헤뷜트라면 신식 영혼술로 자신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 지경이라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할까.

도시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외적의 공격에 전혀 대비되어있지 않았다.

라드세아와 히스론드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봐도 한 나라의 주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방어력이 낮았던 거다.

치와와가 깽깽거린다고 무서워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개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겁하겠지만, 그런 사람도 치와와한테 물려 죽겠다고 생각해서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환인이 헤뷜트를 보고 느낀 점이 그러했다.

대성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사비족의 무서움은 도시의 방위 태세가 아닌 인구수로 밀어붙이는 인해전술이니 말이오. 사비족 여성이 마음먹는다면 1년에 십수 명의 아이를 낳을 수 있고 아이도 인종의 절반도 되지 않는 시간에 육체만큼은 성인이 되니……. 그러한 종족적 장점은 성제의 능력을 생각하면 극상성인 것이지.]

숫자만으로 밀어붙이는 일 따위, 환인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는다.

물량 승부 같은 소리는 영혼 폭발이나 혼령주 앞에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릴 뿐이니. 그 증거가 니라인을 습격해왔던 이블팩션 1만 군대가 아닌가.

[벨티칼 부족장회도 그걸 알고 있어 성제 그대에게 직접 따지거나 하지 않고 소녀에게 항의를 가장한 부탁을 줄기차게 넣는 게 아니겠소? 특히 지금은 그대가 무척 화가 난 것처럼 꾸미고 있으니 더욱 그러하겠지.]

황금색 수실이 놓인 소매로 입을 가리며 조신하게 웃던 대성녀는 재차 한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이 때문에 환인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 벨티칼의 항의를 알려주지 않았던 것인데, 환인이 헤뷜트에 가더라도 부족장회가 환인의 앞에 대놓고 노골적으로 나서지 않을 거라 믿었고.

그랬는데 설마 현지에서 구주의 독니가 그걸 소재 삼아 그를 이용하려 들 줄이야…….

‘그가 거리끼지 말라 하였는데 계속 마음 쓰는 것도 아니 될 말.’

대성녀는 깃털 펜을 들어 벨티칼과 구주의 독니 사건을 기록하면서 말했다.

[성제도 벨티칼의 항의는 개의치 마시오. 거인족은 이제 완연히 영도의 소속이 되었고 주민들과도 어우러져 매우 잘 지내고 있소. 그들 육십의 전력은 족히 주도의 방위 병력에 버금갈 정도라 벨티칼은 물론 라드세아와 히스론드도 우리에게 향하는 태도를 조심할 정도이니. 그리고…….]

서류 뭉치를 잠시 살펴보던 대성녀가 한 권의 책자를 꺼내 펼치며 말한다.

[현재 삼국 연합의 반응은 성제의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소. 메리아놀에 여전히 압박을 가하고 있으나 그 강도는 그대의 실종 때와 비교하면 60%에 불과하지. 남은 40% 및 온존해두고 있던 여력을 전부 그대를 추적하는 데 사용하고 있소이다.]

“니오네브레스의 3/5이 절 주목하고 있다니. 인기인이 된 기분이군요.”

[후후. 소녀가 장담컨대 이제 각국 지도부와 귀족 중 그대의 이름 두 글자를 모르는 인물은 없을 것이오. 아무튼, 메리아놀은 그대의 생존 소식에 반색과 암울을 동시에 드러내는 중이오. 그대가 돌아왔기에 자신들이 성제를 어찌했다는 오핼 풀겠다는 희망, 그리고 그가 분노하여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에 혹시나 하는 암담함.]

“……메리아놀의 결명자라는 집단에 대해서 들어온 소식은 없습니까.”

[하얀 늑대들의 정보 수집을 지원하고 있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소식은 없소. 애초 우리의 정보 수집은 영혼사들이 현장에서 성불행을 하며 보고 듣는 것을 모으는 것뿐이라 고급 정보는 얻기 힘든 편이기도 하고…….]

대현자가 직접 겪은 일이라 하니 착오라 생각하진 않으나 그만한 집단이라면 기밀성은 상상을 초월할게 틀림없지.

앞으로도 정보를 손에 넣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고 대답하는 대성녀의 이야기에 환인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

대성녀와의 대화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메리아놀 지도부의 행동에 이해 안 가는 점이 보인다.

방금 대성녀의 이야기에 있었다. 메리아놀 지도층이 오해를 풀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선다니, 이번에 새로 즉위한 왕은 메리아놀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건가.

‘어쩌면 허수아비나 꼭두각시일 수도 있고.’

투르시온 가문이 암암리에 결명자 집단과 손잡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75% 정도 확신한다.

그런 가문 소속의 젊은 왕이 그에 대한 사실을 모른다면, 왕의 능력이 떨어지거나 성향이 투르시온의 방향과 맞지 않아 가주가 가문의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메리아놀의 국왕은 타르반시올이지만 투르시온의 가주는 볼레보스이니까.

“…아니면 화살받이로 내세운 건가.”

[……성제는 타르반시올 톨마이어 투르시온 신임 국왕이 메리아놀의 어둠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요?]

혼잣말을 슬쩍 흘리자 대성녀가 짙어진 눈빛으로 묻는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그럴 가능성이 보입니다.”

[그래서 화살받이라 말씀하신 거군.]

“때마침 적당한 환경에 시기이지 않습니까. 신임이라지만 메리아놀의 국왕, 그를 내어주고 사건을 묻어버리면 일이 깔끔해질 테니까요. 마침 그자와 안느 사이에 트러블도 있고…… 제물 삼기 딱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으으으음…….]

“제가 활동하며 얻은 자료와 대성녀님이 알려주신 정보를 토대로 보면 메리아놀 지도부는 정말로 제 일을 오해와 착각이 빚어낸 사고로 여기는 느낌입니다. 결명자가 정보를 제대로 제공했다면 이런 반응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결명자도 투르시온과 푸른 나뭇잎의 탑에 연관되어있는 비밀 집단이다. 타르반시올 그자를 버림패로 쓸 생각이 아니라면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나올 리가 없지.

[생각보다 메리아놀의 어둠이 깊은 것 같소…….]

대성녀인 신수 기린은 이런 암투에 극히 피로한 듯 양 눈 사이를 꾹꾹 누르며 지친 기색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환인의 눈빛이 깊어진다.

‘닌실도 신수이니 인간들의 더러운 암투가 영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거겠지.’

영도의 역사, 니오네브레스의 역사는 환인도 영도에서 공부했기에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이라는 아득한 시간 속에 고여있는 세계. 물웅덩이처럼 외부의 자극도, 내부의 분란도 없고 발전도 없이 그저 무미건조하게 시간만 흐르는 기이한 세상.

자신이 태풍의 핵이라느니 사건 사고의 중심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물론 수천 년 시간 속에 문제가 전혀 없던 건 아니었다.

흑마술사의 준동이라던가 특정 직업을 각성한 자를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 횡행이라던가, 분노한 신수의 손에 어떤 지역이 초토화된 적도 있고 이형종과 마물의 범람에 이블팩션의 침공으로 도시와 마을 수십 개가 멸망한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고, 인재라고 할 수 있는 범주이지 인간과 인간의 악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부류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사건은 그야말로 인간의 악의가 똘똘 뭉쳐 세계급으로 요동치는 건.

신수의 영성에 극히 좋지 못한 영향을 주겠지.

환인은 일부러 주제를 돌렸다.

“뭐, 이쪽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보다 이엘카타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아아. 메리아놀에서 벌어지는 일에 가끔 슬픈 표정을 짓긴 하나 아이와 함께 매우 건강히 잘 지내고 있소. 세유도 이제 기어 다니기 시작하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환세유, 이엘카타가 낳은 아기의 이름이다. 대성녀가 직접 이름을 지어주었고 이엘카타의 뜻에 따라 자신의 가문명이 아닌 환인의 성을 붙였다고.

아이의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가자 언제 피로했냐는 듯이 대성녀의 소녀다운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인간들이 암암리에 벌이는 정쟁보다 생과 삶이 그녀에게 훨씬 잘 맞는듯한 모습.

[한데 아직도 이엘에게 통신 한 번 넣지 않았다더군. 성제, 언제쯤 이엘과 세유에게 목소리를 들려줄 생각이시오?]

“들려주어도 제 모습을 되찾은 뒤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샤스라는 이번에도 안되었나 보군요.”

[내심 상심한듯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소. 아기는 자애신님께서 점지해주시는 일이니.]

“대성녀님도 자애신께서 점지해주시지 않으신 듯 하여 아쉽습니다.”

그녀의 배를 응시하며 던지는 그의 농담에 대성녀의 하얀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뭐, 뭣?! 그, 그대는 무슨 말을……!]

“후후후. 통신은 이만 종료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새로운 소식이 있다면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잠깐! 성제, 소녀는 결코 그럴 의도가……!]

핏—

당황한 대성녀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통신 수정구에서 빛이 사라진 순간, 웃음 짓던 환인의 얼굴은 눈 깜짝할 사이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으니 한동안은 암투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직책이 대성녀이니만큼 그 효과가 오래 가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삐이~……

푸화아악—…….

빛이 사라진 통신 수정구를 쥔 채 벨티칼과 메리아놀의 현 상황과 앞으로 벌어질 일을 다시금 짚어나가던 환인의 귀에 실루의 조그마한 포효와 화염 방사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태양이 성을 내는 초원 한쪽에 쿠에들이 모여있는 게 시야에 들어온다.

노른은 실루의 옆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고, 실루는 그녀의 손짓에 따라 삐, 삣, 삐유, 포효하며 불길을 브레스처럼 확확 내뿜는 중이다.

다른 쪽에서는 젤프리가 쿠르티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홍학의 춤과 비슷한 구애의 동작을 펼치는 중이고 쿠핀과 쿠라는 백려강이 펴준 천막 아래에서 햇빛을 피해 느긋하게 휴식 중.

그 평화로운 광경을 바라보던 환인은 슬슬 피부가 햇빛에 따끔거려왔기에 안식처로 걸음을 옮겼다.

냉방이 잘 되고 있어 쾌적한 집 안으로 들어서자 탁자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앉아있던 여자들이 그를 돌아본다.

“환연에게 변화는 있었나.”

=아니. 하지만 환연이한테서 정령력이 점점 강하게 느껴지고 있어. 계약 마지막 단계인 건 확실해.=

이실리테와 안느의 사이에 끼어들려 했더니 안느가 그의 허리를 잡고 자신의 허벅지에 앉힌다.

덕분에 방석이 필요 없어 그녀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탁자 위에 눈길을 주었다.

탁자 위에는 폭신한 환연 전용 이부자리가 깔려있고 그 위에 환연이 누워 있었는데, 옅은 물빛이 그녀의 몸에서 주기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벌어진 현상에 출발을 미룬 지 4시간. 빛의 농도가 아침에 비해 몇 배나 짙어졌다.

안느가 그의 정수리에 턱을 살짝 올린채 환연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정령 합체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 언제 끝날지 짐작도 안 간다는 게 문제네.=

“음…….”

맞은편에 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던 유르파가 고개를 들고 그에게 물었다.

=자기, 대성녀님이랑 통신은 잘 끝냈니?=

“예. 삼국 조사대는 계속 메리아놀을 압박하며 여력을 돌려 이쪽을 찾고 있다더군요. 스프라울드에서 이쪽으로 넘어온 지 하루가 지났으니 슬슬 이쪽의 이동을 조사대도 파악했겠지요.”

=그러면 헤뷜트에서 전사단을 보내올 수 있으니까 빨리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까?=

“나이를 품은 열매가 산출되는 라펩은 헤뷜트에서 하루 이틀 거리밖에 안 됩니다. 사비족이 마음먹는다면 마찰을 피할 방도는 없으니 차라리 환연이 릴라이스와 계약을 빨리 끝마치길 여기서 기다린 다음 이동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와 유르파의 대화에 아영이 끼어든다.

=아무리 사비족이라 해도 아주 막장 짓은 저지르지 않을 거예요.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는지 그들도 다 알고 있을 테니까요. 어쩌면 바다신님 교단의 대사교가 전사들, 주술사제들의 활동을 억누를 수도 있고요.=

=그런가? 메리아놀이 구성했다는 조사대도 여기까지 들어와 활동하긴 어려울 테니까. 음.=

“바다신 교단이 그렇게 편의를 봐준다면 이쪽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 있다만.”

과연 일이 그렇게 될까, 하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앗?=

=어.=

환연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물빛이 더욱 강해지며 그녀의 주변으로 맑고 투명한 물방울이 비눗방울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

「…….」

릴라이스와 계약을 위해 영혼만 환령계에서 머물고 있던 환연은 짙은 물속 같은 공간에서 지루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왼쪽을 둘러봐도, 오른쪽을 둘러봐도, 위와 아래를 살펴도 온통 물색뿐이다.

흙이나 수초나 물방울 같은 사물, 자연물도 없고 물고기 같은 생물도 없다.

보이는 거라곤 너무 미미해서 최하급 정령도 못 되는 흔적의 군무, 최하급에서 하급의 정령들이 오가거나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지는 다소 정신 사나운 광경뿐.

유흥 거리라곤 눈꼽만큼도 없고 후각, 미각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청각도 고요한 세계라 거의 기능하지 않으며 촉각과 시각만이 살아있는 매우 재미없는 세계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지?」

혼잣말하는 취미는 없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릴만큼 심심하기 짝이 없는 세상.

그때 위에서 몸 곳곳이 물로 이루어진 인어공주 비슷한 모습의 릴라이스가 사파이어처럼 예쁜 눈동자를 빛내며 내려와 얽히듯 그녀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지루해?〉

「지루해. 대체 비중화는 언제 끝나?」

〈중간에 누가 꼭 나가봐야 한다고 고집 피우는 바람에 더 길어진 거잖아. 네가 불러일으킨 업보야.〉

「…….」

그땐 진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내가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환인은 완전히 돌아버렸을 테니까.

내가 옆에서 툭툭 말을 던져서 그나마 노여움을 빼줬기에 그 정도로 끝난 거지.

〈그래도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참아.〉

그녀의 이야기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환연.

체감상 이곳에서 3년을 보냈다. 날이 갈수록 환령계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이는 양이 많아져 처음에는 릴라이스의 손 한 뼘 크기였는데 지금은 그녀와 크기가 비등하다.

말 그대로 대격변. 환연은 손을 들어 릴라이스의 손과 크기를 맞춰보며 중얼거렸다.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강해지다니, 진짜 사기지만 그만큼 재미없어.」

왜 정령들이 현계를 구경하러 다니는지 이해가 된다고 할까.

〈흣흣. 네가 그렇게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건 그 인간 덕분이지만.〉

그 인간, 환인의 언급에 환연은 약간 부루퉁한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었다.

설마 환인과 섹스하면서 그의 육합등약을 몸에 받아들인 효과가 영질靈質, 영혼의 질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니. 진짜 개사기 능력이라니까.

〈하아…… 너무 좋아…….〉

아까부터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자신의 가슴을 애무하듯이 어루만지며 목덜미를 핥기 시작하는 릴라이스다.

환연은 환인의 애무에 비하면 애들 손장난도 못 되는 그 감각에 심드렁한 표정을 했다.

동성에게 애무 당하면서 신기한 감각을 느끼는 것도 한두 번이지. 3년 동안 수백 번을 당했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분.

릴라이스가 젖꼭지를 살살 꼬집고 가슴을 주무르지만 그냥 만져지고 있다는 감각뿐, 흥분은 전혀 안 오른다.

환인이 만져주면 진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찌릿찌릿 통했는데.

……그걸 생각했더니 괜히 껄쩍지근한 기분이 들어 환연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지잉—

정신이, 영혼이 저린 것처럼 떨린 것도 그때였다.

눈빛이 살짝 바뀐 환연은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려 역으로 릴라이스의 풍만한 가슴과 치골이 구현된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환인에게 당했던 애무를 흉내내 그녀의 몸 곳곳을 여성의 섬세한 감각으로 쓰다듬어나간다.

〈…앗! 뭐야!〉

삽시간에 공수功受가 전환되어 수受의 입장이 된 릴라이스가 화들짝 놀라 바르작거렸다.

「왜. 너만 만지라는 법 있어? 이제까지 니가 계속 날 만졌으니까 이제 나도 너 만질 거야.」

〈아니 그건……! 안돼, 싫어. 내가, 내가 위에 있을…… 히이잇!〉

「쉿. 조용히 해, 아기 고양이. 언니 믿지?」

〈히익~~. 네가 왜 언니인데… 응기잇!〉

몸 곳곳을 섬세한 손가락이 어루만져지는 감각, 거기에 더해 환연의 순수한 정령력이 자신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감각에 릴라이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령 합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비중화比重化, 합체를 위해 서로의 기운을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작업도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서로의 연결로 그 정령력의 동질화를 이루어야 합체 시의 일치율이 올라간다.

이 일치율이 높아야 힘을 더욱 강하게, 그리고 많이 낼 수 있는 거다.

거기에 릴라이스는 일부러 환연에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동기화를 주도하는 쪽이 정령 합체 시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릴라이스는 정령 합체 후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 지난 3년(현계 시간으로 사흘)간 열심히 환연을 애무하며 동질화를 해나가고 있었는데…….

‘뭐야 이거!? 내가 3년 동안 올렸던 것보다 더 많이 동기화되고 있잖아!’

갑작스레 상승하는 동질화가 일으키는 감각 자극에 릴라이스는 머리가 어지러워져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혼란스럽기도 하고 급격히 상승하는 동질화 및 동기화로 인해 몸이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다.

‘안돼. 내가, 내가 계속 주도해야…… 앗! 버, 벌써 역전되려고 하잖아……!’

3년간 쌓아온 동질화의 주도권이 역전되는 데는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밖에 들지 않았다.

환연의 손바닥이 딱딱하게 기립한 젖꼭지를 희롱할 때마다 가슴이 부르르 떨리고, 환연의 손가락이 오동통한 대음순 사이 골짜기를 앞뒤로 문지를 때마다 꼬리지느러미가 제어되지 않아 파닥파닥 흔들린다.

그러다 귀를 살짝 깨물린 릴라이스는 처음 느껴보는 정신적 절정에 소리 없는 신음을 지르며 온몸을 경직시켰다.

환연은 뒤에서 그런 릴라이스를 껴안고 자신이 애무당할 때 기분 좋았던 곳, 자신이 애무당할 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릴라이스에게 퍼부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바아~보. 내가 네 목적을 모를 줄 알았어?」

〈……?!〉

「너랑 합체하는 거로 이득 보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내 몸인걸? 내 몸의 주도권은 내가 가져야지.」

〈아악! 너, 너……!〉

당했다!

이런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도 자신의 애무가 주는 쾌감에 녹아내릴 듯이 흐느적거리는 릴라이스를 보며 환연은 쿡, 웃었다.

「걱정하지 마. 주도권을 가져간다고 너한테 해를 끼치거나 널 이용할 생각은 없으니까. 정령 합체를 하면 너랑 나는 이심 동체, 앞으로 쭉 함께 살아야 하잖아?」

〈으으으~! …아앙!〉

「욕심쟁이에 어리광쟁이인 너한테 몸을 맡기는 것보다 내가 육신의 점유 시간을 조절하는 게 우리 원만한 생활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너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여. 후우~.」

〈히익♡〉

귓구멍에 불어 넣어지는 환연의 숨결에 릴라이스는 혼이 사출될 것 같은 짜릿한 자극을 느끼며 후회했다.

너무 방심했어. 그 인간의 피에서 태어난 반 정령이니까 그 인간만큼이나 교활하다는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설마 마지막에 와서 입장을 역전시키다니……!

환연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정령체의 안으로 파고드는 걸 느끼며 릴라이스는 헤윽, 또다시 교성을 토해냈다.

동질화가 95%를 돌파했다. 이제는 죽었다 깨어나도 역전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정령 합체 과정이 마무리되어가는지 환령계가 옅어져 가며 점차 현계로 끌려가고 있다.

〈흐이잉♡ 너, 너 언제부터어……♡〉

「언제부터 이런 걸 꾸몄냐고? 네가 우리 앞에 나타나서 가계약을 하자고 할 때부터였는데? 솔직히 네가 정령 합체를 먼저 언급했을 때 속으로 환호했다?」

〈……속았다아! 이거 사기야! 무효야! 계약 물러!〉

「쿡쿡.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너도 알잖아. 저기 봐, 이제 밖이 보여.」

그녀의 말대로 환령계가 뒤로 희미해져 가며 저 앞에 현계의 상狀이 맺히고 있다. 저곳으로 완전히 나간 순간 정령 합체 계약이 완성될 거다.

릴라이스는 환연의 두 팔에 손이 잡혀 현계로 끌려가면서 억울함에 눈물을 뿌렸다.

내,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

〈으아아앙!〉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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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으아아앙 (코 꿰인 초월 정령의 통곡)

[작품 설정]

라펩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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