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 바다신께 바치는 도시, 헤뷜트
쿠클린에게서 규탄 파벌 암살 요청을 받은 환인은 무심한 눈으로 동글동글, 무해한 도마뱀처럼 생긴 상아색 사비족을 응시했다.
정신병이 도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살짝 풀린 눈동자.
웃고 있지만, 위화감이 느껴지는 입매에 순둥순둥한 표정.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예전 자신이 저러했을까, 현대에서 사귀었던 여자친구들이 자신을 볼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이상한 감상까지 들려 한다.
부조화스러운 표정 셋이 섞이니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정상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
환인은 후,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여러 가지 걸고 넘어가고 싶은 게 많지만, 일단 덮어두고 묻지. 암살 이후의 파벌 간 행동과 암살이 벌어질 때부터 퍼져나갈 파장을 예측해둔 것이 있나.”
=주시자의 눈으로 암살 대상의 원한 관계는 모두 파악해두었습니다. 194인 전원 암살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워 어렵겠지만, 사고사와 명예 결투 등을 이용해 멱을 딴다면 40명 정도는 해치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71명의 협조파벌보다는 많지만 규탄 파벌의 움직임은 위축될 것이니 성제님의 활동에 도움이 제법 될 거로 생각합니다.=
그게 전부인가, 하고 눈빛으로 묻자 전부입니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쿠클린.
환인은 방금 쿠클린의 이야기가 진심이라는 걸 짚어내고 혹평을 가했다.
“어수룩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계획에 근시안적인 낙관론이 섞여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발상 그자체다.”
=예……?=
“너희 사비족의 부족장들과 옆의 조언가들 머리가 붕어 대가리만큼이나 지능이 떨어진다면 그 계획이 매우 효과적이겠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낼 정도로 사이가 극히 나쁘다면 제법 나쁘지 않은 계획일 것이고.”
아무리 사비족 사이에 명예 결투가 횡행하고 반 년 가까이 구주의 독니가 활동하지 않아 그간 밀렸던 결투가 몰아서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그런 식의 암살은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뇌에 구멍이 난 것도 아닌데 특정 파벌의 특정 인사들만 암살당하면 당연히 뒷조사가 들어갈 테고 구주의 독니가 한 행동이라는 것은 금방 들통날 거다.
일반 서민, 평민들의 혈투도 아니고 상위 신분인 자들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전방위적인 조사가 들어갈 테니까.
사비족도 그 수가 적다곤 해도 정령과 비슷한 야수의 혼을 부리는 직업도 있고 사이코메트리처럼 사물의 사념을 읽어내는 직업도 적지만 존재한다.
서넛만 죽여도 경각심이 극에 달할텐데 마흔이나 죽이겠다고? 안 들킬 수 없는 일이다.
환인은 귀찮음과 짜증이 물밀 듯이 치밀어올라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묻지. 너와 구주의 이러한 행동을 집단 내에서 누가 더 알고 있지.”
=……여덟 령주 중 다섯이 알고 있소. 정확하지는 않으나 성제와 모종의 대화가 오간 것 정도는 심증으로 느끼고 있겠지.=
구주의 대답에 환인은 “그렇다면.” 하고 살벌한 기운을 풍기며 말을 연결했다.
“령주라는 놈들이 너와 저 멍청한 년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규탄 파벌에 정보를 넘길 수 있단 말이군.”
=…….=
“머리에 열이 오른 상태에서 물증 따위는 의미 없다.”
자신과 저들이 이렇게 밀월을 가진 게 조사로 알려진다면 벨티칼의 상위 계층은 이를 악물고 자신과 영도에게 따지려 들 거다.
“그 뒤에 이어질 일은 생각을 안 하는 건가. 나로서는 네놈들이 일부러 나와 영도에 사건의 실마리를 이어붙여 사비족 상층부와 상잔시키려는 수작이 아닌가 강하게 의심이 들 지경이다만.”
조언자, 쿠클린과 구주가 구주의 독니 내에서 입지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은 유추를 넘어 오늘 낮에 찾아온 암살자의 행동으로 확신했다.
조직 장악력이 뛰어나다면 대수령이라는 자가 이렇게 싸돌아다니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수하를 보내 자기 뜻을 대행했을 테니까.
=읏. 그러한 의도는……!=
자고로 뛰어난 지도자, 수반은 자신의 행동이 불러일으킬 나비 효과를 우려해서라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라드세아 성궁의 여왕이 호천명을 부리고 히스론드 섭정이 아드우리 공작을 움직이며 메리아놀의 전대 국왕, 장인어른인 그라파든이 국왕직을 내려놓은 뒤에야 자신을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카락스의 암살자는 자신을 암살하려 했을 때 현 어금니에 버금가는 실력의 차기 어금니였던 아영과 그녀를 보조할 인원 하나만 붙여 보냈다.
이게 당연한 일이다. 가족처럼 유대가 끈끈한 카락스의 암살자도 훗날을 생각하고 뒷일을 염두에 두는데 이놈들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가.
조직력이 단단하지 않아 보이는 구주의 독니가 벨티칼 상위 계층 부족장과 전사장, 사제장을 암살해대기 시작하면 조직 내에서 그에 반발하는 인물이 나타날 게 틀림없다.
구주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대수령의 자리에 오르고자 원흉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규탄 파벌에 정보를 떠넘길 가능성은 우상향을 급격히 그릴 테지.
귀속 비술로 저 둘의 머릴 터트려 날려버린다 해도 그때 가서는 늦다. 구주의 독니를 움직여 자신들을 암살했단 심증이 시체를 통해 고스란히 물증으로 변해버릴 테니까.
그 결과는 이쪽의 대의명분이 더럽혀져 정당성이 훼손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암살 따위를 지시하는 게 성제? 이단이다!!’
……하고 말이다.
메리아놀을 몰아붙이는 삼국 연합의 구심점은 급격히 흔들릴 테고 영도의 청렴성을 의심하면서 거기에 더해 억지를 부려 아드네빌라의 영락을 이쪽 책임으로 덮어씌울 수도 있다.
현재진행형인 메리아놀 수몰이 자신과 영도의 잘못으로 싸잡힐 가능성이 100%. 영혼사들의 수천 년 성불행과 자기희생으로 쌓아 올린 영도의 명망이 땅에 추락하는 것은 덤이다.
그때부터는 진짜 죽고 죽이는 살육만이 남게 된다. 자신이 가급적 피하고자 하는 그 결말이 찾아오는 것이다.
환인은 후드를 벗고 영혼의 눈을 전개해 살기를 뿌리며 성성을 높였다.
“너희의 암살 배후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쪽의 대의명분이 오염되어 메리아놀의 반격을 받을 수도 있는 큰 위기를 자초하게 된다. 그런데 훗날의 안배도 없이 규탄 파벌의 상위 계층을 암살하겠다고? 말해라. 무슨 속셈이지? 나와 사비족 상위 계층 간에 상잔 계획을 꾸미는 건가.”
그의 살기에 구주는 흠칫하고 어깨를 반 발자국 물러나는 데 그쳤지만, 쿠클린은 큭 짧은 신음과 함께 휘청이며 무릎을 꿇었다.
그 상태로 고개를 든 쿠클린이 자비를 간청하는 것처럼 환인을 향해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성제님. 벨티칼이 국가로서 라드세아, 메리아놀, 히스론드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완고한 자존심 탓에 횃불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은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예가 목숨보다 소중하며 명분이 일족보다 중요합니다. 대화도 여유가 있을 때 이루어지는 법……. 약간의 정보만 조작하면 규탄 파벌의 부족장들은 협조파벌과 피 튀기는 항쟁을 벌이려고만 하지, 외부로 시선을 돌리지 않을 것이…….=
“내가 보기에 너 또한 구주의 조언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격앙으로 벨티칼 상위 계층을 향한 원망을 드러내며 복수에 집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말허리를 끊고 들어간 환인의 지적에 쿠클린이 마비에 걸린 것처럼 표정까지 그대로 굳어버리고, 구주도 쿠클린의 뒤통수를 보며 매우 복잡한 심경에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렸다.
“구주는 짐작 가는 것이 있나 보군.”
=……조언자는 주술사제 후보 출신이오. 성제가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하자면, 공작가 출신의 예비 상급 영혼사라고 할 수 있겠군.=
=…….=
쿠클린은 인형 같은 표정으로 두 손을 내리고 무언가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넋을 놓는다.
그 모습에 여자들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쿠클린을 노려보았다.
환인의 말에 따르면 그를 이용해 벨티칼의 고위층에 복수하려했다는 뜻이니까.
짧게 넋을 놓고 있던 쿠클린이 불시에 으헤~ 하고 웃는다.
=그랬군요. 때때로 알 수 없는 이 감정이 어디서 나오나 했더니 복수라는 감정이었습니까. 이거 참, 저도 그 작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니 부끄럽습니다.=
=야, 그게 무슨…….=
너무나 기가 막혀 안느가 반사적으로 송곳니를 드러내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데 끼어드는 것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니까
환인은 쿠클린을 북풍이 몰아칠듯한 눈으로 바라보다 유르파를 불렀다.
“유르파, 귀속 비술보다 한 단계 높은 제약은 걸 수 없습니까.”
=있어. 키워드를 주고 그 키워드를 위반할 경우 머리가 터져 죽는 식이야. 복종 맹세라고 하면 돼.=
“좋군요. 쿠클린, 그 비술의 시술을 받아라. 너에게는 개 목줄이 필요할 거 같으니까.”
쿠클린은 헤죽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영이 제조한 혼절약을 먹여 기절한 쿠클린에게 유르파가 모종의 비술 시술을 진행하는 사이, 환인은 구주에게 한 가지 지령을 내렸다.
“여덟 령주를 모두 죽여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오. 령주 일곱은 구주의 독니를 지탱하는 여덟 기둥이며 경계심이 심한…….=
“지금 내가 권유를 하는 걸로 보이나.”
=…….=
“그리고 착각하고 있군. 이건 날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기도 하다.”
=…그 무슨?=
“넌 무력은 뛰어나지만 지력과 정치력은 바닥이지. 조직 내에서도 쿠클린의 꼭두각시라 손가락질받으며 멸시당하고 있을텐데. 내 말이 틀렸는가.”
대수로울 것 없이 확신하는 그의 이야기에 구주는 소름이 돋았다.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쿠클린은 미쳐있다. 저런 상태에 주시자의 눈이라는 능력을 쥐고 있으니 령주들은 목 밑에 단검이 들이밀어 진 기분일 것이다. 기회만 있다면 제거하려고 벼르고 있을 터.”
=…….=
“사냥 시즌이 끝난 개는 솥에 들어가 삶아질 뿐이다. 여기서 누가 사냥개인지 물을 만큼 멍청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구주의 눈이 질끈 감겼다.
나사라트라자라는 사냥감을 사냥했다. 카락스라는 사냥감은 사냥터를 벗어났다. 구역에 남은 것은 자신뿐.
=그럴 수가……. 그러면 이제부터 내부 다툼이 시작된단 말이시오?=
“내부 파벌 싸움만이라면 문제는 없겠지. 네 무력은 암살이라는 단계를 벗어나 있는 듯하고 주시자의 눈이 있으니 위협도 통하지 않을 테니까. 여기서 문제다. 과연 그 사실을 령주들이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알고 있겠지.=
“그냥 싸워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기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야 할까.”
=……. ……밖에서 다른 조직을 끌어들일 거란 말이시오?=
한참 생각하다가 낸 결론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준 환인은 답 대신 선택지를 주었다.
“네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령주를 모두 쓸어버리고 내게 쓸모를 입증하여 구주의 독니를 온전히 지배하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원래 모습을 되찾은 뒤, 령주들을 쓸어버릴 때 그 틈에서 함께 죽는 것.”
자신의 손에 죽기 전에 령주들에게 제거당할 수도 있겠지, 하고 작게 덧붙이자 구주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조언자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한 심경과 내면을 고작 두 번, 그것도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 간파했으며 령주들의 불만까지 꿰뚫어 본 성제다.
이대로 있다간 령주들에게 살해당하는 미래는 틀림없이 찾아올 거다.
구주는 작은 바위에 앉은 환인을 바라보았다.
푸른색의 달빛에 물든 다섯 살 남짓한 꼬마의 모습. 그에 어울리지 않는 짙은 권태감과 성가심의 기색. 그리고 묻어나는 살기.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자신들을 이용하려 이런다고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쪽을 성가셔하며 자신과 쿠클린을 이 자리에서 묻어버린 뒤 구주의 독니를 해체해버리고 싶어 하는 게 무표정과 무감정한 목소리에서 오한이 들 정도로 느껴진다.
구주는 귀속 복종 시술을 받는 쿠클린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구주의 독니는 내 대에서 끝장날지도 모르겠군…….=
그러고는 환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자비를 간청했다.
=성제의 지시에 따르겠소. 구주의 독니를 손에 넣어 완벽하게 지배해 보일 테니 부디…… 조직의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령주를 모두 제거하든 제거하지 못하든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너나 쿠클린이든 구주의 독니 조직원이든, 하나라도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죽고 싶다는 뜻으로 간주하고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모두 세상에서 지워버리겠다. 마찬가지로 쿠클린이 죽는다면 그 순간 구주의 독니도 사라진다고 생각해라.”
=며… 명심하겠소.=
=도령, 시술 끝났어.=
=아하하. 이상한 기분입니다. 막 둥둥 떠다니는 거 같아요.=
여자친구들과 함께 술에 취한 것처럼 휘청거리며 따라온 쿠클린이 주정뱅이마냥 깔깔 웃는다.
그 광기 어린 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환인이 유르파에게 물었다.
“제약은 어떻게 걸 수 있습니까.”
=비술로 장치를 일단 가동해야 해. 잠깐만…….=
=오? 아, 아아? 앗? 아?=
유르파가 두 손에 무지갯빛을 뿜어내자 쿠클린의 회색 눈동자가 똑같이 무지갯빛으로 빛을 발하며 경기를 일으키듯이 움찔움찔한다.
=응, 됐어. 이제 말하면 돼.=
영혼의 눈으로 그 상태를 잠시 읽던 환인이 말했다.
“첫 번째로 나, 그리고 내가 인지한 우호적인 관계가 맺어진 모든 이들에 대한 위협행위를 금지한다.”
=서, 서성제 님과 우호 관계를 맺은 이들에 대한 위협행위 금지, 금지.=
“둘, 이제까지 입수한 정보, 및 앞으로 입수할 정보 중 나와 관계된 것은 전부 폐기하고 영원토록 발설, 발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금지한다.”
=그, 금지. 금지잇…!=
“셋, 상기 행위에 저촉되는 일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언제든 멸구할 준비를 해놓을 것. 넷, 상기 세 항목에 저촉되지 않는 한 구주에게 전폭적으로 협조한다.”
=며얼, 구! 혀, 협, 협조조조조옷……!=
네 가지 항목까지 나왔을 때 쿠클린의 눈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코에서도 선혈이 흐르며 상아색 비늘을 더럽힌다.
학질 걸린 것처럼 경직, 경련을 일으키는 쿠클린을 지켜보며 두 손의 무지갯빛을 조율하던 유르파가 환인에게 경고했다.
=자기, 항목을 더 붙이면 뇌가 망가질 거 같아. 폐인이 되어버려.=
“됐습니다. 이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쿠클린처럼 어중간하게 지능이 뛰어나다면 제 사고에 제가 잡아먹힐 테니까요. 그리고.”
=끄으윽…….=
유르파가 비술을 끊자 쿠클린은 실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풀썩 쓰러져 물 밖으로 나온 해파리처럼 퍼진다.
그런 쿠클린을 눕혀놓고 치유를 거는 안느와 아영을 바라보던 환인은 구주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구주, 너와 쿠클린의 상태는 언제나 이쪽에 전달되고 있다. 그걸 상시 염두에 두고 행동해라.”
상태가 이상하다면 즉각 목을 날려버리겠다는 살벌한 경고에 구주는 흐려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의식이라곤 해도 그와 영도를 이용해 어부지리를 취하려 했다. 들키지 않았다면 몰라도 의도까지 모조리 간파당한 상황. 바로 땅에 묻히지 않은 게 용한 일이다.
=그리하겠소.=
구주는 고개를 숙여 복종의 뜻을 나타내었다.
귀속 복종 비술의 시술 여파로 늘어진 쿠클린을 업은 구주를 떠나보낸 환인은 그들에게 붙여놓은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아영을 불렀다.
=부르셨슴까?=
“하얀 늑대 중에 사비족도 있었지. 그들을 벨티칼에 파견해 협조파벌의 동향을 낱낱이 감시하게 해라.”
=어…… 규탄파벌이 아니고요?=
“쿠클린이라면 돌아가서 령주를 꾀어낼 재료로 규탄 파벌과 협조파벌의 분쟁을 유도할 거다. 그것으로 령주 셋 정도를 처리하고 나머지는 그러한 사건을 조사하는 척, 빌미로 나머지 령주도 꾀어 해치우겠지. 지켜보다가 령주가 모두 죽고 나면 구주와 쿠클린을 처리해라. 엘미느라면 구주의 독니와 합작하며 정보와 자료를 수집해놓았을 테니 후속 대응은 쉬울 거다.”
환인의 지시에 아영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오빠, 구주가 조직을 지배하면 살려준다고 하셨잖아요. 오빠 정도 된 사람이 거짓말을 입에 담으면 안 되는데…….=
=아영 말이 맞아요, 주인님. 아드네빌라 님이 거짓을 말 못한다는 걸 떠올려주세요.=
=자긴 자애신님의 시련을 통과했잖니. 그러면 존재의 격이 초월을 뛰어넘었을 텐데 거짓말을 하면 최악의 경우에는 성장이 막힐지도 몰라.=
신수나 사도 같은 존재뿐만 아니라 나 같은 일반인 출신도 그런 제약이 생기는 건가…….
여자친구들의 걱정에 환인은 잠깐 타당성을 검토해보았다.
‘존재의 강함을 생각해본다면 그러한 제약 아닌 제약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신수처럼 고고한 존재가 거짓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영성靈性에 해가 되는 세계다. 거짓말을 하면 정서적, 육체적으로 무척 괴로워하는 플뢰란 종족도 있다.
이때까지 누굴 거짓말로 속인 적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더 주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우려를 드러내는 여자친구들에게 물었다.
“내가 언제 둘을 살려준다는 말을 했지.”
=예?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라고 하면서 첫 번째로 령주를 모두 쓸어버리고 오빠의 믿음을 사서 구주의 독니를 온전히 지배……. 엑!?=
말하던 아영은 이제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다. 유르파와 백려강, 안느도 어? 했다가 으슬으슬하다는 듯이 팔을 쓸어내린다.
맞다. 그는 구주에게 지배하라고 했지 살려준다고 안 했다.
거기다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전부 멸구滅口하라고 하였다. 그건 확대 해석하면 구주와 쿠클린도 포함되지 않는가.
무엇보다 그 멸구를 쿠클린이 시행할 텐데 그건…….
마지막으로 구주와 쿠클린이 죽어 사라지면 오빠와 관계성이 있는 건 다 없어질 테고, 구주가 한 조직만은 살려달라는 것도 지켜주게 되니까…….
환인은 작은 바위에서 일어나며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쿠클린은 혼절한 상태여서 내가 구주에게 한 말은 듣지 못했다. 내막을 파악하진 못하겠지. 구주의 지능을 생각한다면 아영 너처럼 스스로 ‘살려준다’고 머릿속으로 착각을 만들어낼 테니 앞으로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쿠클린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할 거다. 만약 눈치채더라도…….”
=복종 비술에 걸려있으니까 방법이 없겠네…….=
=그, 조언자는? 주시자의 눈이 있으니까 작전이 들키지 않을까?=
안느가 만약의 사태를 지적했지만 그에 대한 처치는 이미 끝나있다.
“나와 우리에 대한 비밀 함구 항목에 위협 행동 금지 항목으로 주시자의 눈 자체가 하얀 늑대들을 감지하지 못한다. 쿠클린은 하얀 늑대들이 내 사조직인 걸 알고 있고, 주시자의 눈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정보 수집의 위배 행위니까.”
=……!=
“어떻게 우연이 겹쳐 알아채더라도 구주에게 협조하란 명령을 내렸으니 구주가 령주를 해치우는데 전폭적인 협조를 해야 한다. 결과는 변하지 않아.”
최악의 경우 이 모든 게 어그러져 계획이 실패한다면 유르파의 조작으로 둘의 대가리를 터트리고 하얀 늑대들이 수집해놓은 위치 정보 자료로 령주를 전부 해치우면 그만이다.
아영을 비롯한 여자들은 척추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흐르는 걸 느꼈다.
어린아이가 되면서 착해지고 성격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오빠는 오빠였어.
필요하면 잔혹한 면모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환인은 마지막으로 유의사항을 전달했다.
“신식 영혼의 눈으로 살펴보니 구주는 번개와 저주에 특히 취약한 대신 독과 다른 기타 속성에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번개와 저주, 두 가지 요소를 가진 특급 암살자 둘 정도면 구주도 처리할 수 있을 거다. 엘미느에게 전하도록.”
=네, 넹.=
침을 꼴깍 삼킨 아영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역시 그때 오빠한테 넙죽 엎드렸던 게 정답이었어.’
정말 천운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과 카락스의 암살자는 저 구주의 독니보다 더한 짓을 저질렀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잘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은 오빠의 여자가 됐고 카락스의 암살자는 하얀 늑대들로 이름을 바꾸고 이전부터 갈망해오던 양지 진출을 성공적으로 이뤄냈으니 말이다.
자신도 자칫 한 발 잘못 내디뎠으면, 구주와 카락스의 우선 순위가 반전되었다면 자신이 구주와 쿠클린의 꼴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자 아영은 목숨의 위협으로 인한 자손 번식 본능이 활활 타오르는 걸 느꼈다.
오, 오늘 밤에 오빨 덮치면… 안될까? 성욕이 엄청 불끈거리는데.
* * * *
=앗핫하하하! 구주, 제 잘못입니다. 판단을 완전히 잘못 내렸어요.=
=하아…….=
정신을 차리자마자 웃음을 터트리는 쿠클린의 모습에 구주는 골치가 지끈거린다는 듯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런 그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감탄했다며 연신 조잘거리는 쿠클린.
=으헤~ 설마 제가 눈치채지 못한 무의식의 원한을 성제님이 꿰뚫어 보실 줄이야. 하나의 정보를 제공했더니 거기서 이어지는 정황을 모조리 파악해내는 그 머리는 진짜 상상을 초월합니다. 역시 신님의 시련을 통과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요? 대사교나 교황들도 일평생 도전하지 못하거나 도전해도 실패하는 신의 시련이니까요.=
=살인 벌집을 건드린 셈인데 이 정도로 끝나 다행이지. 할 일이 많다. 계획을 짜야 하니 서둘러 구골동으로 돌아간다.=
표정을 굳힌 구주가 육척 도마뱀을 재촉하며 달리려 했지만, 따라오지 않고 육척 도마뱀의 뒤통수만 가만히 쳐다보는 쿠클린 때문에 다시 돌아와 그녀를 부른다.
=쿠클린?=
=구주님. 우리, 그냥 도망치지 않겠습니까?=
……? 저 쿠클린이 도망을 언급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성제에게 겁이라도 크게 먹었나.
구주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쿠클린이 헤헤 웃으며 계속 말한다.
=구주의 독니고 나발이고 그냥 우거진 밀림 깊은 곳에서 속 편하게 사는 겁니다.=
=매력적인 이야기지만, 지금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도망치면 성제가 가만히 내버려 둘 거라 생각하나.=
=뭐, 뒷정리 잘 해두고 도망친 뒤에 용서를 빌면서 제 목숨을 성제님께 바치면…… 구주님은 살려주실 거 같습니다만?=
어깨를 으쓱거리는 쿠클린에게 구주는 얼굴을 굳히며 일갈했다.
=허튼소리. 너와 나는 운명 공동체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고,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그게 약속이었을 텐데.=
=으헤~. 그렇지요. 그렇겠지요. 넵, 돌아갑시다.=
=잘 따라와라.=
서둘러 앞서가는 구주의 뒤를 따르던 쿠클린은 쏟아지는 달빛을 올려다보며 덧없는 미소를 지었다.
검은 괴물이 아가리를 벌린듯한 밀림의 초입 너머가 마치, 자신들의 어두컴컴한 미래처럼 보였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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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와 800편까지 80편도 안남았네....
미궁기담 시작 당시
"대강 5~600편이면 완결 되겠지?"
400편 즈음
"800편 하면 완결각이 보일 거야...."
현재
"....(포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