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 팔라툼으로 가는 길
환인 일행이 하늘 도시 팔라툼까지 반나절을 남겨두었을 때, 태양은 모습을 붉게 물들이며 지평선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마침 플라비우스족의 수도 팔라툼에서 여행자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고급 아영장이 멀지 않았기에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짹짹거리는 새 소리를 들으며 쉬었던 자리를 정리해나갔다.
=아영. 뭐해?=
쿠에들에게 깨끗이 씻은 아침 여물을 주고 물도 먹이던 아영은 뒤에서 다가온 백려강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응? 어, 유르파 언니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싶어서.=
그녀는 그리 말하면서 이쪽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다른 여행자들을 돌아본다.
아영이 그리 말하는 이유를 알아챈 백려강은 빙긋 웃으며 자신의 목에 걸린 검은색 초크 목걸이, 아우라 은폐기를 살짝 건드렸다.
=너도 임무를 하면서 숨기고 다녔다고 했잖아. 이런 게 신기할 건 없지 않아?=
=신기해. 엄청 신기해. 우리가 쓰던 방식에 비하면 이건 세련 그 자체이자 혁명인데 당연히 신기하지!=
=그, 그정도야?=
=어후, 우리가 쓰는 방식은 진짜…… 으.=
자신의 질문에 갑자기 부르르, 어깨를 떠는 아영의 모습. 백려강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네가 쓴 방법은 뭔데?=
=직접 조제한 물약을 복용하는 거야. 근데 위상력 감응치를 최대한 올리려다 보니 온갖 끔찍한 재료를 생으로 갈아서 쥐어짜 마시는 거거든? 이게 맛도 식감도 엄청 역겨워.=
=어느 정도길래…….=
=음…… 하수구 똥물이랑 거기에 퇴적된 끈적한 윗부분만 살짝 걷어서 푹 끓인 뒤에 한 2일 정도 졸인 느낌?=
끔찍함을 연상시키는 묘사에 백려강의 천사 같은 얼굴이 흐려진다.
맛도 감촉도 상상이 안 되지만 아영의 설명이 매우 구체적이라 그것만으로도 살짝 욕지기가 올라올 정도.
=게다가 6시간밖에 지속 안 돼서 하루에 3번씩은 마셔야 하는데 그게 한 달이 넘으면 속이 다 뒤집혀……. 미각도 사라지고 생리도 끊기고 피부도 트러블 생기고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지지, 2달 동안 임무를 맡았을 땐 새빨간 소변까지 봤다니까.=
=그, 그렇게 몸에 안 좋은 걸 오랫동안 마셔도 괜찮아……?=
=당연히 안 괜찮아. 그래서 사회 첩보 잠입 임무는 최대 한 달로 정해져 있고, 한 달 임무를 받으면 반년은 다시 잠입 임무를 받지 않게 되어있어.=
백려강은 그녀 특유의 착한 심성으로 공감하며 안쓰러움을 드러냈다.
=그런데 너는 성술 때문에 쉴 새 없이 임무에 들어간 거구나…….=
하지만 아영은 오히려 어깨를 펴고 가슴을 쑥, 내밀며 의기양양 해했다.
=그만큼 내 능력이 뛰어났다는 증거지! 그리고 중요한 임무에 일반인을 잠입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어, 어?=
=그리고 그만큼 능력이 뛰어나니까 환인 오빠를 습격하는 일에 동원된 거잖아?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관측자로 오길 잘했다는 느낌? 이야. 그도 그럴 게 암살자 일에서 손 씻고 성제님의 종자 노예가 된 거잖아! 이 정도면 엄~청 출세한 거지 막 이러고~.=
아영의 초차원적인 멘탈을 정면에서 받은 백려강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 아이는 대체 마음이 얼마나 긍정적인 걸까? 어쩌면 팔라툼에서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런 건 신경도 안 쓰이나?
킥킥 웃으며 수건으로 쿠에들의 부리며 눈곱 등을 닦아주는 아영의 뒷모습에 백려강은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멍청했다면 카락스의 차기 송곳니 후계가 되지도 못했을 거고 7급 성술사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환인 님의 암살일에 뽑히지도 않았을 것이며 환인 님도 그녀를 살려서 거두지 않으셨겠지.
그러니까 그녀는 다가올 결말이 어떻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를 한 것일 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백려강은 자신도 수건을 꺼내 쿠르티를 닦아주며 말했다.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언니들 앞에서 그런 말은 안 하는게 좋아. 하면 엄청 혼날 거야.=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상큼하게 웃는 아영의 모습에서 백려강은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야영장을 나와 다시 팔라툼으로 향하던 환인은 백려강과 마차의 운전석에 앉아 마차를 몰며 플라비우스족이 철새처럼 떼지어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괜히 이명으로 천사족이라 부르는 게 아니군.’
머리 위에 헤일로만 붙으면 꼼짝없이 천사로 볼만한 모습이다.
그간 플라비우스족을 몇 번 실물로 본 적은 있지만 멀리서 본 게 전부였다.
조천 도시에서는 머물 시간도 없이 들어가자마자 곧장 빠져나왔었고 영도에서도 플라비우스족은 눈에 띄지 않았다.
흐라스린드에 플라비우스족이 산다고 들었지만, 절벽에 집을 만들고 살아가는 그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랬기에 이때까지 그런가 보다 하고 보아넘겼었다. 날개 달린 여자 조인족을 적잖게 봐왔기에 플라비우스족도 그 연장선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유심히 보고 있자니 조인족과는 좀 다른 느낌이 전해져온다.
조인족과 비교해 플라비우스족의 날갯짓은 뭔가 느릿하고 하늘거리는 느낌이라 할까.
그 점을 말하자 언니들이 잠깐 마차 안으로 들어간 사이 환인의 옆자리를 차지한 백려강이 이야기를 받았다.
=골격이랑 골밀도가 달라서 그렇게 느껴질 거예요. 루크랑 조인족은 뼈가 상대적으로 가볍거든요. 그래서 날갯짓도 힘 있고 기운찬 느낌인데…….=
플라비우스족은 플뢰족 같은 일반적인 육상 생명체 같은 몸에 날개가 붙어있어 좀 느리고 느긋하다고.
=그리고 플라비우스족은 선천적인 법사 종족이라서 그런 점도 있어요. 환인…… 오라버니도 플라비우스족을 천사족이라고 부른다는 거 아시죠?=
“그래.”
아영의 조언에 따라 은근슬쩍 호칭을 다르게 불러본 백려강은 환인이 자신을 잠깐 바라보곤 앞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게, 플라비우스족은 큰 노력 없이도 빛 속성에 뛰어난 적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요. 플뢰족이 정령술에 큰 적성을 가진것처럼요…….=
“그랬군. 찾아온 사절들 전원이 직업 아우라 외에 위상력의 유동이 남다르다 했더니 그런 이유에서였어.=
말할 필요도 없이 지극히 상식적인 거라 영도의 기록실에서도 얻지 못한 정보에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려강은 그 모습을 보며 콩닥거리는 심장을 달래려 가슴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며칠 전 아영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여자는 애교야.’
‘애, 애교?’
‘언제까지고 오빠한테 무뚝뚝하게 님님 거리다간 진짜 남남이 될 수 있다, 너? 남자가 아무 말 안 한다고 현실에 안주하면 안 돼.’
‘…….’
‘남자에게 제일 매력적인 여자는 얼굴이 예쁜 여자도, 몸매가 환상적인 여자도 아냐. 처음 보는 여자라고. 그게 뭘 말하는지 알아?’
‘뭘… 말하는 건데?’
‘남자는 새로운 자극에 약하다는 말이야.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말도 있잖아. 미모에는 유통기한이 있어서 남자는 금방 익숙해져 버려.’
‘…….’
‘임무를 하면서 엄청 많은 여자랑 남자 사이를 봐온 내가 하는 말이야. 넌 믿어야 해.’
처음에는 아영의 조언을 말도 안 된다고 웃어넘겼던 백려강이었다.
하지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그녀도 깨닫게 되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언니들이 늘 환인 앞에서 새롭거나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꾸준히 몸단장과 몸 관리를 하고 있다는 걸 상기해냈던 것.
말해 무얼 할까. 그녀들이 받는 용돈 대부분은 환인을 위한 치장 용품으로 소비된다.
안느는 용돈만으로는 부족해서 슬쩍 성수를 만들어 파는 걸로 부수입을 올리고 있고 이실리테도 가죽 무두질 실력이 일취월장하며 그걸 팔아 용돈으로 쓴다.
둘 다 환인에게 허락받아 부수입을 손에 넣고, 그것까지 몸단장을 위한 재료를 구매하는 것.
그리고 유르파는 두 여자가 부탁한 것을 만들어주고 남은 자투리로 속옷이나 화장품을 만들어 팔아 수입을 올리는데, 그렇게 얻은 수입은 당연히 자길 가꾸는 데 쓴다.
세 여자가 치장에 쓰는 돈만 한 번에 몇 금화씩 나가는 거다.
백려강은 고위 호족 가문의 자녀로서 자신이 직접 물건을 사보거나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시녀가 가져오는 드레스를 입었고 시녀가 가져다주는 책을 보았으며 시녀가 만든 음식을 먹었었다.
그랬기에 환인 일행에 합류한 뒤로도 그녀가 직접 무언가를 산 적은 없었다. 그래서 언니들이 이것저것 액세서리와 옷가지등을 사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백려강은 유르파가 예쁘다며 만들어주는 옷만 인형처럼 갈아입고 있었는데.
‘언니들이 치장에 돈을 쓰는 이유가 그런 거였어…….’
아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영영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다른 세 여자가 백려강을 따돌리는 것은 아니다.
아드네빌라의 모방체인 현재 백려강의 육신은 속된 말로 거적때기를 입어도 아름다울 만큼 미의 결정체. 굳이 치장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예쁘다고 생각했고 그게 또 사실이었기에 그녀들은 자신을 가꾸는 데만 신경 썼던 것.
=오, 오라버니는 플라비우스족을 가까이서 보신 적 없으세요?=
“거인숲 미궁에서 마주쳤던 사절이 그나마 가장 가까이서 본 거였군.”
=그러면…… 제가 플라비우스 귀족 예법을 알려드릴까요? 저도 조인족이어서 플라비우스족 관련 예법을 배운 적 있거든요.=
“그래. 부탁하지.=
환인은 슬그머니 자신의 옆에 붙으며 드러내는 그녀의 귀여운 속내에 작게 웃으면서 부탁했다.
=이제 내가 가르쳐줄 것은 더 없구나……. 하산해도 좋다.=
=응? 무슨 말이니?=
=그게 려강이가 있잖아요.=
유르파에게 불려 재봉 보조 일을 돕던 아영은 잠깐 마부석 쪽을 훔쳐보다가 유르파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녀가 본 것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그래서 려강이도 이제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있어요.=
=아, 그걸 말해줬구나?=
=어~ 혹시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나요?=
자신이 실수한 건가, 아직 눈치채지 못한 파티의 이면 사정이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던 아영은 뒤에서 새 속옷을 시착중이던 안느가 입을 여는 걸 듣고 고개를 돌렸다.
플뢰족 중에서는 상위 1%에 들어갈 만큼 크고 예쁜 유방이 그녀의 눈에 한가득 담긴다.
크기, 모양, 유륜의 색과 유두의 위치까지. 여자인 자신이 봐도 매력적인 가슴이다.
=우리가 그걸 지적해주려니까 모양새가 조금 이상해지는 거 같아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주제였거든. 잘했어.=
=음?=
모양새가 이상하다고? 왜?
아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해하는 모습에 이실리테는 가슴을 편히 받쳐주는 검은색 패턴 무늬 망사 브래지어의 위치를 손보며 말했다.
=우리 복잡한 사정은 네가 알아차린 것보다 더 많아.=
=7급 모험가 파티는 걸어 다니는 비밀 상자라고 하니까요. 이해했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아영은 한쪽이 자기 머리보다 1.5배 가까이 더 큰 그녀의 가슴 사이즈에 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그녀의 뒤에서 가슴의 위치를 능숙하게 손봐준다.
=어떠세요?=
=……응. 편하네.=
내구성이 조금 약한 것 같지만, 어차피 주인님과 잠자리 외에는 입을 일 없는 속옷이니까.
살짝 상체를 돌려보고 숙여도 본 이실리테는 젖가슴의 무브먼트를 확인한 다음 브래지어를 벗으며 옆에서 옷을 받쳐 들고 있는 아영에게 말했다.
=사정을 지금 이야기해주지 않는 이유는 아직 네가 우리 동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동료가 되면 그때는 주인님이 직접 말해줄 테니까.=
=넵. 그때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실리테는 속옷을 시착하느라 올려묶었던 머리카락을 풀어서 자연스럽게 다시 묶으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마음을 엿보기 위해 약간 심술궂게 괴롭히는 투로 말했는데 조금도 구겨지지 않는 미소라니.
=앗, 이실리테 언니. 머리 제가 묶어드려도 될까요? 머리카락이 무척 윤기 나고 매끄러워서 프린세스 스타일로 묶으면 굉장히 아름다우실 거 같은데요!=
=……전투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라면.=
=헤헤. 맡겨주세용!=
해맑게 웃는 저 얼굴을 보자니 자신이 나쁜 년이 된 기분이라 썩 내키지 않는다.
그렇게 이실리테와 안느의 속옷 시착이 끝났을 때, 유르파는 노트에 수정 사항을 기록하며 지나가듯이 아영에게 물었다.
=원탁의 이빨들이 정말 우리 앞에 나타날 거라고 보니?=
=네. 엘미느 언니는 한 입으로 두말은 절대 하지 않아요. 환인 오빠한테 그렇게 말했으니까 반드시 올 겁니다.=
=하지만 본거지는 벨티칼의 주도 근처에 있다며. 여기까지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일주일은 걸려.=
=음, 이건 율법으로 묶인 비밀이라서 다 말씀 못 드리지만요. 카락스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암살과 정보업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따로 있어요.=
=포탈식 전이술에 정령의 길이나 자연의 통로를 몇 개 마련해놓았나 보네. 주도나 중급 도시 근방에 설치했으려나? 그럼 이미 도착해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수 있겠는걸.=
아영은 그녀의 날카로운 판단에 그냥 헤헤 웃기만 했다.
아무리 율법 계약을 통해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지만,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사실을 전달할 방법은 많다.
더욱이 유르파처럼 똑똑하다면 조그마한 단서만으로도 사실에 가깝게 추리해낼 수 있는 법.
=그때 도령을 암살하려 시도할 가능성은?=
안느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아영은 눈을 두 차례 깜빡이다가 고개를 좌우로 붕붕 흔들었다.
=감유 아저씨가 카락스의 행동 대장이라면 엘미느 언니는 카락스의 두뇌에요. 히스론드의 주도 팔라툼에서 영도의 대성자 후보를 공격하는 행동은 절대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환인이 주도에 들어간다는 것은 주도의 시민들 목숨을 인질로 잡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날 죽이겠다고? 그럼 너희도 죽어.
만약 주도에서 암살 시도가 벌어진다면 히스론드의 천족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카락스는 물론이고 그와 비슷한 집단까지 싸잡아 제노사이드를 일으킬 테지.
대성자 후보가 두 번이나 공격받은 영도는 절대 영도 같은 분위기로 카락스의 암살자를 뿌리까지 뽑아버리려들 테고 자기 본진에서 최고 귀빈이 암살당할 뻔한 히스론드는 물론 히스론드와 사이 친한 벨티칼까지.
=전방위에서 공격받는단 걸 잘 알 테니까요.=
아영의 꽤 구체적인 설명에도 유르파는 놀라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감유라는 흰 늑대 루크랑은 다른 생각을 할 것처럼 보이던걸?=
=감유 아저씨는……. 만약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면 오지 못할 거예요. 왔다면 마음을 바꿔먹었다는 뜻일 테고요.=
오지 ‘않’는 것과 오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명백하다.
아영이 말하는 것은 죽음일 터.
그사이 옷을 다시 차려입은 이실리테와 안느는 각자 천상의 장막과 구세의 빛을 착용했고, 중무장 차림에 시민들이 위압 당하지 않도록 디자인에 어울리는 겉옷을 살짝 걸쳤다.
마지막으로 목의 초커 목걸이까지 푸니 두 사람의 희귀 타입 아우라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게 뿜어져 나오며 말 그대로 영웅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내막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전투를 대비한 모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실리테는 마지막으로 몸 상태를 점검한 뒤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영에게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솔직히 말할게. 나는 네가 죽지 않았으면 해.=
=헤헤.=
=난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어. 그렇기에 알아. 너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여자야.=
=…….=
=그러니까 하나 조언해줄게. 바보 같은 짓을 생각 중이라면 버려. 너와 네 가족을 살리고 싶다면, 가족들이 멍청한 짓을 하려 할 때 목숨 걸고 막아.=
이실리테는 아영이 바보같이 개죽음당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랐고, 마음을 바꿔먹어 자신처럼 주인님 덕분에 새 삶을 살길 바랐다.
그리고 아영은 그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여자가 아니었다.
=네. 언니 말씀대로 만약 가족들이 멍청한 짓을 하려 한다면 필사적으로 막을게요.=
이 파티에 합류하고 난 뒤 분위기를 파악하며 알게 된 것은, 언니들은 환인 오빠와 만나기 전에는 그저 조금 뛰어나거나 별 볼 일 없었다는 거였다.
물론 눈치와 감으로 찍은 거지만, 자신의 감은 매우 높은 적중률을 자랑한다.
그런 언니들이 환인 오빠와 만난 뒤에는 꽃이 활짝 피는 것처럼 능력이 만개했다. 그게 뜻하는 건 무엇인가. 환인 오빠에게는 뛰어난 교관의 자질과 그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아영은 너무나 찬란해서 눈을 돌릴 수가 없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아우라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이건 기회야.’
어둠 속에서 암살집단도, 그렇다고 정보 길드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살아오던 카락스를 변화시킬 기회.
자신을, 이레아를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만 봐도 환인 오빠의 성격이 어떤지 짐작이 간다.
능력은 어떤가.
맨몸으로 니오네브레스에 강제 소환되어 고작 몇 년 만에 영도의 대성자 후보이자 각국 상위 0.1%에 드는 지위와 권력의 인물들이 자세를 낮추게 만드는 인물이 되었다.
게다가 행적은 또 어떤가.
헬루멘도, 프라버도, 알소프도, 영도도, 흐라스린드도.
오빠가 관여한 도시는 흥하거나 망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가장 흥한 곳을 꼽으라면 프라버와 영도. 그중에서도 10만 군단이나 다름없는 거인들을 받아들인 영도다.
그 말은 즉 아득한 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 살아왔던 카락스가 양지로 나갈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란 것.
‘오빠한테 카락스를 바쳐야 해.’
그러기 위해서 아영의 눈빛에 결의가 스며든다.
통통통—
[언니들. 팔라툼 관문이 바로 앞이에요.]
때마침 울려퍼진 알림에 재빨리 마차 천장의 선루프로 마차 지붕에 올라온 아영은 눈에 위상력을 집중시켜 주변을 싹 둘러보았다.
멀리서 보이는 높이 100여m의 티 없이 새하얀 성벽城壁.
히스론드가 자랑하는 백색의 왜곡벽으로 막대한 수의 술법이 새겨져 있어 5천 년간 이블팩션을 상대로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북방의 성벽聖壁이다.
그런 성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녀의 예상대로 가족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엘미 언니라면 환인 오빠한테 모든 결정권을 넘겨주기 위해서 마중 나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다.
만약 없었다면 내부에서 반발이 벌어졌든지 판단했겠지만, 저렇게 이빨들이 전부 모여있는 걸 보면 엘미 언니가 제대로 이빨들을 휘어잡은 게 틀림없다.
=환인 오빠! 저 앞 성벽에 가족들이 마중 나와 있어요!=
“…….”
=아마 오빠한테 모든 결정권을 넘겨드리기 위해서 나와 있는 걸 거예요. 장소부터 해서 전부 다요!=
아영은 자신의 판단을 환인에게 그대로 전달했고, 이야기를 묵묵히 들은 환인은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높다는 성벽, 히스론드의 왜곡벽이 점차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성벽 너머 화려하고 찬란한 건물들과 거리가 하늘을 찌를듯한 산 중턱까지 이어져 있는 거대한 도시도.
이 세상에 와 처음 보는 국가의 수도를 눈에 담던 환인은 영혼의 눈을 전개하며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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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성제가 암살 집단하고 미팅한다고?
???: 그 암살집단이 자길 암살하려했던 곳이고?
???: 그리고 미팅 장소가 우리집 앞 마당이라고? 이 새끼야, 약 처먹었냐!? 당장 가서 안 막고 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