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 아드네빌라와 릴라이스
우르르릉…… 꽈과광-!!
쏴아아아아—!
하늘을 시꺼멓게 뒤덮은 비구름. 세상을 뒤덮은 뇌우.
수백 미터 앞도 잘 안 보일 만큼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로 노기가 충만한 백청룡이 뇌광을 몸에 휘감은 채 세상을 무너트릴 듯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다.
무엇이 그리 화가 났는지 순백의 갈기와 용의 수염은 분노로 너울거리고 있고 바다 빛깔의 두 눈은 불길을 담은 듯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여자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거대한 백청룡의 자태에 딸꾹질조차 못 하고 꽁꽁 얼어붙어서는 쏟아지는 호우를 그대로 맞고만 있고, 환인은 망치로 머리를 쾅쾅 내리치는 두통에 이마를 감싸 쥐고 소리 없는 신음을 흘렸다.
《감히 정령 부스러기 따위가 이몸에게 ‘너’라고?!!!》
꽈과과광—!!
백청룡, 아드네빌라의 노호성에 동조하듯 벼락 다발이 세상에 내려꽂히며 귀청을 찢을듯한 우렛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런 분노에도 릴라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틱틱거리는 말투를 쏟아냈다.
〈너랑 나랑은 위계가 전혀 다른데 너라고 한 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그 품위라곤 최하급 정령의 눈물만큼도 없는 언행이 화낼 일이지!!》
꽈아아앙—!!!
시야가 한순간 백색으로 변했다 사라진다. 근처에 벼락이 떨어졌나? 몸에 전기가 스며드네.
릴라이스는 릴라이스대로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알류겔 대호수의 신수가 왜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신에게 분기를 드러내고 있는 거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어쨌든 저거랑 싸우는 건 좋지 못한 일이다. 릴라이스는 한발 양보해서 사과를 입에 담았다.
〈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 그르니까 그만 좀 번개 뿌려! 몸에 전기가 오르잖아!〉
《시끄럽다!!》
꽈과과광……!!
아이씨, 사과해도 지랄이야.
분기탱천한 질타와 함께 울려 퍼지는 우렛소리에 릴라이스는 속으로 인간에게서 배운 욕을 지껄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성격 같아서는 자신도 본신화해서 맞먹고 싶지만…… 위계가 다르다 해도 저쪽은 물질계 생명체의 정점인 용龍이자 생명의 원천인 물의 지배자다.
하늘 평원의 신님들하곤 비교도 못 하지만 그래도 신성을 좇는 불멸자 중에서는 그분들에 가장 근접한, 홀로 오롯한 존재.
아무리 자신이 물의 화신체化身體라고 해도 한 끗발 밀리는 게 사실인 것이다.
릴라이스는 분통 터질 것 같은 성격을 꾹꾹 누르면서 사근사근 물었다.
〈저기~ 갑자기 찾아와서 이렇게 화내는 이유, 릴은 진짜 모르겠거든? 이유라도 알려줘. 고치도록 노력해볼 테니까.〉
《모른다고? 모른다고!? 거기 있는 인간 계약자에게 이몸이 흔적을 그토록이나 새겨놓았거늘! 그럼에도 계약을 가로채려 한 주제에 모르겠다고!!!》
엑, 용의 냄새가 진짜 계약의 냄새였어?
뜻밖의 이야기에 릴라이스는 크게 놀라면서도 알게 모르게 이해하고 말았다.
자신도 어떻게, 정령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저 인간과 계약할 수 없을까 골똘히 생각했을 정도다. 계약에 별반 제약이 없는 용의 관점에서 저 인간은 얼마나 먹음직스러웠을까.
……응? 잠깐 기다려봐.
〈아니 잠깐. 그거 좀 이상하지 않아? 우리 정령 계약이랑 당신들 의사 계약은 분류가 달라서 계약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텐데? 글고 저 인간한테서는 당신 냄새뿐만 아니라 기린의 냄새도 나고 있어. 그건 뭔데?〉
《…….》
오. 그런 거였나.
릴라이스는 자신의 반박에 저 용이 순간적으로 곤혹스러워한 것을 느끼곤 씩 웃었다. 그렇다면 꿀릴 것 없지.
슈르르— 환인에게 날아든 릴라이스는 그에게 안기듯이 달라붙어서는 아드네빌라에게 조잘거린다.
〈뭐야아~ 그런 거였어? 의사 계약이 아니라 단순한 언약 쪽이었구나? 이쪽이 이 인간이랑 계약을 맺으면 그쪽 계약이 제대로 유지될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약속.〉
《네놈…….》
피식 웃으면서 얕보는 듯한 감정을 고차원의 존재로 나아가는 아드네빌라가 못 느낄 리 없다.
아까까지가 감정에 내맡긴 노여움이었다면 지금은 이성이 만들어내는 조용한 분노.
그것은 릴라이스도 느꼈지만, 딱히 상관없잖아? 하고 흘려넘겨버렸다.
1:1로 정면에서 맞붙는다면 여러모로 자신이 불리하긴 하다. 그렇다고 패퇴해서 도망치는 것도 막혀 맥없이 당할 만큼 약하진 않다.
〈걱정 마~. 난 그쪽과 다르게 이 인간이랑 제대로 된 계.약을 맺을 거니까~.〉
그 뒤에 이 인간이랑 언약을 다시 맺으라지! 내가 용납할지는 의문이지만! 후후훗.
그렇기에 릴라이스는 아드네빌라를 향해 도발적인 언사를 감추지 않았다.
물론 저쪽이 존나 빡치면 그만큼 위험성도 대폭 늘어나니 정도 이상의 도발은 하지 않게 주의는 한다.
그렇게 승리감에 도취했던 릴라이스는 환인을 돌아보았다가 도취감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향해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다는 표정. 좋게 표현해서 이정도지 자신을 흔한 중급 정령처럼 쳐다보고 있다.
‘맞다. 이 인간, 나랑 절대 계약 안한다고 했었지?’
릴라이스는 당황했다. 이, 이러면 곤란한데?
환인과 언약보다 상위로 분류되는 계약을 맺고 안전한 곳에서 용을 놀리려던 계획이 삽시간에 어그러진다.
이 인간은 무척 용의주도하고 안위에 민감한 인간이었다. 당연히 저 용에게 해를 당하지 않을 기초적인 안전장치는 해놨을 것이라 확신했고, 그런 인간과 계약을 맺는다면 저 용도 자신에게 해코지를 못 하리라 판단해서 말했던 거였는데…….
‘큰일났다.’
차가워진 아드네빌라의 눈빛에 릴라이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자신의 것(아니다)에 어떤 년이 손대는 것을 느끼곤 생전 처음 겪는 감정에 분노가 폭발, 계획 없이 앞뒤 가리지 않고 날아온 아드네빌라.
사실 초월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행동이 비교적 정상이다.
세계에 영향력을 끼칠 정도의 힘, 압도적인 무력이 있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죽여버리거나 쓸어버리면 그만인데 머리를 써야 할 이유가 어디 있나.
행동 원리에 감정이 우선시되고 행동이 단순해지는데 생각이나 사고가 숙성될 일이 없다. 이번에도 그러한 이유로 다짜고짜 날아온 아드네빌라는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상태였다.
휘발성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는 이성과 차가운 분노만 남은 상태.
《너 이 쬐끄만 정령아. 그는 관심조차 없거늘 너는 자신의 망상에 취해 현실을 외면하며 이몸을 모욕하는구나. 후환을 어찌하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느냐.》
우르르르르…….
비가 그치고 먹구름만 뒤덮인 하늘에 우렛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온다.
조용한 어조와 먼 곳에서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우렛소리. 그게 좀전의 대놓고 떨어지던 낙뢰와 뇌광, 노호성보다 더욱 무서운 릴라이스였다.
그런 그녀가 택한 것은 조용히 분노하는 용에게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달라붙는 것이었다.
〈야, 야! 인간! 나랑 계약하자니까?! 내가 잘 보살펴줄게! 응?!〉
인간에게 계약하자 조르는 것과 분노한 용에게서 도망치는 것.
어느 쪽이 그녀에게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 알게 된 환인은 그것을 통해 그녀를 수족으로 만들 방법도 구상했지만…….
환인은 몇 가지 떠올린 방안을 전부 폐기했다.
이 초월급 정령은 그런 식으로 사기 계약을 진행할만큼 만만한 대상이 아니다.
분노한 아드네빌라와 말다툼하고 기 싸움을 하는 걸 보면 아드네빌라보다 약한 게 틀림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존재다.
아드네빌라가 수해를 일으킨 범위는 중국 전체를 뒤덮는 수준이었다. 그보다 조금 못한 물의 정령은 어떤 일을 벌일 수 있을까.
거기다 정령은 따로 정령들의 네트워크가 있는 것으로 판명 난 상황.
사기 계약을 당한 릴라이스가 환령계에서 자신에 대한 악의 어린 소문을 퍼트리면 앞으로의 여정에 애로사항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겠지.
그것마저 봉쇄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크다.
전형적인 하이리스크 로우리턴으로 도박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행위.
도박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환인은 자신에게 계약을 종용하는 릴라이스를 무시하고 아드네빌라에게 말을 걸었다.
“한 달 만입니까. 오랜만입니다, 아드네빌라.”
《…이몸에게 한 달은 찰나와 다름없다만 반갑기는 하군.》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문제? 뭐가? 아드네빌라는 환인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눈알을 데굴, 굴렸다.
“제가 약속 당시 분명히 언급을 했었을 텐데요. 이쪽에 피해를 끼치는 일은 엄금이라고 말입니다.”
《아, 아니. 이몸이 널 찾은 것이 어째서 피해가 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저는 정체를 숨긴 채 성불행을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방팔방 이름을 알리며 다니면 제가 목적으로 했던 것을 이루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
“이런 와중에 당신이 보란 듯이 떡하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군요. 좀 전에는 폭우로 인해 볼 수 없었다지만, 지금은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도 잘 보이겠습니다.”
잔잔한 환인의 목소리에 아드네빌라는 언약의 여파가 서서히 역류하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약속을 깬 벌칙이 밀려오는 것이다.
이게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이 상황을 정말로 피해라고 인식하고 있단 이야기.
《……!》
아드네빌라의 기다란 유선형의 아름다운 용체龍體가 옅은 빛에 휩싸여 점차 줄어들더니 종내에는 사람 정도로 작아졌다.
형상도 사람의 모습으로, 백려강이 차지한 용인체가 나이 먹어 성숙한 여인이 된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은 외형이다.
《…미안하군.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건 너에게 고의로 피해를 주고자 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 계약에 끼어들어 분탕을 치려하는 이 정령 부스러기 때문. 그 점을 참작하여주길 바란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보아도 되겠습니까.”
《이후에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몸이 스스로 계약을 내려놓겠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이번은 실수로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환인의 담담한 이야기에 활동성에 중점을 둔 개량한복 같은 복식의 아드네빌라가 눈을 감는다.
그리고 몇 초 뒤 눈을 떴을 때, 청록색 눈동자에서 벼락불이 튀었다.
대상은 당연히 대화를 들으며 초조해하고 곤혹스러워하던 릴라이스.
저 망둥이 같은 년이 환인과 맺은 약속을 훑고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자신이 이렇게 튀어오지 않았을 것이며 그에게 고개숙여 사과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
그 눈빛에서 위기감을 느낀 릴라이스는 즉시 몸을 돌려 서쪽의 호수를 향해 도망가려 했지만.
덥썩.
인간화한 아드네빌라가 그녀의 생선 지느러미 꼬리를 잡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네년 때문에……!》
〈꺄—?!〉
확— 릴라이스를 끌어당기는 동시에 그녀의 복부로 주먹을 내지르는 아드네빌라.
꽈광, 공기의 벽을 부수며 나는 소리인지 아니면 릴라이스의 물로 이루어진 육체를 박살 내느라 난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굉음이 터져 나오고, 동시에 릴라이스의 뱃가죽과 등가죽이 펑- 터지며 도저히 그 안에 들어있었을 양이라 믿기 어려운 물보라가 사방에 뿌려졌다.
배를 중심으로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릴라이스가 익, 잇소리를 내자 물고기 하반신은 그대로 해일로 변해 대지를 뒤덮었고 상체에서는 다시 하반신이 돋아난다.
그러는 사이 아드네빌라는 9등신에 달하는 늘씬한 팔을 들더니…….
《일단 좀 맞자.》
〈시, 싫—〉
이를 악 문 표정으로 손날을 릴라이스에게 내려쳤다.
파아앗—
평온의 파동이 이실리테와 안느, 백려강을 한차례 휘감고 사라지자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딱딱하게 굳어있던 여자들이 허억,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다리를 후들거렸다.
친왕인 호천명은 지위에 걸맞은 경험을 많이 했기에 백청룡의 위광에도 버틴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거의 없을 터인 여자친구들이 용케 주저앉지 않고 두 다리로 어쨌든 서 있는 것은 그녀들의 의지력이 뛰어나다는 증거.
〈으꺄, 악!〉
《도망가지 마라!》
게다가 그 의지력이 육체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는지, 릴라이스를 쥐잡듯이 두들겨 패며 순간순간 강해지는 아드네빌라의 위광이 쏟아질 때마다 그녀들의 신체에 흐르는 위상력이 점점 촘촘해지고 탄탄해지는 듯하다.
“다들 괜찮나.”
=으, 응. 후우, 후아…….=
=네에. 괜찮은 거 같아요…….=
=…….=
주먹을 꼭 쥐거나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숨을 몰아쉬는 이실리테와 안느하곤 다르게 백려강은 조금 피로하긴 하지만 그저 그 정도일 뿐이란 것처럼 좀 떨어진 곳에서 릴라이스를 두들겨 패는 아드네빌라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말을 거는 것도 깨닫지 못할 만큼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환인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재차 말을 걸었다.
“백려강, 괜찮나.”
=……앗, 네.=
그를 돌아보았던 백려강은 다시 아드네빌라에게 시선을 향하며 어딘가 멍한 것처럼 느릿하게 대답한다.
=왠지 모르게…… 저 용님에게 이끌리는 기분이에요……. 이제는 기억도 잘 안 나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같이…….=
“그 육신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네?=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릴라이스를 야무지게 패는 아드네빌라.
그녀의 옆에 지금 백려강을 세우면 열 중 여섯은 모녀로 보고 나머지 넷은 조금 나이 차이 나는 자매로 볼 법한 외모다.
=그, 그렇지만 용인체를 쓴다고 해서 용님에게 마음이 이끌리는 것은…….=
“백려강. 신체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
사고로 팔을 잃은 사람이 손가락 끝의 감각을 느끼는 환상통, 장기 기관의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의 입맛이 갑자기 변했다는 도시 괴담에 가까운 풍문.
그게 과연 괴소문이기만 할까. 적어도 환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옆에서 환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안느도 환인의 이야기에 동조했다.
=차가운 게 몸에 닿았을 때 뜨겁다고 암시를 주면 실제로 화상을 입는 경우가 있다고 하잖아. 려강이가 겪는 것도 그 연장선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환인은 아드네빌라를 향해 아련한 시선을 보내는 백려강을 보며 약간 고민했다.
프라버에서 들었다시피 그녀는 어렸을 적 모친과 사별했고 부친에게도, 가족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랐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모성애의 갈구로 인식해버린다면 백려강이 아드네빌라에게 종속되는 일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환인은 아드네빌라에게서 백려강을 격리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고 안느를 가까이 불러 입을 열었다.
“백려강이 아드네빌라를 계속 보게 두는 것은 좋지 못할듯하다. 그녀를 데리고 먼저 마을로 복귀해라.”
=역시……. 알았어. 하지만 도령도 조심해. 아무리 맹세했다지만 원한이 깊어지면 정령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몰라. 제약을 감수하고 맹세를 철회할 수도 있고.=
“알았다. 주의하지.”
환인의 대답에 고갤 짧게 끄덕인 안느는 백려강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려강, 저쪽은 그만 보고 우리는 먼저 돌아가자?=
=네? 어…….=
=너 용의 위광에 감정이 너무 흔들렸어. 감정이 혼란스러울 때 그 원인을 계속 보는 건 안 좋아. 자, 얼른.=
=하, 하지만…….=
=도령한테 허락은 받았어.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네에.=
확실히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부자연스럽긴 하다.
마을로 돌아가서 차분히 생각해봐야겠다고 생각한 백려강은 자신을 바라보는 환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안느의 손을 잡고 그녀와 함께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가면서도 미련이 남는지 간간이 이쪽을 돌아보았지만, 그 모습도 언덕을 넘어가면서 사라졌기에 환인은 서서히 결판이 나고 있는 아드네빌라와 릴라이스의 매치로 고개를 돌렸다.
〈아윽! 그만, 그만해!〉
《그만하란다고 멈출 일이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릴라이스가 물 그 자체인 초월급 물의 정령이라지만, 아드네빌라는 그런 물을 지배하는 용이다.
고작 호수 근처에서 주변에 깽판을 치는 정령이 천변지이를 부리며 2천 킬로미터 반경에 수해를 일으키는 신수에게 이길 거라고 보는 게 이상한 일.
주먹에 기운을 담아 두드려 패는 아드네빌라에게 대항해 물을 다른 여러 가지 공격을 가하던 릴라이스였지만 어느 순간 방어에만 치중하다가 지금은 아드네빌라를 피해 도망만 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정 반경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 아드네빌라가 무언가 수를 쓴 게 틀림없겠지.
촤악!
〈끄아앙……!〉
아드네빌라의 손날이 릴라이스의 쇄골에서 사타구니까지 갈라버리자 비명과 함께 절단면에서 재차 막대한 물을 쏟아내고서는 다시 도망치며 육체를 수복하는 릴라이스.
그러나 그 크기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과 비교해 2/3 가까이 줄어든 상태다.
=……주인님, 저 정령의 크기가 좀 작아진 것 같지 않으세요?=
“베일 때마다 쏟아지는 물의 양도 적어지고 있다. 아드네빌라가 힘을 담은 손날로 베어버리며 주위 물의 흡수를 방해하고 있나 보군.”
=그럼 결과가 나온 것과 다를 바 없겠네요. 정령의 공격은 백룡 님에게 전혀 닿지 않는데 백룡 님의 공격은 정령에게 모두 들어가고 있으니까…….=
그때 13살 정도로 어려진 릴라이스가 울상으로 범고래를 피해 유빙 위로 도망치는 물개처럼 환인쪽으로 날아와 그의 등 뒤에 숨는다.
〈인간, 인간! 나 좀 살려줘! 저 용이 나 죽이려고 해!〉
다급히 소리치는 릴라이스를 쫓아온 아드네빌라가 쌍심지를 켠 얼굴로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정령인 너에게 영원한 소멸 같은 건 없는 걸 알고 있다. 단지 몇백 년 잠들어있다 중급 정령 정도로 다시 태어날 뿐이지.》
〈그게 죽는 거랑 뭐가 다르다는 거야!〉
발끈하면서 소리치는 릴라이스지만 말투에 재수 없는 꼬맹이 느낌은 거의 없다. 긴 시간 잠에 들기 싫어 울상을 짓는 정령뿐.
자신이 의도하긴 했지만, 그녀를 샌드백 취급했던 아드네빌라의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환인은 릴라이스를 향해 무심한 눈길을 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이 지역에 문제가 된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까. 릴라이스 정도 되는 초월급 정령이 힘을 잃는다면 자연 생태계에 문제가 생길 법도 할 텐데요.”
《저게 사라져도 바로 뒤를 잇는 정령이 나타난다. 정확히 말하면 저것보다 조금 더 약한 물의 정령이 지금 저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식이지.》
기업의 승진 밀어내기 같은 건가. 정령의 순환 고리를 순식간에 이해한 환인의 귀에 아드네빌라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리하기는 어렵다. 저것의 본체는 환령계에 있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 된다면 저것도 필사적으로 날뛸 테니까. 그리되면 이 근방에는 커다란 호수가 생기고 말겠지.》
“현실적으로는 몇십 년 정도 환령계에서 요양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게 한계겠습니다.”
《그래. 초월급 정령을 명목 없이 해치우면 정령과 적대행위가 성립되니까.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은 이몸에게도 부담이다.》
환인은 그런 것에 관심 없다는 투로 릴라이스의 어깨를 잡아 아드네빌라 앞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어쨌든 저로 인해 자연계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아드네빌라가 알아서 하십시오.”
《맡겨라. 앞으로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전례를 확실히 남기지.》
뚝, 뚜둑. 앞에서는 아드네빌라가 손가락을 위협적으로 꺾으며 다가서고 뒤에서는 환인이 어깨를 잡은 채 밀어내고 있는 상황.
릴라이스는 눈이 팽팽 돌아갈 정도로 머리를 굴렸다.
아드네빌라에게 왕창 당해서 환령계로 강제 송환되어 몇십 년을 요양하는 것은 싫다. 그만큼 시간이 지나면 이 인간은 늙어 죽거나 사고로 죽거나 해서 없어질 테니까.
그렇다고 정령 친화력은 개뿔도 없는 인간과 정식 계약을 맺는 것도 싫고, 아드네빌라 앞에서 도망치는 것도 싫다.
둘 다 자신의 가치를 말도 안 되게 낮추는 행위인데다 그 불돼지년과 바람새년한테 무진장 놀림당할 게 뻔하니까.
어쩌지? 어쩌면 좋지?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해결할 수……?
「으으으. 에으……. 머리 아파…….」
형상이 일그러질만큼 고민하던 그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환인의 상의 안주머니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버둥거리며 옷깃 밖으로 기어 나오는 환연이었다.
정령도, 요정도 아니면서 중급 정령을 말로만 부릴 만큼 충만한 정령 친화력.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눈앞의 인간과 비슷한 냄새도 나고, 뭔가 이것저것 복잡한 게 섞이고 뭉쳐져 만들어진 듯한 신기한 생물.
안주머니에 넣어둔 것을 보면 저 인간에게도 소중한 거란 뜻이겠지.
이거다.
릴라이스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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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정령석 출신 엘리트 요정령(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