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39화 (539/813)

533 흑마술사의 마궁

릴라이스, 아득한 시간을 살아온 고대 물의 정령은 잠시(700년) 머물기로 한 호수에서 주변을 지나다니는 인간을 살펴보고 건드려보며 줄곧 계약할만한 인간은 없을까 찾아다녔다.

그 행동에는 모종의 치기 어린 사유가 있었지만 아무튼.

그러나 오늘날까지 눈에 차긴커녕 혐오스러운 것들 밖에 보지 못했다. 때로는 너무 나타나지 않는 적합자에 짜증 나서 살짝 지나다니던 인간을 괴롭히기까지 했었다.

그걸 몇 차례 반복했더니 이번에는 지나가는 인간 자체가 없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에는 보기만 해도 짜증 나고 열받아서 뭉개버리고 싶은 것이 근처 미궁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자신의 손으로 찍어 죽이자니 미궁이 무너질 것 같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자니 역겹고 짜증 나고.

슬슬 자리를 옮겨야 하나 생각하던 중에 나타난 저 인간.

정령 친화력이 0이나 다름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자신의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이때까지 살아오며 딱 한 번 보았을 정도로 희귀하면서도 멋진 생명의 아우라.

50%에 불과하다지만 진심을 드러낸 자신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을 불사를 기세를 보이며 맞부딪쳤을 정도로 기개 있는 성격.

유혹에도 넘어오지 않는 강직함에 지금은 비록 유약하지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밉상 같은 불돼지년과 바람새년의 계약자를 뛰어넘을듯한 자질까지.

가진 재주 또한 신기하기 짝이 없으니 더할 나위 없는 적합자인 거다. 정령 친화력이 0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떻게 하면 저 인간과 약식 계약을 맺을 수 있을까.’

인간들 사이에서는 정령 친화력보다 다른 점을 더 눈여겨본다는 걸 릴라이스도 알고 있다.

즉 저 인간과 약식 계약을 맺으면 그 불돼지년과 바람새년에게 ‘난 네년들의 계약자보다 더 뛰어난 인간을 약식 계약으로 부린다.’고 자랑까지 할 수 있다.

게다가 특이한 변종 정령까지 저 인간 곁에 붙어있으니…….

‘아이참.’

생각을 거듭하던 릴라이스는 방도가 보이지 않아 아쉬움에 짭, 입맛을 다셨다.

만약 저 인간이 약간의 정령 친화력만 갖추고 있었다면 키워서 잡아먹는 느낌으로다가 조금 양보해서 정식 계약을 제안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저 인간도 받아들였겠지. 초월급 정령과 계약한다는 것은 단숨에 이 세계에서 손꼽는 강자가 된다는 뜻이니까.

그 약간이 정령 친화 종족이라 불리기도 하는 플뢰족에서도 천만분의 1의 확률로 태어날까 말까 하는 수준이라는 건 제쳐두고.

하지만 정령 친화력이 0이나 다름없는 저 인간에게 정식 계약을 제안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것이나 다름없어 릴라이스의 고민이 깊어진다.

약식 계약은 저 인간이 죽어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 같고, 그렇다고 정식 계약을 제안하거나 머리 숙여 사과하는 것은 싫고.

‘정령의 과실을 먹이면 정령 친화력의 토대를 처음부터 새로 쌓을 수 있을 텐데…….’

그건 환령계의 심층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우주수의 뿌리, 거기에서 일천 년에 한 번 맺히는 황금의 과실이다.

맺혔는지도 알 수 없고 맺혔더라도 가져오는 것은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지난하기 짝이 없는 일.

그러한 난관을 뚫고 과실을 가져왔는데 시간이 지나서 저 인간이 덜컥 죽어있기라도 하면 그게 무슨 생고생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그걸 가져오는 건 저 인간이 자신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부탁을 받은 뒤의 일이다.

‘……아니, 잠깐이지만 본 저 인간의 성격이라면 절대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부탁하는 일은 없겠지.’

반대다. 머리를 숙이고 부탁하는 것으로 니오네브레스에서 손꼽히는 정령 친화력과 초월급 정령이 따라붙는다면 얼마든지 고개를 숙일 인간이 환인이다.

‘나는 정령 친화력이 없을 뿐이지 바보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릴라이스의 고민이 깊어져 간다.

〈으으으응~.〉

“…….”

환인은 뒤에서 선정적인 신음을 흘리며 따라오는 릴라이스에게 향하려는 신경을 애써 차단하며 저 너머에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미궁의 끝으로 시선을 주었다.

영혼 시야의 야간 투시 능력 덕분이지만, 여자친구들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듯하다.

눈에 힘을 줘 내부를 살핀다.

바닥에 쏟아져 널려있는 반쯤 타버리고 일그러진 피지皮紙들. 가재도구로 보이는 것들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거나 반쯤 탄 흔적을 드러내고 있고 마녀들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커다란 무쇠솥도 넘어져 있다.

다만 솥에서 흘러나온 것은 없다.

‘릴라이스가 물을 빨아내며 솥의 내용물도 같이 치운 건가.’

그리고 그사이에 구겨진 것처럼 처박혀있는 더럽기 짝이 없는 망토 뭉치 하나.

“멈춰라.”

자신의 신호에 멈춰선 이실리테와 안느 사이로 환인은 여섯 자루의 방벽 패널 단검을 소환, 망토 뭉치를 향해 투척한 뒤 재차 소환해서 투척을 반복, 총 40개의 단검을 망토 뭉치에 꽂아 넣었다.

퍼버버버벅- 퍼버버버벅—……

패널 단검이 박혀 사라질 때마다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지니 반사적으로 전투 자세를 취했던 이실리테와 안느가 멈칫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뭐, 뭐야? 저기에 뭐가 있어?=

=적인가요?=

“……흑마술사의 시체 같군. 주변에 영혼이 보이지 않아서 공격부터 해보았는데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시체가 맞겠지.”

=그래……?=

“가까이 가보지.”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으며 미궁의 끝, 흑마술사의 방 같은 곳에 도달한 일행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테니스 코트 정도 넓이의 방. 구석에는 여자 머리 아홉 개가 반쯤 부서진 선반 위에 고여있었고 그 아래에는 여자 시체를 꼬매 만든 듯한 늑대 머리의 괴물 시체 세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 널브러진 쥐 인간의 시체.

전부 사막의 뙤약볕 아래 한 달 정도 방치된 것처럼 새까맣게 미라화되어있어 참혹함이 덜하다. 멀쩡한 상태에서 보았다면 토악질이 나왔겠지.

=여자들은 인신 공양 당한 사람들인가…….=

=이게 흑마술사였나 보네요.=

=환인 님의 전격에 죽었나 봐요…….=

수십 번 패널 단검에 찔렸지만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시체와 대체 뭘 만들려 한 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늑대 머리의 팔 여섯, 다리 여섯의 시체를 살피며 으음, 신음을 흘리는 이실리테와 백려강.

그사이 안느는 내부를 살폈다.

마지막 방은 지대가 약간 높았는지 방의 2/3 높이 정도만 검게 그을려있었고 그 위쪽에 있던 물건은 상대적으로 멀쩡하다.

안느가 발견한 것은 1살 아기 정도는 충분히 담을 수 있을 법한 제법 큰 유리병이었다.

아홉 개의 유리병 속에 가득 찬 약간 연한 녹색의 액체. 그리고 그 가운데 둥둥 떠 있는 여자의 자궁.

핏물과 살점이 붙어있는 데다 몇 개는 심장처럼 약하게 맥동하고 있다.

=이건, 자궁인가…?=

“그래. 특수 처리를 했는지 전부 생기가 느껴지는군. 연성의 재료로 사용하려 한 거겠지.”

=…….=

환인은 잠깐 주위를 둘러보다 흑마술사의 시체 아래에 뭔가가 깔린 것을 발견하곤 시체를 걷어차 날려버린 뒤 그걸 확인했다.

사람 가죽으로 만든 듯한 책이다.

지팡이로 툭 쳐서 반대로 넘기자 책의 표지 중앙에 여자 성기의 겉을 도려내 붙인 듯한 것이 드러난다.

=…역겨워.=

=최악이에요…….=

=이게 흑마술사가 손에 넣은 그건가 보네. 책에서 불길한 기운이 적나라하게 느껴져. 함부로 손댔다간 저주받을지도 모르겠어.=

책 자체에 흐르는 마력, 그것도 검은 전기 같은 형태라 불길함이 배가 되는 책을 바라보던 환인은 평온의 파동을 전방 집중형으로 책을 향해 펼쳐보았다.

회백색의 파동이 바닥에 깔리듯이 퍼져나가는 와중에 책이 있는 장소에서 파직- 파지직— 검은 스파크가 힘없이 튀다가 사라진다.

“이제 어떻지.”

징표로 정화를 시도해보려던 안느가 멍청하게 서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책을 살폈다.

=……응. 불길한 기운이 다 사라졌어. 근데 평온의 파동에 정화 효과도 있었나?=

=주인님은 성제시니까. 부가 효과가 붙었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일 거야.=

=그건 그러네.=

책을 집어 든 환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안느에게 넘겨주었다.

=어? 도령 책 내용 안 봐?=

“책의 표지를 본다면 대충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지만, 지금 호기심을 채우기에는 좋지 못하단 생각이 드는군. 나중에 교단의 상위 성직자와 합석한 자리에서 보는 게 허락된다면 그때 확인하도록 하지.”

=응! 잘 생각했어. 흑마술서는 허가받고 교육받은 성직자가 아닌 이상 읽는 걸 추천하지 않으니까.=

환인의 결정이 제법 기뻤던 듯 안느는 밝은 표정으로 축성 받은 주머니를 꺼내 책을 집어넣고 축성 받은 끈으로 꽁꽁 묶어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걸 바라보던 백려강은 자궁을 담은 유리병 아홉 개를 조금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다 환인에게 물었다.

=저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번개로 태워버리는 게 좋겠지.”

딱히 저주의 매개체는 아닌 듯 불길한 마력은 흐르지 않고 있다. 아니, 불길한 마력이 흐르고 있긴 하지만 극히 미약한 수준이라 저주를 터트리기에는 훨씬 미흡하다고 할까.

정화 효과가 있다고 릴라이스가 장담한 번개로 태우는 게 가장 확실할 거다.

환인은 아직 강령 중인 번개 정령의 번개를 0.1%의 심핵력과 함께 일으켜 선반째로 지져버린다.

그러자 나무 선반이 확- 불타오르고 샛노란 번개에 유리병마저 녹고 액체는 자궁과 함께 삽시간에 증발해버렸다.

“백려강, 연기를 방 밖으로.”

=넵.=

백려강이 일으킨 바람에 증발하며 발생한 매캐한 연기가 줄지어 방 밖으로 향한다.

그러던 중 허공에서 갑자기 여자 영혼 아홉이 파파팍 소리를 내며 튀어나오는 모습에 환인은 천칭을 콱, 움켜쥐었다.

“…….”

잠깐 기다렸지만 악령이 되어 덮칠 기색은 없다.

천칭을 내린 환인은 기절한 것처럼 근처를 둥둥 떠다니는 회백색의 여자 영혼을 살폈다.

얼굴이 선반에 놓인 머리와 똑같다.

‘어째서 흑마술사가 공적으로 취급받는지 알겠군.’

사람의 육체를 이용하다 못해 영혼까지 연성에 사용한다.

여자의 자궁을 추출해 그 속에 씨앗을 심은 뒤 재료로 자궁의 주인인 여자의 혼을 활용하는 방식. 악마가 손뼉 치면서 브라보를 외칠만한 행위다.

이 사실은 영도에 알려지지 않았나 본데, 닌실 대성녀에게 전한다면 영도도 흑마술사를 공적으로 지정해 뒤쫓겠지.

여자들의 영혼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둥둥 떠다니다 바닥에 아직 고여있던 회백색 빛무리에 닿아 하나씩 빛가루를 뿌리며 사라져간다.

=주인님? 솥 안에 뭔가를 발견했는데 오셔서 봐주시겠어요?=

뭘 발견했나 싶어 이실리테에게 다가간 환인은 사람 한 명 정도는 가볍게 삶을 수 있을법한 무쇠솥을 들여다보곤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거 심핵 맞죠?=

“그래. 산란못 미궁에서 본 것보다 훨씬 작지만 심핵이다.”

산란못 미궁의 심핵은 사람 크기만 했고 황금빛 구체 또한 사람 머리만 했었다. 하지만 이건 주먹만 한데다 황금빛 구체도 엄지손톱 정도 크기밖에 안 된다.

이건 미궁의 등급 차이에서 오는 거라곤 해도, 수정 겉면에는 검은 금이 곳곳에 가 있었고 수정 내부의 황금빛 구체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미약한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명백하게 흑마술사의 손에 오염된 듯한 모습.

환인은 심핵을 잠시 바라보다 재차 평온의 파동을 펼쳤다. 이번에는 0.05%까지 줄인 심핵력을 주입해서.

그래서일까. 심핵의 겉면에 새겨져 있던 검은색 금이 삽시간에 연기가 되어 흩어지고 금도 수복, 황금빛 구체는 다시금 안정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심핵을 쥐자 조금 따스하면서도 아기의 심장박동 같은 두근거림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온다.

비슷한 감촉이라면 여자친구들의 가슴이 아닐까.

잠시 심핵을 만지작거리던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난 심핵을 부쉈으면 하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지.”

=응? 음. 아무래도 부수는 게 낫겠지. 심핵은 깨끗해졌다고 해도 미궁은 흑마술사의 손에 오염됐었잖아. 심장이 건강해졌어도 몸이 골병든 상태라면 회복은 힘드니까……. 회복된다 해도 이런 경험을 겪은 미궁이 어떤 식으로 재차 변이를 일으킬지 짐작도 안 가고.=

이실리테와 백려강도 안느의 알아듣기 쉬운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

약하게 맥박치는듯한 황금색 구체를 환인은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이걸 부순다고 또 현실로 전이 되는 일은 없겠지. 만약 전이 된다 해도…… 유르파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고 기다려줄 것이다.

환인은 이실리테와 안느가 슬그머니 다가와 빈손을 잡는 것을 보았다. 백려강도 무슨 일인가 했지만 눈치껏 환인의 팔에 손을 올린다.

그녀들의 따뜻한 손을 느끼며 환인은 수정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주었고, 심핵은 말 그대로 산산이 조각나며 방에 흩뿌려졌다.

…….

바닥에 흘러내리는 수정 가루를 바라보던 안느가 환인의 손을 놓으면서 머릴 긁적인다.

=이번에는 전이가 안 일어났네.=

=일어났으면 유리 언니가 조금 걱정될뻔했어.=

=……??=

=아. 려강이는 모르겠구나. 좀 있다 마을로 돌아가서 이야기해줄게.=

=네에.=

손바닥에 묻은 수정 가루를 털어낸 환인은 황금빛 구체가 스며든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뭔가, 심핵력의 용량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흑마술사의 방으로 사용되던 심핵의 방을 다시 훑어본 환인은 눈을 감고 있는 인신 공양 당한 여자들의 머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볼일은 끝났으니 나가지.”

=주인님, 시체는…….=

“미궁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질 것들이다. 여자들의 혼은 성불했으니 미궁 붕괴가 그녀들의 장례식이 되어주겠지.”

=흐음, 이걸로 흑마술사 건은 해결인가? 이걸 교단에 보고하면 이번 분기 의무는 면제되겠네.=

=자유 성직자의 의무인가요?=

=맞아. 슬슬 2년 차라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이야.=

=정령 기사가 됐잖아. 그런 쪽으로 혜택은 없어?=

=이중 직업 혜택을 받고 있었는데…… 희귀 직업 혜택도 있을지 모르겠네. 한번 알아봐야겠다.=

그렇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긴장과 경계를 늦추지 않는 여자친구들과 함께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궁을 나온 환인은…….

《빨리도 나오는군.》

〈……너 뭐야.〉

미궁을 나오자마자 도지는 두통에 이마를 감싸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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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당!!

3천자 정도 갈아엎고 다시 쓰느라 늦었어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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