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06화 (506/813)

〈 506화 〉 500 용의 계약자

* * *

비가 그치고 빛내림 현상이 알류겔 호수의 수평선, 좌우 평원과 끝이 없는 정글 위로 쏟아지니 멀찍이 물러났던 아지에라와 영도의 대행렬이 다시 다가왔다.

=성제 예하! 무사하셨군요! 늦어지시기에 걱정이 태산과도 같았습니다…!=

“일은 잘 해결되었습니다. 잠시 후에 과정이 어찌 되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친왕 전하와 먼저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 할듯해서.”

=예.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역사교육기관의 상급 기관원에게 양해를 구한 환인은 아드네빌라와 만난 그 잠깐 사이 10년은 족히 늙어버린 듯 어딘가 초췌해진 호천명에게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주야화와 이야기를 나누던 호천명이 그의 접근을 먼저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권을 한다.

=해왕과 계약을 맺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성제 예하.=

“감사합니다. 그보다 몸은 좀 어떠신지.”

=과연이라할지, 상급의 신수 격인 해왕의 위광은 역시 범상치 않더군요. 주도의 사도님을 기준으로 방비했다가 큰코다치고 말았습니다.=

쓰게 웃는 그의 손에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는지 피에 젖은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것으로 향한 것을 환인도 보았고, 거기에 대해 입을 열려는 찰나 호천명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성제 예하께서 용과의 계약에 대하여 약간,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신듯하여 그 점을 먼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예. 계약이 표면적인 부분 외에 다른 요소가 있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역시 모르고 계셨군. 하지만…… 자신과 일행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조건을 제시한 것은 의도적이었겠지.

준비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오지 않았었을 타이밍이었으니.

호천명은 담담한 태도의 환인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본디 성수, 신수와의 계약이란 두 가지 물이 한데 섞이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두 개의 컵이 있고, 사이에 하나의 통로가 생겨 하나로 섞이는 셈이지요. 이 때문에 신수와 계약하는 자는 본의든 아니든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계약자인 신수의 성장 방향, 잠재력 같은 것에 영향을 받는 겁니다.=

용의 계약자가 되었다는 것은 곧 정신적, 영적인 부분에서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해왕은 아니지만 다른 용과 인연이 맺어져 계약한 자가 평범한 투사에서 희귀 직업인 용투사로 재각성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

‘하지만 성제님은 유일 직업으로 각성하였으니 용술사가 될 가능성은 없겠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

희귀 직업이 일반 직업으로 재각성한 일은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유일 직업이 희귀 직업으로 재각성 하는 일도 없을 거다.

문제는 종속화 현상.

10ℓ 오렌지 주스와 1ℓ 생수가 있고 사이에 연결관이 이어진다면 당연히 1ℓ 생수 쪽의 변화가 극심하다.

힘이나 위상력의 급, 격의 차이가 그리 심하게 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 차이가 극심할 경우 미약한 쪽이 강대한 쪽으로 동화 현상이 발생하며 최악에는 종속화가 이루어져 계약자가 신수의 수호자, 혹은 병사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이 종속화 현상을 피하거나 막는 방법은 용량이 큰 쪽이 신경을 쓰는 수밖에 없다.

자신의 힘과 기운이 과도하게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조율하는 거다.

이야기를 듣던 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계약이란 동등한 자들 사이에서 거래를 위해 체결하거나 힘이 작은 자를 보호하는 조치 수단입니다. 그 때문에 안전장치를 마련해둔 것인데 다행히 도움이 되겠군요.”

=역시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걱정할 일은 없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하셔야 할 점이 있는데, 해왕 아드네빌라… 님은 현재 알려진 지상의 신수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분입니다. 그런 분과 계약을 하였으니 다른 신수님의 영역에 들어서더라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겠지만…….=

호전적이거나 영역 의식이 특출난 신수와 마주치게 된다면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알려주는 호천명.

그 점은 환인도 고려해두었지만, 호천명의 이야기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니오네브레스에 신수가 많은가 봅니다.”

=현재 위치가 기록된 신수님은 총 아홉 분, 심산유곡에 은거하며 자신을 연마 중이신 분을 생각하면 두 배, 세 배는 되지 않을까요.=

“조언 감사합니다. 제가 교섭에 별달리 도움이 되지도 못했는데 이토록 신경 써주시다니, 면목이 없군요.”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왕…님과의 회담은 그 결과가 정해져 있었던 듯하니까요.=

땅에 영역까지 전개해놓았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는 뜻이다.

마지막에 확정 사항을 통보하듯 말하고 자신들을 전이시켜버린 것만 보아도 확실하다. 그런 상황에 자신이 아무리 떠들어봤자 쇠귀에 경읽기나 다름 없었겠지.

해왕의 목적은 애초에 자신을 이용하여 환인 성제를 알소프까지 부르는 것이었던 거다.

‘게다가 호르손을 처벌하라고 재차 강조하였으니…….’

이 결과물을 가지고 갔다간 성궁에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바람이 불 것이다.

=…….=

호천명은 생각이 많아진 눈으로 해왕의 계약자이자 유일 직업자이기도 하며 영도의 대성자 격인 환인을 잠시 조용히 응시했다.

급속도로 생각이 많아진 호천명을 두고 환인은 필령궁 대성녀 직속 집행부의 아지에라 영혼 심문관과 톨락 영혼 심문관, 그리고 역사교육기관의 기관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한 묘사와 함께 차분히 전달해주었다.

40분가량 시간을 보냈다지만 그중 절반은 이동에 소비한 시간이다. 내용은 길지 않았기에 전달은 금방 끝이 났고 기관원들은 머리를 맞댄 채 고뇌에 휩싸였다.

=시간 괴리가 발생하는 영역은 상급 신수 격도 힘들지 않나?=

=알류겔 해의 해왕이시잖나. 그만한 영지를 지닌 신수이고 초광역 기상 조작의 술을 일주일 동안이나 유지할 정도이니 당연히…….=

=여기, 관조의 술을 애용한다는 부분은 어떻게 할까요?=

=…기록으로 남긴다면 해왕의 품격에 손상을 주었다며 진노하시지 않을지…….=

=하지만…… 역사교육기관의 심중기록처에는 오직 진실만 기록하게 되어있습니다. 고의누락은 신뢰성에 큰 흠을 내게 될 것입니다.=

솔직하게 적자니 해왕의 뒤끝이 두렵고, 그렇다고 적당한 각색과 누락을 하자니 영도의 역사를 자신의 손으로 끝내는 듯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환인은 끙끙거리는 기관원들을 구경하다가 자신이 해야할 일을 다 했다고 여겨 그들의 토론에서 빠져나왔다.

‘입수한 기술서는…… 목격자가 있으니 숨기는 건 불가능한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훗날 그 점을 질문받는다면 공개하길 원치 않는다고 적당히 말을 돌리면 된다. 그러면 아드네빌라가 말했다고 착각해서 넘어가겠지.

그게 아니라면 돌아가는 길에 영도에 잠시 들러 닌실과 샤스라에게만 이야기해주고 알아서 결정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녀들이 알려서는 안 되겠다 싶으면 자신이 보상으로 받은 기술서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고,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면 자료를 요청할 테니까.

교섭 지원의 보수인 그리모암의 양화, 정강이를 뒤덮는 형태의 정체불명 가죽으로 만든 부츠는 이미 받았고 그리모암의 모자 위치는 플라비우스 족의 국가인 히스론드에 있다 들었다.

어차피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니 히스론드로 향하는 길에 영도에 잠깐 들르면 된다.

마차에 도착해서 출입구 근처를 서성이는 비상을 쓰다듬어준 뒤 문을 열고 들어간 환인은 여자 친구들이 마차 중간에 빙 둘러앉은 것을 보게 되었다.

=율이 언니, 그럼 이게 시체가 아니란 거야?=

=응. 구분하자면 용이 만든 인공생명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은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멈추면 죽은 게 되어서 시체의 부패가 시작되잖니. 그런데 이 몸은 그런 부패 작용이 일어나지 않아. 위상력이랑 신통술…… 같은 걸로 현상 유지를 하는 거 같아.=

=주인님은 왜 이걸 받아오신 걸까요. 려강에게 주려고 받은 걸까요?=

「제, 제가요……?」

「이거 진짜 용의 뿔인가……. 뭐 그렇겠지. 보니까 밑에 구멍도 있겠다, 얼굴도 예쁘니까 려강이 들어가서 조종하면 려강에는 몸이 생기는 거고 환인한테는 새 여자가 생기는 거잖아. 서로 상호이익이네.」

먼저 아드네빌라의 인형을 가지고 마차로 돌아가 있으라 했더니, 지금까지 인형의 정체와 용도를 토론하고 있었나.

=주인님.=

=어, 도령 왔네. 어서 와.=

환인의 입장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다가온 이실리테에게 후드 망토와 코트를 벗어준 환인이 의자에 앉자 유르파가 냉큼 그의 발치에 붙어 무릎에 턱을 올리며 묻는다.

=자기, 저건 어떻게 할 거니?=

“유르파도 저걸 연구해보고 싶은 겁니까.”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일 거야. 저건 그야말로 초고도의 마도구, 모든 비술사와 연금술사들이 꿈에도 그리던 육체 생성의 결과물이니까.=

“친왕도 저걸 보더니 학자의 탐구심을 욕망처럼 내보이더군요. 하지만 연구 거리로 쓸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간 아드네빌라가 화나서 쫓아올 테니까요.”

유르파의 순백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 환인은 자신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보는 백려강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일단 저걸 받은 이유는 예상대로 너의 몸으로 쓰기 위해서다. 아드네빌라도 그럴 목적으로 저 인형을 만든 것으로 보였고.”

「하지만 저건 용인이잖아. 백려강은 조인이고. 그 빙의로 움직일 수 있어? 육체 구조가 다른 데가 많을 텐데.」

“빙의와 강령은 별반 차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백려강은 이미 몇 번 너희 몸을 움직여본 경험도 있지.”

진짜? 하고 안느와 유르파의 시선을 받은 백려강이 수줍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들이 기절하셨을 때 잠깐이지만요……. 그리고 날개를 집어넣으면 언니들과 외견에서는 별 차이 없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상관없지만…… 그런데 그 해왕님이 려강이한테 육체를 주려고 저걸 만들었다는 거 진짜야?=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아무래도 믿기 어려웠던 안느가 자그마한 의문을 내비치자 환인은 이부자리 위에 눕혀져 있는 인형으로 다가가 머릿결을 들어 올렸다.

“아드네빌라의 인간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용 상태의 갈기는 백색이었고 비늘도 백색에 청색이 약간 스며든 색이었다. 하지만 이 머리카락은 보다시피 뚜렷한 하늘색을 띠고 있지.”

=려강의 머리카락이랑 날개와 같은 색…….=

이실리테의 혼잣말에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도의 서고에서 읽은 것 중에는 변신에 관한 것도 있었다.

변신은 대체로 변신 전과 후의 일부 신체 특징이 일치된다고 되어있었는데, 그 말에 따르면 아드네빌라의 인간 형태는 비늘이나 갈기색처럼 백색 혹은 백청색이라야한다.

그러나 인형의 체모는 백려강과 흡사한 푸른색.

환인은 자신이 파악한 아드네빌라의 심리를 늘어놓았다.

“구독자, 애독자 중 일부는 작품 내에 자신의 그림자가 그려져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아드네빌라는 그러한 의식의 발로로 자신의 피와 살을 가지고 자신의 인간일 적의 형태와 흡사한 인형을 만들어서 건네준 거라고 보고 있다.”

=아…… 인형의 외모는 자기 인간일 적 모습이지만, 마음에 들어 하는 등장인물이 안에 들어가 움직이면 그것은 그 등장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외형만큼은 자신이니 자기 구현의 욕망도 충족하고 작품 내에 자신의 흔적 또한 남길 수 있고…….=

안느의 해석에 여자들의 살짝 놀란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느냐는 눈빛이다.

그 시선에 안느는 조금 뻘쭘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나 한때 로맨스 소설 엄청나게 읽었잖아. 주인공이랑 여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건 아니면서 조언자 역할을 하는 조연. 그걸 상상하면서 자기위로를 한 적이 많아서 이해가 돼.=

=아. 그래서 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랑 주인님이랑 엮으려고 들었었던 거구나.=

속내를 드러낸 게 부끄러웠는지 안느는 옆에 앉은 이실리테의 허리를 끌어안고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그 신체접촉에 살짝 한숨을 쉰 이실리테는 이번만큼은 봐주고 자신의 배에 올린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환인은 그녀들을 조금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백려강을 불러 인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한 번 빙의해볼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인도 해볼겸.”

「네. 유리 언니, 로브 벗는 것 좀 도와주세요.」

=응.=

로브를 벗어 알몸이 된 백려강은 그대로 용인 여자의 육신에 다가가 끌어안듯이 그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갠다.

자신의 영혼술 보조도 없이 빙의를 시도하는 걸 가만히 주시하던 환인은 정말로 인형의 몸 안으로 백려강의 영혼이 스며들어 가는 장면에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저게 가능하다면 살아있는 여자의 몸도 차지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기존에 육체를 차지하고 있던 영혼과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싸워서 쫓아내면 죽음으로 간주하고 영혼이 되어버리는 건가.

만약 그 싸움에서 진다면? 싸우기 위한 에너지는?

=와, 진짜 들어가네.=

=강령할 때랑 좀 다르지 않니?=

=그건 영혼술로 펼친 강령이고 저건 영혼이 직접 들어가는 빙의잖아.=

「집중하게 좀 조용히 해.」

환연의 핀잔에 여자들이 입을 꾹 다물고 20초 정도. 천천히 용인의 인형으로 스며들어 간 백려강의 영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였다. 환인의 영혼 시야에 인형의 자궁과 심장에 영기가 차츰 차오르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영기라기에 불완전한 것이었다.

원래 육신이란 음과 양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 인형의 심장과 자궁에는 한기만이 가득하다.

=……들어간 지 1분 정도 지나지 않았어? 왜 숨을 안 쉬지?=

안느의 우려를 들은 환인은 손을 뻗어 명치 부근에 올려보았다. 예상대로 심장이 제대로 안 뛰고 있다.

그럼 할 행동은 하나뿐. 환인은 훈기만 끌어와 용인의 육신에 조금씩 흘려 넣기 시작했다.

=어머. 백옥 같은 피부라고 생각했는데 원래 피부색이 아니었나 보네.=

=피가 안 돌고 있었던 건가?=

그녀들의 말대로 환인이 훈기를 심장에 흘려 넣기 시작하자 창백하다 할 수 있던 피부에 점차 혈색이 돌며 살아있는 사람 특유의 느낌이 전해져오기 시작한다.

심장도 콩닥거리며 제법 강하게 뛰는게 손바닥을 통해 전달된다.

하지만 불규칙하게 뛰는 것이 불안하다. 이러다 심장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느낌.

환인은 주먹을 쥐고 적당한 힘으로 가슴을 퍽, 때렸다.

누워있음에도 그 형태가 봉긋한 젖무덤이 충격에 한차례 출렁하고 흔들린 직후, 쿨럭! 콜록콜록, 기침과 함께 물을 조금 토해내며 인형이 눈을 떴다.

=콜록, 아윽……. 쿨럭, 케흑….=

=려강 아가씨, 괜찮니?=

=쿨럭… 끄르륵…….=

대답을 못 하고 괴로워하는 얼굴로 고개를 작게 도리도리 젓는 모습에 유르파가 그녀의 몸을 안아 일으키고 등을 두드려주니 켈록콜록, 계속해서 물을 토해낸다.

=어, 어떡하니? 폐에 물이 들어찼나 봐!=

본체로 나타난 아드네빌라와 대화하는 사이 코와 입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 폐를 채운 거겠지.

숨을 쉬기 어려운지 혈색이 돌던 안색이 순식간에 납빛으로 변해가는 것을 본 환인은 물을 토해낼 기력이 부족하다는 걸 눈치채고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려 원기 방출로 원기를 채워주었다.

그러자 물을 토해내는 힘이 조금 강해졌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한 상황.

환인은 유르파와 교대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유르파, 큰 수건을 가져다주십시오. 이실리테는 대접을 가져와라. 안느는 만약을 대비해 치유를 준비하고.”

=아, 응!=

=네. 주인님.=

=어어.=

그렇게 지시를 내린 환인은 망설임 없이 백려강이 들어간 용인의 육체에 입을 맞추고 숨을 강하게 후웁­ 불어넣었다.

=끄웁…! 오에엑!=

환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왈칵, 물이 흘러넘치듯 용인의 코와 입으로 물이 주르륵 쏟아진다.

시큼한 냄새라던가 불쾌한 냄새는 하나도 없는, 맑고 청량한 물 냄새다.

‘애초에 먹은 것도 뭣도 없고 신체 활동을 한 번도 안 한 새 몸이니.’

인공호흡 하듯 백려강의 폐 속에 숨을 불어넣고 가슴과 배를 꾹꾹 눌러 물을 토해내게 하길 몇 차례 반복하자 2ℓ 정도를 토해낸 백려강은 그제야 새액새액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채 반쯤 죽어가는 목소리로 쥐어짜듯 이야기한다.

=두, 두 번째로 죽는… 줄…… 켈록! 알았…어요. 헤으으…….=

=응. 두 번 안 죽어서 다행이네.=

유르파가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에 묻은 눈물이며 토해낸 물을 닦아주며 웃으니 백려강이 실낱같은 가녀리고 청아한 목소리로 고마움을 전했다.

=환인… 니임. 고마…워요…….=

“몸은 어떻지.”

=너무… 무거……워요……. 머리도… 무겁고…….=

여자들의 시선이 그녀의 머리로 향했다.

대략 30cm 정도로 자라난 우아하고 아름다운 사슴뿔 한 쌍. 저 정도면 무게가 2kg은 가볍게 넘지 않을까.

“멀쩡히 살아있던 몸이 아니어서 그런 것도 있을 거다. 영체의 거부반응은 없는지 옆에서 계속 지켜볼 테니 일단 좀 자둬라. 잠은 잘 수 있겠나.”

그녀를 이불 위에 눕혀준 환인은 못 자겠다고 하면 유르파에게 수면의 술을 부탁하려 했지만, 백려강은 작게 =네….= 대답하고는 눈을 감았다.

=려강 아가씨? 옆으로 돌아누워서 자렴. 자다가 숨이 막힐 수도 있으니까.=

=네…에….=

백려강, 아드네빌라가 만든 몸에 들어간 백려강은 자면서도 가끔 켈록거리며 기침해 물을 조금씩 토해냈다.

그것도 1시간이 지났을 때는 멈추었고 그때부터는 느릿하게 숨을 쉬며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기력을 회복하려면 무언가를 먹어야 할 것 같았기에 중간에는 이실리테가 위장에 부담이 없도록 조미료와 향신료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죽을 끓여와 먹였고, 안느가 영양 드링크라고 이름 붙인 특제 채소+과즙 주스도 마셨다.

덕분에 점심때까지 푹 자고 일어난 백려강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듯, 감격한 얼굴로 몸을 매만지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제가 다시 숨을 쉬고 있어요. 몸의 무게도 느껴지고, 심장이 뛰는 것도, 피가 도는 것도 느껴져요…….=

=려강아, 몸 얻은 거 축하해. 우와, 가슴 감촉 뭐지? 크기는 내꺼랑 비슷한데 엄청나게 쫀득거려!=

=축하해요, 려강.=

=가, 감사합니다…….=

「흥. 이제 몸이 생겼으니까 환인이랑 밤일도 정식으로 할 수 있겠네.」

여자들의 장난과 축하와 부러움 섞인 질투에 백려강은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러워했고 환인과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이미 그와 볼 짓 할 짓 다 한 사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순진하고 청순한 모습이다.

환인은 담담한 얼굴로 백려강이 차지한 용인의 육체 이곳저곳을 만져보다 말했다.

“네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게 확인되었고 네 영혼과 육신의 동화율도 높은듯하니 이건 이제부터 네 몸으로 쓰면 되겠군.”

=가, 감사합니다, 환인 님…!=

=근데 이 몸의 얼굴이 려강이랑 되게 비슷하지 않아? 아깐 이런 얼굴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안느가 백려강의 머리카락을 땋아 영혼일 적과 머리 모양을 흡사하게 만들어주며 말하자 이실리테와 유르파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눈코입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른데 전체로 보니까 굉장히 닮은 느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건가 모르겠네.=

백려강의 영혼이 들어간 육신은 놀랍게도 외모가 살아생전과 비슷한 부분이 많게 느껴졌다.

그 점을 느끼고 용인의 얼굴을 살피는 여자 친구들에게 환인이 제 생각을 전했다.

“분위기 때문이겠지. 이 얼굴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특색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분위기에 따라 얼굴 외형이 다르게 느껴지는 거다.”

사람은 눈매만 변해도 인상이 확 변한다고 한다. 그런데 백려강이 몸에 들어가 생전처럼 표정을 만들고 몸을 다루니 백려강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그 이야기에 기쁜 듯이 뺨을 감싸 쥐고 부끄러워하는 백려강에게 환인이 주의를 주었다.

“백려강, 기억해둬라. 너는 되살아난 게 아니다. 이 육체는 해왕이 만든 인형이고, 너는 이 육체에 빙의한 거다. 이걸 잊는다면 그 육체가 파손되었을 때 자칫 소멸할 수도 있다.”

환인의 경고에 백려강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넷!=

“그러면 이번에는 그 몸에서 나오는 것을 연습해볼까.”

=네!=

인형의 관리는 별것 없다고 아드네빌라가 말했었다.

숨이 멎고 혈액의 흐름이 멈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만든 뒤 원격으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그랬던 것일 뿐.

그릇에 영혼을 빙의시키면 그때부터 심장이 뛰고 숨을 쉬게 될 것이며, 영혼이 육체를 떠나더라도 한 번 뛰기 시작한 심장과 숨결은 멈추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위상력을 신체에 채워놓거나 모아두면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가더라도 제법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거라 했다. 즉 미음과 물을 계속 먹여주면 신체 에너지, 열량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는 육신이 죽지 않고 계속 유지될 거라는 이야기지.”

백려강이 용인의 인형을 의자에 앉혀놓고 그 몸에 들어갔다 빠져나왔다 하는 걸 보면서 이야기해주자 그의 여자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 그럼 저 몸은 사람이랑 똑같이 먹고 자고 하는 건가요?=

“그래.”

=도령, 저 몸은 얼마나 강해? 용의 피륙으로 만들어졌으니까 보통이 아닐 거 같은데.=

“그 점은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용이 직접 만든 육체인 만큼 전투의 포텐셜은 절대 낮지 않겠지.”

=하긴. 려강이도 생전 직업자였으니 저 육체에 적응한다면 술법도 쓸 수 있겠네.=

=그럴 거야. 려강 아가씨도 4급 녹술사였고 지금만 봐도 몸에 위상력이 막 넘쳐흐르는 느낌이니까.=

=신체 능력은 어느 정도려나?=

=팔다리가 너무 가녀린 걸 보면 힘이 셀 거 같진 않은데. 안느 네가 보기엔 어때?=

=사람이라면 그럴 텐데 저 몸은 평범하지 않아서 모르겠어. 나중에 한번 시험해봐야겠다.=

용인은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종족이다. 그럼에도 강인하기 그지없다고 알려졌는데 저 몸은 무려 용이 직접 만든 것.

엄청나게 강하지 않을까?

‘그랬다면 좋겠다.’

이전에 트라프로넨 영성과 대련하면서 느낀 거지만, 이제 슬슬 새로운 대련 상대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이실리테와 안느는 생각 중이었다.

맨날 같은 사람이랑 대련했더니 영감의 자극이 점차 감퇴하는 느낌이었던 것.

이실리테와 안느는 저 육체가 강인하길 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백려강이 용인의 육체에 적응해가는 것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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