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5화 〉 499 알소프의 재앙, 아드네빌라
* * *
차가운데다 짜증까지 스며들어있는 환인의 일갈이 호천명의 고막에 닿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혼돈이 펼쳐졌다.
중급 도시의 보호 방벽을 단숨에 무력화해서 수십만 시민이 도망칠 틈도 없이 몰살시킨 명백한 초월급 신수, 왕의 호칭까지 붙은 알류겔의 주인에게 호통이라니.
무수한 생각과 상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수십 가지가 떠오른다.
분노한 해왕이 상선, 여객선, 운송선 가리지 않고 모조리 침몰시켜 해역을 파괴하는 미래.
격노한 해왕이 알류겔 인근 도시와 마을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하는 미래.
진노한 해왕이 대홍수를 일으키고 비를 퍼트려 라드세아 중부를 물바다로 만들어버리는 미래.
해왕에게 자신과 일행이 살해당하는 미래.
고작 초 단위의 시간에 막대한 사고의 발생은 곧 쇼트를 일으켰고, 호천명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체감상 10분 같은 1초가 지났을 때.
《시끄럽다니! 감히 이몸에게 시끄럽다 짜증을 내는 것인가!》
해왕의 역정이 터져 나온 순간, 호천명은 간신히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있었다.
화를 내고 있긴 하지만 이것은 막역지우들 사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분노다. 용의 기운이 섞여 심장이 욱신거리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라면 오히려 성제 쪽.
이때까지 그를 지켜본 근 한 달, 단 한 번도 부정적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무표정에 무감정이며 자신의 영혼 기사 여인들에게만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는 남자.
거기에 가능성을 지레짐작한 야화가 정말로 귀찮게 했을 때도 무표정으로 담담히 대응했지, 짜증을 낸 적이 없었는데…….
“…수천 년에서 수만 년을 살아가는 용이면서 고작 10분도 못 기다려 재촉에 채근에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겁니까. 용이라는 신성이 아깝습니다.”
지금은 진심으로 화가 났는지 목소리에 은은한 분노가 느껴진다.
《이몸의 분노는 나름 합당한 것이거늘! 감히 이몸에게 일갈을 하다니!》
“그 분노를 어째서 제가 받아야 합니까. 아드네빌라, 당신의 분노가 정녕 저에게만 쏟아져야 할 만큼 그 이유가 합당한 겁니까.”
《네가 저놈과 같이 왔다는 것은 이몸의 호출에 응했다는 증거가 아니한가! 그러면 너에게도 책임이 일정량 있는 것이 이치인 거다!》
저 발언이 인간 사이에서 나왔다면 호천명은 부정했을 거다. 하지만 저 말을 용이 했다 하니 그 나름대로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는지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설마 용과 치고받고 싸우려는 건가? 신통력의 근본이자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용과?
호천명의 심장이 불안으로 점차 크게 뛰기 시작할 때(용의 기운에 짓눌린 탓도 있다), 환인은 정말 오랜만에 가슴 속에서 불이 지펴지는 것을 느꼈다.
분노가 꾹꾹 눌러 담긴 단정한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한숨에 호천명의 긴장이 몇 배나 치솟는다.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저를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솔직이라 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사실인데!》
“정말 저를 주도와 당신의 교섭 중개인이 되길 원해서 불렀다는 겁니까.”
《그렇다!》
=…….=
자신의 지위에서는 이런 생각은 해서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호천명은 자신이 왜 여기에 있을까 진지하게 후회했다.
해왕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위광이 창처럼 다가와 몸과 마음을 찌르는 느낌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통력을 일으켜 막지 않으면 피를 토하며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야말로 늑대와 사자의 싸움에 병아리가 끼어든 꼴이었으니.
그렇게 호천명이 후회를 거듭하고 있을 때 골치 때문에 이마에 손을 올렸던 환인은 무거운 눈으로 아드네빌라를 보며 위협했다.
“제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야 솔직히 대답하실 겁니까.”
찔리는 것이 있을까. 어깨를 살짝 움찔하는 그 동작에 선녀 옷처럼 하늘거리는 순백색의 한푸가 작게 흔들린다.
그 사소한 움직임에 호천명이 그제야 해왕의 인간 모습을 눈에 담았다.
물색이 스며든 듯한 가려하고 아름다운 머릿결. 그 위로 수사슴의 뿔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웅장하고 기개가 넘치는 황금색 뿔이 나 있다.
귀는 순백색 인우족처럼 신성스러운 하얀색의 귀가 나 있고 얼굴은…… 볼 때마다 바뀌어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려 보이다가도 성숙해 보이고 요염하다가도 청순해 보인다. 강인해 보이다가도 여려 보이며 우아하다가도 경망스러워 보인다.
그 천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급을 초월한 이들 특유의 정신 오염 현상이 끼쳐오는 것을 깨달은 호천명은 황급히 눈을 감고 청심경을 외웠다.
《무엇을 까발린다는 것인지 모르겠구먼.》
아드네빌라의 능청에 환인의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분노를 담고 쏟아지기 시작한다.
“당신 정도의 신수가 고작 한 번 만난 저를 중개인으로 지목하고, 그 때문에 주도의 친왕 전하가 절 찾아온 것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습니다.”
《…무슨.》
“제 이름을 묻지도 않고 보낸 것에서 그럴 기미를 느꼈지만, 과대망상이라 치부했는데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제게 마커 같은 것을 붙여놓았군요.”
《…….》
“저를 지목해서 부른 이유, 제가 영산 알노르의 주인이신 신수 기린을 만났기 때문입니까.”
《……!》
“맞군요. 사건을 일으킨 직접적인 관계자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집요하게 저에게 염사를 보낸 것은, 상대에게 부담되지 않을 만큼 염사의 위력 조절이 가능함에도 그러지 아니하고 저에게만 염사를 마구 보낸 것은 화풀이겠지요. 제게 당신이 아닌 다른 신수의 흔적이 덧씌워지는 게 짜증 나서.”
청심경, 마음을 가라앉히고 외도비의外???의 간섭을 막아주는 신통술을 외우며 용과 인간의 말다툼을 조마조마하게 듣던 호천명은 반사적으로 뜨려던 눈을 필사적으로 감고 귀도 뒤로 접은 뒤 두 손으로 꾹 누른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라는 필사적인 의지의 표현.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환인의 지적에 해왕의 위광이 더더욱 강렬해진데다 위압까지 더해져 공기의 밀도와 중력이 몇 배나 늘어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약 눈을 뜬다면 라드세아는 신수 격의 해왕을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필사적으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호천명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감정을 억눌렀다.
관음 당한 게 짜증은 나지만, 이게 목숨 걸고 신수 격의 해왕과 싸울 일인가하면 그것은 아니다.
애초에 니오네브레스에서는 힘이 곧 정의고 지위, 신분이 법이다.
지구의 오대양 중 하나만큼이나 넓은 알류겔 호수의 주인이자 해왕이라 불리는 용인 아드네빌라는 현재 이곳에서 절대적인 존재.
감정을 다스려 평소의 담담한 태도로 돌아온 환인이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묻고 스스로 답했다.
“왜 그랬을까요. 그건 인간사와 거리를 두고 살면서도 나름 인간사에 해박한 당신의 존재가 그 대답입니다.”
《…….》
“때때로 당신을 찾은 인간들, 혹은 당신의 영지를 지나는 인간들 몇몇에게 지금처럼 흔적을 묻혀두고 지켜봐 왔기 때문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처음 아드네빌라와 마주쳤을 때 환인은 위광과 존재감과 자신을 감화시키려는 특유의 현상에 저항하면서도 의아함을 느꼈었다.
그건 신수 기린인 닌실=아나그와 마주하고 있을 때도 느꼈었다.
사람을 제법 잘 아는 비인간족 특유의 화술과 태도. 닌실은 인간들과 수백 년간 부대꼈으니 그렇다 해도 수백 년을 호수 속에 은둔하고 있던 아드네빌라는 어떻게 잘 알고 있었을까.
환인의 이야기에 아드네빌라는 언제 감정을 드러냈냐는 듯이 초자연적인 존재 특유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발산하며 느긋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마치 좋아하던 배우와 마주할 기회를 얻은 재벌처럼 말이다.
《관찰과 주시의 권능이 없으면서 그에 맞먹는 직관을 가진 인간. 타 차원의 생물. 그러면서 세상에 불협화음과 조화를 동시에 불러오는 존재. 천정과 신님의 주시를 받는 자. 그게 너라는 인간이다.》
“…….”
《그야 관심이 생기다 못해 넘칠 법도 하지. 세상의 특이점이란 특이점은 모조리 때려 넣고 빚은 듯한 인물이 바로 너란 존재이니까.》
느긋하게 말한 아드네빌라는 물만으로 형성되어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나긋나긋한 몸짓으로 사뿐거리며 환인에게 다가섰다.
선녀 옷처럼 온통 하늘거리며 몸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드러나는 옷은 그녀의 불가사의한 외모와 어우러져 천계의 여자 신선이 강림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너에게 이몸의 기운을 묻혀 그대를 관찰하였다. 비록 한 달이 조금 넘는 몹시 짧은 시간이었으나 네 삶이 주는 흥미와 재미는 이때껏 보아온 어느 인간들과도 비교를 불허하였지.》
“고상한 취미입니다, 아드네빌라.”
《후후후.》
비꼬는 말이었지만 아드네빌라는 하얀 팔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백의 시 스루 원단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웃을 뿐이다.
이윽고 그의 주변을 사뿐사뿐 걸어 다니며 흥흥거리기 시작했다.
《널 관찰하는 시간은 몹시 재미있었다. 네 힘, 네 능력, 네 주변의 인간관계와 너에게 찾아드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의 예감.》
그러더니 분이 치미는 것처럼 작은 주먹을 꼭 쥐고 부르르 떨다가 환인의 옷자락을 쥐고 흔들거나 가슴, 어깨, 등과 허리를 검지로 쿡쿡 찌른다.
《그런데 알노르의 그 망할 사슴이 너에게 엉기며 나의 기운을 씻겨내는 것이 아니겠나. 거기다…… 뭐냐, 이 흔적은. 아주 자기 것인양 치덕치덕 발라놓은 꼴이라니.》
“…….”
자기 관조에 영혼 시야, 강화 영혼 시야를 펼쳐도 보고 위상류로 몸 상태 전체를 가늠해봐도 무엇이 발라져 있다는 건지 환인은 알 수 없었다.
탁탁, 흙먼지를 털어주는 것처럼 환인의 몸 이곳저곳을 때리면서 아드네빌라가 노 기 섞인 투로 입을 열었다.
《이 때문에 주시의 권능이 끊어졌다.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서책을 발견하여서 밤낮으로 탐독 중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작가가 집필을 중단해버린 셈이다. 애독하던 입장에서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느냐. 분노의 5,700장 서신을 작성하여도 사정을 안다면 이해해줄지언정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관음에 취미가 있는 몰상식한 변태용이라고 인정하면 그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받아주겠습니다.”
책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과 사람에게 감시 드론을 붙여놓고 구경한 것이 같을 수가 있나.
뇌가 청순해 비꼬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건가 싶어 환인은 대놓고 비아냥거렸지만, 아드네빌라는 마찬가지로 흣, 실소만 흘렸다.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몸에게 화내기에는 너도 체면이 서지 않겠지. 지금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미지의 불편함이 가슴을 채우고 있을 터이니.》
“그 말대로입니다. 지금 제힘으로는 또 기운을 묻혔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법이 없냐고 한다면 아니지요.”
《흑흑. 맞다. 네가 떠난 뒤 이몸에 대한 불신과 악의로 그 사슴을 다시 찾아 해주와 정화를 부탁해버리면 이몸만 손해일지니.》
그러더니 환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키로 풍만한 유방을 그의 배에 꾹 누르고는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 백려강을 모두 합친 듯한 새초롬한 미소를 짓는다.
옷감이 얇기 때문인지 살결의 보드라움이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가운데 유혹적인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간지럽혔다.
《어떤가. 이 몸은 취향일듯한 요소를 전부 모아 구성해본 것이다. 네가 잠자리에서 희망하는 것은 전부 가능하다. 너만 손을 뻗으면 이 육신은 너의 것이 되는 거다. 군침이 돌지 않나.》
옷을 입고 있어도 방금 접촉으로 알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저런 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아득한 확률이 필요할 거다.
우월한 유전자는 당연히 타고 나야 하며 저 나이가 될 때까지 피를 토할 정도의 꾸준한 자기 관리를 해야 할 테지.
이 기회를 놓친다면 이런 몸은 두 번 다시 안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환인에게는 1푼의 값어치도 없는 제안이었다.
“이제 보니 꽃뱀의 자질도 있으셨군요.”
《……풋. 아하하하하!》
박장대소. 아드네빌라는 배를 움켜잡고 그야말로 허파가 뒤집힐 만큼 웃어댔다. 그 소리에 호천명이 슬그머니 눈을 뜨려다가 다시 꾹 닫을 정도로.
환인의 가슴을 탁탁 때리며 눈물이 찔끔 흐를 만큼 웃던 아드네빌라는 별안간 실 끊어진 인형처럼 철퍼덕, 제자리에 쓰러졌다.
마악 익사한 시체처럼 얼굴이 물에 잠겼음에도 미동조차 없다.
환인은 눈썹을 모았다가 그녀를 똑바로 눕혀 눈꺼풀을 열어 동공 반사를 확인해보고 목덜미에 손을 대 맥박도 확인해보았다.
죽은 사람처럼 반응이 없다.
‘……숨도 쉬지 않는군.’
보통 사람이면 무언가 사달이 난 건가 해서 식은땀을 흘렸겠지만, 환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하늘로 시선을 주었다.
하늘의 먹구름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마치 눈꺼풀이 열리듯 회색 먹구름의 일부가 좌우로 갈라지며 그 너머로 티없이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백청룡이 하늘의 바다에서 천천히 하강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위광의 짓누르는 압박감이 좀 전 인간 형태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해지고, 동시에 강한 현기증이 찾아왔다.
반강제로 상대에게 감화되는듯한 불쾌하기 짝이 없는 감각.
투 아웃.
환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천칭을 꺼내 흑옥 다섯, 현재 동시 운용 가능한 최대의 숫자를 꺼내 영혼 화살을 장전한 뒤 문양 에너지까지 1/10을 밀어 넣는다.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기운이 천칭의 기다란 지팡이에 맺히니 통째로 시꺼먼 기운에 물들어 웅웅 떨리기 시작한다.
음습한 살기에 가까운 검은 기류가 천칭에서 새어 나오듯 일렁이자 위광에 짓눌려 죽을 듯이 헐떡이던 호천명도 입가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이를 악물고 품에서 수십 종의 부적을 뿌려 자신과 환인을 보호하는 막을 펼쳤다.
기겁한 듯한 아드네빌라의 중성적인 목소리가 쏟아져 내린 것은 그때였다.
《뭐, 뭐 하는 것이냐! 그 흉물스러운 물건을 당장 집어넣지 못할까!》
“그…러는 당신은 뭘 하는 겁니까. 저를 강제로 감화하려 한다면, 이 자리에서 죽을 각오로 싸울 겁니다.”
《……!》
한순간 놀란 듯한 기의 파동이 퍼져나가더니 공간을 짓누르던 위광이 대폭 감소하고 자신이 아니게 될 것만 같던 불가사의한 감화력 또한 사라졌다.
그리고 조금 언짢아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식한 인간 같으니. 그분의 뒤를 따르는 용으로써 위엄 좀 보였다고 사생결단을 내려 해? 에잉, 쯧.》
“위엄이라면 기운과 기세가 아닌 평소 행실로 보여야 하는 법 아닙니까. 사람은 재미로 돌팔매질을 한 거겠지만, 그 돌팔매의 표적이 된 개구리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환인이 피로하고 짜증 나고 화내는 기색으로 지적하자 아드네빌라는 끄응, 속으로 혀를 차다가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인간의 허약함을 잠시 잊었군. 실수를 사과하지.》
“…….”
어물쩍 사과하는 느낌으로 넘어갈 거라 생각했던 환인은 눈을 감고 한차례 심기를 추슬렀다.
환인이 상대의 잘못을 실수라며 받아주는 기준은 하나다.
상대가 고의로 그랬는가.
방금 행위에 자신을 해치거나 몰아붙일 의도는 없었다. 애어른처럼 자신 앞에서 무게 좀 잡아보려다 삐끗했을 뿐.
호천명이 쳐놓은 부적막 덕분인가. 어느 정도 머릿속도 진정되었기에 환인은 아드네빌라였던 ‘것’을 내려놓고 영혼 화살을 장전해놓은 천칭도, 흑옥과 문양 에너지도 회수하며 저 백청룡의 의도를 읽고 이득 손해를 가늠해보았다.
“…….”
신의 이름으로 약속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겠지. 다른 생물들보다 신에게 가까운데다 그 신을 섬기는 신수, 하찮은 인간이 신을 언급한 순간 진노할지도 모른다.
신수로서의 격과 정체성을 놓고 약속하라 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약속에는 조건을 설정해 이쪽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고 단순히 관음만 할 수 있도록 제약을 넣고.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담담히 물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인형 놀이를 그만두고 본신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알고 있으면서 묻는 것이냐.》
“신수가 그 입으로 꺼낸 말과 제가 동의를 구하기 위해 꺼낸 말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계속 이렇게 말장난을 하시겠다면 교섭 중개인은 관두고 떠나겠습니다.”
이제는 수백 미터 거리까지 다가온 아드네빌라를 향해 예의도 체면도 집어치우고 묻자 용과 인간 사이에 침묵이 들어찬다.
호천명의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갈 때 쯤 져준 것은 아드네빌라였다.
《실수 한 번의 대가가 쓰라리군. 이몸이 원하는 것은 그대와 계약을 맺는 것이다.》
“관찰과 주시의 권능이 어떤 경우에도 해제되지 않도록 말입니까.”
《그러하다. 그러기 위한 계약을 받아들여 준다면, 그 인형은 너에게 주지.》
역시.
시체처럼 물에 둥둥 떠 있는 인형人?을 잠시 내려다보던 환인이 고개를 들어 인형에 대하여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 질문에 아드네빌라는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물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 그리고 물신님께서는 그러한 물을 관장하는 분이시다. 그분의 자취를 쫓는 이몸이 육신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혼을 관장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며 권리이자 권한이지만, 육신을 창조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거군요.”
《그러하다. 그 육신의 기본 토대는 이몸이며 피륙 또한 이몸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일지니, 삿된 행동과도 거리가 멀지.》
=……!=
그 순간 호천명의 눈이 화등잔만 해지더니 아드네빌라의 인형으로 향했다. 그 눈에 숨길 수 없는 학자적인 욕망이 묻어난다.
“그것만 본다면 당신이 얻을 이득에 비해 제가 얻는 것이 그다지 없는 것 같습니다만.”
《흠……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군. 그러면 이것도 주지.》
그 순간 환인의 앞에 자그마한 술법진이 그려지더니 아주 얇은 가죽 책 한 권이 툭 떨어졌다.
호천명의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을 느끼며 단단함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책을 넘겨본 환인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책을 덮고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좋습니다. 단, 몇 가지 안전장치를 위한 조항을 추가해주신다면 당신과 계약하겠습니다.”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너, 환인과 노르스리넨, 이실리테, 안실라, 유르파, 환연, 백려강, 그리고 너의 피가 섞인 아이들에게는 의도적인 피해를 주지 않겠다. 단, 너와 네 핏줄이 세상과 이몸에게 해악이 되는 짓을 저질렀을 때에는 제외한다.》
“…….”
환인은 알아서 깔끔하게 조항을 채워주는 아드네빌라보다 그가 말한 한 가지 항목에 더 신경이 쓰였다.
나의 피가 섞인 아이‘들’이라니. 이 세상에 자신의 자식이 태어났다는 건가.
‘이때까지 안은 여자들만 수백 명이다. 그중 몇 명은 우연히 10점 과녁에 맞았을 수도 있겠지.’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굳이 아이들에 관한 제약의 철회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상은 왜 포함했을까. 짧게 생각하던 환인은 의미 없다고 여기며 입을 열었다.
“인간의 보편적이고 통념적인 윤리관에 의거하여 명백히 잘못이라 지적되는 수준의 죄가 아닌 한, 저와 제 여자 그리고 제 일행에게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쌍방의 협의 하에 계약을 해제할 수 있을 것도 약조해주십시오.”
《좋다. 너도 약조해라. 이몸과 척을 져야할 일이 생긴다면 최소 세 번은 이몸과 독대하여 대화한 뒤 사견 없는 오롯이 너의 판단만으로 결정을 내린 다음 실행하겠다고.》
“좋습니다. 기간은 당신과 저 어느 한쪽이 자연사할 때까지이며 계약을 파기하는 자는 신의 저주를 받는 것으로.”
《동의하지.》
백청룡의 거대한 머리가 살짝 끄덕여진 순간이었다.
『물신 aminnRaa 』님의 이름 아래 계약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한다.』
머리가 아닌 영혼에 새겨지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환인은 물의 청명함이 영혼을 한차례 휩쓸고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자신이 보고 겪고 느끼는 것을 전부 아드네빌라도 보게 되는 건가.
한국에서 살며 수많은 CCTV와 블랙박스, 감시카메라에 관찰당하는 삶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 환인은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도 아닌 용의 유희에 잠깐 어울려주는 것으로 미궁의 심핵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담은 책자, 그리고 용의 피로 만들어진 빈 육체를 얻었다.
이득이라면 이득이라 할 수 있겠지.
《자, 이제 떠나라. 세상을 떠돌며 이몸에게 즐거움을 선사해다오.》
만족한 아드네빌라의 선언에 호천명이 크게 당황하며 손을 들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해왕이시여, 저는……!=
《아, 네놈도 있었군. 나는 이 땅을 떠날 생각은 없다. 비는 멈추었으니 구름은 이제 흘러가야 할 곳으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이몸을 감히 토벌하려 한 그 망나니의 일족은 틀림없이 단죄하여야 할 것인즉, 그리하지 않는다면 맹세에 따라 주도 라수비탄은 이몸의 공격을 받아야 할지니.》
=자, 잠시만 기다려주……=
노골적으로 관심 없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일방적으로 말을 끝낸 아드네빌라가 꼬리를 한차례 휘저은 순간.
위이잉—
환인과 비상, 호천명과 그의 회색 쿠에, 그리고 아드네빌라의 인형이 환인의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언덕으로 전이되었다.
=…십시오! …헉? 이런!=
=주인님!=
=…어?! 도령! 으왓, 이 여자는 뭐야?=
「시체 같아요. 누구의 시체일까요?」
=어, 어머? 이 뿔 좀 보렴. 이거 혹시 그거 아니니?=
여자들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환인을 발견하곤 놀라서 달려들어 그의 몸을 살피거나, 그와 함께 나타난 물에 젖은 여자 시체를 살핀다.
환인은 자신에게 상처나 이상은 없는지 조사하는 그녀들의 손을 잡거나 품에 안아주면서 비가 그쳐가는 구 알소프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둠 속에 홀로 고고히 떠서 빛나는 아드네빌라가 보인다.
갈라져 가는 먹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내리쬐며 어둠을 물리치기 시작하는 광경에 환인은 잠깐 굳었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침이라고?’
분명 호천명과 자신은 밤이 찾아왔을 때 성벽을 넘었었다. 거기서 40분 정도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아침이라니.
환인은 백청룡이 구 알소프의 중심에 난 거대한 싱크홀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여자친구들에게 물었다.
“내가 떠난 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대충 13시간 정도? 왜?=
유르파의 대답에 환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안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제야 걱정을 모두 내려놓고 안도하며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를 경청하는 여자들.
=나는 대체 왜…… 그 고생은…….=
호천명은 그런 그녀들의 뒤에서 실의에 잠긴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