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7화 〉 461 대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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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는 이엘카타를 따라 고풍스럽지만 생활감이 느껴지는 목조 복도를 걸어가던 환인은 어느 순간 주변의 색감이 차가운 느낌에서 따스한 느낌으로 바뀐 것을 눈치챘다.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고요하지만 따스한 빛이 포근하게 물들이고 있는 복도.
“…….”
걸어온 복도를 뒤돌아보았지만, 봄날의 햇살처럼 포근한 분위기에 잠겨있는 복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
=??=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자신을 따라 뒤돌아보곤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에 자신만 이 사실을 눈치챘다는 걸 깨달았다.
=도령, 왜?=
“…아니다.”
다시 몸을 돌려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엘카타를 향해 걷는다.
자신의 위상류에 반응하는 것은 없다. 역쇄류 또한 잠잠하다. 품 안에서 자는 환연도 무언가 낌새를 느꼈다면 신호를 보내왔을 테니 문제가 될 것은 없겠지.
다만 조금 기분이 미묘해졌다.
싫은 것은 아니고 나쁜 기분도 아니지만, 왠지 거슬리는 느낌.
‘어머니의 품…… 인가.’
어머니가 포옹해주실 때면 이런 몽실몽실한 느낌이 들었었다. 여자친구들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어도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기분이 되었고.
이 분위기 또한 그런 느낌이다.
거슬리는 이유는 아무런 감정의 교류 없이 대뜸 이런 기분이 들기 때문이겠지.
수수하면서도 고상함이 느껴지는 복도를 주의하며 뒤따르고 있으니 좌우로 갈림길이 나 T자 모양인 복도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이엘카타가 돌아섰다.
[이곳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품에서 조금 반질반질한 카드를 꺼내 보여준 이엘카타는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하고 조용히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자들이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린다.
=플뢰 종족 표준 체구라서 그런지 동방 전통 복식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아가씨네.=
=나도 저런 체구였으면 예쁜 옷을 많이 입을 수 있었을 텐데.=
=으응? 안느 아가씨는 아가씨만의 매력이 마구마구 흘러넘치는데?=
「저는 안느가 더 좋아요. 다른 플뢰 분들은 너무 가녀리셔서 보고 있으면 조금 불안한 느낌인데 안느는 기운이 날 정도로 건강하니까요.」
=……그거 칭찬 맞지?=
환인도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지만, 이곳에서 지내는 것을 알았으니 대화할 기회는 다음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지금은 대성녀에게 집중할 때.
환인은 잠깐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월이 깃들어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고풍스러운 목조 복도. 그리고 자신들의 앞에 나란히 붙어있는 두 장의 장지문.
그의 시선이 장지문으로 향했다.
일반 장지문의 3배는 될법한 크기에 골조를 이루는 나무 재질도 범상치 않을뿐더러, 동서남북과 정중앙에는 각각 생물이 하나씩 그려져 있는데…….
=저 그림… 신님들 아니야…?=
=안느… 이 문 너머에… 대성녀님이 계신거 같으니까… 조용히….=
청룡과 붉은 새, 하얀 늑대와 녹색 거북이를 선으로 이었을 때 교차하는 중앙에는 황금색의 빛무리가 그려져 기이한 압박감을 뿜어낸다.
살아있는 듯한 기백과 생동감이 느껴질 정도.
“…….”
영혼 시야를 열어봤지만, 그저 그림이고 장지문일 뿐인데 이런 존재감이라니.
시작부터 분위기에 억눌려서는 곤란하다. 숨을 들이마신 환인이 단단한 어조로 말하려는 순간.
[들어오시게.]
두꺼워서 건너편이 비치지 않는 장지문 너머로 조금 기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 목소리지만 조금 어린듯하면서도 연륜이 묻어나는 음색. 귀와 머릿속을 동시에 자극하는 듯한 감각.
“……들어가겠습니다.”
두 장의 장지문을 좌우로 밀자 황금색 빛무리의 그림이 세로로 나누어지며 장지문이 벽 속으로 사라진다.
열린 문 너머로 환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방 한가운데,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자라난 작은 소나무 한 그루였다.
그리고 녹색 소나무를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
몇 겹의 천을 덧대 만든 듯한 격식 높은 금색 로브 차림의 여자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방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십자 모양의 방 형태와 방 곳곳을 정갈하게 꾸미고 있는 조그마한 전통 가구들.
30평 정도로 넓은 방이지만 집기가 거의 없어 휑하다. 휑하지만 그런 여백의 미가 또 다른 멋으로 다가온다.
3m 정도로 비교적 높은 천장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에 대성녀로 추정되는 여자의 등으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아우라가 없어?’
일곱 영성 중 한 명으로서 대성녀로 추앙받는 여자다. 아우라가 없을리가…… 아니, 그런 거였나.
복도가 포근해보였던 것은 내부에 빛이 스며들어와 복도를 부드럽고 포근한 색감으로 물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게 저 여자, 대성녀 닌실=아나그의 아우라였다.
‘벽을 뚫고 수십 미터를 뒤덮는 아우라라니.’
규격 외.
그런 단어를 떠올리며 환인은 닌실=아나그와 적당히 떨어진 곳, 바닥 무늬가 마치 이곳에 서 있으라는 표식 같은 곳으로 걸어간다.
가면서도 그의 눈은 여자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허리까지 가지런히 내려온 머리카락은 금색이지만, 평범한 금발이 아니라 금에서 광채만 뺀 듯한 은은하면서도 부드러운 색이다.
어깨너비와 앉은키를 보자면 키는 140cm가량. 체구가 가녀리다기보단 어리다는 쪽이 더 어울린다.
머리 위로는 짐승 귀가 안 보이…….
‘…뿔?’
거리가 조금 가까워지자 정수리 너머로 비늘에 뒤덮인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위치와 각도라면 이마 윗부분에 난 뿔인데.
여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자리, 표식이 있는 곳에 멈춰선 환인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환인입니다.”
스으윽.
환인의 인사에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바닥에 손을 짚고 부드럽게 몸을 돌리는 여자.
드러나는 얼굴에 환인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희미하게 미소를 띤 얼굴의 피부, 눈썹, 속눈썹, 눈동자까지 전부 머리카락 색처럼 희미한 금색이다.
그 때문에 하얀 피부와 경계가 옅어서 이목구비가 흐릿한 느낌이며 더욱이 시선 또한 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동공의 움직임이 없어 기묘하다.
양쪽 볼 일부를 머리카락 색과 같은 작은 비늘이 살짝 뒤덮고 있고 이마와 머리카락 경계선에는 황금색 비늘로 뒤덮인 뿔이 자라나 있다.
‘기린인가.’
대성녀의 종족은 목이 긴 동물을 가리키는 기린이 아니라 상상 속의 동물인 기린??, 그중 암컷인 린?이 아닐까 환인은 추측했다.
여자가 두 손을 앞으로 짚으며 절을 올리는 것처럼 허리를 크게 숙였다.
《이쪽의 억지 초대에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소. 소녀가 영도의 수장, 닌실 아나그요.》
대성녀의 목소리가 호수의 해왕 아드네빌라처럼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온다.
육성도 귀에 닿아 같은 말이 두 번, 동시에 전달되는 느낌.
뒤에서 여자친구들이 흠칫 어깨를 떠는 걸 느끼며 환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뒤쪽은 제 여자들이자 저의 기사들인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백려강입니다.”
《…….》
자신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이목구비만큼이나 흐릿한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에 환인은 미묘한 거슬림을 느꼈다.
속내가 저 눈 앞에 모두 드러나는 듯한 불가사의한 감각.
환인이 철저하게 속내와 생각을 감추는 사이 여자친구들에게서 꼴깍, 작게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2초 정도 시선의 교환 끝에 대성녀가 조금 더 짙어진 미소로 말했다.
《손님을 초대하여놓고 방석조차 내어주지 못하는 빈궁함을 이해해주시기 바라오. 그러니 부디 편히 앉기를.》
애초에 대성녀 본인도 황토방 같은 맨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있다.
집기라고 해봤자 이부자리를 수납한 듯한 궤와 옷 몇 벌이 들어가 있을듯한 수납장, 작은 책장과 앉은뱅이책상이 전부인 방.
방석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환인은 말대로 편히 자리에 앉았지만, 그의 여자들은 왠지 기가 눌리는 느낌에 대성녀처럼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환인이 들어온 뒤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옅은 미소를 띤 표정 그대로의 대성녀. 그 시선에 무표정으로 대응하는 환인.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은 대성녀가 입을 여는 것으로 깨어졌다.
《환인 성자. 그대는 참으로 혼돈이라는 설명이 걸맞은 분이시군.》
“사람은 본디 혼돈에서 태어나는 생물입니다.”
스윽 눈을 감은 대성녀는 어쩐지 웃음이 깃든 것처럼 환인의 대답을 받았다.
《그 주제로 오늘 만남을 토론으로 보내고 싶지만…… 성자께서는 원치 않으실듯하오.》
“긴 시간을 할애해드릴 수는 없으나 잠깐이라면 어울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보잘것없던 저를 영도로 불러들이신 이유부터 듣고 싶군요.”
《으음…? 아지에라에게 그 이유를 들었다 이야기 들었소만.》
“…2년 전에 나온 예언 말입니까.”
《며칠 전 예지가 추가로도 나왔소. 내용은 별것 없었지. 2년 전의 예언 속 인물이 성자이시다는 확답이었으니 말이오. 출처는 성자께서도 아실 것이오.》
“이엘카타입니까.”
대답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대성녀.
환인은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과 쇠사슬이 자신을 붙잡고 얽매기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바닥없는 늪에 잠기는 느낌. 이대로 있으면 영도에 묶이게 될 것 같다는 예감.
드러나지 않게 속으로 코웃음을 친 환인은 대성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대성녀님께서 보시기에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흘로드의 정시 연락을 받았을 때 소녀는 의아함을 금치 못함과 동시에 납득하는 모순적인 감정을 느꼈소. 그리고 지금, 아지에라와 흘로드가 느꼈을 곤혹스러움이 이해되어 그들에게 측은함이 느껴지는군.》
대성녀의 미약한 웃음기 섞인 이야기에 환인은 무표정으로 응대한다.
“아지에라 님은 제가 새벽의 빛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계시더군요.”
《상급 이상의 영혼사라면 누구든 성자님을 뵌 순간 납득하고 말 것이오. 집회의에서 신중론을 펼치던 이들도 그대를 본다면 마음이 돌아서겠지.》
“그저 빛이 절 뒤덮고 있기 때문입니까. 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것만 보고 저를 새벽의 빛이라 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기록에는 ‘시선을 뗄 수 없는 빛에 휘감긴 그는 뭍 사람과 뭍 영혼이 이끌림을 느껴 자발적으로 따르는 인물.’이었다 적혀있었소.》
그러더니 눈을 감은 채로 후후후 웃는다.
《냉혈, 냉철, 냉정의 삼박자를 철이 든 이후 한 시도 떼어놓지 않던 아지에라마저 사랑을 알게 된 처녀처럼 그대를 따르니, 소녀가 삼라만상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나 성자가 새벽의 빛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소.》
“…….”
그래서 대성녀가 눈을 감은 건가.
환인은 혹시 여자친구들이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을 따르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떠올리는 동시에 지워버렸다.
자신이 지금 대성녀가 말하는 새벽의 빛이 된 것은 린덴 촌락에서 그 기묘한 현상을 체험한 이후의 일이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대성녀처럼, 능력에 이끌린 여자는 아지에라와 그녀의 영혼 기사 다섯 명이겠지.
환인의 눈빛이 깊어질 무렵 대성녀는 눈을 감은 채로 조금 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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