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6화 〉 460 영도 에쉬누르
* * *
대성녀 닌실=아나그의 면담을 앞두고 일행은 유르파가 지구, 한국의 옷본을 참고해서 만든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영도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사람과 만나는데 격식 없이 평상시 여행할 때 입는 반 전투복과 갑옷 차림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먼저 거실에 나와 있던 백려강과 안느가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람을 기다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안느. 그 복식이 땅신 교단의 성투사 기본 예식복인가요?」
=응. 예의를 차려야 할 자리에 교단의 품위를 위해서 반드시 입어야하는 옷이야. 따로 옷에 신경 안 써서 편해.=
「하지만…… 안느는 키가 크고 은색 머리카락이 예뻐서 잘 어울리는 드레스가 많을 거 같은데. 아쉬워요.」
=으~. 드레스는 진짜 아니야. 나 좀 봐. 키만 멀대 같이 커서 어울리는 것도 없을걸? 그리고 대성녀님을 뵈러 가는 거잖아. 드레스 복장은 아니야. 응.=
「그런가요?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몇몇 드레스는 안느한테도 반드시 어울릴 테니까, 만약 드레스를 입으실 일이 있으면 꾸미는 건 제게 맡겨주세요. 반드시 환인 님도 돌아볼 정도로 예쁘게 꾸며드릴 테니까요!」
=어, 어어. 그땐 부탁할게…?=
안느는 의욕 넘치는 백려강의 묘한 기백에 은색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눈을 끔뻑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울하고 기운 없어 보였는데, 밤에 도령이 따로 기운을 북돋아 준 건가? 그보다.
‘역시 웃는 게 가장 보기 좋아.’
일행이 된 뒤로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 같은 모습을 종종 보이던 백려강이었다.
그런 강박증은 대체로 안 좋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안느와 이실리테, 유르파는 그녀의 강박증을 풀어주려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본질적으로 육체가 없는 영혼 상태여서인지 평범한 격려와 응원은 잘 먹히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들의 노력도 있고 백려강도 워낙 착해서 조언해주고 격려하면 웃는 얼굴로 잠깐은 기분이 풀렸었는데…….
어제는 그런 강박증이 악화되어 우울증이 되려는 낌새가 보여 걱정했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이유를 눈치챈 안느가 흐흐 웃으며 그녀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와락, 끌어안으며 물었다.
「꺅! 아, 안느?」
=려강이 기분 좋아 보이네? 혹시 도령이 포옥 안아주기라도 한 거야?=
「…….」
=……어, 진짜?=
「야, 야한 건 아니었어요! 그… 새벽부터 동이 틀 때까지 그냥, 품에 꼭 안아주셔서……. 같이 해돋이를…….」
아, 그런 거였어?
안느는 잠깐 상상해봤다.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거실, 한쪽 벽을 차지하는 커다란 창문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쬐며 그의 품에 안겨 따스함과 포근함을 느낀다.
어둠이 천천히 물러가고 새카만 하늘이 떠오르는 태양의 찬란한 빛에 정화되는 여명의 순간을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서 함께…….
=와…… 좋다 그거…….=
안느가 발그레해진 뺨을 감싸며 헬렐레하니 백려강도 응응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긍정을 표시했다.
역시 안느라면 알아줄 거 같았다. 일부러 털털하게 행동하지만, 누구보다 상냥하고 감수성이 높은 그녀였으니까.
그때 한쪽 문 열리며 옷을 다 갈아입은 이실리테와 유르파가 걸어 나왔고, 두 여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두 분 다 너무 예뻐요!」
=우와. 진짜 도령도 한눈에 반할 정돈데?=
유르파는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백색 앞트임 로브에 옅은 회색의 어깨 숄을 걸쳐 거유를 가리고 있었다.
숄도, 로브도 백색 계통 원단에 은실로 열녀초??라 불리는 수수한 꽃무늬가 놓여있어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잘 보면 은은한 기품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복장이다.
그런 그녀에 비하면 이실리테는 약간의 활달함과 약간의 노출을 곁들인 매력적인 복장으로 남심을 단숨에 휘어잡는 모습이었다.
커다란 가슴이 천박하게 보이지 않게끔 가슴을 단정하게 가리고 모으는 검은색 볼륨 레이스 블라우스.
하얗고 뽀얀 허벅지를 중간부터 드러내면서 하복부가 딱 붙는, 단정한 백색의 버튼 디바이드 스커트.
검은색 가죽의 무릎 부츠에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는 호박색의 더블 라인 리본 벨트.
여기에 귀엽게 땋아 올린 화사한 호박색 머리카락이 약간 캐주얼한 활동성을 부여하며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매력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마지막으로 아름답게 흩어지는 아우라의 빛 입자가 그녀의 미모를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모습.
루크랑 남자라면 열 명 중 열 명 전부 뒤돌아볼 정도다.
=와 근데 이슬이는 너무 예쁜데? 패턴만 봤을 때는 그냥 옷이 이쁘구나 싶었는데 이슬이가 입으니까 완전히 옷이랑 몸이 서로를 꾸며줘서 매력이 배가 되는 느낌이야.=
「와앙, 이런 치마바지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분은 처음 봐요!」
=그치그치? 나도 만들면서 이걸 이슬이 아가씨가 입으면 진짜 예쁘겠다고 생각했거든!=
자신의 작품을 칭찬하는 두 사람에게 붙어 이실리테의 주변을 돌면서 짧은 치맛자락을 들춰보거나 어깨의 살짝 부푼 부분을 만져보거나 하며 칭찬을 쏟아내는 여자들.
=노, 놀리지말고…….=
졸지에 구경거리가 된 이실리테가 얼굴을 붉히며 미약하게 저항해보지만.
=놀리다니! 우린 지금 진실을 말하는 거라고! 안 그래?=
「맞아요!」
=그럼그럼. 그런데 이 벨트를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소드벨트랑 비슷한데 가늘어서 귀엽길래 만들어봤는데, 이슬이 아가씨랑 되게 잘 어울리지?=
=응응. 소드 브레이커 같은 거 걸어두면 딱 맞을 거 같아.=
=으으…….=
그게 오히려 더 귀여워 칭찬을 멈추지 않는 그녀들이다.
=주, 주인님. 주인님은 어디 계셔?=
칭찬이 어색해 견디지 못하고 주제를 돌리려는 이실리테.
의도가 훤히 보였지만 이 이상 장난치면 매서운 손바닥이 날아올 거라는 걸 경험으로 아는 안느는 웃으면서 정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고딕 양식과 스팀펑크 풍의 가상 세계관 속 남자 주인공이 입을 법한 복장의 환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팬더 머리의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 입던 조끼 정장 차림의 법술사 복장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한듯한 검은색 트렌디 코트에 흑색 정장.
이전에는 전투를 상정해 가죽으로 보강한 정장이었다면, 이쪽은 예식을 위해 가죽의 양을 줄이고 고급 원단을 더 많이 써서 품위를 높인 쪽이다.
그쪽으로 걸어가자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해서 이 아이들을 후원하려 합니다만, 어떤 방식이 있을까요.”
=성자님께서 아이들을 후원하신다면…… 그 아이들에게는 두 가지 미래가 주어집니다. 하나는 아드지의 기숙사가 딸린 상급 교육 기관에서 머물며 교육을 수료한 뒤 도시의 행정 쪽으로 취업하는 것. 다른 하나는 영도에서 숙식하며 영혼사가 되기 위한 수행을 시작하는 거지요. 마침 나이도 알맞고 둘 다 영특하니 수행에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영혼사가 되지 못하면 도시나 마을의 묘지기가 되는 겁니까.”
=그런 장래도 있고, 당사자가 원한다면 영도에 남아 저같이 영혼사님들을 보조하는 전문인이 되는 길도 있습니다.=
“우브 님도 영혼사 지망이셨군요.”
=하하하. 옛날 일이…죠……?=
웃으며 답하던 우브는 저쪽에서 다가오는 여성진의 모습에 할 말을 잊고 멍하니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느낌의 세련된 복식의 절세 가인들.
네 명의 여자가 모여있으면 그중에서도 미추가 나뉘는 법인데, 저 아가씨들은 한 명 한 명이 미의 여신처럼 아름다우면서 서로의 미모를 해치지 않고 어울려 더 아름다워지는 느낌.
우브는 속으로 환인을 무척이나 부러워하며 말했다.
=여러분들 복식이 참으로…… 단정하면서 세련되었군요. 유명한 직인의 작품인가 봅니다.=
환인도 그녀들을 돌아보았다가 그의 감탄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21세기 한국의 세련미에 니오네브레스 대륙 라드세아의 양식미를 첨가한 복식들. 이 세상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양식일 테지.
“유르파의 솜씨입니다.”
=헛! 이런, 실례했습니다.=
그 능력에 걸맞게 강한 이형종도 많이 잡고 추정 5~6급의 미궁도 돌파하며 많은 돈을 벌어들이신 분이라고 들었다.
중간에 대도시도 몇 군데나 들르셨으니 그곳에서 고가의 의류를 맞추신 건가 했는데 설마 동행하는 영혼 기사님께서 직접 제작하신 작품이었다니.
=…….=
우브의 사과에 유르파는 단정한 미소로 화답해주었고, 환인은 조금 신경 쓰인다는 투로 물었다.
“그보다. 우브 님께서 그런 반응을 보이시니 이대로 가도 괜찮을지 우려가 듭니다.”
방탕하거나 사치를 즐기는 모습으로 비치면 어떡하나 싶은 이야기에 우브가 겸연쩍어하며 손사래를 친다.
=아, 아아! 아닙니다. 고족이나 호족의 성불행을 대가로 고가의 금품 같은 향응을 받아 사치를 부리면 주의 차원에서 경고가 내려지지만, 환인 성자님의 경우에는 오히려 시장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시는 것이니까요.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능력에 걸맞은 소비를 사치라고 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직접 만든 옷이라니.
‘허어. 환인 성자님은 참으로…… 영혼사로서도, 남자로서도 축복받은 분이시군.’
여성 진의 애정 가득한 시선이 환인에게 향하는 걸 보며 다시금 속으로 부러워하던 우브는 웃음으로 그러한 감정을 감추면서 입을 열었다.
=준비가 끝나셨다면 필령궁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 아르, 아라.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놀면서 기다려라. 담장을 넘어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된다.”
=네, 성자님.=
=네에….=
각자 쿠에를 타고 우브를 뒤따라간 환인 일행은 탁상지 쪽이 아니라 산에 난 거대한 반 공동으로 움직였다.
입을 벌린 것처럼 드러난 공간 곳곳에 굵고 거대한 석주??가 세워져 거리감을 소재로 하나의 실물 병풍를 형성한다.
그 엄숙한 풍경에 여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어디에서 봐도 석주 병풍처럼 보여……. 산이 무너지지 않게끔 일부러 세운 거 같은데 이 풍경을 의도한 걸까?=
=천장의 형태를 보면 자연스럽게 생긴 대공동이잖아. 저렇게 인공적으로 생긴 석주가 자연스럽게 생겨날 리는 없으니까, 사람이 세웠을 거 같은데.=
「영도가 만들어질 때 프라우드 종족분들이 힘을 많이 썼다고 책에서 봤어요.」
=오. 그 아저씨들이라면 저런 걸 만들고도 남지.=
프라우드 종족…… 헬루멘에서 천상의 장막을 판매한 그 종족인가.
석주 병풍을 둘러보던 환인은 그 형태가 묘하게 한 방향으로 시선을 모으는 느낌을 받았다.
그쪽에 대성녀가 기거한다는 필령궁??이 나올 듯한 느낌.
=으~응. 탁상지도 어지간히 생기기 어려운 지형인데 거기에 산맥이 붙어있고, 이만한 대공동까지 산속에 있을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이곳 외에는 없지 않을까요?=
지름이 30m는 되는 석주 곁을 지나가며 속닥거리던 여자들은 맞은편에서 수행자로 보이는 일곱 명이 조용히 걸어오는 모습에 입을 딱 다문다.
환인 일행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곁을 지나가는 진회색 로브의 수행자들.
그녀들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그들이 모두 지나간 뒤에 후우, 긴장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영혼사도 아니고 수행자일 뿐인데도 느껴지는 진지함.
=왠지 긴장돼….=
이실리테의 혼잣말에 안느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다가 점차 멀어지고 있는 수행자들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분위기가 엄숙해서 더 그런 거 같아. 그보다 방금 지나간 수행자분들, 어린 쪽은 아르하고 아라 정도로 나이가 어린 것 같던데…… 뭔가 대단하네.=
저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수행을 시작하다니. 그들이 겪을 고통이 잘 상상되지 않는 안느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브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가 조용히 웃으며 설명해준다.
=수행은 어린 나이에 시작할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살업이 쌓일수록 각성에서 멀어지며 그것은 저 아래쪽 평범한 환경일수록 살업의 누적이 심해진다. 그렇기에 이곳, 영도로 와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
「각성의 순간에 선 빛의 강에서 그때까지 해친 생명의 원한을 전부 받아야 한다고 들었어요. 그 때문인가요?=
=예. 그 때문에 해발 852m의 영도에서 수행과 덕을 쌓는 것이지요.=
850m 해발이면 어지간한 곤충은 살 수 없는 환경이다.
바닥은 딱딱한 암석이라 개미 같은 곤충이 돌아다니지 않으며 저택이나 작은 공원을 제외하면 식물도 몇 없다.
식사는 매일 위상력 승강기가 아닌 도르래 승강기로 음식이 반입되는데 수행자에게는 과일과 채소밖에 제공되지 않는다.
아직 어려 충동과 자제력이 약하고 주의력이 산만한 어린 수행자들이 실수로 곤충 같은 작은 생명을 해치지 않게 하는 환경.
그뿐만 아니라 금욕적인 생활도 강요받는다.
수행자는 깨끗하고 정갈한 마음을 위해 사욕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영혼사가 된 이후에는 식단에 제한이 사라지지만, 그전에는 고기 같은 것은 금물.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것도 금물. 번잡하고 사람이 많은 곳도 금물.
금지하는 것 천지인 금욕 생활을 이처럼 삭막한 곳에서 길면 30년이나 해야 한다.
=그런 고행 끝에 영혼사가 되어서 세상을 위해 성불행을 다니는 거구나…….=
=그래서 존경받는 게 아닐까?=
어찌 보면 자기희생뿐인 인생이니까.
“…….”
환인은 우브의 설명을 들으며 말을 아꼈다.
자신은 금욕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영혼사로 각성한 것은 녹색 호브가 쥐고 있던 그 불가사의한 지팡이 덕분이라 해도, 빛의 강에서 닿은 것은 자신이 죽인 생명뿐.
스물여섯이 되도록 먹어왔던 고기는 그 빛의 강에서 하나도 보지 못했고, 무엇보다…….
‘식물도 하나의 생명일 텐데.’
살업을 쌓지 않기 위해 채식을 한다는 건 환인이 보기엔 우스꽝스러운 궤변일 뿐이다. 식물도 엄연한 생물이니까.
하지만 종교 도시에 가까운 장소에서 그들의 생활과 믿음을 부정한다는 건 싸우자는 것과 다름없는 일.
그렇게 먼지나 돌가루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깨끗한 길을 걸어 영도의 가장 안쪽에 도달한 환인은 잠시 눈앞의 건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전 영도의 고위직 중에 일본이나 중국 출신의 영혼사라도 있었나.’
여러 군데에서 어레인지된 부분이 보이지만, 그들의 문화와 양식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하고 탄성을 흘릴 건축물이 그의 앞에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역대 대성자, 대성녀님께서 기거하시는 신사, 필령궁입니다.=
20명 정도는 가볍게 수용할 수 있을법한 백색과 회색의 목조 건축물은 일본의 신사와 중국의 절에서 따온 점이 많이 보였다.
일행이 쿠에의 등에서 내리자 필령궁의 부속 건물에서 나온 회백색 민무늬 로브의 여자가 소리 없이 다가와 공손히 쿠에들의 고삐를 건네받는다.
뀨으?
“잠시 볼일 보고 올 테니 그분을 따라가서 기다려라.”
큣.
이 여자는 뭔데 자길 끌고 가려는 건가 해서 안 가려고 버티는 비상을 보내놓고, 스으으 작게 숨을 들이마신 환인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우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니오네브레스 기행의 분수령이 되겠지.’
대성녀라는 여자와 얼마나 돈독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여행이 편해질지 성가셔질지 결정된다.
저쪽은 자신에 대해 잘 아는 듯한데 이쪽은 저쪽을 모르니 긴장이 절로 일어나는 기분.
백중강도 대성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땅신 교단의 르아웬을 통해서 정보를 입수해 보려 해도 그저 훌륭한 사람이라는 답변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라니.’
그런 건 사기꾼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환인이다. 자신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이런 세계에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신에 가까운 존재일 텐데…….
우브와 함께 문이 없는 신사 입구로 들어가자 마루 같은 것이 나타났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시면 됩니다.=
=우브 씨는 같이 안 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롱부츠라서 벗는 데 시간이 걸리던 안느의 질문에 우브는 씩 웃으면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예. 저는 이제부터 다른 임무로 영도를 떠나야 해서 말입니다.=
“이곳까지 안내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츠를 벗고 마루로 올라간 환인의 이야기에 우브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한다.
=아닙니다. 성자님을 모시는 것은 제게도 영광이었습니다. 마루로 올라가셔서 왼쪽으로 난 길을 쭉 따라가시면 그곳에 안내해주실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잘 가. 다음에 또 봐.=
안느의 가벼운 인사와 이실리테, 유르파, 백려강의 목례에 우브도 허허 웃으며 작게나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신사를 나간다.
“…….”
우브와 작별하고 마루로 올라선 환인은 그가 말한 대로 움직이며 신사 내부를 조용히 살폈다.
겉모습만 신사와 닮았을 뿐, 안쪽은 평범한 문지방이 여럿 붙어있는 대궐 느낌이다.
다만 한국 대궐은 방과 중정이 붙어있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면 신발을 새로 신어야 하지만, 이곳은 툇마루 느낌의 바닥이 정갈하게 이어져 있는 게 다르다고 할까.
그렇다고 일본식 고전 저택 느낌이냐면 또 아닌 게, 문은 창호지로 만든 살문이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보인 방의 바닥도 다다미방이 있는가 하면 온돌방도 있고…….
온갖 아시아 문화권의 양식이 뒤섞인 근본 없는 구조에 환인은 조금이지만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후, 웃었다.
여자친구들이 잔뜩 긴장해서 집에 처음 온 새끼 고양이들처럼 구는 것도 긴장이 풀리는데 한몫한다.
그렇게 우브가 말한 곳, 네 갈래 길이 나뉜 공간에 들어선 환인은 뜻밖의 인물이 한복과 회색 무녀복을 섞은 차림으로 정갈하게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엘카타 님!」
환인과 마찬가지로 순간 멍하니 있던 백려강이 환한 얼굴로 소리쳤지만, 앞으로 나가지는 않고 그저 반가운 표정만 짓는다.
그런 그녀에게 살포시 미소로 화답하는 이엘카타.
“오랜만입니다, 이엘카타.”
뜻밖의 일로 인한 미약한 당황을 금방 수습한 환인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그의 뒤에 서 있던 여자들도 각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하며 그녀들은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로서 본능적으로 그녀가 환인과 깊은 사이임을 눈치채고 살짝 긴장했다.
그녀와는 웨이포드에서 처음 만났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먼저 환인과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
게다가…….
=어…… 설마 했는데 진짜야…?=
안느의 모깃소리 같은 혼잣말에 이실리테와 유르파는 뭔가 다른 문제가 더 있음을 직감한다.
스윽
여자들의 경계심 섞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모아 깍지 끼고 환인에게 허리를 깊게 숙이는 이엘카타.
하지만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손바닥 크기의 카드를 꺼내 보였다.
[반갑습니다.]
[이엘카타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에 환인이 물었다.
“금언 수행 중이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영혼사로 각성한 그녀가 설마 그사이에 목소리를 잃는 사고를 당했을 리는 없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추측을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진짜였다.
그냥 자기 수행으로 금언 중일 리 없다. 그러면 무언가를 목적으로 훈련을 하고 있단 뜻인가.
고개를 끄덕여준 환인은 조금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사하신 것을 보니 안심이 되는군요.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자신들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지 환인과 홍조 띤 얼굴로 시선을 나누는 모습에 환인의 여자들은 머릿속에 무언가 경보음이 울려 퍼지는 것을 느꼈다.
[여러분들을 모시겠습니다.]
그 카드를 보여주고 앞장서는 이엘카타의 뒤를 따르던 환인은 안느가 뒤에서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는 걸 느끼고 돌아보았다.
=도령. 저 아가씨랑 어떻게 아는 사이……. 아니다, 깊은 사이야?=
환인은 앞서가는 이엘카타의 금빛 머리카락과 그곳에서 살짝 뻗어 나온 플뢰 족 특유의 긴 귀를 보며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심각해진 안느의 표정에 무언가 그녀만이 아는 사정이 있음을 깨닫고 환연에게 소리를 막아달라고 한 뒤 조용히 물었다.
“신경 쓰이는 점이 있나 보군.”
=어어……. 저 아가씨,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엘위드리스 가문의 영애야.=
“그 가문에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
=……그녀의 가문은 종족 연합 국가의 최중요 가문이야. 일천 하고도 수백 년 동안 메리아놀의 대소사를 예언해왔어. 그 때문에 지위도 높은데 여기 급으로 따지자면 8급 호족 정도야.=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게 꽤나 정치적인 문제겠군.”
=아마 지금도 그녀를 메리아놀로 돌려보내달라는 엘위드리스 가문의 요청이 계속 오고 있을 거야. 거의 2년 전? 그쯤에 각성했다고 했지? 저 아가씨가 여기 있다는 건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거절하고 있단 이야기니까…….=
=…….=
안느의 우려 섞인 이야기를 들은 이실리테의 표정에도 근심이 스며들었다.
파르히스트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안느를 만나러 가기 전날 밤에 로나 아우로라라는 여자가 찾아왔었다.
가문과 이엘카타, 그녀 사이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던 그녀.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반쯤 협박하고 을르며 편지와 선물을 교환한 주인님…….
이실리테의 마음에 걱정이 먹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을 때였다.
“재미있군.”
환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그런 그녀가 날 안내한다는 건 대성녀가 자신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일 터.’
자신을 이 세계로 끌고 온 원수, 그리고 자신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을 게 틀림없는 종족 연합 국가의 사회 고위층.
그들이라면 자신이 차원 방랑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을 텐데 영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자신을 종족 연합 국가 메리아놀은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대하려 생각하고 있을까.
환인은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감추지 않고 단정한 걸음걸이로 앞서 걷는 이엘카타의 뒤를 따른다.
그런 그의 뒤에서 이실리테와 안느는 근심과 걱정을 감추지 않았고 그런 둘의 모습에 백려강과 유르파도 입을 꾹 다물고 그녀들과 환인을 힐끔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