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27화 (427/813)

〈 427화 〉 421 알소프로 가는 길

* * *

덜컹, 덜컹덜컹—

새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흙먼지를 옅게 일으키며 달리는 마차 한 대.

그 마차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빛을 흡수하는듯한 검은색의 무광 재질. 외부 장식에는 곡선이 대거 차용되어 반듯하기보다 부드럽다는 느낌이며 크기 또한 일반적인 마차의 1.5배에 달해 묵직한 무게감까지 전해진다.

자갈이 드문드문 튀어나와 있는 거친 노면을 시속 40km에 달할 만큼 빠른 속도로 달리지만, 사람의 불안과 불편을 부추기는 파열음이나 충격 진동은 일절 전해지지 않는 고성능 서스펜션에 각종 생활 편의성 기능까지.

수리하기 이전과 똑같은 탑승감에 안느는 아침의 고된 훈련을 끝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싱글거리며 연신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좋아?=

보다 못한 이실리테가 황당함을 담아 물었지만, 안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 잃었더니 마차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뒤늦게 깨달았어. 율이 언니가 고생해서 고쳐줬으니까 앞으로 많이 아껴줄 거야.=

=고작 마차일 뿐인데 아껴준다고……?=

이실리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열 번 양보해서 주인님이 직접 끼워주신 반지랑 목걸이는 고가의 위상석을 사용한 마도구이기도 하니까 보물처럼 애지중지해도 이해한다.

그런데 이건 그냥 여행 도중에 우연히 얻은 마차일 뿐이잖아.

이전의 마차는 천여 마리 일꾼 키메라의 돌격에 휘말려 차축은 물론 뼈대까지 수리가 불가능할 만큼 크게 휘어져 버렸다.

유르파가 제작에 일가견이 있고 손재주도 뛰어나다지만 마차, 그것도 최신 기술이 도입된 복잡한 구조의 마차를 단순히 손재주와 설계도만 가지고 수리하는 것은 어불성설.

그랬는데 하늘 기사단 파견 부대와 함께 도착한 인부 중 뛰어난 실력의 카펜터와 팅커가 있었고, 예비 부품 또한 마차를 새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보관하고 있었기에 약간의 수고 끝에 이전과 똑같은 마차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지금 타고 있는 마차는 그러한 마차인 거다.

=뭐야. 이슬이 너. 그거 편견이다? 마차라고 아껴주지 말란 법 있어?=

=아니 마차는 소모품인데…….=

=네가 입고 있는 방어구도 소모품인데 맨날 밤에 기름칠하고 뽀득뽀득 닦아주잖아. 그거랑 이거랑 다를 거 없다 너.=

=……듣고 보니 그러네.=

자신의 소중한 것에 비유하니 금방 이해된다. 비록 마차는 여럿이서 쓰는 공공재지만, 뭐 자기가 좋다고 하니까.

마차 지붕에 앉아 중급 정령이 들어가 있는 구슬을 핸들링하며 명상과 정신 집중 훈련을 병행하던 환인은 이실리테와 안느의 대화에 잠깐 눈길을 주었다가 말했다.

조금 무료하기도 하고 잠깐 쉬어볼까.

“내가 살던 곳에는 ‘테세우스의 배’라는 유명한 역설이 있지.”

=응?=

=네?=

갑자기 무슨 이야기일까. 그를 돌아본 이실리테와 안느는 곧 호기심 돋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고대의 시조 영웅이라는 설화에 기반하는 테세우스는 여행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지. 이곳으로 치자면 바르둘에 해당하는 멧돼지, 소머리 괴물을 물리치거나 사람들을 잔혹하게 해치는 악당을 처단하고 아티케 반도를 정치적으로 통일한데다 개혁자라고 불리는 등.”

=오…….=

“그런 여행 도중에 타고 다닌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른다. 역설은 여기에서 등장하지.”

환인이 풀어놓는 이야기에 새 마차에 새길 술법식과 마도구를 만드느라 바쁜 유르파를 제외한 이실리테와 안느, 마차 밖에서 놀고 있던 환연과 그런 환연하고 놀아주던 백려강까지 귀를 기울인다.

“십수 명은 타고 여행할 수 있는 커다란 배에서 썩거나 부서진 판자 하나를 갈아 끼운다고 해서 그 배가 테세우스의 배라는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계속 반복되어 처음 배를 제작할 당시의 재료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도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는가.”

=……으응?=

=어…….=

영웅기를 기대했지만 뜬금없는 이야기가 나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근접전투직의 두 명. 그리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생각에 잠기는 술사 계통직의 두 명과 반인반령 하나.

환인은 그녀들을 보면서 재차 질문을 던졌다.

“우리 마차에도 그런 명제를 대입해볼 수 있지.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는 예전부터 타고 여행해온 마차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마차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안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연히 예전부터 우리가 타고 온 마차잖아.=

그 의견에 환연이 반대 의견을 낸다.

「아냐. 모든 부품을 새것으로 완전히 교체했잖아. 그럼 우리가 여행하면서 타고 온 마차가 아닌 전혀 다른 마차가 된 거야. 겉은 똑같을지라도 속은 전혀 다른 거지.」

=…으응? 하지만 설계도 그대로 만든 거잖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뀌면 다른 마차겠지만 똑같이 생겼고 우리가 똑같이 쓰니까 똑같은 마차인데…….=

「물질적인 측면이 바뀌면 정신 쪽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어.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고 해서 개념까지 승계될 수 없다는 거야. 예를 들어서 안느 네가 환인한테 선물 받아서 엄청 소중하게 여기는 마도구 반지, 그걸 내가 부수고 똑같이 생긴 똑같은 반지를 구해주면 그게 환인이 선물해준 반지가 돼?」

환연의 예시에 안느가 헐하고 탄성을 지른다.

=절대 안 되지.=

「거봐. 지금 이 마차는 우리가 예전에 타고 있던 마차랑 전혀 다른 마차라는 거야.」

=그렇다면 부서진 반지와 똑같은 반지를 다시 주인님이 선물해주시면 어떻게 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이실리테의 질문 난입에 환연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어, 그러면…… 아니아니 그래도 완전히 다른 물건이잖아. 환인이 새것을 선물해준 거니까.」

=하지만 주인님이 선물해주신 거라는 개념도 있고 똑같이 생긴 반지잖아. 주인님이 선물해주신 소중한 반지라는 주제는 달라진 게 없어.=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똑같은 데서 난 부품으로 똑같은 마차를 만들었으니까 지금까지 함께 해온 마차랑 같다고 볼 수 있다고 봐.=

「하지만 진짜 함께 여행한 마차의 부품은…… 전부 부서져서 버렸으니까 전혀 다른 마차이지 않나요?」

거기서 끼어든 백려강의 의문에 이번에는 이실리테가 입을 다물었다.

이쪽을 생각하면 저쪽에 문제가 생긴다. 저쪽을 생각하면 이쪽에 문제가 또 생긴다.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니면서 어느 쪽도 정답인 거 같은 문제에 여자들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여자들은 두통을 유발하는 질문을 던진 환인을 동시에 돌아보았다.

=도령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환인, 어느 쪽이 진짜야? 네 생각은 어떤데?」

환인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둘 다 진짜이기도 하고 둘 다 가짜이기도 하지.”

그 대답에 환연이 어처구니없어하다가 쌩하니 날아가 그의 귓불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그게 뭐야! 그런 대답은 지나가던 하급 정령도 하겠다!」

“유심론적 입장과 유물론적 입장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주제니 어쩔 수 없지.”

「유심론이랑 유물론이 뭔데!」

“애초에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거다.”

태연한 그의 대답에 환연이 입을 쩍 벌리고는 여자들을 보며 ‘방금 들었어?’하는듯한 제스쳐를 한다.

「어처구니없네. 우리 머리 아파보라고 이야기한 거라는 뜻이잖아.」

“재미있지 않나.”

「하나도 재미없어…….」

「저는 재미있었어요. 어째서 난제라고 이름 붙여졌는지 알 것 같네요.」

=나도. 계속 생각하기에는 머리 아픈 주제지만 말이야.=

=대학원의 높은 분들이 탁자 앞에서 진지한 얼굴로 나눌 것 같은 내용이었어.=

=풉. 아하하하! 생각해보니 진짜 그러네!=

「후후후.」

「……에휴.」

피식피식 웃는 환인을 얄밉다는 얼굴로 째려보던 환연은 다른 여자들의 순진한 감상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성격도 좋지. 뭐 그러니까 환인을 따라다니면서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거겠지만.

환인의 짓궂은 질문에도 이실리테와 안느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며 이것저것 물건을 가지고 역설을 가져다 붙이며 놀았다.

레드릭 얼터를 계속 수리해서 끝내 다른 무기가 되면 그것은 진짜 레드릭인가 아닌가.

검은 보강이 불가능하고 소모되기만 하니 레드릭은 언제고 사라질 거다. 예시는 네가 쓰는 성벽의 방패를 들어야지. 유리 언니가 맨날 수선해준다고 깎여나가거나 패인 자리를 땜질하고 덧씌우니까.

내 성벽의 방패는 소중한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는데?

때때로 이런 지적 자극도 있어야 머리가 굳지 않는다는 생각에 던져준 화두였는데 서로 재미있게 노는 것을 본 환인은 약간이지만 만족감이 들었다.

그리고 점심시간.

마차를 세우고 이실리테가 차린 식사를 마친 여자들은 유르파가 마차 후면의 보관함에 아공간 상자 술법진을 새기는 것을 기다리며 한가로이 잡담을 주고받았다.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떡밥은 질렸는지 백중강에게 이번 사태 해결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물자 수송 가방이 주제다.

=지금까지 들고 다니던 짐이 전부 들어갈 정도라니. 물자 수송 가방이 진짜 크긴 엄청나게 크네.=

=응. 덕분에 짐 정리가 무척 간단해져서 좋아. 너무 커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적어놔야 하는 게 단점이지만.=

그냥 봐서는 75L의 대형 가방인데 이 안에 작은 창고 정도의 공간이 있다니.

이실리테가 진수의 뱀가죽으로 만든 물자 수송 가방을 천으로 닦는 모습에 그 옆에서 다소곳이 앉아있던 백려강이 웃으며 말했다.

「설마 큰 오라버니께서 대용량 아공간 가방을 보상으로 드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맞아. 율이 언니도 엄청 놀라더라. 물론 나도 놀랐지만.=

=려강, 이건 얼마나 비싼 건가요?=

「음…… 작은 창고 크기의 공간이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는 용량의 한계라고 해요. 아공간 가방의 구조가 위상차원 공간을 술법과 주문진으로 연결하게 해서 그곳에 보관하는 방식인데 위상 공간의 계면공간팽창률이 인접한 상차원 접촉면적에 영향을 주기에 한계 이상의 공간을 형성하면 현실에도 영향이 오거든요.」

=어…… 안느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

=……크기를 키우면 키울수록 위험하다? 으음, 려강이도 법술사라서 어려운 말을 잘 쓰는구나.=

「앗. 그러니까 작은 창고보다 더 큰 아공간을 만들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서 위험하다는 이야기에요. 컵에 물을 한계까지 담고 한 방울씩 떨어트리면 표면장력으로 점점 솟아오르잖아요? 장력 이상의 물이 떨어지면 쏟아지구요. 그 쏟아진다는 현상이 현실에는 공간이 찢어져서 사람이 빨려 들어가거나 엄청난 무속성 폭발이 일어나거나 안에서 아공간 피조물이 튀어나올 수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벌어져요.」

=어어……. 그러니까 작은 창고 크기 이상으로 키우면 안 된다는 거까진 이해했어. 위험하니까. 그런데 이 가방의 가격이랑 위험하다는 거랑 무슨 관계인 거야?=

「……네? 그, 그러게요? 제가 뭘 말하려고 했죠?」

=…?=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그녀들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환연은 한심스레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의 기술로 만들 수 있는 한계가 물자 수송 가방 수준이고, 크기가 크면 클수록 가격이 비싸지는 아공간 가방 특성 탓에 금화로는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이야기잖아.」

「아! 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

=…….=

「…….」

백려강을 바라보는 이실리테와 안느, 환연의 시선이 약간 유감스러운 아가씨를 보는 느낌으로 변한다.

뭔가, 착하고 예쁘고 배우기도 잘 배운 아가씨지만 어딘가 맹하다고 할까.

=려강이는 어딘가 좀 엉뚱한 면이 있네?=

「죄송해요……. 제가 평소에 맹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부끄러운듯 배시시 웃는 백려강의 반응에 여자들도 피식거리며 웃었다.

안느는 가방에 다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아무튼, 무게 감소 70%에 약한 보존 효과까지 붙어있어서 중요한 교섭의 재료로도 쓸 수 있는 물건을 준 건… 역시 백 공자가 우리 도령한테 잘 보이려는 뇌물의 의미도 없지 않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키메라를 생산해내는 타락한 바르둘이 위험하긴 하지만 가문의 보물 창고에는 이 가방 말고 충분히 답례와 보답이 되는 것들은 많으니까요.」

=예를 들면?=

「음……. 날아다니는 비행 마차라거나 잠항 기능이 있는 마차라거나…….」

비행 마차라는 이야기에 이실리테의 눈이 커진다.

=날아다니는 마차도 있어요?=

「7급 바람 위상석과 풍맹철을 써서 연속 31시간 비행이 가능한 마차예요. 생김새도 보통 마차와 다르게 새랑 비슷하게 생겼구요. 한 번 비행하면 4급 법술사 한 명이 보름치 위상력 회복량을 충전해야 날 수 있다는 게 소소한 단점이에요.」

=그 정도면 어지간한 호족도 못 타겠네요…….=

「주도의 고위 호족이나 성족 분들이 타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확실히 그 정도는 돼야 이용할 수 있겠지.

4급 법술사는 소도시 정도에도 20명이 채 안 되는 수준이다.

비행 마차를 한 번 충전하면 위상력 탈진으로 하루를 쉬어야 할 테고, 나눠서 충전한다 하더라도 4급 술법사들의 인건비를 생각하면 어지간해서는 못 쓸 것이다.

혹시 얻었을지도 모르는 물건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가지지 않는 안느가 다리를 쭉 뻗으며 말했다.

=우리로서는 어쨌든 가방을 얻은 게 좋은 일이네. 겉만 봐서는 좀 비싼 아공간 가방이랑 차이도 없으니 노려질 일도 없고, 뭣하면 비싸게 처분한 뒤에 적당히 가성비 좋은 아공간 가방 몇 개를 더 들고 다녀도 되니까 말이야.=

=안느……. 차기 영주한테 받은 걸 함부로 처분해도 괜찮아?=

=선물로 받은 것도 아니고 정당한 보상으로 받은 건데 뭐 어때.=

그런가? 백려강을 돌아보았지만 별 반응 없는 것을 보니 그래도 괜찮나보다고 이실리테는 생각했다.

이런 가방보다 2*2*2m나 3*3*3m 사이즈 아공간 주머니를 여러 개 들고 다니는 쪽이 싸고 이득인 것은 확실하니까.

유르파의 마차 재단장에는 사흘이 꼬박 걸렸다.

우선 열대야를 대비해 냉방 기능부터 되살렸고 마차 색 변화 마도구, 외장 형태 변화 마도구도 수리하거나 다시 만들어 적용했다.

그 뒤에는 마차 수납함에 아공간 상자화 술법진을 새겨넣었으며 마지막에는 마차에 적용되어있는 편의성 기능을 끄고 켤 수 있는 버튼까지 만들어 차후 히스론드의 고산 산악지대를 넘을 때를 대비했다.

편의성 기능을 모두 off로 해놓으면 마차에 축소화 비술을 적용할 수 있으니까.

=아으으~. 끝났다아…….=

열대 지방을 지나고 있기 때문일까. 지구에서 사 온 회색 맥시 원피스를 입고 있던 유르파가 몸매를 선명하게 드러내며 철푸덕, 쓰러져 앓는 소리를 낸다.

그 근처에서 책을 읽던 환인은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다가 축 늘어지는 유르파를 보고 책을 덮으며 칭찬했다.

“고생했습니다.”

=하으~ ……흐힣. 자기한테 그 말 들으니까 피로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야.=

“그렇습니까.”

헌신적인 그녀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부드럽게 웃은 환인은 그녀의 머리맡으로 걸어가서 앉아 허벅지 베개를 해주었다.

우와, 자기의 허벅지 베개라니! 포상 감사합니다!

속으로 환호를 지른 유르파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옆으로 돌아누우며 편한 자세를 잡는다.

‘하으으…… 녹아내린다앙…….’

옆머리에서 올라오는 그의 따스한 체온과 아스라이 맡아지는 남자의 야성적인 체취.

사흘간 9시간을 자면서 작업한 피로와 스트레스가 남김없이 해소되는 것을 느낀 유르파는 스으읍—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가느다랗지만 길게 숨을 들이마셨고…….

‘……흑. 실수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체취에 그 즉시 발정해버렸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다. 사흘간 61시간 작업이라는 미친 작업량에 잠깐 판단력이 흐려져 저지른 실수.

평소에는 발정하지 않도록 몸가짐을 단단히 했었다.

아침저녁 훈련 때 그의 땀 냄새를 맡지 않게끔 거리를 두었고, 만약 가까워지면 숨을 참아서라도 체취를 맡지 않으려 했다.

자신의 변태 욕망을 자극하는 그의 모습도 최대한 안 보려 노력했었다.

막 씻고 나와 살짝 젖은 그의 모습이라던가 위팔까지 걷어 올린 소매, 그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남자의 팔뚝과 손등에 불거진 핏줄이라던가. 목에서부터 아래로 단추 세 개를 풀어 드러난 그의 남성적인 쇄골이라던가…….

물론 잠자리를 되새기는 것은 절대 엄금이다. 생각하면 곧장 스위치가 들어가 그곳이 축축하게 젖어버리기 때문.

그랬는데 그의 허벅지 베개에 이어 체취까지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고 그 체향에 며칠 전 막사에서 서둘러 하던 급박한 섹스까지 생각해낸 유르파는…….

=……~~.=

젖꼭지가 발기한 것이 맥시 원피스 너머로 뚜렷하게 보일 만큼 발정해버리고 말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꼿꼿하게 선 유두가 옷자락에 스치며 관능의 불꽃이 확확 일어난다.

이럴줄 알았다면 답답하다고 브래지어 풀어놓지 않는건데!

‘말, 무슨 말이라도 해서 신경을 돌려야 해.’

자신은 첩이다. 이제 자신이 흡정족인 것을 두고 자조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첩이며 이실리테와 안느가 정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착해빠진 아가씨들은 그런 신분 차이를 두지 않고 자신을 언니 취급해주는데 어찌 그런 아가씨들의 마음을 배신할 수 있을까.

게다가 아가씨들은 지금 마부석에서 손수 마차를 끌고 있다. 그런 아가씨들 뒤에서 자신은 그와 질펀하게 몸을 섞는다?

아가씨들이 용서해도 자신이 용서 못 한다.

=자, 자기? 그 적청색 위상석 있잖…니. 이제, 지금부터 연구할 수 있을 거 같……애.=

“그렇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지친듯하니 오늘은 그만 쉬고 내일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다.”

유르파는 그의 상냥한 목소리에 이어 크고 단단한 손이 자신의 이마를 덮는 것을 느끼며 약하지만 절정에 올랐다.

흨, 큿… 헤으윽…….

이마에서 시작된 약한 전류가 머리를 들쑤시고, 거기서 발생한 감각이 아랫배까지 치고 내려가 자궁을 헤집는다.

허벅지가 저절로 조여지고 발끝이 구부러지는 가운데 유르파는 속으로 발발 떨며 기도했다.

그가 자신의 여자에게만큼은 상냥하고 자상하다는 건 알지만, 지금은 때려주고 매도해 줬으면 좋겠다. 발정 나버린 게 좀 식도록.

‘아니…… 맞으면서 매도당하면 그것도 나름대로…….’

업계 포상이 아닐까?

아, 안돼.

유르파는 자신의 성욕음란 스위치가 on과 off 사이 중간 점에 정확히 위치한 것을 깨달았다. 조금만, 약간의 자극만 주어져도 찰칵, 스위치가 올라가 버리겠지.

어쩌지? 어떻게 하지?

유르파는 맥시 원피스 자락에 손자국이 찍힐 만큼 꼭 쥐고 고민하던 중.

「아…?」

인세의 천사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는 세 번째 아가씨가 천장을 뚫고 마차 안으로 내려오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는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며칠 전, 그녀의 입으로 들었던 귀접 자매 동시 덮밥 사건을 떠올렸다.

그래, 내 몸을 려강 아가씨한테 내어주고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주면 돼!

그럼 나는 정욕이 식고 려강 아가씨는 오랜만에 자기랑 오붓하게 회포를 나누는 거니 일석이조잖아?!

먼 훗날. 제 딸들에게 ‘스스로 목줄을 차다 못해 족쇄까지 차버렸다.’고 회고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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