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화 〉 353 복귀
* * *
첨벙!
시원한 물이 온몸을 애무하듯 휘감겨온다. 더해 코와 입과 귀 안쪽으로 침범하는 느낌.
부그르르르르
격렬한 물거품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가운데 환인은 즉시 몸을 웅크려 수면이 어느 방향인지 확인 후 수면 위로 떠올랐다.
“푸우우!”
코와 입 안에 들어온 물을 뱉으며 황급히 가슴을 더듬은 환인은 포켓 속에서 발버둥 치는 환연을 꺼내 머리 위에 올려주었다.
「푸엑! 켈록, 케윽…… 콜록! 쿠췽!」
제대로 물을 마셨는지 환인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매달린 채 필사적으로 기침을 토해내는 환연.
환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여자친구들과 비상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거라곤 밝은 하늘의 따스한 햇살과 찰랑이는 파란 호수, 그리고 푸른 초목들 뿐.
‘여긴 어디지?’
촤아악 촤악
그 순간 근처에서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가 차례대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물보라와 함께 찬란히 뻗어 나오는 세 명의 아우라.
그녀들의 몸을 뒤덮은 빛의 휘광에 자신이 니오네브레스로 돌아왔다는 걸 확인한 순간 세 명이 황급히 자신을 향해 헤엄치며 소리쳤다.
=도령?! 괜찮아?!=
=주인님! 주인님?!=
“난 괜찮다. 그런데 비상은 어디 있지?”
주위를 둘러본 환인은 그 말을 꺼내자마자 발밑을 무언가가 받치고 밀어 올리는 느낌에 놀라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큐삣! 푸르르
자신을 등에 태우고 백조처럼 물에 떠서는 고개를 푸르르 터는 비상을 보곤 손에 힘을 풀었다.
이어서 어리둥절해하는 여자친구들을 살핀다.
다들 수영이 수준급인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모습. 환인은 비상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단 호숫가로 나가지.”
=넵.=
큐웃.
물갈퀴가 없지만 바람으로 능숙하게 나아가는 비상의 등에서 환인은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았다.
머리 위로 떠오른 태양. 맑고 청명한 날씨 아래 심록이 우거진 숲. 그리고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드넓은 호수.
흑갈색 나무는 이보다 꼿꼿할 수 없을 만큼 곧게 자라있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나뭇가지에는 싱그러운 녹색 이파리가 가득 붙어 머리를 만들고 있다.
물결이 찰랑이는 호수는 눈이 아릴 정도의 에메랄드 색이다.
수심이 깊은 곳은 불투명하지만, 호반으로 다가갈수록 투명해지며 바닥이 보일 정도가 되어간다.
바닥은 자갈과 모래로 가득 차 깨끗한 느낌. 정신을 집중하자 물 속을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가 느껴졌다.
아무리 보아도 산란못 미궁이 아닌, 어딘가의 평화로운 숲속 호수 느낌이다.
‘어떻게 된 거지. 복귀 장소는 지정이 아닌 무작위인가.’
촤아악
큐으~
호숫가로 나온 환인은 자신을 태워준 비상의 부리와 머리를 어루만져주며 고맙다고 한 뒤 가장 먼저 환연의 상태를 살폈다.
“환연, 괜찮나.”
「으우, 코로 물 제대로 먹었어……. 귀 안쪽에도 물이 찬 거 같아…….」
“시간이 지나면 물이 빠질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환연을 비상의 머리 위에 올려주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둘러준 환인은 다음으로 여자친구들을 살폈다.
가벼운 티셔츠에 무릎 바지를 입은 이실리테, 회색 탱크탑에 검은색 돌핀 팬츠를 입은 안느, 진회색 맥시 원피스를 입은 유르파.
“다들 몸에 이상은 없나.”
=저는 괜찮아요.=
이실리테가 물을 먹어 늘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대답하자 안느와 유르파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흠뻑 물을 빨아들여 무거워진 맥시 원피스를 낑낑거리며 벗은 유르파가 옷의 물기를 짜려 한다,
그러나 근력이 부족한지 몸을 비틀며 힘을 주는데, 그 덕에 라인이 드러나지 않는 보라색의 우아한 속옷 차림이 부각되며 환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리 줘. 내가 짜줄게.=
=고마워, 안느 아가씨.=
단숨에 빨래처럼 비틀어 물을 짜내는 안느의 차림도 차림이지만, 온통 젖은 이실리테의 차림이 선정적이기 그지없다.
가벼운 티셔츠가 물을 흡수해 반투명해지며 속살과 가슴 윤곽, 브래지어가 훤히 비쳤던 것.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환인은 모두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세 명 모두 이제 와서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인재들이다. 한 명이 빠지면 그 자리를 메꿀 인력을 보충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환인은 다음으로 아공간 주머니를 살폈다. 아까 손수건을 꺼낼 때는 괜찮았었는데…….
삼림형 미궁에서의 악몽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환인은 미간에 살짝 힘을 주고 주머니 속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고 잠시 후.
‘다행이군.’
멀쩡한 노트북과 스마트폰 상태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옷가지 일부 귀퉁이가 살짝 젖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무사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이실리테와 안느도 서둘러 개인용 주머니를 확인한다.
=옷이 다 젖었네. 이슬이 너는 어때?=
=아…… 요리 레시피 적어둔 공책이 젖었어…….=
실망하며 젖은 공책을 펼친 이실리테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옆에서 안타까워하던 안느의 눈도 동그래졌다.
=뭐야. 젖었는데 글씨가 하나도 안 번졌네?=
=다행이다.=
표정이 밝아진 이실리테가 마른 수건으로 조심조심 물기를 닦아내는 것을 바라보다 환인이 물었다.
“유르파의 주머니는 괜찮습니까.”
=응. 내 주머니는 방수와 입구 차단이 되어있어서 뒤집어도 물건이 안 쏟아져.=
입구가 까맣게 된 주머니를 거꾸로 잡고 탈탈 흔들어도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휴대용 태양광 발전기는 무사하겠군.
6대를 다 합치면 무게만 72kg이다. 그 때문에 소형인 대신 무게 감소율을 크게 끌어올린 유르파의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둔 거였는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여자친구들이 훌렁훌렁 젖은 옷과 속옷까지 벗고 알몸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환인도 수건을 꺼내 물에 젖은 비상의 깃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체가 되며 깃털이 촘촘해져서일까, 속 깃털과 솜털 깃털이 물기 하나 없이 멀쩡하다. 겉 깃털도 몇 번 홰치고 몸을 털면 금방 마를 수준.
쿠우~
하지만 자신이 몸을 닦아주는 걸 눈에 보일 정도로 좋아하는 모습에 환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됐다.”
푸르르르!
한차례 거나하게 몸을 털자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느라 이리저리 엉키고 부푼 깃털이 금방 제자리를 찾는다.
그 놀라운 정리법에 작게 웃은 환인은 꺼내놓은 비상의 안장과 가슴막이, 깃털 투구도 다시 씌워주었고 자신도 젖은 옷을 벗고 법사복과 흑색 코트로 갈아입었다.
옆에서 천상의 장막과 구세의 빛을 챙겨입던 여자친구들이 묻는다.
=그런데 주인님. 여긴 아무리 봐도 산란못 미궁이 아닌 거 같은데…… 어디일까요?=
=혹시 도령이 떨어졌다던 그 삼림형 미궁 아냐?=
“일단 삼림형 미궁은 아니다. 거기의 나무는 이렇게 작지 않고 수십 미터 높이로 빼곡했었다. 숲 밑바닥에서는 푸른 안개가 끼어있다고 착각할 정도였지.”
미궁을 벗어난 곳은 열대우림과 삼림이 섞인 구릉지였지 이렇게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평지 숲이 아니었다.
비상의 등에 올라탄 환인이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하늘에서 주변을 살펴보고 오지. 쉬고 있어라.”
=네, 주인님.=
=엉.=
“가자.”
쿠엣!
환인의 신호에 녹색의 풍성한 꽁지깃을 바짝 세워 크흥! 크게 콧숨을 내쉰 비상이 훌쩍 하늘로 날아오른다.
4일간 작은 정원과 집안에만 갇혀있어 좀이 쑤셨던 걸까. 힘찬 날개짓에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불어닥친다.
‘고글을 사둘걸 그랬군.’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쉬움이 느껴진다.
자신을 위해 나선 모양으로 회전하며 100여 미터 상공까지 올라온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환인은 탁 트인 숲과 저 멀리 지평선 근처에 솟아오른 작은 산자락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니, 관찰할 필요도 없다.
며칠간 숲을 오가며 양서류 이형종들을 잡아댄 덕분에 꽤나 눈에 익은 지리, 크라빈 숲이다.
큐으~ 삐잇~
다시 내려가자고 말하려던 환인은 너무나 즐겁게 비행하는 비상의 모습에 잠시 비행을 즐기게 두고 젖은 옷을 벗은 채 알몸으로 손수건을 망토처럼 두른 환연에게 물었다.
“환연. 주변에 괴물이 느껴지나.”
「아닝. 깨끗행. 근데 여긴 어디양?」
환인의 가슴 포켓으로 쏙 들어온 환연이 물을 먹은 탓에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크라빈 숲이다.”
「여기강? 숲이 엄청 깨끗한뎅?」
“지형을 보면 확실하다.”
「미궁이 주변에 영향을 꽤 많이 미쳤구낭.」
고개를 끄덕여준 환인은 아래쪽에 넓게 펼처진 아름다운 호수와 평화로운 숲을 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지구로 돌아가면 이런 곳에서 은거해도 좋겠군.’
니오네브레스에서의 여정을 끝내고 지구로 돌아가면 비상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현대에서 안 쓰이는 곳이 없는 시멘트에 거부 반응을 드러내는 환연도.
비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에서는 자유롭게 키운다는 게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적당히 살만한 무인도를 찾아서 여자친구들과 거기서 살까. 아니면 외국으로 이민을 갈까.
한국이야 비좁은 땅덩어리에 수천만 명이 살고 있어 어딜 가도 사람이 있지만, 외국에는 비상도 함께 살 수 있는 곳은 널리고 널렸다.
일례로 스웨덴이 있다. 한국에 비해 땅덩어리는 4.5배나 넓은데 인구수는 1/5도 안되는 나라.
국토 대부분이 수림이라 은거할 곳도 많은 국가.
‘노르웨이도 나쁘지 않지.’
국토 대부분이 바다와 인접해있고 산으로 이루어진 곳. 거기다 땅 면적은 한국의 3.8배지만 인구수는 1/10 정도인 500만 명 수준이다.
수도 오슬로에서 몇십 킬로미터만 움직여도 강원도 오지나 다름 없는 곳이 널려있으니 은거할 곳은 쉽게 찾을 수 있겠지.
오지 숲속이라고 해도 위성 연결을 통한다면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능력과 여자친구들의 도움이 있다면 자급자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가 생겨 도시로 나가야 할 경우, 비상을 타고 날아가면 수십 킬로미터 정도는 십여 분 거리.
그렇게 은거하면 정체 모를 인간들과의 접촉도 일어나지 않을 테고 비상도, 환연도 자연 속이니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어느 사이엔가 환인의 머릿속에는 완벽한 자급자족 시스템이 적용된 주택을 원시림 오지에 지어 여자친구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은거 생활을 보내는 상상이 흐르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 편해지는 상상을 접은 환인은 비상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욕구불만은 이 정도면 조금 해소했겠지. 그만 내려가자.”
쿠으~.
조금 더 날고 싶은데. 살짝 칭얼거린 비상은 아쉬움의 콧소리와 함께 호숫가에 내려섰다.
=도령, 왔어? 어땠어?=
“위치로 보았을 때 크라빈 숲의 산란못이 있던 장소가 맞다.”
=……헐, 미궁이 사라지면서 숲의 모습도 바뀐 거야?=
“그렇겠지. 우리가 산란못을 공략할 당시는 초봄 정도였다. 지금 날씨는 7월 중순 정도……. 4개월 정도가 흘렀으니 미궁이 사라지며 숲이 정화되어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천상의 장막을 모두 착용하고 아름다운 여기사가 된 이실리테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소녀 감성이 물씬 풍기는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다른 세상에서 쉬다가 돌아왔더니 세상이 바뀌었다……. 뭔가 꿈만 같은 이야기네요.=
=음……. 그럼 다음 미궁을 돌파하면 그때도 지구에 가게 되는 거야?=
=산란못 미궁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겠니?=
=…….=
힐끔, 자신의 눈치를 보는 안느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읽은 환인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미궁의 소원석으로 지구에 고작 며칠간 머무르다 오는 거면 손해인 듯한 기분이지. 그리모암의 유물 같은걸 만들 수 있는 소원석이인데 말이다.”
=어어? 아니, 그 정도는 아니구…… 그러니까…….=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단어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지 버벅이는 안느. 그런 그녀 대신 유르파가 말을 이었다.
=중핵이 6급이었으니까 산란못 미궁도 6급일 텐데 6급씩이나 되는 미궁을 돌파한 대가가 고작 며칠간의 휴양이라는 건 조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 그거야!=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붕붕 끄덕이는 모습에 유르파가 빙긋 웃는다.
=하지만 소원석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더 많으니까, 아직은 섣불리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유물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장비잖니? 차원 이동도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고. 그거에 비하면 6급 미궁 돌파는…… 힘들긴 하지만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느낌이니까.=
잠깐 생각해본 안느가 맞장구쳤다.
=확실히 그리모암은 미궁을 몇 번이나 돌파한 걸로 유명한 영웅이야. 그 그리모암의 유물이 미궁을 한 번 돌파할 때마다 하나씩 생겨났다고 하면 납득이 되긴 해. 도령 말대로 소원의 무게에 따라 미궁을 여러 번 돌파해야 하는 거지.=
“나머지 이야기는 마을로 돌아가서 쉬면서 하기로 하고, 크라빈 마을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도 하고 마차와 쿠에들도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으니 그만 출발할까.”
=앗, 저기… 주인님.=
“음.”
=저, 문양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게 궁금해서…….=
“…….”
돌아왔다는 생각에 문양은 신경 쓰지 않았던 터라 환인은 다시 검은색 셔츠의 앞 단추를 풀고 가슴을 확인했다.
혼불을 그린 듯한 주먹만 한 문양이 여전히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모습에 여자들이 가까이 다가와 눈을 끔뻑인다.
=어떻게 된 거지? 문양이랑 빛이 그대로잖아.=
=아니, 같은 건 아니고 색이 조금 달라. 지구에서는 옅은 황금빛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회색? 백색? 그런 느낌이야.=
=혹시 이대로 또 지구로 가시는 건…….=
=…….=
=…….=
이실리테가 슬그머니 환인의 팔을 잡자 안느와 유르파도 슬쩍 환인의 손와 허리에 손을 올린다.
그런 그녀들을 두고 환인은 잠시 차원 이동을 하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확실하지 않지만 징조도, 현상도 없이 바로 이동할 거 같지는 않다.”
지구에서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오기 전에 확인했던 왼팔의 빛, 문양으로 흘러 들어간 훈기와 한기, 그리고 약간의 고통.
그 전부를 이야기해주자 안느가 걱정을 드러냈다.
=뭐? 심장이 아팠었단 말이야?=
“아프다고 하진 않았다만.”
=하지만 전기 자극이 왔다는 거잖아. 그거 위험한데…….=
그녀의 걱정도 합당하다. 심장에 전기 자극 충격이 가해진다는 것은 심장마비에 걸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괜찮다. 만약 문양에 내 힘을 밀어 넣어야 발동하는 거라면 내가 제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문제 될 것은 없지. 너희가 옆에서 물약이든 성술이든 치료해주면 되는 일이니.”
=……그러면 지금 당장 해보지 않겠니?=
“지금 말입니까.”
=응. 여기서 미리 다 확인하고 움직이는 게 좋을 거 같아.=
유르파가 말하는 것을 이해한 환인은 훈기와 한기를 움직여 가슴의 문양 쪽으로 보내봤지만, 두 가지 기운은 문양에 흡수되지 않고 가슴 부근을 맴돌다 다시 척추 쪽의 두 흐름길로 되돌아가 버렸다.
여기서 환인은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하나는 그냥 시간을 보낼 경우 가슴의 문양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그때 차원 이동이 가능해지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이대로 쭉 회색빛이다가 미궁의 심핵을 하나 더 부수면 황금색으로 바뀌며 차원 이동이 벌어지는 것.
“어느 쪽이든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넘어가지. 그리고…… 누가 물어볼 경우 심핵을 부순 뒤 경험했던 것은 모른다고 이야기해라. 그래도 꼬치꼬치 캐물으면 내게 넘기고.”
=높으신 분들이 우리 입을 막으려 할거라는 이야기지? 그렇게 할게.=
“그래.”
=네, 조심할게요.=
자신의 우려를 잘 알아들은 여자친구들의 모습에 환인도 걱정을 접었다.
여행을 반년 이상 함께 다닌 덕분일까. 이제 자신의 의도를 곧잘 알아채는 그녀들이다. 그녀들이라면 남들 앞에서 허튼소리를 흘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 출발하지. 크라빈 마을은 저쪽이다.”
비상의 등에 탄 환인이 선두에서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하자 여자친구들이 뒤따라오며 이야기를 나눈다.
=저쪽은 저녁이 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여긴 한낮이네.=
=날도 더워졌어. 산란못을 공략할 땐 봄이었는데 지금은 여름이잖니.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데 실감 나네.=
=구출한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돌아갔겠죠?=
=롬 파티가 있었으니까 무사히 돌아갔을 거야. 도령이 주변 이형종도 다 쓸어버렸었잖아?=
=마을은 어떻게, 수습을 잘 했으려나? 120명이나 구출했으니까 그 사람들을 수습하는 것도 어려웠을 텐데.=
=……전 크라빈 마을이 마음에 안 들어요.=
=엥? 뭐 때문에 그러니?=
=언니 뒤에서 음흉하게 씹었잖아요.=
=아, 그거. 나도 그 사람들은 싫어.=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마렴.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잖니. 라비올라 아가씨 같은 경우에는 참 착했고.=
=그건 그렇지만요.=
=후후. 이슬이 아가씨 걱정을 받으니까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걸.=
그녀들의 대화를 들으며 크라빈 마을에 해놓은 흉계를 기억해낸 환인은 우묵해진 눈빛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주변 풍경 속에서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원래 계획은, 산란못 미궁을 돌파한 뒤 돌아가서 유르파의 뒷담과 험담을 한 인간을 골라내 영혼의 저주를 내리는 거였다.
정령의 구슬로 상대에게 저주를 걸면 각종 상태 이상 디버프가 걸리는데 이걸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
영혼사의 영혼 기사에게 뒷담과 험담을 하다 영혼사에게 저주받은 사람.
비록 1시간 남짓이지만 온갖 병적인 증상이 발생했던 사람을 같은 마을 사람들이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저주받은 불길한 인간이라고 기피하고 배척하겠지.
그를 위한 밑밥은 라비올라를 통해 모두 뿌려놓았다.
영혼사라는 직업과 마을의 구원자라는 입장을 이용하면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뿌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배척과 집단 따돌림을 유도해 험담을 한 인간들의 사회적 타살과 그로 인한 자발적 자기 살해를 유도하려 했는데 시간이 4개월이 넘어 5개월 가까이 지나버렸으니…….
자신이 라비올라를 부추겨 불 지른 것의 영향력과 전파력을 생각하면 크라빈 마을이 통째로 불타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라비올라의 모친인 유미안이 보여준 침착함을 생각하면 그녀들이 알아서 정리했을 가능성도 크고.....
‘크라빈 마을 상황을 확인하고 이후 행동을 결정해야겠군.’
4개월이나 지난 일이다. 마을이 무사하다면 어떤 식으로든 해당 일은 봉합됐을 테지.
다시 쥐고 흔들려면 새삼이라는 느낌이지만, 이 세계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권위를 위해서라도 손을 써야 한다.
=윽. 저건…….=
=…유리 언니, 저 사람들 맞죠?=
=으… 으응…….=
그리고 도착한 크라빈 마을에서 환인은 자신의 생각 이상의 일이 벌어진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21명의 목 잘린 머리가 마을 광장에 줄지어진 꼬챙이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