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58화 (358/813)

〈 358화 〉 352 현대

* * *

동작 감지 기능으로 인해 켜진 인터폰의 고화질 액정을 본 안느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령, 저 사람들은 누구야?=

“짐작 가는 곳이 없진 않지만 확신은 못하겠군.”

자신의 집을 찾아올만한 사람이라면 심부름센터나 흥신소 쪽 인간뿐이라고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누군가 찾아올 만큼 자신의 인간관계가 넓지 않았기 때문이며, 지구 시간으로 14일 전에 적지 않은 큰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물론 삼안 물산 비리 수집 과정에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2중, 3중으로 위장을 펼쳤다.

이민두, 멍청하고 대머리에 여자만 밝히는 배불뚝이 문어 대가리인 그자를 통해 과장, 차장, 부장, 이사, 상무, 전무까지 차례대로 백도어를 설치했고 이를 통해 사내 인트라넷까지 암중에 손을 뻗쳤다.

어렵거나 들키지는 않았다. 회사가 워낙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데다 뒷주머니를 꿰차고 라인전을 벌여댔기에 유일한 사내 보안팀은 유명무실한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수집한 소스는 비리 폭로의 신뢰성 증가 겸 인맥 관리를 위해 주요 언론사의 사회부 기자인 친구에게 일부 독점을 쥐여주었다.

그 친구의 인품이라면 내부고발자 신원 보호를 단단히 신경 쓰고 실수로라도 흘리지 않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

당연히 거기서 그치지 않고 출처 추적이 나오면 쓰라고 제공한 가상의 정보 제공자 또한 신경 써서 마련했다. 소스를 건네주기 위해 친구를 부를 때도 그냥 부른 게 아니라 우연을 가장했다.

이외에 다른 폭로자들에게는 IP 우회에 익명이 가능한 이메일로 자료를 제공했기에 이쪽으로의 추적은 불가능하다.

만약 이 모든 걸 꿰뚫어보고 역추적해 자신에게 도달할 정도라면 그건 국가적인 규모와 실력의 집단이란 뜻이고, 그만한 집단은 정부 쪽 외에는 없다고 환인은 확신했다.

그만한 실력을 갖춘 집단이 무엇이 아쉬워서 재계 순위 100위 바깥인 기업 비리에 관심을 두고 움직일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거라면 강하연이 악의를 품어 추리의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에 집착하게 된 경우다.

“아 몰라! 그 새끼가 회사를 관둔 이유가 비리를 터트려가지고 쫄려서 튄 거잖아! 아니면 왜 그 시기에 회사를 관둔 건데?!”

……이런 식으로 말이다.

여왕벌 기질에 안하무인에 이기적인 그 성격을 본다면 오히려 이쪽이 신빙성이 높다.

삐리리­

몇 초, 현 상황의 파악을 위해 과거의 검토를 끝냈을 때 남자가 초인종을 눌렀는지 희미한 벨소리가 인터폰에서 흘러나왔다.

환인은 잠깐 시간을 두었다가 받았다.

“예.”

[……어, 여기 환인 씨 집 아닙니까?]

“누구십니까.”

[아아. 실종자 수색 요청이 들어와서 말입니다. 전 수상한 사람이 아니고…….]

잠시 부스럭거리더니 파란색에 하얀색의 신분증이 화면을 채운다.

경찰청등록 2020­150000. 아래에는 남자의 사진이 찍혀있다. 그리고 탐정이라는 단어와 마크, 하단에 적힌 KCI한국탐정연맹이라는 글귀.

남자가 신분증을 뒤로 돌리자 no.20­09­0001 등록번호와 함께 이름과 생년월일, 1급탐정사라는 급수가 나온다.

20년도부터 합법이 되어 협회가 생겨난 탐정업의 종사자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합법적으로 활동 중인 탐정 기우혁이라고 합니다. 온달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실종자라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누가 의뢰했다는 겁니까.”

자신의 행방을 궁금해할 사람이라면 솔직히 말해 두 명뿐이다. 자신이 삼안 물산의 비리 소스를 제공해준 기자 친구.

이쪽은 지구로 귀환한 다음 날 따로 메일을 보내 근황을 알렸다.

[잘 지내고 있나. 나는 잠시 한국에 들렀다. 곧 다시 출국할 거다.]

그리고 그 녀석이 아니라면 역시 강하연 뿐.

강하연에 대해서 빠르게 기억을 검토했지만, 얼핏 이해가 되면서도 되지 않는다.

그 여자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좋은 이미지를 쌓지 않았다.

동남아 쪽이나 중국 쪽의 외국인 불법체류자를 통해 습격을 사주하면 했지 이런식으로 흥신소를 이용해 자신을 찾을 이유가 없는데.

액정너머의 남자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짧게라도 괜찮습니다.]

의뢰를 받아 자신을 찾아다녔다고, 괜찮다면 잠시 대화를 나누지 않겠느냐는 자칭 탐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아. 안녕하십니까.”

대문에 오토바이 체인을 걸어놓은 채로 문을 열자 문틈으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의 뒤에 서 있는 30대 초중반의 무표정한 남자를 잠시 쳐다본 환인은 기우혁이라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인사는 건너뛰는 게 좋겠습니다.”

“하하. 이해합니다. 외국에서도 탐정은 음지의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하니까요. 거부감이 느껴지시겠지요.”

셜록 홈즈, 오귀스트 뒤팽, 제인 마플 같은 추리 소설 장르의 캐릭터로 인해 탐정에 대한 로망이 높아지긴 했지만, 현실을 대입하면 결코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 직종이다.

자신의 거리감을 이해한다는 얼굴로 웃는 기우혁을 응시하며 습관적으로 영혼 시야를 연 순간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어깨 위로 아주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푸른색의 아지랑이.

환인은 시선을 돌려 기우혁의 뒤에 서있는 남자도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남자. 그에게서도 비슷한 양의 푸른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각성자에게서나 볼 수 있는 흔적.

마력이었다.

기우혁은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환인에게 “대답하고 싶지 않으시면 말씀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로 말문을 연 뒤 녹음기를 작동, 경찰이나 할법한 의례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14일 전부터 소식이 없었는데 어디에 있었느냐, 뭘 했었느냐, 언제 돌아왔느냐, 별일은 없었느냐.

마치 자신이 니오네브레스에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물음.

……처럼 느껴졌으나 평범하게 해외 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인지하고 묻는 걸 수도 있다. 자신은 정말 외국으로 뜨려고 했었으니까.

환인은 깊어진 눈으로 남자의 차림새 및 녹음기의 상태, 얼굴의 안면 근육을 통한 감정을 읽으며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누가 의뢰했느냐. 언제부터 탐문수색을 했느냐. 의뢰를 한 이유가 정말 실종 소식 때문이냐.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음에도 남자는 후련하다는 얼굴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의뢰인의 발설은 곤란하다고 대답했고, 환인도 마찬가지로 사생활을 떠들고 다니는 취미는 없다고 대답했다.

환인은 남자와 질답도 아닌 질질을 주고받으며 눈앞의 두 명의 정체를 유추할만한 사소한 단서라도 얻기 위해 집중했지만…….

“듣기 불쾌한 질문들이었을 텐데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걸로 의뢰를 끝낼 수 있겠군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게 되었다.

녹음기는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 평범한 전자기기였고 옷도 아무런 신비가 깃들지 않은 평범한 옷이었으며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은 기우혁이 숨기는 것 없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전한다.

젊은 남자 쪽은 호위 비슷한지 격투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자세와 무게 중심이 보였는데 환인에게는 직업자라고 보기에 너무나도 잡스러웠다.

‘아니, 저정도 마력 아지랑이라면 고작 1급에서 2급정도 수준일 테니…….’

환인의 눈빛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살벌해진다.

사이코패스 기질이 발동하며 이대로 두 명을 소리 없이 납치해 죽인 뒤 영혼을 통해 숨기고 있는 모든 것을 캐내고 싶다는 충동이 뱀의 혀처럼 마음을 건드리는 기분.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두 명은 정말 용무가 끝났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남자가 돌아가는 모습을 응시하며 충동을 애써 갈무리한 환인은 집으로 들어가서 곧장 환연을 불렀다.

“방금 그 남자들이 어디로 가는지 추적할 수 있겠나.”

「가능해. 여기 주변은 숲이라서인지 정령이 가까이 다가오거든.」

“대화를 엿듣는 것까진 힘들겠지.”

「엉. 애들이 시멘트나 콘크리트에 반경 3m까지는 죽어도 안 오려고 해. 힘들어.」

“알았다. 멀리서 지켜만 봐다오. 누군가를 만난다거나 누군가와 대화하는지 봐주면 된다.”

「응.」

환인의 부탁에 환연은 곧장 바람의 정령을 불러들여 남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저 남자가 환인한테 무슨 짓을 했나? 보기에는 아무런 힘도 없고 허약한 보통의 사람인데.

계속 주시하고 있으니 남자 둘은 평범하게 걸어서 도로까지 나간다. 거기서 길가에 세워진 차에 올라타 어디론가 향하는데, 그 과정에 서로 대화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태평하게 콧노래를 부를 뿐.

“차에 다른 사람은 없나.”

「없어.」

“어디로 향하고 있지.”

태블릿으로 지도를 열어 환연에게 보여주자 오~? 놀라워한 환연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동 방향을 짚어주었다.

강남을 벗어나 송파구로 향하는 도로다.

「음~ 여기까지가 조종범위 한계거든? 지금 여기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 길을 타고 이쪽으로 쭉 올라가고 있어. 근데 이 남자가 뭔가 한 거야?」

“약간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팔짱을 낀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시선을 받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전문가의 견해가 필요하다고 여겨 유르파에게 물었다.

“사람이 자연스럽게 마력을 얻고 다룰 가능성이 유르파가 보기에는 어느 정도입니까.”

=그게 어느 정도인데?=

“직업자와 비유하면 1급, 잘하면 2급 초입 정도 되는 수준입니다.”

=그 정도면 0이라고 봐도 될 거야.=

“마력의 축복을 받아 자연스럽게 마력을 다루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겁니까.”

=아주 없지는 않아. 엄청난 천재에다 자질이 무지막지해서 무직자의 몸으로 궁정 술사에 오른 사람이 없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전에 안느 아가씨가 이슬이 아가씨한테 위상력의 조작에 대해서 가르친 적 있잖니. 기억나?=

“기억납니다. 위상력은 물이나 바람처럼 일종의 흐름이기에 미약한 흐름은 감지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지요.”

=맞아. 미세한 바람은 불어오는지 아닌지도 모르잖니? 마찬가지로 물도 잔잔한 개울가는 고여있는지 흐르는지도 모르고.=

“……그렇기에 위상력 농도가 터무니없이 옅은 지구에서 자연스럽게 마력을 깨우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겁니까.”

=내가 마력의 근원을 깨우친 게 아니라서 확답은 못하겠지만……. 이 세상에는 각성자가 없다며? 각성자가 없는 마당에 마력을 깨우친다는 건 적어도 내 상식에서는 불가능이라고 봐.=

=도령. 아까 찾아온 남자한테서 마력이 보인 거야?=

대련을 하느라 흘린 땀 때문에 회색 탱크탑의 가슴골이 뚜렷하게 젖은 안느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묻는다.

“너희와 비교하면 태양 아래 반딧불이나 다름없었지만…… 영혼 시야를 여니 보이더군.”

=그렇다면 지구에 도령이 모르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거네.=

“…….”

간단하게 결론을 내린 안느의 이야기에 환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찾아보면 현대에도 괴생물체 같은 이야기는 많다.

네스호의 괴수나 백두산 천지의 괴물, 빅풋, 예티, 오클라호마 민물 문어, 모켈레 음벰베에 몽골리안 데쓰웜, 팔척 귀신등이 유명하며 이외에 상상의 동물로 취급되는 생물을 포함하면 수도 없이 많다.

사방신으로 매우 유명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시작으로 동방의 용, 서방의 드래곤, 구미호, 달토끼, 맥, 인면조, 천구, 해태, 두억시니나 도깨비, 아수라, 구울, 레비아탄, 불사조, 이프리트, 그리폰, 바실리스크, 유니콘, 바이콘, 하피에 히드라, 퀴클롭스, 니드호그, 바바 야가, 인어에 뱀파이어에…….

이 모든게 수천 년에 걸쳐 사람들의 상상력이 발현되어 축적된 가상의 생물일 수 있지만, 만약 지구에 현실과 다른 이면 세계가 존재하고 거기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더해진 거라면?

일례로 플뢰 족은 엘프와 어마어마하게 흡사하다. 고전 일본 판타지의 엘프와 서양 판타지의 엘프가 뒤섞인듯한 플뢰.

루크랑 족 남녀의 짐승 수준을 적당한 수준으로 섞고 나눈듯한 수인족.

드워프가 아닌가 싶은 프라우드 족.

그외 곤충족이나 페어리, 픽시도 봤고 인어인 사비 족도 있다고 들었다. 자이언트도, 몬스터로 구분되는 고블린, 코볼트, 오크 같은 괴물들도 만났다.

이게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

기우혁의 행동도 조금 수상한 점이 있었다.

실종자 수색 의뢰라면 대상이 살아있고 집에 멀쩡히 있다는 걸 안 순간 의뢰자에게 보고만 하면 끝날 일이 아닌가. 굳이 실종자 대상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는 건가?

그러다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친 환인은 태블릿을 집어들어 SNS를 통해 실시간 트렌드를 확인했다.

최상단에 보이는 미녀, 초미녀, 여신, 3여신, 수서E마트의 태그들.

그중 가장 많은 좋아요와 리트윗된 하나를 터치했다.

[군필여고생@ASK8]

[여신.png][마왕.png]

수서 E마트에서 진짜 여신 발견ㄷㄷ 인생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첨 봤다. 그런데 같이 있던 남자 눈빛이 엄청 무서웠다…

#여신발견 #남자는_마왕인가? #저걸_봐 #살인자의 #눈빛이야

좋아요만 7천 개에 리트윗이 만 단위인 트윗 하나. 그곳에는 자신의 사진과 여자친구들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그곳 외에도 각종 사이트에 수서E마트 3여신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이 빠르게 퍼져 나가는 중이다.

‘만약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사진을 보고 찾아온 거겠지.’

고개를 든 환인은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친구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세 명 다 범상치 않은 외모지만, 자신이 보기에 유르파만 조금 독특할 뿐, 이실리테와 안느는 평범하게 아름다운 여자다.

안느의 귀 모양도 마도구로 사람처럼 변한 상태여서 어딜 봐도 지구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

이 모습에서 이계인의 흔적을 읽은 건가.

자신의 관점을 제거하고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실리테가 엘프에 가까운 외모이고 안느는 북/서유럽쪽 백인종에 가까운 외모이지만 그렇다고 이계인, 외계인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도 니오네브레스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여겨야 할 텐데…….’

환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리되면 가정해야 할 경우의 수와 그로부터 대비해야 할 준비가 미친 듯이 늘어난다.

소리없이 한숨을 내쉰 환인은 자신의 손바닥 위로 올라오는 환연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재로서는 정보가 부족해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안느 네 말대로 이면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에 대한 대응 준비만으로도 골치가 아플 수준이야.”

=여기도 직업자 세계 같은 게 존재하는 건 맞아?=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을 7할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애매한 수치네…….=

=높은 수치 아니니? 수학적으로 7할이라는 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기타 요소를 고려하는 단계니까.=

=그런가?=

=낮은 수치든 높은 수치든 적일지도 모르는 대상이잖아요. 그러면 확률이 어떠하든 간에 거기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야 한다는 말 아니에요?=

=…….=

=…….=

이실리테의 지적에 안느와 유르파가 그러네? 하는 표정을 짓는다. 환연은 그의 손바닥에 드러누운 채 손가락을 가슴에 끌어안고 물었다.

「환인. 주변 경계 시작할까?」

“여긴 니오네브레스가 아닌데 괜찮겠나.”

「애들이 내 몸처럼 움직여지지 않지만 그래도 의사는 충분히 소통돼.」

“그럼 부탁하지.”

그 후로 더 이상의 방문자는 없었다.

환인은 강하연의 연락처를 두고 많이 고민했지만, 끝내 전화는 걸지 않았다.

타초경사라는 고사성어도 있고 벌집을 쑤신다는 관용구도 있다.

괜히 건드려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 강하연을 건드렸다가 곤란한 진실이 불쑥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이쪽만 난감해질 뿐이다.

‘저쪽이 다시 접근해올 때까지 기다린다.’

많은 것이 니오네브레스와 흡사하다면 그들은 자신도 별것 아닌 것처럼 볼 것이다.

여자친구들을 직접 본 것도 아니니 아직은 경계심이 낮을 터.

만약 지구에 영구히 귀환한 거였다면 순탄하고 평온한 일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테지만, 지금은 어느 쪽으로든 움직이기 곤란한 상황이니 일단은 대기한다.

쿠우~ 뀨으. 쿠읏.

「응? 응응.」

쿠쿠루삣. 뺘으.

「그치? 응.」

여긴 좁고 사람도 바글거리는데다 시멘트도 많아서 별로 마음에 안 든다고 숙덕거리는 비상과 환연.

둘의 대화를 들으며 지구로 돌아온다면 서울 외곽의 땅을 알아봐야겠다고 환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상과 환연이 그나마 자유롭게 살려면 사람이 적고 초목이 무성한 곳이 좋을 테니까.

“음.”

머그컵을 들었던 환인은 커피를 다 마셨다는 걸 깨닫고 부엌으로 걸어가다 전신 거울 앞에서 멈춰 섰다.

셔츠 앞섬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단추를 풀자 셔츠에 가려져 있던 문양이 드러나며 빛이 조금 더 강해진다. 아니, 빛이 문양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환인은 불현듯 자신의 왼팔, 상완까지 뒤덮은 빛의 건틀릿의 밝기와 문양의 밝기를 비교했다.

비슷하다. 왼팔 쪽을 100%라고 한다면 가슴의 문양 밝기는 90%정도. 거기다 어쩐지 빛의 색감도 닮은 느낌이다.

왠지 조만간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에 머그컵을 싱크대에 두고 돌아온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불렀다.

“짐을 챙기고 돌아갈 준비를 하지.”

=어? 문양의 빛이 다 찬 느낌이 들어?=

“그런 건 아니다. 빛이 어느정도 강해졌으니 정말 차원 이동이 재차 벌어질지 대비를 해두어야지.”

왼팔의 상태에 대해서는 여자친구들에게 말한 적이 없기에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만약 문양의 밝기가 왼팔의 빛과 연관되어있다면 그때 가서 이야기할 생각인 것.

=알았어. 잠시만.=

환인의 지시는 나름 합당했기에 여자들은 빠르게 소지품을 정리한 뒤 거실 카펫에 앉은 환인의 주번에 자리를 잡았다.

오른쪽에는 이실리테가, 왼쪽에는 안느가 앉고 다리 사이에는 유르파가 앉는다. 환연은 환인의 셔츠 포켓에 들어갔고 비상은 환인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아 그가 등을 편히 기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 자세로 tv를 켠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광대 코스튬의 빌런이 탄생하게 된 계기를 그린 영화를 보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고…….

=어? 도령!=

=주인님, 가슴에서 빛이 나요!=

큐삣?

영화가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 가슴의 문양에서 빛이 흘러나와 셔츠를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설마설마하다가 정말로 무언가 벌어질 징조가 드러나자 긴장을 드러내며 환인의 팔과 허리를 꽉 붙잡았고 비상도 날개를 펼쳐 친구들을 감싼다.

=…….=

=……?=

=??=

하지만 1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여자들이 살짝 무안해하면서 슬그머니 떨어지려는 것을 환인은 그녀들의 허리에 손을 올려 끌어당기며 말했다.

“바로 이동하는 징조가 아니었나 보군. 일단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같으니 계속 기다려볼까.”

=네, 네.=

젖가슴 모양이 뭉개질 정도로 환인의 가슴에 몸을 붙인 이실리테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인다.

TV를 끄고 방벽­패널 하나를 만들어내 불을 끈 뒤 난방 기능도 꺼놓는다. 그리고 여자 친구들을 끌어안고 가만히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다되어서일까. 점차 어두워져 가는 거실 속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점차 뚜렷해져 간다.

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하교 중인지 아이들의 희미한 대화 소리 사이로 끼어드는 연인들의 색색거리는 숨결.

온몸에서 느껴지는 그녀들의 따스한 체온에 환인은 이러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포옹이 주는 스트레스 감소 효과가 뛰어나다고 하던가.’

환인은 마음이 편해지는 감각에 정신이 이완되는 것을 느꼈고, 그와 함께 척추를 따라 흐르던 훈기와 한기가 가슴의 문양 쪽으로 천천히 흘러들어 가는 것을 포착했다.

두 가지 기운이 문양으로 흘러들어 갈수록 훈기와 한기가 동시에 맺히다 빠져나가는 기묘한 뻐근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차원 이동이 벌어진다면 지금이라고.

환인이 품 안의 여자들을 끌어안으며 비상의 옆구리 깃털에 한층 몸을 파묻었을 때.

“……!”

찌릿­ 심장에 전기가 통하는 느낌과 함께 세상이 까맣게 암전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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