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40화 (240/813)

〈 240화 〉 234+ 교상?上 마을 오울링

* * *

※R18+ 고어 표현 주의!

평온의 파동은 죽은 자의 정화와 성불을 돕고 산 자에게는 마음의 평온을 주는 영혼사의 힘이다.

영혼사라면 누구나가 펼칠 수 있는 힘이라고 파르히스트 짐승신 교단의 여사제에게 들은 환인은 이때까지 딱히 평온의 파동을 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처음 평온의 파동을 목격했을 때의 감상, 그리고 주변의 반응에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에게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기술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쓰고 다녀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다고.

파르히스트에는 영혼이 별로 없었던 것도 이유였다. 밖에서 평온의 파동을 쓰면 정체를 들킬 가능성도 컸으니까.

그 때문에 약 60일간 평온의 파동을 쓴 것은 신분 증명용으로 몇 번, 감옥 미궁에서 여자 친구들의 미궁 정신 침해를 완화하는 용도로 쓴 게 다였다.

하지만 시더가 혼재화하는 모습에서 평온의 파동을 시험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었었다.

때마침 주위에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는 다른 영혼도 있었고 멜빈도 공포와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기에 평온의 파동을 테스트해보기에 최적의 상황이었다.

환인은 망설임 없이 파동을 발사했고 그 효과를 절실히 체감했다.

‘평온의 파동을 진정제와 신분증으로 치부할 게 아니었어.’

침식당하는 것처럼 혼재의 적색으로 물들어가던 흔적은 티끌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영혼들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

「으, 으으.」

「여기는……. 나는….」

말빈의 형제인지 가족인지 모를 영혼들이 깨어나는 모습에 환인은 자신의 미숙함을 느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감옥 미궁에서 언데드를 대상으로도 써보고 축제 이후 늘어난 영혼을 모아서도 써보고 정령을 대상으로도 써보고 해야 했었는데.

아무튼, 비록 영혼 상태이지만 모친과 재회한 말빈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아~! 흐어어어엉! 흐느으으응!=

「마르. 아아, 마르…」

얼마 전에 성인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마음이 너무 어린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지만 환인은 그들의 방해하지 않고 말없이 가족묘를 빠져나왔다.

말빈의 대성통곡에 저택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달려온 덕분에 환인이 상급 영혼사라는 것이 알려졌지만 소란으로는 번지지 않았다.

오히려 환인을 향한 태도가 더욱 정중해졌고 공경도 극진해졌다.

오울링에, 저택을 찾아온 이유가 억울하게 살해당한 영혼의 성불 때문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저택의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과 경비병들에게도 이 사실을 조용히 알려 한 명도 빠짐없이 환인이 상급 영혼사임을 알게 손을 썼다.

그러는 사이 말빈과 시더는 1년하고 6개월 만의 해후를 나누었고, 두 사람이 어느 정도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준 환인은 이후 저택으로 자리를 옮겨 약속했던 부탁 하나를 요구했다.

“그날 사망한 피해자들이 원한과 증오를 잊고 성불해 하늘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마을 사람 전원이 참가하는 위령제를 지냈으면 합니다.”

=위령제가 무엇인가요?=

“말 그대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입니다.”

=어… 위령제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침을 주세요. 성심성의껏 실천하겠습니다.=

바로 옆에 어머니의 영혼이 있어서 마음이 안정되었기 때문일까. 말빈은 안정된 태도로 환인이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에 환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의 절차를 알려주었다.

1. 위령제를 지내게 된 이유를 포함한 개회사(말빈 다음가는 마을의 높은 신분인 헬리사가 낭독).

2. 사건의 개략적인 보고(경비대장이 ‘그’ 사건을 언급).

3. 죽은 자를 향한 묵념과 위로하기 위한 추모사 낭독(주인인 말빈이 낭독).

4. 죽은 자가 편히 성불할 수 있도록 분향(마을의 모든 사람이 차례대로 향을 피울 것).

5. 자신이 영혼을 모아 성불을 시도.

6. 폐식.

위령비도 세우는 것이 효과가 있겠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상정하면…….

=그런 거라면 저택 앞의 동상을 치우고 위령비를 세우겠습니다! 환인 님의 성함과 살해당한 피해자들의 모든 이름을 적은…….=

「마르. 그러는 것은 곤란해. 상급 영혼사님께 폐가 되는 것은 물론…… 그 인간이 다시 공격할 여지를 줄 수 있는 행위란다.」

세계 어딜 가도 상급 영혼사의 이름을 박은 동상이나 석비는 없다. 그저 구전으로 상급 영혼사의 업적이 끊이지 않고 이어질 뿐.

=엇? 네, 어머니. 부주의하게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합니다, 영혼사님.=

“괜찮습니다.”

환인은 말빈의 곁에 앉아 조용한 미소를 띠고 있는 시더를 응시했다.

카턴에서 검은 영혼의 여자와 접촉했을 때 일어났던 사이코메트리 현상, 그것은 시더와 접촉했을 때도 일어났었다.

다만 현실과 똑같은 기억을 체험한 검은 여자 영혼과 다르게 시더는 3자의 시선에서 시더가 경험한 일을 지켜보는 쪽이었다.

=그러면 어머니, 영혼사님이 말씀해주신 위령제의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해야 할까요?=

「마르는 어떻게 생각하지?」

=마을 사람 전원을 모아야 하니 좁고 번잡한 마을 광장이나 넓지 않은 저택 앞은 맞지 않겠죠. 방앗간 앞의 공터를 임시로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주인의 덕목이란다. 헬리사는 이 어미의 젖자매로 여러 가지 지식을 가졌으니 그녀와 집사들과 의논…….」

어머니의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빈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하는 모습.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하고 아들만을 남긴 채 죽어버린 것을 후회하다가 다시 찾아온 기회를 붙잡은 모습.

그녀에게는 알드헬름 르마리테에게 여자로서 겪을 수 있는 대다수의 고문과 고통을 받고 살해당한 사람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

환인의 머릿속에 시더가 받은 고문과 잔혹한 행위가 영화처럼 다시 떠오른다.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시더는 그대신 알드헬름의 노리개가 되었다.

먼저 몇 안 되는 가문의 남자들, 아버지와 오빠, 동생들과 강제로 접붙여졌고 가문에서 일하던 하인과 남자 몸종들에게 윤간당했다.

살해 협박을 받은 빈민가의 남자들에게 집단강간 당하고 개와 돼지 같은 짐승들에게 수간까지 당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지고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정신만은 또렷한 시더에게 그때부터 육체적인 학대가 이루어졌다.

모성의 상징인 가슴과 젖꼭지가 날붙이에 의해 난도질당했으며 단시간에 수백 명을 받아들여 너덜너덜해진 음부와 항문이 나뭇가지, 작대기, 부지깽이 같은 온갖 이물질로 내부가 헤집어졌다.

고문은 그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피부가 벗겨지고 귀가 잘리고 꼬리가 끊어지고 혀가 뽑히고 손톱 발톱이 잡아 뜯기다 못해 손가락이 잘리는 고문의 풀코스.

마지막에는 가족과 친지들이 보는 앞에서 임페일먼트까지 이루어져 항문부터 입까지, 천천히 꼬챙이에 꿰뚫려 1시간에 걸쳐 천천히 죽었으며 시체마저 짐승에게 뜯어먹혀 남기지 못했다.

혼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강도의 고문이었다.

‘혼재를 만들어내고자 했지만 실패한 건가, 아니면 알드헬름은 시더의 심성을 눈치채고 가학성을 마음껏 충족한 건가.’

그럼에도 시더는 증오와 원한에 휩싸이지 않았다. 죽어서도 이성을 유지하며 그저 슬퍼하고 서글퍼했다.

아들에게 지식을 물려주지 못한 것을, 아들에게 마지막까지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괴로워했다.

정신적으로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정신병자가 지능이 높아지면 지식과 경험으로 독심술에 가깝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환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지식이 있다고 초인이나 철인처럼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며 악의 군주, 흑막, 최종 보스로 군림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아무튼, 정신병자들은 어린아이가 최애 장난감을 아끼고 가지고 노는 것처럼 가진 능력을 오직 자신의 관심사에만 쏟아붓는다.

그래서 알드헬름은 오울링을 좋은 놀이터로 인식했고, 용의주도하게 병사나 마을의 중산층 서민을 살해하는 대신 죽어도 별 지장 없는 빈민가의 하층민을 유흥으로 가지고 놀았다.

빈민들을 이용해 양적인 가학성을 충족하고 마을의 주인인 고족을 상대로 질적인 가학심을 충족하고.

이렇게 해석하는 게 옳은 건지 환인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소문을,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무언가 중요한 행동 원리 하나를 빼먹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더의 교육을 응시하던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금방 성불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비자룩스 마을과 알드헬름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도 지금 분위기에서는 어렵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별채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위령제의 준비가 완료된다면 저를 부르십시오. 그리고 시더.”

「응, 영혼사님.」

“제가 당신에게 주입해드린 영기가 다 되어 가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 모습도 희미해질 겁니다. 그리되면 절 찾아오십시오. 성불하기 전까지, 아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영혼사님!=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영혼사님.」

환인은 두 명의 인사를 받으며 1층의 홀로 나왔다.

그런데 홀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한 여자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가 싶어 저택을 나서려던 환인은 현관문 너머에서 일행과 헬리사가 대화하는 것을 일부 들을 수 있었다.

[……전의 환약이라면 가문의 금고에 있을 것입니다. 남은 것을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도록 말빈 님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어어. 공짜로 달라는 게 아니야. 돈은 제대로 낼 테니까 부탁해.]

전의 환약은 뭘 말하는 거지. 신전의 환약? 약제라면 유르파도 어지간한 건 다 만들 수 있을 텐데 일반적이지 않은 건가.

문을 열고 나가자 대화가 중단되며 헬리사가 허리를 공손히 숙이고 여자 친구들이 다가와 옆에 선다.

=도령, 일은 끝났어?=

“그래.”

위령제가 시작될 때까지 자유시간이라고 말하며 안느와 헬리사를 번갈아 보았지만, 더 나눌 이야기는 없는지 멀뚱거리며 서 있었기에 환인은 여자 친구들과 함께 언덕을 내려왔다.

쏴아아­ 철썩. ……쓰아아아­

하얀 햇빛이 비치는 별채의 거실 소파에 앉아있으니 맑고 청량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파도 소리를 백색 소음 삼아 피로해진 정신을 이완하며 환인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일단 이 마을의 성불행은 위령제가 준비되는 대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성불행 쪽은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신경 써야 하는 쪽은 알드헬름 그 인간의 목을 쳐버릴 방법과 비자룩스라는 광산 마을(도시?)의 정보다.

알드헬름 그자가 이 마을에 첩자를 심어놓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외부인이 몇 달을 머무르면 의심받기 마련이지.’

오히려 돈으로 현지인을 매수해놓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런 매수자를 찾아내는 것은 안느의 선천 재능인 진실의 주시자를 동원하면 어렵지 않지만, 그쪽은 오히려 역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으니 내버려 둔다.

매수자를 통해 자신이 상급 영혼사라는게 전해지면 그자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

환인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반드시 멱을 따버리고 싶은 놈이 호족의 직계라니. 그런 놈을 죽이겠다는 것은 한국에서 재계 서열 5위 이내의 재벌 집 자제가 기분 나쁘게 했다고 찾아가서 도끼로 골통을 쪼개버리려는 짓과 다름없다.

하물며 그 재벌 집 자제는 뇌를 장식용으로 꾸며놓고 욕망에 따라 살던 놈(길레스=벡슬)과 다르게 지능적으로 법망의 안에서 살인의 유희를 즐기는 놈이다.

‘교묘하게 모욕죄와 연좌제를 이용하는 놈이니 비자룩스도 어쩌면 멀쩡한 도시일 수 있어.’

그러한 상태라면 보복은 어려워진다. 살해는 간단하지만 그 후 혐의를 피하고 보신하는 것이 문제니까.

환인은 원기 방출 준비 상태가 된 오른팔에 시선을 주었다.

팔꿈치까지 새까맣게 물든 손.

가장 좋은 방법은 크라버리를 뒤집어버리려 준비한 수단을 채용하는 것이다. 일부 규모를 축소하면 알드헬름의 목숨만 끊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하지만 알드헬름의 목을 치는데 이걸 쓰는 것은 아까워.’

쓰고 나면 어떻게든 그 방식이 알려질 가능성이 크다. 기획했던 대로 도시 자체를 지워버릴 생각이라면 괜찮지만, 아니라면 흔적이 남을 테니까.

그것도 아니면 다시 외유를 나가는 놈을 쫓아가서 납치, 으슥한 곳으로 데려와 다짐육으로 만들어버리는 방법도 있다.

문제는 알드헬름이 언제 다시 외유를 나갈지 모르니 채택하기 어렵다는 것.

“흠.”

알드헬름을 암살할 방법을 구상하며 정신의 피로를 풀던 환인은 잠시 나갔던 여자 친구들이 밝은 얼굴로 우르르 들어왔다.

자신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건지 작게 속닥거리지만, 감각이 확대되고 날카로워졌기에 환인은 어렵지 않게 그 대화를 엿들었다.

=역시 고족 가문이라 그런지 신전제 환약을 많이 가지고 있었네. 구해서 다행이야, 그치?=

=응. 없어도 딱히 곤란하진 않았지만.=

=모야모야~. 도령의 아이를 가지겠다는 암시?=

=아, 아니거든!?=

무슨 이야기인 걸까. 때마침 현관 입구에서 헬리사와 나누던 대화가 생각난 환인이 물었다.

“저택에서도 헬리사와 그 이야기를 나누던데, 신전의 환약은 뭘 말하는 거지.”

=응? 아…….=

설마 이야기가 들렸을 줄은 몰랐는지 여자 친구들이 어색하게 시선을 나눈다.

잠시 후 돌아온 답변을 들은 환인은 작게 중얼거렸다.

“신전에서 파는 피임 환약이라고.”

=으응.=

신전제 환약의 정체를 알게 된 환인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과 몸을 섞으며 임신을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섹스에는 필연적으로 임신 확률이 동반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환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책임을 질 생각이다. 그저 씨만 달라고 들러붙는 여자들이 아닌, 자신에게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고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 여자들이다.

때문에 이실리테와 안느를 여자 친구로 받아들인 뒤 환인도 나름대로 생각해서 이 세계 여자들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무직자인 여성들은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임신 기간과 출산을 겪고 임신에 관한 위험성도 존재하는 반면…….

‘직업자 여자는 몸이 튼튼하고 질병 내성도 일반인보다 높은 편이라 싸움박질 같은 짓만 하지 않으면 유산이나 사산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였지.’

근접 직업자인 전사나 투사는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그런 위험성은 0%에 수렴한다.

엽사도 나름 튼튼한 몸이라 몸을 혹사하지만 않으면 착상=출산 공식이 성립한다며 출산을 담당하는 짐승신 교단의 사제에게 들었다.

신체 능력이 엽사하고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약한 술사 직업자들도 안정기만 지나면 마차 여행을 하는 것도 문제가 없을 수준.

그렇기에 그녀들이 임신하게 되면 미궁 탐사에 데려가기는 힘들겠지만, 그땐 행정관에서 임시 동료를 구해 미궁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여행? 마차를 구하면 그만이다.

‘임신하게 되면 이야기하겠지.’

환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설마 그녀들이 피임약을 복용 중이었다니.

팔짱을 낀 채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에 찔리는 게 많은 그의 여자 친구들은 그가 화났다고 생각해서 전전긍긍했다.

=도, 도령. 미안해.=

“……?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억양의 고저가 그다지 없는 목소리. 평소에는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화난 것처럼 들려 안느와 이실리테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남자는 피를 이은 자식을 보고 싶어 하잖아……? 우리가 말도 없이 피임약을 먹어서 임신을 피해왔으니까…….=

=임신하게 되면 주인님의 여정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고의로 피임약을 먹었어요. 죄송합니다…….=

……내가 화났다고 생각해서 사과하는 건가.

환인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들이 꼭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나지 않았으니 그렇게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너희들의 임신에 별말 하지 않았던 것은…….”

이러이러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거라고 설명하자 그녀들은 적잖이 감동한 것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 그랬구나.=

“너희들의 피를 이은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귀엽고 사랑스럽겠지.”

환인의 적나라한 대답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그녀들의 외모 유전자를 절반만 물려받아도 평균에서 월등히 높은 외모를 가진 아이가 태어날 테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부모님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의 아이에게 사랑을 줄 자신은 없는 환인이었다.

하지만 참고할만한 행동 샘플은 넘칠 정도로 충분하니 아버지의 역할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지.

환인은 후,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가 생기더라도, 생기지 않더라도 너희를 탓할 생각도 없고 내 마음은 변치 않을 거다. 그러니 너희도 있는 그대로의 날 받아주었으면 한다.”

=응! 물론이야!=

=네, 주인님.=

이실리테와 안느는 바깥에서 내리쬐는 햇빛만큼이나 밝고 환한 미소로 환인의 뺨에 동시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녀들이 어떤 마음인지 선명히 와닿는 모습에 작게 웃은 환인은 문득 든 궁금증을 중얼거렸다.

“나와 이실리테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남자라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루크랑족 남자의 특징을 타게 되는 건가.”

=아니요. 루크랑 여자가 낳는 아이는 사내일 경우 아빠의 종족을 따라가고 여자 아이는 엄마의 종족을 따라가요.=

“그럼 나와 이실리테의 사이에서는 인간이 태어난다는 건가. 그럼 플뢰는?”

부끄러워하며 손가락을 꼼질거리는 이실리테의 옆에서 안느도 귀 끝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이며 대답했다.

=우리는 크게 변하지 않아. 남편과 아내의 종족이 반반 섞이는 정도? 나랑 도령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회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귀는 반 뼘 정도일 거야.=

플뢰 족의 귀는 일본 판타지의 엘프처럼 귀가 20cm 정도로 길쭉하다. 그 절반이라면 10cm. 말 그대로 하프다.

“만약 루크랑 남자와 플뢰 여자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되지.”

서로를 바라본 이실리테와 안느는 포근포근한 얼굴로 구경하던 유르파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세 여자는 시선을 나누다가 자기들도 궁금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나눈다.

=이슬이는 플뢰 여자가 루크랑 남자랑 결혼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아니……. 그건 안느네 종족 이야기잖아. 네가 더 잘 아는거 아냐?=

=나도 들어본 적 없어서 그러지. 유리 언니는 들어본 적 있어?=

=플뢰 여자가 결혼 상대로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종족이 루크랑하고 사비 족이라는 말은 들어봤어.=

=역시 밖에도 그렇게 알려져 있구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녀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던 환인이 끼어들었다.

“듣자 하니 루크랑 남자의 평판은 다른 종족에게 별로 좋지 못한가 보군.”

=네……. 보편론이지만 루크랑 남자는 남성우월주의가 모든 종족 중에서도 독보적이라 결혼 상대로는 환영받지 못한다고 들었어요.=

=나도 들었어. 차라리 사비 족 남자가 낫다고…….=

사비 족. 아직 본 적은 없지만 들은 소문에 따르면 리저드맨 친척 같은 종족이다.

포유류와 파충류로 생물 분류 단계의 강?이 다른데도 교배가 가능하다는 건가.

=여자를 다루는 것도 난폭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대. 성기도 여자들하고 안 맞게 이상한 모양새기도 하고.=

=결혼 전에는 멀쩡했는데 결혼하고 났더니 이상해졌다는 것도 들었어.=

=이슬이 너도 루크랑 남자랑 결혼한 사람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며?=

=진실이 아니라 뜬소문 같은 걸 들은 거뿐이야.=

“…….”

그 정도로 심했었나. 하지만 지금까지 만나본 루크랑 남자들은 꽤 멀쩡했었는데.

처음 인연을 맺은 행상인 스사는 연위라는 애인을 만들었지만, 가정에 충실한 남자였다.

백려강의 호위인 레심은 그저 외모만 늑대 인간인 한국 사람과 다를 바 없었고 칸트 마을의 유지인 칸트위도, 파르히스트의 펜리 성주나 무사단장인 아렐도 겉으로는 멀쩡했다. 저 말빈도 평범했고.

생각하던 환인은 줄곧 품고 있던 궁금증을 해결할 분위기인 듯 해서 여자 친구들에게 물었다.

“루크랑 남자에 대한 인식이나 사회 평판, 남녀 성비를 생각해보면 라드세아는 모계 사회가 되는 게 당연할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지나친 부계 사회로 보인다. 여기에 모종의 불가항력적인 사항이 있는 건가?”

환인의 질문에 플뢰인 안느도 궁금하다는 듯이 이실리테를 쳐다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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