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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239화 (239/813)

〈 239화 〉 233 교상?上 마을 오울링

* * *

회색 후드 로브를 입고 저택으로 올라가는 길에 집과 감시탑 쪽을 살핀 환인은 역시나 파수꾼과 감시병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제 헬리사와 올라갈 때는 느껴지지 않던 시선이 여자 친구들하고만 오르자 찌를 듯이 날아오고 있었던 것.

시선의 강도가 손님을 받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일이 살짝 꼬일듯한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자신이 소문을 모으던 행동의 의도가 와전된 듯 한데.

‘여관의 급사를 통해 먼저 연락을 넣었어야 했나.’

아니나 다를까 저택에 도착하자 헬리사가 4급의 여전사, 그리고 4급의 여법술사 두 명에 무장한 여자 병사 넷과 저택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살기와 분노 사이의 어중간한 기세가 환인의 기감을 쿡쿡 찌른다. 특히 헬리사가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대접해주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같은 생각을 하는 표정.

=뇌술사네?=

=분위기가 안 좋아…… 안느, 준비하자.=

=응.=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 친구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환인은 노란 머리카락의 법술사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

전투기의 소닉붐 같은 느낌으로 둥둥 퍼져나오는 술법사들의 아우라다. 그런데 어떻게 속성을 눈치챈 걸까. 노란 머리라서?

환인은 여자 친구들에게 대기하라고 손짓한 뒤 헬리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무직자인 자신이 나서는 게 그녀들이 덜 자극받을 거란 생각이었다.

여자들이 위협을 느끼지 않게끔 몇 걸음 정도 혼자 앞으로 나선 환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할지, 못할지는 손님의 의사에 달린 듯 합니다. 무슨 일로 완전 무장을 하시고 저택을 다시 찾아주셨는지 그 이유를 여쭈어보아도 될는지요.=

대답은 정중하지만 말속에 뼈가 느껴진다. 자세 또한 미묘하다. 왼손은 배에 가지런히 올리고 있었지만, 허리 뒤로 숨긴 오른손은 비수나 독침을 들고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이대로면 100% 싸움이 벌어질 분위기.

벌어진다 해도 상관없는 환인이었지만, 이 상황은 오해가 빚어낸 마찰이었기에 우선 대화로 풀기 위해 본심을 전했다.

“제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한 것은 말빈 씨를 어떻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날 찾아온 역겨운 자들도 그리 이야기했었습니다.”

“…….”

생각해보니 그렇군.

안느는 안에 착용한 구세의 빛 탓에 망토를 두른 판금기사 같은 모양새의 6급 직업자. 이실리테도 비슷하게 판금사슬 전사고, 유르파도 지팡이를 쥔 6급의 비술사다.

마르테 그 인간도 무직자였고 자신처럼 고위의 직업자를 대동했겠지. 헬리사의 입장에서는 트라우마가 자극받은 기분일 거다.

잠시지만 말문이 막힌 탓일까. 헬리사와 여자들의 눈빛이 흉흉해지며 여전사의 손이 허리춤의 검자루에 올라가고 법술사는?

‘진짜 뇌술사군.’

왼손에 쥔 지팡이의 머리 부분에 노란 전기가 빠직거리며 모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더라도 동귀어진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내는 여자들. 그 기백에 여자 친구들도 긴장을 드러내는 것을 느낀 환인은 살짝 고개를 가로젓고는 재차 오해였음을 강조했다.

“서로 간에 오해가 빚어진 듯 합니다. 어제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을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우선 진정하시고…….”

=도령, 저 언니들 지금 눈이 돌아가서 당장이라도 공격할 거 같거든? 그냥 빨리 신분을 밝히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자신이 영혼사라고 밝혀도 믿지 않고 ‘죽어라, 이 악적!’하면서 달려들 분위기니까 그렇지. 그렇다고 평온의 파동을 쓰기 위해 손을 들었다간 공격 의사로 여길 거 같고.

긴장감이 끊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저쪽의 모습에 이실리테와 안느도 무기를 빼 들려 하고 유르파도 싸움에 참전할 생각인지 작은 구슬 몇 개를 손에 꺼내 쥔다.

공간 진동 폭탄이다.

기감이 강화된 덕에 그것을 모두 느낀 환인은 될 대로 되라 싶어서 일단 정체부터 밝혔다.

“저는 영혼사입니다.”

=…….=

=……!=

어이가 없었든지 기가 막혔든지 이유야 어쨌든, 헬리사와 여자들에게 한순간 틈이 발생한 것을 느끼고 재빨리 말을 던졌다.

“지금부터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저쪽이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나서기 전에 두 손을 마주 잡아 깍지 낀다. 그걸 본 법술사가 지팡이를 움찔거렸지만 번개가 날아오진 않았다.

그 행동을 모두 지켜보던 환인은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화아악­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회백색 물결이 포근함을 품고 빠르게 퍼져나간다.

=어, 어?=

=이…건.=

평온의 파동이 주는 효과 때문인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병사들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헬리사의 다부진 표정도 온천에 들어간 것처럼 서서히 풀어지고 손대면 베일듯한 기세를 내뿜던 여전사도 평온의 파동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 이거 진짜 평온의 파동이야?=

=직접 본건 나도 처음이야! 헤, 헬리사 님? 어떻게 해요?=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은 이실리테와 안느가 재빨리 튀어나와 자신들의 몸으로 환인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이쪽은 진짜 영혼사니까, 언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좀 진정해! 거기 전사 언니는 그만 무기에서 손 떼고 뇌술사 언니도 흉흉한 기운 좀 집어넣고!=

=당신들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은 것은 이쪽도 당신들을 의심해서였어요. 당신들이 나쁜 짓을 해서 영혼이 대량으로 발생한 게 아닌가 했던 거예요.=

갑자기 앞으로 나선 이실리테와 안느의 행동에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찔한 여자 법술사가 더듬거린다.

=아. 그게, 그건…….=

=응응, 서로 오해한 거니까 일단 무기부터 거두자?=

=진정하세요. 우리는 싸우려는 의사가 없어요.=

잠깐 머리가 굳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이던 여자들에게서 날선 기세가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태를 파악한 두 명의 직업자와 병사들은 큰일 났다는 얼굴로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영혼사를 향한 공격은 패륜보다 더 위중한 범죄로 취급한다. 영혼사를 향한 공격은 국가 전복 획책과 같은 수준의 죄를 적용하는 곳도 있을 정도.

헬리사는 땅, 챙그랑­ 뒤에 숨기고 있던 비수를 후두둑 떨어트리고는 달려 나와 환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쿵!

=영혼사님께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 이 행동은 모두 저의 독단이니 저를 벌하시고 아이들과 말빈 님은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쿵! 쿵! 쿵!!

매끈하고 하얀 이마가 땅에 부딪힐수록 벌겋게 변하다 피가 흐르기 시작하고, 그 모습에 벌벌 떨던 여자들도 우르르 달려 나와 헬리사의 뒤에 무릎을 꿇었다.

환인은 소리 없이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우라가 안 보이는 것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군.

그렇다고 해도 자신에겐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은 아우라 무증상이기에 짧은 상념을 치우고 석고대죄하듯 엎드린 헬리사에게 다가가는 순간.

=기, 기다려주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저택의 현관문이 쾅­ 열리며 말빈=루브이주가 뛰쳐나왔고 그 뒤를 저택의 하인, 하녀들이 기겁한 얼굴로 뒤쫓아왔다.

=도련님! 아니 됩니다!=

=안 돼요 도련님! 돌아오세요!!=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을 잡은 환인은 성가심에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상대로 말빈은 넘어지다시피 헬리사를 감싸듯 안으며 환인에게 울먹이는 얼굴로 소리친다.

=제발! 재산이든 뭐든,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랑 미궁도 전부 드릴테니까 헬리사를 용서해주세요!=

“…….”

애달프게 소리치는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려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 뒤쫓아온 하인과 하녀들도 넙죽 엎드려 말빈과 헬리사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한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 앞에 넙죽 엎드린 모습에 악당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 환인은 약간이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을 느끼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오르막길로 스물 남짓한 오울링의 병사들이 우르르 뛰어 올라왔다.

필사의 각오가 스며든 얼굴이다.

=이 극악무도한 악의 앞잡이야! 이제는 우리도 참지 않겠다아앗!!=

“……후우.”

어디선가 쳐다보는 느낌이 계속 들더라니. 다리 중앙의 망루에서 이 상황을 본 병사들이 달려온 듯 하다.

환인은 마르테를 향한 살의를 1스택 더 쌓으며 창을 꼬나쥐고 덤벼드는 오울링의 병사들을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단…… 좀 두들겨서 진정시키는 게 좋겠군.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될듯하니.

병사들이 무기를 꼬나쥐고 덤벼드는 모습에 자초지종을 모르는 말빈과 하인, 하녀들은 일말의 희망을 표정에 띄웠지만, 헬리사를 비롯한 나머지들은 얼굴에 핏기가 모두 빠져나간 표정이 되었다.

=아, 안 돼요! 그분은 영혼……!=

투콱! 우득, 콰지직­ 쾅!

끄아악! 으크억!? 꽤애액!

……사, 님…인데……?

말리려고 몸을 일으키려던 헬리사가 우뚝 굳었다.

어느 순간 손에 기다란 봉을 영혼사님이 봉을 휘두르고 찌를 때마다 오울링의 병사들이 땅을 뒹굴고 하늘을 날아간다.

뻐걱! 빡! 우지끈­!

끄아앙­! 으아아악! 꿱……!

머리통을 얻어맞은 여자 병사가 눈이 뒤집힌 채 쓰러지고 봉에 다리가 걸려 넘어지던 병사가 풍차처럼 회전하며 다른 병사와 부딪쳐 도미노처럼 넘어진다.

공간 진동 폭탄을 손에 꼭 쥐고 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유르파가 아가씨들에게 물었다.

=…저기, 아가씨들? 자기를 말려야 하는 거 아니니……?=

=즐기시게 두세요.=

=응. 도령도 문답 무용으로 악당 취급을 받아서 좀 짜증 난 거 같고, 저들도 저렇게 얻어터져야 자기들이 공격한 사람이 영혼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마음이 좀 가볍겠지.=

제멋대로 착각했다가 제멋대로 살려달라고 용서를 빌다가 제멋대로 오해해서 공격하고.

배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고 참외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신지 말라는 말이 있다지만 대화를 조금이라도 시도했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지 않은가.

환인의 봉에 얻어맞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병사들의 모습에 속으로 조금은 고소해하는 이실리테와 안느였다.

=끄으으….=

=어우, 아우우.=

=으어…….=

스무 명 남짓한 남녀 병사들이 쌍코피가 터지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채 널브러지는 데는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여기저기 쓰러져 얻어맞은 부위를 감싸고 웅크리며 고통에 신음하는 병사들.

그들 중에는 3급과 2급 직업자도 몇 명 있어 마냥 약하지만은 않은 병사들이지만, 4급+ 이형종도 단숨에 박살 내버리는 환인에게는 어린아이나 다름없다.

얼타고 있던 헬리사는 병사들이 다 쓰러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곤 벌떡 일어나 환인을 가리키며 저분은 영혼사이지 그 악종들이 아님을 피력했다.

늦어도 한참 늦은 지적이지만 어쨌든 그걸로 오해는 풀렸고, 환인의 예상대로 분위기는 그제야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리되었다.

오지게 얻어터진 병사들이 환인의 예상대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표정을 한 채 우와, 영혼사님 존나 세다 이러고 있지만 어쨌든.

조금 일이 커지긴 했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사태가 정리됐다고 봐도 되겠지.

소문을 종합해보면 위령제 같은 것은 치르지 않았고 오울링에는 그러한 풍습도 없다 하니, 영혼을 모아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위령제를 치르면 엉뚱한 소문이 퍼져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환인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담담하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은 오해라곤 해도 말빈 씨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왔습니다. 그 충정을 보아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닷!!=

“힘찬 대답이 좋군요. 그럼 병사분들은 지금 올라오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헤프닝이었음을 설명하고 돌려보내십시오. 저희가 내려갈 때까지 누구도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주시면 됩니다.”

=네, 넵!!=

너구리처럼 두 눈이 시퍼렇게 물들고 쌍코피를 흘리는 3급의 여자 경비대장이 척, 경례를 올리곤 후줄근해진 병사들과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간다.

환인은 천칭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멍하니 주저앉아있는 말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아, 그, 저… 정말 죄송해요…….=

“오해로 벌어진 일인 만큼 도도하게 흐르는 페이웰처럼 흘려보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네, 넵.=

어제 만났을 때 보여주던 다나까 말투는 억지로 하던 것일까. 부끄러운 듯 눈을 가리며 어린 티를 드러나는 말빈을 잡아 일으킨 환인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말빈 씨는 저와 잠시 이야기 좀 하실까요. 헬리사 양만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긴장한 게 역력한 헬리사와 멜빈 두 사람을 데리고 가문묘로 향하자 이실리테만 뒤를 따른다.

저택 상주 병력들과 시종인들은 못내 신경 쓰인다는 듯이 어정거렸다. 그렇다고 6급 직업자 두 명, 안느와 유르파를 뚫고 지나갈 용기가 없어 조바심만 애태울 뿐이다.

가족묘로 내려온 환인은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영혼들을 보며 작게 콧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엉키고 다투면 자연히 양기가 발생한다. 양기에 끌리는 영혼의 성질을 생각해보면 이 모습은 확실히 문제가 많아 보이는 장면이다.

환인이 말빈과 함께 납골묘 앞에 서 있는 꼬리 둘 달린 미망인 여자 영혼, 시더 앞에 서자 그제야 땅을 보던 시더의 고개가 들리고 눈망울이 커쳤다.

말빈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온갖 감정이 휘몰아친다.

그런 시더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환인은 말빈과 헬리사를 향해 몸을 돌리고 말했다.

“마을에 대강이나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남자는 제가 쫒는 남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예? 어, 설마 영혼사님도 그 인간에게 당하신 게 있어요?=

“파르히스트 북쪽에 카턴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 얼마 전 큰 일이 벌어졌었지요.”

카턴에서 벌어졌던 일을 이야기해주며 수첩에 그려놓은 마르테의 몽타주를 보여주자 말빈이 어깨를 살짝 떨기 시작했다. 뒤에 다가온 시더도 그 몽타주를 보더니 가슴을 움켜쥐고 헐떡인다.

원초적인 공포에 잠식된 모습을 바라보던 환인이 조용히 부탁했다.

“그자에 대해서 아는 것을 이야기해주시겠습니까.”

그때까지 벌벌 떨던 말빈은 헬리사가 옆에서 손을 꼭 잡아주자 흐읏, 짧은 한숨을 토해내고 흔들리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 인간의 이름은 알드헬름 르마리테 비자룩스……. 여, 여기서 남쪽에 있는 비자루크스 산맥의 광산 도시를 다, 다스리는 영주 직계예요.=

마르테는 미들 네임의 아나그램인가.

옆에서 헬리사가 보듬어주고 있지만, 말빈은 좀처럼 공포심을 밀어내지 못하는 모습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인간이,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 모르겠어요. 길거리에서 놀던 애들, 애들이 부딪쳤다고 사람들을 그렇게, 그렇게 살해하고 재밌다는 듯이 웃는 건, 웃는 건!=

“말빈 씨의 어머니도 그자에게 살해당하셨군요.”

=예, 예. 처음에는 우리가, 우리 마을 사람들이 호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는…… 누가 봐도 살인이랑, 고문이 목적인 것처럼 행동했……어요. 어, 엄마도 그때…….=

「아아…….」

이야기를 듣던 시더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웅크리며 울음을 흘리는 게, 견디기 어려운 기억이 떠올라 괴로움에 몸서리치는 모습이다.

문제는 그럴수록 시더의 몸을 이루는 영혼 일부가 희미하게 적색으로 물들어간다는 것.

“…….”

환인은 말빈에게 잠시 이야기를 멈추라고 신호를 보낸 뒤 손끝과 발끝을 뒤덮은 붉은빛이 점차 영혼을 잠식해가는 시더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아아아…… 흐으으아아…….」

급기야 흐느낌에 귀기가 서리기 시작한다.

이대로 두면 확실하게 혼재로 변할듯한 조짐. 환인은 두 손을 깍지 끼고 평온의 파동을 쏘았다.

불규칙적이기에 아름다운 빛의 요동이 트라우마로 몸을 떨던 말빈과 비관에 잠겨가던 시더를 포근히 휘감는다.

약간씩 핏빛에 물들어가던 시더의 영혼이 원래의 회백색을 되찾았다. 절망을 부르는듯한 흐느낌도 평범한 눈물로 변했고 정신도 차렸는지 눈물이 범벅이 된 애처로운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영혼사님. 보기 흉한 꼴을 보였네.」

‘강제력을 쓰는 것보다 진정 효과가 뛰어나군. 그렇다면…….’

잠시 생각한 환인은 성스러운 파동의 효과로 부정적인 감정 상태에서 벗어나 어리둥절해하는 말빈에게 말했다.

“말빈.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습니까.”

=…보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는데…….=

혹시 영혼사님이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실 수 있나? 그런 기대감을 보이는 말빈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아직 소매로 눈물을 찍어 감추는 시더를 보며 말했다.

“어머니를 만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후에는 저도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위험하거나 힘든 일은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저 정말요?! 어머니,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게만 해주시면 뭐든지 도와드릴게요! 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아직 어려서 그런가. 공수표를 남발하는 게 환인의 눈에는 미덥지 못하다.

그런 마음은 헬리사도 비슷한지 말빈의 뒤에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격한 반응을 보이는 말빈에게 약속을 받아낸 환인은 시더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영기를 밀어 넣어주었다.

「아……?」

시더의 회백색의 영혼에 코팅 되듯 한차례 윤기가 지나간다.

=마…님?=

=…엄마?=

「마르, 헬사. 내, 내가 보이는 거니……?」

‘방금 그건 뭐였지.’

시더에게 영기를 밀어넣는 순간적으로 눈앞을 스쳐 지나간 장면에 미간을 작게 찌푸렸던 환인은 극적인 상봉을 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다가서는 그들 사이에서 비켜주었다.

=엄마아!!=

그러자 왈칵 눈물을 뿌리며 시더의 품에 뛰어드는 말빈.

감동의 포옹 같은 장면은 없었다. 말빈은 그대로 시더를 관통, 건너편 벼랑에 쾅 얼굴을 처박고 벌렁 자빠진다.

=끄아앙!=

「아들!」

=도련님!=

온몸으로 꽁트를 보여주는 말빈을 조금 그런 시선으로 보던 환인은 옆에서 들리는 가쁜 숨소리에 이실리테를 돌아보았다.

하얗게 변할 정도로 꾹 다문 입술. 잘게 떨리는 어깨. 꽉 쥔 주먹.

얼굴이 살짝 상기된 이실리테가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이실리테의 웃음 포인트는 몸개그인가.’

말을 걸었다간 웃음을 터트릴 모양새에 그녀를 배려해준 환인은 고통의 눈물인지 감동의 눈물인지 모를 것을 눈가에 매달고 웃는 말빈에게서 다른 영혼들로 시선을 돌렸다.

평온의 파동에 맞은 허깨비 같은 영혼들이 조금씩, 약간씩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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