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 224 오울링으로 가는 길
* * *
이유를 묻는 환인을 멍하니 바라보던 안느가 짝, 손뼉을 쳤다.
=아~ 도령은 모르는게 당연하겠네. 니오네브레스에 가장 인구가 많은 종족은 루크랑 족이야. 플뢰, 프라우드, 플라비우스 3개 종족을 다 합쳐도 루크랑 족이 더 많거든?=
그런 루크랑 족의 평균 수명을 내면 대충 100살 정도 된다고 한다.
=거기에 타종족 평균 수명을 백분율로 내는 거야. 각 종족의 수명이 다르고 성장 시기도 다른데 나이로 대략적인 사회의 상하를 정하는 건 안 맞으니까.=
“……그래서 안느는 20대 초반이고 이실리테는 10대 후반이라는 건가. 유르파는 30대인 거고.”
=응.=
그래서는 더 맞지 않을 텐데.
100살 수명의 30살 남자가 300살 수명의 90살 남자와 만나 친구가 되더라도 100살 수명 남자가 40대가 될 때 300살 수명의 남자는 여전히 30대일 테니 말이다.
=그냥 하나의 지표인 거야. 상대 나이에 따라 존댓말과 반말을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어. 어린애가 아닌 이상 존댓말 하는 사람은 죄다 존댓말을 쓰고 반말하는 사람은 죄다 반말을 쓰니까.=
이외에는 사회적 지위와 신분으로 반말, 존댓말을 나눠 쓴다고.
환인의 시선이 이실리테에게 향했다.
이실리테의 배다른 누이를 성불시켜줄 때 들은 이실리테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그래서 액면가도 비슷했기에 스물아홉이라고 생각했는데 평균을 내면 10대 후반이라니.
“…….”
환인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이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외모의 액면가만 믿어야겠다고 말이다.
‘그러면…….’
100살을 평균 지표로 여자 친구들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유르파의 수명은 230년, 안느의 수명은 300년, 이실리테의 수명은 약 150년.
환인은 피식 웃었다. 역시 이 세상은 다른 세상이군. 수명이 150~300년이라니.
“그렇다면 우리 중 내가 가장 먼저 죽겠군.”
샌드위치를 다 먹고 빈 바구니를 이실리테에게 넘겨주며 말한 환인은 여자 친구들의 표정을 보자마자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환자분의 수명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듯한 표정들.
=주…인님?=
=그, 그게 무슨 말…이니?=
=……도령네 종족은 수명이 보통 몇 년인데?=
덮칠 듯이 다가오는 여자 친구들의 모습에 환인은 담담한 모습으로 말했다.
“통계학적으로 봤을 때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한 사람의 전성기는 40살에서 50살 정도면 끝난다. 기대 수명은 80년이 보통일까. 오래 산 사람은 130살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절대 흔하지 않지.”
=그게 뭐야! 수명이 50년 넘게 들쭉날쭉한 종족이 어딨어!=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바락 소리 지르는 안느. 이실리테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콧잔등을 실룩거리며 환인의 손을 잡고 묻는다.
=주인님은 오, 올해 몇 살이신…데요?=
“스물여섯이다.”
여자 친구들의 말이 없어졌다.
갈롯에게 받은 지도에는 그녀가 기입한 도시와 마을 외에 엽사 조합에서 구입한 촌락, 마을, 도시 위치가 일부 기록되어있다.
파르히스트와 주도 라수비탄 사이에 존재하는 마을은 총 3곳, 촌락은 9곳 정도. 물론 기록되지 않은 마을과 촌락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환인 일행이 향하는 곳은 직선거리로 200km가량 떨어진 강변 마을 오울링이다.
“…….”
뒤를 돌아본 환인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아무 말 하지 않는 여자 친구들을 볼 수 있었다.
=…….=
=…….=
점심을 끝내고 출발한 뒤부터 땅만, 기승 중인 쿠에의 뒤통수만, 하늘만 바라보는 여자들.
‘그럴 만도 하지.’
이실리테의 종인 인원족은 12~15살이면 성인이 되고 거의 80살, 90살까지 젊은 외모를 유지한다.
유르파의 종족인 흡정족은 20살이면 성인이 되고 그 후 죽을 때까지 성인의 외모를 이어가지만, 정기를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면 늙는다.
안느의 종족인 플뢰의 경우는 30살에 성인식을 치르는데 그때까지 소년, 소녀의 모습을 유지하다가 성인식 이후 급격하게 성장을 이룬다. 그리고 죽기 몇 년 전까지 젊음을 유지하다가 급격하게 늙고 죽는다.
그런 그녀들이 보기에 18세에 성인이 되고 젊음은 20년도 채 유지되지 않는 데다 죽을 때까지 계속 늙어가는 자신의 종족은 페널티가 극심한 종족으로 보이겠지.
‘선천 능력, 종족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명이 길지도 않으니까.’
자신이 그녀들보다 얼마 못 산다는 것이 그렇게 충격이었을까. 언제나 밝고 건강한 성격이던 안느마저도 세상 심각하게 땅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환인은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자신이 실소를 흘렸다는데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그녀들을…….
그순간 환인은 미약한 살기를 포착했다.
널 죽이겠다는 적나라한 살기가 아니라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찾았을 때 낼 법한 기척.
한참을 달리다 몇 분 전부터 걷기로 전환했는데 그사이 무언가가 이쪽을 포착한 모양새다.
살기의 방향을 가늠하던 환인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비상의 뒤통수를 보았다.
비상이 기척을 포착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알아채다니, 기척 감지가 갑자기 왜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넓어진 거지.
감옥 미궁 16층에서 기감이 예리해졌던 것에 원인이 있는 건가.
자신의 감각이 잘못되었다곤 전혀 생각하지 않은 환인은 이 느낌을 기억하는 한편 살기의 방향과 거리를 가늠한다.
“…….”
살기가 날아오는 방향이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마치 먼저 앞으로 나아가 길목을 막으려는 듯한 이동 궤적.
쿠?
그 때문인지 비상이 작게 울며 살기가 날아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직후 살기의 움직임이 멈추고 살기의 양도 대폭 감소했다.
……쿠우. 쿠엣. 쿠쿠.
걸음을 멈춘 비상이 환인을 돌아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칭얼거린다. 그 기특한 행동에 환인이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무언가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 야생 마수인 것 같군.”
쿠엣? 쿠우웃!
진짜? 그럼 혼내줘! 하고 우는 것을 들으며 환인은 천칭을 허리의 주머니에서 빼 들었고, 넋을 놓고 있던 이실리테와 안느도 반사적으로 대검과 천벌의 망치를 꺼내 쥐어 물었다.
=도령? 뭐야?=
=주인님. 적인가요?=
정신을 아주 놓진 않았군. 반대로 살기는 이제 아주 희미해져서 환인도 신경 쓰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수준이 되었다.
“그래. 살기가 느껴지나.”
=……아니….=
=아니요…….=
환인은 말없이 최하급 영혼 구슬 두 개로 3중 영혼 화살을 생성, 살기가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쏘았다.
핏
소리는 없었지만 영혼 화살이 총알처럼 날아가 풀숲으로 사라졌다. 직후 캬아앙! 고양이과 맹수의 비명과 함께 갈색과 회색 무늬의 자동차만 한 네발짐승이 수풀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캬으으으으!
호랑이를 닮은 대가리에는 악마의 뿔 같은 것이 두 개가 나 있었는데 영혼 화살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는지 검붉은 피가 줄줄 흐르는 중이다.
=쿠알이네.=
=강해?=
=4급 정도 돼. 길이 희미해져서 그런가 저런 게 튀어나오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르르 거리는 쿠알. 덤벼들려 하면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맡겨두려 했지만…….
그르르르…….
아무래도 조심성이 강한 종인지 자기 은신을 간파한 것과 이실리테, 안느의 참전에 불리함을 느낀 듯 도망치려는 낌새가 눈에 보였다.
저런 것들은 대부분 집요하게 추적하며 성가시게 구는 것들이다. 도망쳐도 다시 돌아와 습격하려 하겠지.
환인의 예상대로 쿠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을 받아 극도의 경계심을 품고 도망칠 각을 재던 중이었다.
그리고 도망치기 위해 마악 몸을 돌리려던 순간.
두두두둑
눈알에 무언가가 연달아 꽂히는 고통에 앞발을 크게 들며 캬오오오옹!! 비명을 질렀다.
의식이 사라져가며 몸에 힘이 빠진다. 쿠웅, 몸을 늘어트린 쿠알은 자신이 무엇에 죽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4발의 3중첩 영혼 화살에 눈알과 뇌가 한꺼번에 꿰여 죽은 쿠알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손에 쥐고 있는 천칭을 내려다보았다.
‘영혼 화살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중첩도 더 가능할 것 같고.’
시험 삼아 최하급 영혼 구슬로 화살을 중첩해보자 5개까지 중첩된다.
영혼 구슬이 30개일 때 3중첩이 된 것과 50개일 때 5중첩이 된 것을 보면 개수와 중첩 수에 연관성이 없다고는 못하겠지.
그사이 죽어버린 마수를 살피다가 뒷다리를 잡고 환인이 있는 곳까지 끌고 온 이실리테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이거 무두질해도 될까요?=
“그래.”
=나도 도와줄게.=
=응. 고기는 저녁에 구워먹을 거야. 잘라낼때 잘 잘라야해.=
=어. ……어? 고기?=
=쿠알 고기는 못 먹는 거야?=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 아냐, 아무것도.=
=…?=
=앗, 이슬이 아가씨? 무두질 칼은 이걸 써보렴. 이게 더 잘들 거야.=
여자 친구들이 쿠알의 시체에 모여드는 것을 본 환인은 쿠알의 영혼이 시체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강제력으로 불러들였다.
영혼의 크기나 형태, 뚜렷함을 보면 쌍둥이산의 칼날 멧돼지 수준이다.
이실리테는 쿠알을 4급 정도라고 했지. 역시 1급은 최하급, 2급은 하급, 3급은 중하급, 4급은 중급인가. 그렇다면 칼날 멧돼지도 중급?
‘하지만 아우라가 없군.’
칼날 멧돼지의 영혼은 불길 같은 아우라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 쿠알의 영혼에는 불길 같은 아우라가 없다.
‘성수로 분류되는 존재만이 그러한 아우라를 두르고 있는 건가.’
잠시 생각에 잠긴 환인은 쿠알의 배를 가르기 시작하는 이실리테와 그 옆에서 지켜보는 안느, 유르파를 보곤 쿠알의 영혼을 자신에게 강령시켰다.
“…….”
심장이 두근, 평소보다 2배가량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신체 능력이 상승한 감각은 전체적으로 하급 정령 강령과 비슷한 수준.
수첩을 꺼낸 환인은 한쪽에 글을 적어 내려갔다.
[인간 영혼 타격을 주면 소멸 가능. 강제력 통함.
아우라O = 보유한 영혼은 루아(류히 자매)뿐. 효과 불명. 구슬화 불가능.
아우라X = 신체 자유를 빼앗길 가능성 있음. 구슬화 시 크기가 더 큼. 강령할 경우 신체 강화 효과 약 3배(혼에 따른 차등 확인 필요). ※살해한 영혼을 구슬화 할 경우 적색으로 변함(조건 확인 필요).
유색 혼 = 목격한 색은 푸른색, 검은색. 성불시킬 경우 빛가루에서 기술을 얻을 수 있음. 구슬화 여부 불명.
붉은 혼 = 혼재. 재앙을 퍼트릴 수 있음. 구슬화 여부 불명.
짐승 영혼 강령하면 신체 능력 강화 가능. 일부 기술 습득 가능. 투명도와 크기에 따라 등급 갈림. 강제력 통함.
아우라O = 성수? 구슬화 가능. 강령 시 부작용 일어남(영혼의 격 차이인가 했지만 조건 불명으로 수정. 확인 필요)
아우라X = 최하급 1.15배, 하급 1.3배, 중하급 1.5배, 중급 2배.
정령 강제력 통함. 최하급은 빛덩어리. 하급부터 10살 남짓한 인간형 외모로 보임, 키 20cm정도.
최하급 = 강령 시 신체 능력 1.15배 가량 상승. 부작용 없음. 추가 효과 없음.
하급 = 강령 시 신체 능력 2배가량 상승. 신체 내구도가 낮을 시 육체 부담 상승. 추가 효과 있음.]
“흠.”
메모를 바라보며 생각하던 환인은 수첩을 덮었다.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사항이 있지만, 삼림형 미궁에서처럼 자그마한 정보 하나에 생명이 오가는 극한 상황도 아닌 만큼 급하게 사실확인 작업을 할 필요는 없겠지.
아무튼 심장이 쿵덕거리며 뜨거운 피를 돌리고 있어 땀이 흐르려 한다.
쿠알의 강령 효과를 확인하고 강령을 중단할 생각으로 천천히 몸을 릴렉스하며 어떤 기술이 생겼는지 감각을 확인하던 환인은 눈을 감자 감각이 위험할 정도로 예민해진 것을 느꼈다.
=그게 위장이야?=
=응. 이거랑 여기에 연결된 이것들을 찢어먹으면 냄새 엄청나게 심하게 나서 고기 맛이 떨어져. 떼어낼 때 조심해야 해.=
10m 정도 떨어져 있는데도 여자친구들의 대화가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심장 소리, 숨소리도 들리고 그녀들이 움직일 때마다 육체가,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그녀들의 나신에 대한 기억이 덧씌워지며 마치 투시 안경을 쓴 것처럼 그녀들의 속살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졌다.
미술관의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그녀들의 나신을 감시 감상한 환인은 주위로 신경을 돌렸다.
그러자 마치 자신을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모래 한 알, 돌 한 조각, 풀잎, 나뭇잎, 꽃의 움직임, 모양, 주변 풍경이 머릿속에 전부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끈.
‘……이건 위험하군.’
뇌가 정보를 다 처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두통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러자 정보량이 대폭 줄어들어 두통이 사라졌다.
쿠알의 기술은 육체적인 기능이었다. 단어로 표현하자면 감각 증폭.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적당한 언덕을 찾는다. 구릉지는 아니고 군데군데 언덕이 있는 평지였기에 원하는 높이의 언덕을 찾는 것은 금방이었다.
“잠시 언덕에서 주위를 살피고 오지.”
=어어. 다녀와.=
안느에게 말하고 비상에게 저기 보이는 언덕으로 가자고 해 높이 5m 정도 되는 언덕의 꼭대기에 오른다.
휘이이잉
불어온 바람에 후드가 벗겨지고 머리카락이 흩날렸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으며 주위 하늘을 돌아보았다.
‘역시 따라오고 있군.’
파르히스트가 있는 뱡항, 환인 일행이 이동해 온 쪽의 하늘에 보이는 자그마한 점 하나. 알고 찾지 않는 한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 작은 점이 시야에 들어왔다.
영혼 시야를 켜고 조금 전의 감각 증폭에 집중하자 하늘의 점이 커지기 시작했다.
하늘처럼 파란 날개에 푸른색의 기사단 제복을 입은 조인족 여자. 눈이 마주치자 상당한 외모를 지닌 미녀가 살짝 놀란 표정까지 보인다.
하지만 환인이 이쪽을 발견했다곤 믿지 않는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환인은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역시 도시를 나올 때부터 따라오던 조인족은 파르히스트의 기사단이었다. 저 기사의 아래에는 다른 파르히스트 기사단 일부 전력이 있겠지.
만에 하나 자신에게 문제가 벌어지면 해결하기 위해 개입해올 것이다. 그것은 성주의 뜻일 터. 파르히스트의 권역이라고 알려진 곳을 넘기 전까지 계속 따라올 거란 추측은 쉽게 된다.
‘여러 가지로 신경 써주고 배려해주는군.’
용건을 끝마친 환인은 비상의 목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내려가자.”
쿠엣!
파다다다다닥
언덕에서 훌쩍 점프한 비상이 약간 방정맞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다가 날개를 활짝 펼친다. 그와 함께 녹색 바람이 아래에서 불어오며 글라이딩하듯 비행을 이어갔다.
밑에서 이것을 목격한 안느와 유르파의 눈이 커지고, 그녀들의 쿠에도 하늘을 날고 있는 비상을 보며 부러운 듯 쿠웃, 쿠에~ 하고 운다.
해체 중인 쿠알의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살짝 올라왔다.
쿠알의 가죽이며 고기를 정리한 뒤 출발하자마자 여자 친구들의 말수가 다시 줄어들었다.
좀 전은 멍하니 넋이 나간듯했다면 이번에는 각자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해가 질 무렵 작은 개울 근처에서 야영 준비할 때까지 이어졌는데, 환인도 대화가 없다고 일부러 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묵묵히 주변의 풀밭을 돌아다니며 작은 장작을 주웠다.
주변에는 나무고 뭐고 없는데 어디서 이런 나뭇가지들이 날아온 걸까.
품에 한 아름 나뭇가지를 가지고 오자 안느가 헛웃음을 흘렸다.
=도령 요령도 좋네. 주변에 나무도 없는데 어디서 나뭇가지를 주워온 거야?=
“올 때 나뭇가지가 여기저기 보이더군. 그래서 주워 왔다.”
=그거 아마 태풍 때문일 거야~. 매년 여름 알류겔 호수에서 발생한 태풍이 로아팅스 정글을 훑으면서 올라오다가 파르히스트 평원에서 사라지거든. 그때 태풍에 휘말린 나무 파편이나 나뭇잎, 나뭇가지가 흩어지는 걸로 알아.=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의아했지만 아무렴 좋은 일이라 불이 피워져 있는 모닥불 옆에 쏟아놓고 옷을 툭툭 털고 있으니 개울가에서 쪼그려 앉아있던 이실리테가 사람 머리만 한 큼지막한 고깃덩어리 여러 개를 꼬치로 만들어 가져왔다.
개울가에서 씻은 듯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오와. 오늘은 바베큐야?=
=응. 특별 소스를 써서 구울 거니까 맛있을 거야.=
=기대된…… 아.=
기대감을 드러내려던 안느가 살짝 아쉬운 감정을 드러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며 이실리테에게 말했다.
=나 이제 채식만 할 거야. 계란은 물론 고기 기름도 안 먹을래. 아, 과일은 괜찮아.=
이야기를 들은 이실리테는 물론 옆에 있던 유르파도 놀라고 환인도 의아한 얼굴로 안느를 돌아보았다.
체질 탓에 많이 먹진 못하지만, 누구보다 고기와 생선을 좋아하던 안느였는데 갑자기 고기를 끊겠다니?
갑작스러운 안느의 선언에 세 명이 놀라고 거기에 비상도 ‘고기를 끊어? 쟤 미쳤나봐.’같은 시선을 안느에게 준다.
고기를 끊다니. 한국의 어느 가수 겸 예능인이 이런 말을 해서 공감을 사지 않았던가. ‘고기와 밀가루를 멀리하면 오래 살 수 있지만, 그렇다면 딱히 오래 살 이유가 없다.’고.
그만큼 식도락이 인생에 큰 의미를 주는데 싫어하는 음식도 아니고 굉장히 좋아하는 고기, 그것도 고기 기름이 든 것까지 안 먹겠다는 선언은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안느, 머리 아파? 아침에 먹은 게 잘못됐나?=
=나 멀쩡하거든?=
자기 이마에 손을 짚는 이실리테에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던 안느는 들어보라며 시선을 모았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 들어봐. 도령은…… 솔직히 모르겠는데 이슬이 너나 유리 언니는 두 손 들고 환영할 테니까.=
그러면서 안느가 꺼낸 이야기는 환인에게 문화 충격 그 이상의 쇼크를 주는 내용이었다.
=플뢰의 까마득한 선조는 나무 인간이라는 거 알아? 목인이었던 선조가 사람이랑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지금의 우리가 된 건데, 여기서 유래된 능력이 하나 더 있어. 진실의 주시자라는 선천 능력 외에 말이야.=
=정말이니? 세상에, 무슨 능력이야?=
새로운 지식에 큰 호기심을 드러내는 유르파를 향해 작게 웃음 지은 안느는 환인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마음으로 받아들인 반려의 수명을 늘려주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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