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223 오울링으로 가는 길
* * *
찌르르르 짹짹.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안개 낀 새벽녘.
창문 너머 회색 세상을 바라보며 사슬철판 갑옷을 착용한 이실리테는 마지막으로 잊은 물건이 없는지 집 안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응. 잊은 거 없어.
=안느, 짐 다 챙겼어? 유리 언니는 잊은 거 없어요?=
=먼지 빼고 다 챙겼지.=
=침대 아래랑 서랍 뒤쪽까지 다 살폈으니까 잊은 건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인 이실리테는 그녀들과 함께 짐가방 여러 개를 들고 집을 나섰다.
집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쿠에들이 그녀들을 돌아보고, 그중 이실리테의 탈것인 쿠르티가 다가와 그녀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그래그래.=
쿠르티의 등에 짐가방을 싣기 시작하자 구세의 빛을 착용하고 자신의 탈 것이 된 10살의 수컷 쿠에, 쿠핀과 터그 놀이를 하던 안느가 웃었다.
=근데 얘 웃기네. 우리한텐 물으면서 도령한테는 왜 잊은 거 없는지 안 물어봐?=
=주인님 건 내가 다 챙겼으니까.=
=…….=
태연히 대답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이실리테를 멍하니 바라보던 안느가 혀를 내둘렀다.
진짜 대단하다. 어쩜 저렇게 주인님 일편단심일 수 있지? 인견족도 아닌데.
호위나 하녀, 하인으로 가장 큰 인기를 끄는 종이라면 단연코 루크랑 인견족이다. 한 번 주인으로 인식하면 몇 번 커다란 배신을 당해도 괴로워하면서 믿음을 놓지 않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인식이 조금 바뀌고 있다. 어쩌면 이슬이의 종인 인성족이 가장 충성심이 뛰어난 게 아닐까, 하고.
그도 그럴 게 이실리테가 환인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 파르히스트에서 지내는 내내 곁에서 지켜봤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헌신적이고 봉사적으로 환인을 챙기는 걸 목격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거다.
=유리 언니도 그렇게 생각 안 해?=
=음~. 그냥 이슬이 아가씨가 특별한게 아닐까?=
=그런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회색 체크무늬 스커트와 진회색 블라우스, 그 위에 흑회색 재킷을 걸치고 회색 후드 망토를 두른 유르파는 쿠라와 유대감을 쌓기 위해 부리를 쓰다듬어주고 목과 날개뼈를 긁어주며 말했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는 안느 아가씨가 이슬이 아가씨보다 더 특별한데?=
=응? 내가?=
그렇게 충성스럽게 보였나~ 헤헤 웃는 안느에게 유르파는 벼르고 있던 저질 스킨십의 복수를 날렸다.
=안느 아가씨는 무지막지 변태잖니. 플뢰 족이 아니라 변태 늑대 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너무해! 난 친하게 지내려고 그런 건데!=
=안 너무해. 나랑 이슬이 아가씨니까 받아준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성추행범이라고 경비대 병사님들한테 당장 신고했을 정도였거든?=
=진짜?! 여, 여자애들은 서로 몸을 만지면서 친해진다고 들었는데…….=
진심으로 충격받은 안느의 표정에 유르파가 경악했다.
=대체 누가 그런 잘못된 상식을 가르쳐준 거니?!=
=채, 책이?=
=……음란서적?=
=아냐! ……15세 이상 상업 소설이긴 했지만…….=
유르파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숲의 여신령님 뺨치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저렇게 변태처럼 행동하나 했더니 교보재가 잘못된 거였어.
하지만 교정해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는 유르파였다.
플뢰 중에서도 저런 별종 플뢰가 있는 것도 재미있으니까. 좀 과한 신체접촉도 흑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사이 좋아지고 싶어서 그랬다는 걸 알았더니 기분 나쁜 것도 상당수 사라졌고.
그때 문이 열리며 환인이 걸어 나왔다.
=…….=
=…….=
안느와 유르파는 회색 안개 속의 환인이 풍기는 분위기에 눈을 크게 뜨고 침을 꼴깍 삼켰다.
예리하고 진지한 느낌을 살린 듯한 바디핏의 올블랙 모험가 복장.
여기에 까마귀처럼 새카만 흑발이 야성적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 그 사이로 드러나는 나른하면서도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은 한 번 보는 걸로 만족 못할 정도의 남성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와. 어째 점점 잘생겨지는 거 같은데…….’
분명 처음 봤을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잘생긴 수준이었는데 요즘 들어 자신도 모르게 힐끔거릴 정도로 환인의 매력에 마음이 흔들리는 느낌이다.
‘그냥 내가 콩깍지 씐 건가?’
그렇다고 보기엔 유리 언니가 도령을 바라보는 모습도…… 아, 유리 언니도 도령을 엄청나게 좋아하지?
그 순간 안느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무심한 듯 시크한 모습으로 회색 후드 망토를 걸치는 환인. 펄럭 망토가 넓게 펼쳐져 회색 안개를 밀어내며 어깨 위에 살짝 안착한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에 안느는 가슴이 콩닥거리고 젖꼭지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쿠에~
안장 뒤에 등짐을 진 비상이 환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빈다.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린 안느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마성의 남자네.
“안느, 유르파. 출발 준비는 끝났습니까.”
=응? 어. 다 끝났어. 그치?=
아직도 멍하게 서 있는 유르파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화들짝 놀란 유르파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잊은 것 없이 다 챙겼어.=
“그럼 출발하지.”
환인이 비상의 등에 오르자 문을 닫고 나온 이실리테도, 안느와 유르파도 각자 자신의 쿠에 등에 올라탄다.
안느는 장비까지 다 합쳐 160kg에 가까운 자신을 태우고도 멀쩡한 쿠핀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나저나 아루 고것은 우리 떠나는 날인데도 얼굴을 안 비추네.=
“내가 오지 말라고 했다.”
=엥? 왜?=
“어제 작별 인사까지 마쳤는데 굳이 새벽 일찍 오라고 할 필요 없으니까.”
발뒤꿈치로 비상의 옆구리를 툭 건드리자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고 세 명의 여자들도 각자 타고 있는 쿠에에게 명령을 내려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새벽의 찬 공기가 달아오른 뺨과 귀를 식혀준다.
환인 일행은 시간을 맞춰 나온 덕분에 남쪽 성문이 마악 열리고 있을 때 도착할 수 있었다.
구르르르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두께 5m의 철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고, 남문 근처 공터에서 대기 중이던 여행자들과 상단 행렬, 모험가들, 짐마차, 승합마차등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성문 바깥도 마찬가지였다. 밤새 성문 주변에서 야영하던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며 성문으로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줄이 생기며 검문 검사가 시작된다.
=평온한 여행길 되시길.=
나가는 쪽이라 약식 검문(현상수배 및 범죄자 확인)만 끝낸 환인은 인사하는 경비병들과 기사에게 묵례해주고 성을 나섰다.
그리고 지나치거나 뒤로 멀어지는 여행자, 혹은 모험가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것에 환인은 의문을 느꼈다.
상인이나 수송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외에는 대부분이 도보로 이동하고 있었지, 자신들처럼 전원이 쿠에를 타고 있는 무리는커녕 말이나 기승룡을 탄 사람들도 거의 없었던 것.
‘생각해보면 일반인들이 무언가를 타고 있는 것 자체를 못 봤군.’
무언가를 탄다 해도 마차나 수레였고, 그런 수레를 끄는 것도 말이나 하반신이 말인 인마족이 대부분이었다.
쿠에가 끌고 있는 마차를 본 것도 부호, 고족처럼 지체 있는 집안의 사람들이 탄 마차와 그런 마차를 호위하는 호위병들 뿐이었다.
파르히스트 성주 혈족인 시두르마저도 본인만 쿠에를 타고 있었고 그녀의 두 수행 기사는 두 다리로 걷고 있었고.
쿠에를 타기만 하면 이동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는데 왜 안 타고 다니는 걸까.
“…….”
잠시 생각해보니 이유는 금방 나왔다.
쿠에 한 마리의 가격은 통상적으로 5~6억 정도다. 말과 비교해 이래저래 범용성도 높고 쓸모도 많다지만 주목적은 `탈것`이다.
지구처럼 장거리 이동이 생활화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 사이의 이동이 빈번한 것도 아니다. 단순한 탈것에 금화를 5닢이이나 쓸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서민들은 철화와 동화권의 생활을 한다. 2~4급의 대다수 직업자가 포진되어있는 중산층은 동화와 은화 정도의 생활권에 포함되어있다.
무엇보다 멀쩡하고 튼튼한 두 다리가 있는데 굳이 비싼 쿠에를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단적으로 안느도 쿠에를 타고 다니지 않았고.
혹시나 해서 여자 친구들에게 물어보자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땅신을 믿는 종족 연합의 사람들은 자기 다리로 걸어 다니는걸 더 좋아해. 그분의 축복과 은혜가 내린 대지를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걸 행복으로 여기거든.=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거나 도시에서 마을로 이동하는 건 승합 마차를 써도 되니까? 굳이 자기 소유의 쿠에를 사는 사람은 없는 편이라고 생각해. 칸트위 정도로 잘 사는 집이면 몰라도…….=
=촌락은 마을의 모든 재산을 모아야 쿠에 한 마리를 살 정도예요. 마을이나 도시는 유리 언니 말대로 더 싸고 편한 이용 수단이 있는 데다가 무직자들이 여행하는 건 어지간히 강하지 않은 이상 무리인 것도 있구요.=
거기다 쿠에는 말이나 기승룡보다 훨씬 빠르고 스태미너도 높다. 보통 파티는 대여섯 명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들 모두가 쿠에를 장만하지 않으면 이동 속도에 손실이 발생한다.
전원이 쿠에를 타지 않으면 굳이 비싼 쿠에를 탈 이유가 없다고 할까.
“그만큼 비싸다면 쿠에를 번식시켜 판매하는 것도 괜찮을 텐데. 하지 않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스사와 여행하다 들른 촌락이 쿠에 번식과 사육을 하던 걸 떠올리며 묻자 안느가 후드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도령도 비상이를 키우면서 느꼈겠지만, 갓 태어났을 때부터 최종 성장 때까지 쿠에가 먹는 양은 엄청나. 판매 가격이 5금화 정도로 형성된 것도 절반은 먹이값 때문이라고 봐야 할 정도거든.=
=먹이도 질 좋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마련해야해요. 아니면 말보다 못하게 자랄 수 있거든요. 영양 불균형이 오면 병치레도 잦은 편이고 심각하면 성체가 되지 못하는 일도 있어요.=
즉 번식 사육은 위험 부담이 크다는 이야기.
=무엇보다 쿠에는 척 보기에 비싸. 도적이나 마적 떼들이 가장 먼저 노리는 게 쿠에야. 이런 문제로 쿠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곳은 군대 정도지. 아니면 우리처럼 실력이 확실한 모험가거나.=
궁금증이 해결되어서 고개를 끄덕이는 중에 어느덧 안개 속을 빠져나와 도시에서 수 킬로미터까지 멀어졌다.
70일 넘게 머물며 이런저런 사건을 경험한 안느가 회색 안개에 뒤덮인 도시를 돌아보며 중얼거린다.
=뭔가 엄청나게 오래 지낸 느낌이네.=
=2달 넘게 지냈으니까 충분히 오래 지낸 거 아닐까?=
=그런가?=
환인도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홀로렌 강에서 시작된 안개가 마치 도시를 먹어 치우는 듯한 광경을 눈에 담는다.
시선을 조금 올리자 도시의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는 까만 점이 시야에 들어왔다.
“…….”
고개를 돌린 환인은 일행이 신기한 듯 가까이 다가와 구경하는 하급 바람의 정령과 하급 물의 정령을 불러들여 영혼 구슬로 만든 뒤 여자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 속도를 좀 더 올리지. 점심까지 빠르게 이동한다.”
=네.=
=어.=
=응~.=
고삐를 살짝 흔들자 신호를 받은 비상이 쿠엣! 울고는 눈을 반짝이며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여자 친구들이 뒤를 따르는 것을 보고 다시 파르히스트 상공을 날아다니는 까만 점을 보았다.
“…….”
고개를 앞으로 돌린 환인은 바람 저항을 줄이기 위해 상체를 낮추고 비상의 옆구리를 건드려 속도를 재촉했다.
점심때까지 거의 6시간.
적당한 속도로 40분가량 달리다가 20분을 걸으며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40분가량 달리다가 또 30분을 걸으며 체력을 회복하고.
그렇게 4번을 더 반복한 덕분에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던 일행은 점심시간을 맞이해 길에서 벗어나 간단한 식사 준비를 마쳤다.
말 그대로 간단한 점심이다.
비상을 제외한 쿠에들한테는 잘 말린 짚단과 쿠에 전용 사료와 과일을, 아직 성장기라 많이 먹어야 하는 비상에게는 5kg에 달할 정도의 통구이에 사료와 과일을 한가득 담아준다.
그리고 일행은 이실리테가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한 도시락을 받아서 들었다.
야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먹은 유르파가 입가에 묻은 달콤한 소스를 핥아 먹으며 환인에게 물었다.
=자기. 좀 서두르는 거 같은데 다음 마을에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거니?=
“파르히스트와 크라버리의 권역을 빨리 이탈하려는 게 목적입니다.”
환인의 대답에 튀김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서 우물거리던 안느가 눈을 크게 뜨곤 꿀꺽, 삼켰다.
=뭐야. 뭐 안 좋은 이야기라도 들었어?=
“크라버리가 파르히스트에게 단단히 앙심을 품은 거 같더군. 어제 도시를 돌아다니며 들은 소문에 크라버리와 파르히스트가 맞부딪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건 성주의 셋째 딸이 죽은 뒤로 계속 나도는 이야기였잖아.=
“엽사 조합에서 크라버리가 병력을 모으고 병사를 징집하고 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여자들이 샌드위치를 먹다 말고 굳은 얼굴로 환인을 바라본다.
=어, 정말? 크라버리의 영주가 시민을 징집하고 있어?=
“그렇다고 하더군.”
안느와 유르파의 얼굴이 유래없이 심각해진다.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일반인을 징집하는 점에서 무언가를 느낀 모습이다.
이실리테는 그런 둘을 바라보다가 환인에게 질문했다.
=주인님. 크라버리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요?=
“크라버리의 현 영주는 아집이 심하고 독선적인데다 열등감과 편협함이 가득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 인물이 자기가 보낸 사절단이 문전박대당하고 돌아왔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한 일이지.”
=내놓은 혈족이라해도 가문의 인간이 죽었으니까…….=
안느의 중얼거림을 들은 유르파가 으음,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한다.
=나도 이야기로는 들었지만…… 그런거면 토리오 아필렉스 크라버리가 자기랑 우리를 노리고 습격자들을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작게 불안을 내비치는 모습에 환인은 태연히 고기 샌드위치를 먹으며 대답했다.
“몇 달 뒤의 일은 모르지만, 당장은 문제없을 거라고 봅니다. 파르히스트 성주가 저희를 보호하고 있기도 하고 크라버리의 첩자가 절 추적하고 있었다면 지난 며칠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으니까요.”
=응? 설마 도령, 첩자를 유인한다고 어제랑 그저께 돌아다닌 거였어?!=
“겸사겸사였다. 그리고… 크라버리가 습격자를 보내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값비싼 아이템을 다수 얻을 기회가 될 테니.”
=…….=
=…….=
환인의 담담한 태도에 눈을 몇 번 깜빡인 이실리테와 안느는 그가 4마리의 4.5급 미이라 투사를 삽시간에 조각내버리던 것을 떠올리며 ‘그건 그렇지?’ 하고 수긍한 뒤 도시락을 다시 먹기 시작했고, 유르파는 이렇든 저렇든 환인과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으면 상관없었기에 다소곳이 샌드위치를 먹어나갔다.
덕분에 환인의 눈이 살의로 번들거리는 것을 보지 못한 그녀들이었다.
만약 환인이 혼자였거나 일행이 이실리테 뿐이었다면 다음 목적지는 라수비탄이 아닌 크라버리가 되었을 거다.
이미 환인의 머릿속에는 크라버리를 거대한 공동묘지로 만들어버릴 계획이 다 세워져 있었다. 머릿속에 세워둔 몇 가지 확인 사항만 점검한다면 크라버리가 누구에게 파괴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을 정도는 되는 계획이다.
그게 실행되면 세상에는 영혼사가 아닌 영혼술사라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겠지만…….
밤하늘처럼 어두운 눈동자 속에 고통과 비명과 절망으로 뒤덮인 크라버리를 그리던 환인의 눈동자가 여자 친구들에게 향했다.
그의 강함을 믿는 여자 친구들이 재잘거리면서 밝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살의가 일렁이며 탁해진 환인의 눈동자가 서서히 나른함으로 변해간다.
‘기회는 나중에도 있겠지.’
=난 6급의 혼합 직업자고 이슬이 넌 4급의 평범한 전사인데 진지하게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 1위부터 10위까지 전부 단일 직업자들이잖아.=
=그게 네가 나보다 강해질 수 있다는 증거는 안 되거든.=
=반대로 널 뛰어넘지 못한다는 이유도 되지 않아.=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또 다투는 분위기가 된 이실리테와 안느. 하지만 이번은 다른 때와 다르게 장난기 없이 진지한 모습이다.
하지만 환인은 걱정하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이실리테를 바라보던 안느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져간다. 조롱이나 비웃음의 의미라곤 1g도 없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다.
=그때가 되면…… 정말 기쁠 거야. 하지만 쉽게 져주지 않을 거라구?=
그 미소를 접한 이실리테도 얼굴에 꽃망울처럼 화사한 미소를 만들며 대답했다.
=알아.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마지막 야채 샌드위치를 입에 가져가며 두 여자를 눈부시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는 유르파였다.
=젊다는건 좋은 거야~.=
=……뭐야. 유리 언니도 일반적으로 치면 이제 30대면서.=
=응~ 하지만 안느 아가씨는 이제 20대 초반이고~? 이슬이 아가씨는 10대 후반이지~? 이 아줌마가 보기에는 젊음이 눈부셔~.=
=…….=
=…….=
조금 붉어진 얼굴로 슬쩍 시선을 피하는 이실리테와 안느를 본 환인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일반적인 나이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유르파는 올해 71살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안느도 62살이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