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194 성도 파르히스트
* * *
환인의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시두르가 빙그레 웃으며 묻는다.
=놀랍군요. 절 한눈에 알아보신 분은 환인 군이 처음이에요.=
“저도 이렇게 가까이 서기 전까지는 긴가민가했습니다.”
=성주께서는 백학실에 있나요?=
시두르의 질문에 수석 집사는 순간 당황해서 해선 안 될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와 환인을 커진 눈으로 번갈아 본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 순간. 드카온은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백학실은 소규모 만찬장에 입장하기 전 한담을 위한 티타임을 즐기는 방.
시두르는 부드럽고 기품있는 미소와 함께 환인에게 물었다.
=이렇게 재회한 것도 인연이지요. 환인 군만 괜찮다면 만찬에 저도 참가하고 싶어요. 어떨까요?=
안될 일은 없다. 환인에게 시두르는 무려 커피를 제공해주었던데다 루비 브로치를 우호의 증표로 건네준 사람.
첫인상은 그저 그랬지만 이후 만남에서 관계를 개선, 중립에서 살짝 오른쪽으로 치우친 인물이었기에 환인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경우 성주의 뜻도 확인해보아야 하겠지만 대상이 성주의 모친임이 분명한 상황에서 그런 절차는 필요 없겠지.
또한 성주 모친의 의사인 만큼 이 자리에서 거절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고.
환인의 승낙을 받은 시두르는 수석 집사에게 소식을 쥐여주고 먼저 보낸 뒤 본인이 옆에서 직접 안내하기 시작했다.
=설마 바로 알아보실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어떻게 알아보셨나요?=
“제 눈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덕분이지요.”
=제 변신술을 꿰뚫어 보는 눈이라니, 놀라운 선천 능력이에요.=
“한때 사용 방법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보다 시두르 님도 아우라 미발현자셨습니까?”
=후후후. 그저 이만큼 나이를 먹으며 챙긴 재주일 뿐이랍니다.=
법사란 말인가. 그러면 심장의 마법진 모양 양기는 일정 수준에 도달한 법사의 특징? 그게 아니라면 호족 핏줄의 특별함일까.
“그렇습니까. 하지만 제 눈에 시두르 님은 이제 불혹을 지나고 계신 거로 보입니다만…….”
=호호호호. 환인 군이 이렇게나 혀에 꿀 떨어지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니, 첫인상과는 전혀 달라 놀라운 마음이 한가득 차오르네요.=
부채로 입을 가린 시두르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몹시도 기쁜 모양새다.
환인은 딱히 아부할 생각이 아니었다. 시두르의 외모는 정말 불혹(40세, 지구 기준)정도로 보일 만큼 젊었던 것이다.
성주의 나이가 올해 60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 말은 최소 80이라는 이야기. 이 세상 여성들의 노화 속도가 정말 의아한 환인이었다.
‘혹시 내가 여성을 보는 눈높이가 형편없는 건가.’
그건 아니다. 이실리테와 안느의 외모는 유르파마저도 탄복할 정도였고 자신도 매우 아름답다고 인식하고 있으니.
하지만 긴가민가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고, 환인은 그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그녀가 안내해주는 백학실에 도착했다.
똑똑똑.
문 옆에 서 있던 집사가 노크하자 잠시 후 문이 스스로 열리며 역시나 백색 기조의 세련된 응접실이 나타났다.
백곰 머리의 남자는 방 한가운데 마련된 티테이블 세트에 앉아있었다. 환인은 그가 성주임을 직감했다.
‘저자가 성주, 펜리 후스티오 파르히스트. 그런데…….’
……여성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라인의 소파에서 일어나는 성주의 심장에도 시두르와 같은 마법진 형태의 영기가 맺혀있었다.
법사의 증명이 아니라 혈족의 증명이었군.
=어머니. 어인 일로 이 자리엘 다 오셨습니까.=
=이 어미가 아들과 오랜만의 만찬을 들려하는 것이 그리도 이상합니까.=
=시녀에게 듣기로 밖에 약속이 있다 하여서 오시리라 예상치 못했기에 여쭙는 것입니다.=
=그리 중한 약속이 아니니 성주께서는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주가 평범한 얼굴로 묻고 시두르도 웃는 얼굴로 대답한다. 하지만 대화에서 느껴지는 가시에 환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최상위 호족이니만큼 평범할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모자가 보일만 한 모습은 아니다.
환인은 담담한 눈으로 시두르와 성주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본다.
=……이 청년, 환인 군에게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재회하였기에 기쁜 마음이 들어 약속을 미루었던 게입니다. 그런데 성주가 이 어미와 저녁을 드는 게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군요. 슬픔을 머금고 돌아갈 수밖에요.=
=그러니까 불편하다고 말씀드린 적 없지 않습니까…….=
짐짓 슬픈 척 연기하는 시두르의 행동에 성주는 순백의 하얀 털로 뒤덮인 이마를 한차례 쓸어 넘기고는 살짝 피곤한 기색으로 환인에게 말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못난 꼴을 보였군.=
“마음 쓰지 않겠습니다.”
환인의 대답에 다행이군, 작게 읊조린 성주는 어머니께 먼저 앉으라 권한 뒤 환인과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는다.
=본인이 파르히스트의 성주, 펜리 후스티오 파르히스트일세.=
“환인입니다. 성이 환, 이름이 인. 편히 환인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어머나. 환인 군도 먼 곳의 귀한 분이었군요.=
“성만 이어져 올 뿐인지라 귀하다는 말씀이 부담스럽습니다.”
=…….=
성주는 자신의 모친과 부드러운 매너로 대화를 나누는 청년을 살펴보았다.
독특한 디자인의 복식이긴 해도 신체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옷의 균형미가 매우 훌륭하다. 저런 옷을 어색하지 않게 입고 있다는 것과 성이 이름 앞에 온다는 것은…….
‘역시 그의 눈썰미대로인가.’
환인을 바라보는 성주의 눈빛이 깊어진다.
‘게다가 차원 방랑자라니.’
어젯밤, 소식을 가져온 아렐=케드윈에게 이 사실을 들었을 때는 설마 했었다.
사대 종족 최상위 계층 중 일부는 차원 방랑자를 니오네브레스에 흘러들어온 이물질이라 치부한다. 그런 존재가 땅신 교단의 고위 성직자와 동행중이라니,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거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호호호.=
어머니가 청년과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하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주는 다시 청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말쑥한 차림에 단정하게 정리된 검은 머리카락의 미남자.
어제저녁, 초대장을 전하고 온 아렐=케드윈의 보고가 성주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 청년에게서 정령과 영혼의 기척이 느껴졌어.’
‘그가 플뢰 영혼사라도 된단 말인가.’
‘몰라. 거기에다가…… 나와 동류처럼 느껴졌단 말이지. 날 보고도 평범한 옆집 어른 대하듯이 대한 것 하며, 하여튼 신기한 사내였어. 한 번 손을 섞어보고 싶을 만큼’
‘…….’
여기에 일련의 사건에서 느껴지던 석연치 않던 점과 엘위드리스 영애의 조언, 모친이 청년에게 보여주시는 호의 등이 섞이며 하나의 결론으로 나타났다.
‘영혼사군. 그것도 급수가 상당히 높은 영혼사.’
펜리 성주는 어째서 엘위드리스 가문의 영애가 그런 조언을 주고 갔는지 이해했다.
그녀는 이 청년의 특별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어머니도 저 청년이 영혼사라는 것을 알고 계실 터.
가문의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오랫동안 영성 하늘 고래를 쫓으시던 어머니.
딸이 그토록 빠르게 성불한 이유.
이 청년이 딸의 시신을 굳이 수습한 이유.
신분이 높으면서도 직업을 밝히지 않은 이유와 땅신 교단 성투사가 동행하는 이유.
이 모든 게 눈앞의 청년이 영혼사라면 이야기가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아클라멘토 학장의 경위서에는 그가 직업자이지만 아우라는 발현되지 않은 특이체질 소유자라 적히지 않았던가.
성주는 소리 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우라가 드러나지 않는 영혼사라니. 실로 끔찍한 조합이지 않은가.
부친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호족으로서 절대 지켜야 하며 발설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에 대해서 구전으로 알려주셨다.
그중 하나는 영혼사를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였는데, 당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젊은 성주는 이해하지 못해 물었다.
‘영혼사가 죽으면, 혼의 격류가 일어난다니…….’
‘붉은 영혼의 격류는 생기를 휩쓸어 모든 자연의 은총을 집어삼킨다. 그 재앙은 사람에게 살해당할 때만 일어나지.’
‘그렇다면 어째서 이 사실을 널리 알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혹시나 못된 놈들이 영혼사를 노리면!’
‘오히려 그렇기에 비밀로 묻어야 하는 것이다. 아랫것들은 걱정할 것 없다. 하지만 위엣 것들은 권력과 돈의 노예들. 신의 은총을 받는 영혼사가 무기로 활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지 않느냐.’
‘…….’
‘비단 우리 가문뿐만이 아닌 전 세계의 일부 호족, 성족, 귀족, 왕족이 알고 있다.’
‘……그래서 영혼사에게 해를 끼치면 영도를 비롯해 모든 도시와 교단에게 공격받는 거군요.’
‘그렇다. 그렇기에 지식은 이어져야한다.... 너도, 너의 자식에게 알려 구전의 맥이 끊이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알아선 안 될 것이 있는 법이며 알려지지 않아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비밀을 지키지 못하거나 악용할 경우도 염두에 두어 구전으로 전해야 할 세상의 비밀.
이제는 알려지더라도 믿지 않으며 진실을 밝히면 오히려 외도, 이단이라 손가락질받을 진실.
이 전승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자신도 모른다. 허나 영식?이 벌어진 흔적은 대륙에 분명 존재한다.
성주는 눈앞의 청년을 응시했다.
이 청년은 멸망의 관?과 마찬가지다.
모르고 건드리면 지옥이 쏟아지는 죽음의 관. 높은 신분일수록 트랩을 발동시킬 가능성이 큰 끔찍한 함정.
그의 머릿속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사막으로 변한 파르히스트가 그려지며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철창이 빼곡히 박힌 공간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느낌이다.
남몰래 한숨지은 펜리 성주는 그를 향한 미심쩍음과 석연치 않은 점을 치우고 지웠다.
눈앞의 청년이 영혼사라면 딸의 죽음과 연관 지을 이유가 없지.
육감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그날 그대의 종자가 만들어준 음식은 참 맛있었어요. 성으로 돌아와서 요리장에게 재현을 부탁하니 그 맛이 나오지 않더군요. 어째서일까요?=
“요리에는 손맛이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주위 상황도 맛에 영향을 끼치고 야외 조리인 만큼 방법에도 차별이 있겠지요. 그 결과가 약간 다른 맛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보내면 가르쳐놓도록 그녀에게 귀띔해놓겠습니다.”
=고마워요. 사실 그때 제대로 맛을 보지 못해서 무척 아쉬웠거든요. 호호호.=
청년과 대화하다 기껍게 웃으시는 어머니에게 시선을 준 성주는 눈매가 누그러졌다.
어머니가 저렇게 기껍게 웃으신 게 마지막으로 언제였던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인듯한데. 대충 15년은 넘었군.
그날부터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했지…….
어머니와 사내의 대화 주제가 한 바퀴 돌고 대화의 맥이 끊긴 사이에 성주가 입을 열었다.
=먼저 파르히스트의 성주가 아닌 딸내미의 아비로서 고마움을 이제야 전하겠네. 딸의 시신이 미궁에게 먹히지 않게 수습해온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지.=
진심을 입에 담으며 고개를 숙이는 성주의 모습에 환인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인구 수십 만인 성도의 지배자가 저렇게 고개를 숙인다? 권위주의와 선민사상이 없거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느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시대의 지배자가 권위주의를 가지지 않을 리 없으니 후자라는 뜻. 그 후자는 아마도…….
‘……이엘카타가 왔다 간 건가.’
미흡하던 가설의 밑바탕이 완성되자 나머지 비틀리고 미흡한 구조가 빠르게 조립되며 하나의 가설이 완성되었다.
환인은 시두르와 성주의 불편한 사이를 읽고 합당한 추리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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