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 193 성도 파르히스트
* * *
=어? 괜찮겠어? 2명까지 동행을 허락한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호위로…….=
“일반인이 성주의 성에 들어가며 호위를 데리고 들어가는 게 가능한가.”
환인의 질문에 안느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말이 되지 않았던 것. 그러나 이실리테는 숨기지 않고 우려를 드러냈다.
=하지만 성주님께서 다른 속셈을 하고 있다면 혼자 가시는 건 위험해요…….=
“초대장에는 나 혼자, 하지만 바란다면 2명까지 동반을 허락한다고 적혀있었다. 그 속내를 보자면 독대를 원한다고 해석할 수 있지.”
=…….=
“그는 성주이고 우리는 일반인이다. 힘을 쓰려한다면 이런 식으로 초대 형식의 함정을 팔 이유가 없지 않겠나.”
=하지만 내가 옆에 붙으면 정치적으로 압박할 수는 있잖아.=
안느가 끼어들며 안전장치를 언급했다. 환인은 한쪽 팔로 감을 수 있을 만큼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긴 귀에 속삭였다.
“생각해줘서 고맙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나 혼자 가야 할 듯하다.”
=읏…… 아, 알았어….=
유르파는 덤처럼 거실 구석에 앉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기는…… 어떤 사람이지?’
얼핏얼핏 읽히는 분위기나 흐름을 보면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뭔가 굉장한 것을 감추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할까. 왠지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쭉 입 다물고 있지만…….
유르파의 시선이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는 은발 장신의 미녀에게 향했다.
매우 신분이 높을 거라 추측되는 안느 아가씨. 직업도 성투사이고 땅신 교단의 양산형 신물,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를 가진 걸 보면 교단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는 호박색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동자의 미녀에게 향한다.
이슬이 아가씨는 그나마 평범한 신분과 평범한 직업이지만, 자기를 향한 충성심은 가문 기사 출신의 기사 못지않은데다 저 외모는 무슨 성족 수준.
그런 두 아가씨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이제는 성주의 호출까지……?
=…….=
그런 대단한 남자가 조금 전 자신들을 소개할 때, 임시겠지만 자기도 여친의 범주에 포함시켜 준 것을 생각하자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얼굴에 열이 확확 나기 시작한다.
유르파는 뺨을 꾸욱 누르면서 속으로 자신에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자. 그의 마력에 풍덩 빠지면 그길로 모든 게 끝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그저 첩의 말단 자리.
이슬이 아가씨와 안느 아가씨처럼 여신의 아름다움을 지닌 것도 아니고 안느 아가씨만큼 신분이나 특별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처녀인 것도 아니고 평범한 종족인 것도 아니지.
자기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고 자신에게 단단히 다짐한 유르파가 속과는 달리 겉으로 유들유들하게 말한다.
=음~. 내가 20년 동안 파르히스트에 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바로는, 성주님은 곰 같은 분이시란 거야.=
=곰?=
=응. 실제로도 인웅족 백곰이시긴 하지만. 아무튼 정면에서 머리를 깨부수면 깨부쉈지 그런 비열한 수단을 쓰시는 분은 아니셔. 초대장이라고 적혀있으니까 진짜로 초대만 하는 걸 거야.=
=그러려나…….=
=응. 여긴 파르히스트고 그분은 7급 성주님. 이 이상 설명은 필요 없잖아? 아, 그래도 만에 하나 걱정이 되면…… 자기한테 이걸 줄게.=
유르파는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에서 엄지손톱 크기의 군청색 구슬을 꺼내 환인에게 넘겨주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단거리 전이가 담긴 기술석이야. 이걸 깨트리면 반경 100m 범위로 무작위 전이가 일어나는데 공간이 가장 넓은 곳으로 전이되는 특성을 지녔어.=
대번에 이 구슬의 활용처를 특정해낸 환인이 작게 감탄하며 물었다.
“말 그대로 긴급탈출용이군요. 그런데 허공에 전이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짠! 이 부적을 찢으면 돼. 가벼운 깃털 술법이 봉인되어있어서 찢으면 5초간 낙하 속도를 대폭 감소시켜주는 거야. 유지 시간이 5초밖에 안 되니까 너무 일찍 찢으면 안 돼?=
듣기에도 비싸 보이는 마도기와 마도구를 선뜻 내놓는 유르파를 환인이 살짝 안아주며 뒷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크게 도움이 될 물건들이군요. 고맙습니다.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으응. …흐헤헤…….=
환인의 품에 폭 안겨서 그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신 것만으로 20금화짜리 마도기를 선뜻 내준 게 아깝지 않은 유르파였다.
다음날, 유르파는 오전에 안느와 함께 잠깐 외출해서 상당한 커리어가 느껴지는 재단사와 그녀의 조수 및 보조들을 데리고 왔다.
성도 파르히스트의 유행을 선도하는, 옷 한 벌에 금화 단위로 거래되는 초?가 붙는 유명 디자이너라고.
척 봐도 뭔가 비싼 질감의 옷에 골반과 어깨가 과도하게 부푼 옷을 입은 여자를 잠시 바라보던 이실리테가 안느에게 속삭였다.
=저런 직공을 어떻게 데려온 거야? 고족이나 호족 아니면 상대도 하지 않을 부르주아 같은데.=
=저 재단사가 쓰는 마도구를 유리가 만들어줬대. 내 직업도 조금 빌렸고.=
현실의 디자이너 못지않게 감성 터지는 복장과 스타일의 재단사를 통해 신체 치수를 제공한 환인은 그녀가 곧장 작업을 시작하는 모습에 약간의 감탄을 흘렸다.
세 개의 가위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재봉틀을 연상케 하는 속도와 정확성으로 박아나가는 대·중·소 사이즈의 바늘 여섯 개와 패턴을 1mm 오차도 없이 옮기는 완벽한 재단 능력이 펼쳐지며 옷을 한 벌 만들어간다.
아무리 재봉 도구가 마도기인데다 사용자의 의식과 싱크로해서 염력으로 조작한다 해도, 6명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한다는 것은 해당 분야의 대가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감탄하며 1시간을 지켜보았을까. 재단사는 놀랍게도 맞춤 정장을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성해내었다.
고족이나 호족들이 즐겨 사용하는 원단에 환인의 요구사항을 완벽하게 가미해서 만든 라드세아풍風 브리티시 스타일 정장이다.
=이런 식으로 몸의 흐름을 따른 자연스러운 실루엣이 특징적인 디자인은 처음이에요. 우리 루크랑 족 남자들에게 맞지 않지만 플뢰 분들의 신체에 맞추어 약간만 조율한다면 균형미가 폭발적으로 쏟아지겠지요. 이것은 예술이었어요. 이런 경험을 주셔서 고마워요.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
아무튼 재단사는 자신의 창작욕에 불을 질러준 환인에게 감사의 의미로 원단값만 받고 돌아갔다.
원단값만 해도 7열은화에 달할 정도였지만, 출장비와 가봉, 재봉비에 급행비까지 합치면 5금화는 나왔을 거라는 유르파의 설명을 듣고 솔직하게 생각했다.
‘돈 아꼈군.’
그리고 정오의 종소리가 울리기 전, 성내 시종이 찾아와 오후 5시에 성주의 초대가 있을 것임을 알리고 돌아갔다.
환인은 그에 맞춰 이런저런 준비를 시작했다.
파르히스트에 발을 내디딘 첫날부터 지금까지 당시의 상황을 되새기며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곳, 변수가 발생할만한 상황,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는 지식을 대입, 대조해보고 여기저기서 들은 성주의 인품, 인성과 어제 찾아온 아렐=케드윈의 성격 등을 조합해 문제 발생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해본 것.
‘결과는 같다.’
딸의 사망에 크나큰 마음의 상심을 얻어 원흉을 찾는 게 아니다.
그저 육감의 영역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포착했고, 그걸 해소하기 위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자신을 불러 그 감정을 해소하려는 거겠지.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했다.
자신이 시뮬레이션한 성주라면 ‘초대’가 아니라 ‘소환’을 했을 텐데 어째서 자신을 성에 불러들이는 걸까.
‘성주가 생각을 바꿔 먹게끔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 인물이 누구인지 짐작이 어렵다. 의심 가는 인물들은 몇 명 존재하지만, 타당성을 따지면 신뢰도가 낮아진다.
생각하는 사이 약속 시간이 되었고, 성주 성에서 주황색 쿠에 4마리가 끄는 화려한 4두 마차가 도착한 것을 보고 환인은 소지품을 챙겼다.
무기와 아공간 주머니는 못 챙겨간다. 단거리 전이 기술석과 가벼운 깃털 부적만 챙기고 집을 나서자 얼마 전 땅신 교단에서 봤었던 수석 집사가 백색의 집사복 같은 차림으로 마차 앞에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환인 님을 성으로 안내할 하얀 성의 제3 수석 집사, 드카온입니다.=
환인이 그의 앞에 서자 드카온의 눈빛이 살짝 이채로 빛났다가 사라진다.
=일행분은 없으십니까.=
“혼자입니다.”
환인의 대답에 수석 집사는 재차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고, 환인은 모여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 친구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준 뒤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승차감은 리무진에 버금갔다.
올라타기 전 살짝 보인 마차 하부에 명백한 코일스프링 서스펜션이 붙어있었었는데 여기에 에어 쿠션과 관련된 마도구가 마차 내부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던 것.
‘역시 누군가가 서스펜션을 만들어 퍼트렸군.’
코일 스프링까지 구현한 것을 보면 공돌이 출신이거나 이곳의 자산가를 통해 기초 지식만으로 재현해낸 것일 터.
음식에서부터 비누와 종이, 수건과 화장품까지.
현대 문물과 비슷한 것들이 만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생각을 조금 접긴 했는데 역시 어지간한 기초 과학이나 화학은 이 세계에 만연하고 있다고 봐야 할 듯하다.
이과보다 문과에 가까운 자신의 지식으로 현대 기술을 재현한 돈벌이는 불가능하겠지.
생각하는 사이 환인을 실은 마차는 하얀 성이라 불리는 성주 성에 도착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높이 세워진 내성벽 안쪽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도 될 만큼 넓은 부지에 형형색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펴있고 그러한 꽃밭의 풍광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관목과 멋지게 자란 나무들이 정원을 꾸미고 있다.
공기의 질도 달랐다. 해가 졌음에도 느껴지는 싱그러운 꽃내음과 삼림에 들어온 듯한 상쾌한 공기가 머리를 맑게 깨운다.
환인의 시선이 아름답고 넓은 정원의 한 곳에 세워진 예술품 같은 묘비 여러 개에 향했다.
‘성주 혈족의 가문묘인가.’
공동묘지라고 불러야 할 장소지만, 꽃과 나무, 잔디로 그저 평온하고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일 뿐.
영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에 관리가 철저하다고 생각하던 환인은 넓고 아름다운 성내 정원의 길을 따라 예술적인 조각상의 분수대를 지나 본성 입구에 내려섰다.
그리고 눈앞에 우뚝 선 궁전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시대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르네상스 양식의 3층 백색 궁전이다. 드넓고 아름다운 정원과는 매우 잘 어울린다.
성벽이 바깥 풍경을 차단해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듯하다.
프랑스 샹보르에 있는 샹보르 성과 비슷한 궁전 및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쾰른 대성당 풍 첨탑 성을 살피던 환인은 가까이 다가온 집사를 돌아보았다.
=이쪽입니다.=
수석 집사의 뒤를 따라 좌우로 늘어선 하녀들 사이를 지나 궁전 안에 들어섰다.
궁전 안쪽은 백색으로 화려하게, 그냥 화려하다는 말밖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아치형 천장은 백색과 황금색으로 벽화를 그려놓았고 곳곳에 걸린 대형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술법적인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벽에는 틀이 황금색인 아치형의 초대형 유리창이 일정 간격으로 늘어서 있고 사이사이 황금 조각상이나 황금 벽화, 황금 동상 등이 벽을 꾸미고 있었다.
바닥은 하얀색과 회색 작은 타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위에 투명한 유리가 깔려 바닥 전체를 채우고 있다.
이음매도 보이지 않는데 이렇게 거대한 유리를 어떻게 바닥에 전부 깐 걸까.
‘그냥 유리도 아니군. 술법을 부여해 강화한 유리인가.’
이 모든 것이 따로 놀지 않고 하나로 어우러지니 말 그대로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의 극치다. 홍보나 광고용 표현일 뿐인 7성급 호텔을 직접 구현하면 이렇지 않을까.
지구의 역사는 가진 자의 위세 자랑으로 이러한 화려함을 우선시했다. 그런 법칙은 다른 세상인 이곳도 마찬가지겠지.
환인은 성 내부 인테리어에 관심을 끊고 수석 집사의 뒤를 따라가던 중 폭이 8m는 되는 복도의 저 앞에서 세 명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집사보다 한발 앞서 발견한 환인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앞에서 하얀 부채를 펴고 입을 가린 귀부인에게서 무언가 익숙한 기척을 읽은 것.
그 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문제는 당사자가 맞는지 긴가민가하다는 점이었는데, 귀부인의 뒤를 따르는 자주색 기사복 차림의 여자 둘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자주색 기사복 차림의 여자들은 파르히스트 숙영지에서 만났던 윤라와 수라였던 것.
그 말은…….
‘시두르라고?’
시두르는 말 그대로 100세에 가까운 노파 같은 왜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티아라 모양의 왕관을 쓴 귀부인의 머리카락은 미역 줄기 같던 하얀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정말 오랜 시간 관리와 손질을 받은 매끈한 머릿결이었고 얼굴도 주름이 거의 없었다.
코 또한 매부리코가 아니었으며 약간 녹색을 띈 백색 드레스 소매 밖으로 보이는 손등도 주름이 별로 없다.
말 그대로 곱게 늙은 귀부인. 하지만 그녀가 시두르라는 것을 환인은 확신했다.
영혼 시야로 본 귀부인의 심장에 맺힌 영기가 독특한 마법진 모양이었던 것.
‘그때는 마법으로 외모를 숨겼던 건가.’
머리 위에 탈색된 듯한 곰 귀가 붙어있는 걸 보면 인웅족이라는 뜻인데, 성주도 백곰이라고 했으니…….
그사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진 귀부인이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드카온, 뒤에 계신 젊은 분은 어디의 귀인이신가요.=
=가주님의 명을 받아 손님을 모셔가는 중이옵니다.=
집사의 소개에 환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런 곳에서 다시 뵐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시두르 님.”
귀부인의 눈이 살짝 커지고 뒤에 서 있던 윤라, 수라 자매의 무표정한 얼굴도 살짝 당혹에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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